|
삼지(三知)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알고, 그만둘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三 : 석 삼(一/2)
知 : 알 지(矢/3)
三知 : 知人, 知分, 知足.
삼지(三知)란 남을 알고, 분수를 알며, 만족할 줄 알아야, '사람으로 하여금 평생에 욕됨이 없다(使人不爲辱乎平生)'고 한다.
한비자(韓非子) 유로편(喩老篇)에 나오는 말이다. '무리한 욕심이 화(禍)를 부른다(禍莫大於不知足).' 지족(知足)이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정해진 사안(事案)에 대해 만족감을 갖는다는 의미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지백(智伯)은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병합(倂合)하고 조(趙) 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한(韓) 나라와 위(魏) 나라가 지백(智伯)에게서 등을 돌려 지백의 군대는 진양(晉陽)에서 패했다.
결국 지백은 고량(高梁)의 동쪽에서 죽었으며 영토는 마침내 세 나라로 나누어졌고, 그의 머리는 잘려 옻칠이 된 다음 요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지백의 무리한 욕심으로 인해 그 자신도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백성들 역시 갈기갈기 찢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한비자는 하나의 비유를 더 들어 보여준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황하(黃河)와 형옹(衡雍) 사이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손숙오(孫叔敖)에게 상(賞)을 주려고 하자 손숙오는 한수(漢水) 부근의 모래와 자갈이 있는 토지를 청했다고 한다.
그 당시 초나라의 법에는 신하에게 봉록(俸祿)을 줄 때 두 세대를 지난 후에는 영토를 회수하도록 돼 있었는데 오직 손숙오만은 계속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토지를 회수하지 않은 까닭은 그 땅이 척박(瘠薄)했기 때문이고, 손숙오가 아홉대까지 제사(祭祀)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숙오의 처신은 우리에게 무리한 욕심이 덧없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욕심이 없을 때 화(禍)는 피해가고 복(福)이 굴러오기 마련이고 마음을 텅 비울 때 닥쳐온 위기도 쉽게 넘길 수 있는 법이다.
물론 한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면(裏面)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이 말은 어찌 보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모든 것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한비자의 말처럼 '상대방에게 취(取)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도리어 그것을 주어야 하는 것'처럼 때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일을 시작하면서도 큰 공(功)을 세우는 미명(微明)의 지혜를 발휘하라는 것이 한비자의 통찰력이다.
물론 전제 조건은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예(禮)를 다하며 자신을 낮추어 공경하면서 친절을 베풀면 손해 갈 것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다.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지명(知命)은 삼지(三知), 즉 지분(知分), 지족(知足), 지지(知止)로 풀이된다. 즉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며, 그칠 때를 알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적당한 때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그치는 것이 어렵다. 자신이 처한 분수를 알기에는 가진 욕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분수를 알고 만족하며, 제 때 멈춘다는 것, 제일 어려운 일이다. 이미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삼지(三知)를 망각해 무너지는 모습을 수없이 목도해 왔다.
인간에게는 지혜롭고 사리에 밝은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 때문에 자기 분수를 분별치 못하고 생활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전해오는지 모르지만,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의 분수를 느끼고 스스로 깨닫는 자가 되라는 뜻이 아닐까 한다.
깨닫지 못할 땐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없고, 만족해야 함에도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지식과 지혜를 겸비했다 해도 지성인이라고 볼 수 없다.
탐욕은 행복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지만, 가진 게 없어도 많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부자고, 많은 걸 가졌지만 적게 가졌다고 여기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이 말도 인생의 깊은 달관(達觀)의 경지를 두고 한말인지도 모른다.
아주 넉넉하다고 생각할 줄 안다면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하고, 넉넉함을 알지 못하는 이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행복할 수 없다고 했다.
누구의 삶이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때문에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지키는 것 또한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다.
누구에게나 제 자리가 있고 몫이 있듯 행복하게 살려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만족하면서 분수를 지킨다 해도 진실로 올곧게 살아가고 있는지의 여부를 의심치 않을 수 없다.
정도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데도, 제 자리를 모르고 맞지 않는 행동과 생활을 함으로써 일이 잘못되어 불행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라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되듯, 자신을 알고 자신에게 맞는 생활이 유지될 때 우리 삶에서 만족과 분수는 분명 행복의 길잡이가 된다.
'법구경'에, '예쁜 꽃을 따 모으기에 마음이 바쁜 사람은 그 욕심 다 채우기 전에 몸은 어느새 시들고 만다.'
위의 가르침은 재물을 모으기에 정신없는 사람은 그 욕심을 다 채우기 전에 꽃이 시들 듯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좀 더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지나친 분수나 욕심이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초한지'에 등장을 하는 한신은 큰 욕심을 부리다가 고조에 죽임을 당했지만, 장량은 작은 욕심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신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나중에 초나라 왕에 임명 되었지만 황제 유방에게 정치적 견제를 당하면서 죽음을 맞이 하였는데 그가 썼던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 성어다.
장량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했지만 건국 후에는 관직을 반납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을 더욱 낮추었다. 그래서 숙청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나친 욕심은 도리어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삼지(三知)란 지족(知足), 지분(知分), 지지(知止)를 말한다. 만족을 알고, 분수를 알고, 그만 둘 때를 아는 것이다.
숙맥불변(菽麥不辨)은, '콩인지 보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를 구별 못한다는 말은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온갖 군데를 다 참견하는 것을 핀잔하여 하는 말이다. 사람은 제 분수를 알고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은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뜻이다.
지혜있는 사람은 지족지계(止足之戒) 한다 하였으니, '제 분수에 맞는 만족을 알고 욕심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분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면 결국 따라가지도 못하고 탈이 난다는 교훈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살라는 이야기다.
삼지(三知)
삼지(三知)란 말이 있다. 삼지(三知)라? 무슨 말인지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삼지(三知)란 지족(知足)과 지분(知分)과 지지(知止)를 말하는 것이다. 족함을 알고 분수를 알고 그칠 줄 아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한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고 분수껏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바로 '지지(知止)'이다.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멈춤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단전호흡을 할 때도 호(呼)나 흡(吸)보다 지(止)에 무게를 둔다. 멈출 때 신(神)이 열리고 멈출 때 각(覺)이 오기 때문이다. 숨을 멈추고 '무아(無我)의 경지(境地)'에 들어 보라. 정신이 맑아지고 깨우침이 오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다.
지(止)의 상태에서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지수(止水) 위에 '계시(啓示)가 발현(發現)' 되는 것이다. 아이디어(idea)가 떠오르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생각해 보라. 아찔하지 않은가?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있어야 하듯이 사람에게는 지지(知止)가 있어야 한다.
멈출 줄 아는 지혜(智慧)가 있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멈출 때 멈추지 않고 질주(疾走)하다가 낭패를 당했는가?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다.
좀 나쁜 듯 할 때 수저를 놓아야 한다. 지나치면 탈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한 것이다. 지나침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나는 머리를 많이 썼다고 생각될 때 곧장 손을 놓고 걷는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무조건 걷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걷는다. 걷다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유연(柔軟)해진다.
지지(知止)의 효과다. 머리만 멈추는 것이'지지'가 아니다. 생각을 멈추고 욕심(慾心)을 멈추어야 한다.
과욕(過慾)을 멈추고 사욕편정(邪慾偏情; 바른 도리에 어긋나는 온갖 정욕, 음욕, 방종 따위를)을 멈추어야 한다. 아니 버려야 한다. 그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아야 한다.
물론 멈출 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것이 잘 안 될 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內面)을 돌아보고 자신의 능력(能力)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분수(分數)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을 알고 분수껏 살면 문제될 게 없다. 분수를 알면 '지지(知止)'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분수에 넘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수껏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수를 지킨다는 것은 일한 만큼만 거두는 것이다. 땀 흘린 만큼만 거두는 것이다.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 된다. 다툼이 일기 때문이다. 싸움이 일기 때문이다.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니 다툼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분쟁(紛爭)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송사(訟事)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분수를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 분수의 경계(境界)를 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능력(能力)과 성향(性向)을 알아야 한다. 수리(數理)에 밝은 사람은 수리에 집중해야 하고 추리(推理)에 밝은 사람은 추리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적성(適性)이라고 한다.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 같은 장사라도 자기에게 맞는 업종(業種)이 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남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업종'을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과 취향(趣向)'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
모든 일은 자신이 하고 싶을 때 그리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최선(最善)이다. 하고 싶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못하는 수도 있고 할 수 있으나 시들해져서 안 하는 수도 있다.
능력이 있을 때 일을 해야 하고 싶을 때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잘 안 되니 속을 끓이는 것이다.
그럴 때 지지(知止)를 떠올려야 한다. 일단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것이다. 어떤가? 그 이치(理致)가 훤히 보이지 않는가?
삼지(三知)
위나라 시대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사당에 가서 소원을 빌었다. 아내의 소원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를 편하게 살게 해 주시고 삼베 백 필만 얻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내의 기도 내용을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기왕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할 것이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크게 빌어야지, 하필 삼베 백 필이 뭔가?'
이 말을 듣고 아내는 남편을 쳐다보며 쏘아대듯 대꾸했다. '그보다 더 많이 부자가 되면 당신이 첩을 들일 테니까요' 부인은 삼베 백 필이 자신의 수준에 맞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삼베가 백 필 이상으로 많이 생겨서 돈이 많아지면 남편은 한눈을 팔게 되어 바람을 필 수 있는 위험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즉 분수를 지키지 않고 무턱대고 부자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이다.
삶의 방식에서 절제하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 뭐든지 지나치면 오히려 화근이 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분수에 맞는 생활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거친 밥을 먹으면 물 한 그릇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정당하지 않은 부유함과 귀함은 나에게는 본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과 같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하늘의 구름을 잡으려고 헛고생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당한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재산을 감당할 그릇이 되지 않으면 금덩이라 할지라도 화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사자와 나귀, 그리고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다. 그날 사냥한 것을 사자가 나귀에게 나누어 보라고 했다. 나귀는 셋이 함께 사냥을 했으므로 똑같이 나누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공평하게 삼등분하였다.
그런데 사자는 화가 나서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에게 다시 나누어 보라고 했다. 여우는 자신의 몫으로 아주 조금 남겨 놓고 몽땅 사자에게 돌렸다.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다. '아주 좋아! 그런데 누가 이런 걸 가르쳐 주던가?' 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죽은 나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재물을 모으기에 정신없는 사람은 그 욕심을 다 채우기도 전에 꽃이 시들 듯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
돈을 얼마만큼만 모으리라, 어느 지위까지는 꼭 올라가리라, 이것만 하고 그만두리라, 이렇게 하다가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인생의 삶이란 무엇이든 그만 둘 때가 삶의 포인트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말이다.
우리 인생에서 성공의 정상이 있다면 그 다음은 내리막이라는 것을 알아야 망신이나 화를 당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시내 변두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개발의 바람이 그곳까지 불어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하던 거금을 손에 쥐자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어 몸을 함부로 하다가 얼마 전 제법 창창한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스페인의 풍자(諷刺)소설가 세르반테스의 묘비명이 감동이다. '미쳐서 살다가 정신이 들자 죽었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한학자로 유명했던 변시연 선생은 일찍이 '삼지(三知)'의 철학을 강조했다. 삼지는 지족(知足), 지분(知分), 지지(知止)로서, 풀이하자면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알고, 그만둘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권력의 서열에 서 있는 사람은 '그만둘 때'를 알아야 한다는 이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권력과 명예가 정점일 때 과감히 그만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성공의 정상이 있다면 그 다음은 내리막이라는 것을 알아야 망신이나 화를 당하지 않는다. 복도 그릇에 차게 되면 넘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넝쿨째 굴러온 복이 있다면 그것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재삼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109세까지 장수했다는 20세기 인도의 수행자 사이바바는 이렇게 일갈했다. '지금 이 시대의 죄악 가운데 무슨 죄가 제일 크겠는가? 그것은 돈을 잘못 쓰는 데 있다.'
결국 진리의 삶이란, 물질이 전부라는 잘못된 가치관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법구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예쁜 꽃을 따 모으기에, 오로지 마음이 빠진 사람은, 그 욕심 다 채우기도 전에, 몸은 어느새 시들고 만다.'
재물을 모으기에 정신없는 사람은 그 욕심을 다 채우기도 전에 꽃이 시들 듯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 이 돈만 모으리라. 이 지위까지만 오르리라. 이것만 하고 그만두리라. 이렇게 말하다가 그 뜻을 이루기 전에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중생의 습관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만둘 때가 삶의 포인트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지나친 분수나 욕심이라면 물러날 시점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삼지(三知)의 교훈
子曰:
不知命이면 無以爲君子也요,
不知禮면 無以立也요,
不知言이면 無以知人也니라.
논어(論語)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입신(立身) 할 수가 없고,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을 알아 볼 수가 없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명(知命), 지례(知禮), 지언(知言)의 삼지(三知)가 수많은 철학적 교훈중에 동양 고전의 가장 기본서인 논어에 왜 마지막 문장으로 채택 되었을까?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때 삶의 지렛대로서 되새김 해보곤 한다.
첫째가 지명(知命)으로, 자신의 운명을 안다는 것, 즉 본인의 소임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라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진정성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최고 경영자라면 고객과 주주, 임직원을 위한 기업가 정신을 실현해야 하며, 스포츠인이라면 스포츠맨십을, 교육자라면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펼칠수 있는 교육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을때가 많다. 본연의 책무를 망각하는 사례를 적지않게 볼 수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승부 조작이 일어나고, 사회지도층이 각종 비리에 휩쓸리고, 교육자가 선거에 몰입하는 일이 흔하다. 모두 본인의 소명의식을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둘째는지례(知禮)로, 예의를 지키고 예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들과 차별화된 점은 상대적으로 예의를 잘 지키는 나라,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전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매스컴상에 오르내리는 뉴스를 보면 예의지국에 걸맞지 않는 무례한 언행을 종종 접한다.
공연장에서 휴대전화를 끄지 않거나, 지하철에서 소란을 피우는 행위 탓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또한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을 실망시키는 언행을 하는 경우, 국민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지언(知言)은, 말을 적절하게 하고 들을 줄아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해석해 보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같이, 말로써 큰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각종 언론 매체에 연일 오르내리는 정치, 경제분야의 유명인사나 스타연예인이, 말한마디 때문에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있다.
이는 유명 인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젊은이들이 연애할때나 결혼후 평소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작은 불씨로 번져 이별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왜 삼지(三知)는 논어의 가장 마지막 내용으로 기록 되었을까? 이를 되풀이하여 음미해 보았을때, 필자는 공자의 세가지 말씀이 어떤 상황에도 적절한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경영자는 고객과 임직원을 대할때, '경영자로서 맡은바 본분을 다하고 있는가?', '예의를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적절한 언행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할 것이다.
사회의 리더에게는 '리더로서의 국가관과 사회적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가?', '대중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적절한 언행을 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할 것이다.
또한 가정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삼지(三知)를 자기경영의 근간으로 삼는다면, 개개인이 발전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더 세련되고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충만할 것이다.
논어의 또 다른 삼지(三知)
論語 第16 季氏篇 9章
三知之,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공자 가라사대, '나면서 아는 이는 위요, 배워서 아는 이는 다음이고, 곤하여 배우는 이는 또 그 다음이니, 곤한데도 배우지 아니하니 백성이라, 이에 아래가 되니라.'
(註)
여기서 知나 學은 현대적인 의미의 지식이나 개념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천지자연의 이치에 바탕한 인륜의 도리를 의미한다.
이에 공자는 학이(學而)편 6장에서, '젊은이는 집안에서 효도하고 집을 나서서는 자애로우며, 매사를 삼가 신의를 얻고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렇게 하고서도 힘이 남거든 비로소 육경 등과 같은 것을 배워라'고 하였다.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이를 이어받아 제자인 자하(子夏)는 그런 사람은 학이편 7장에서,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 하리라(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고 하였다.
다만 천지자연의 이치나 인륜의 도리를 알고 배우는 방식에는 등급이 있다. 후대에 성인으로 칭하는 공자나 노자, 예수, 부처 등은 공부를 통하지 않더라도 천지자연의 이치나 인륜의 도리를 알고서 실천하는 타고난 사람이다(生而知之).
반면에 현인(賢人)이라 불린 이들은 천지자연의 이치나 인륜의 도리를 공부를 통해 배운 사람이다(學而知之).
그리고 나머지 선비들은 그 이치와 도리를 잘 몰라 괴로움을 겪고 난처한 일을 당하기에 배우고 또 배우는 사람이다(困而學之).
공자는 이치와 도리를 배워서 알게 되면,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나 배워서 아는 사람이나 곤하여 배운 사람이나, 중용 20장에서, '앎에 있어선 하나로 같다(及其知之 一也)'고 하였다.
그러나 이치와 도리를 몰라 난처한 일을 당하는데도 배우지 않는다면(困而不學) 이는 일반 백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공자는 태백편 9장에서, '이런 사람은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알게 할 수는 없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공자는 중용 20장에서, '그 행함에 있어선 한 가지로 같다(所以行之者 一也)'고 하여 궁극적으로 위정자와 백성이 한 길임에 있음을 제시하였다.
(朱子)
困은 謂有所不通이라
곤(困)은 통하지 않는 바가 있음을 이름이라.
言人之氣質不同이 大約有此四等이라
사람의 기질이 같지 않음이 대략 이 네 가지 등급이 있음을 말함이라.
(楊氏)
生知, 學知로 以至困學知이 雖其質不同이나 然이나 及其知之하여는 一也라
생지(生知), 학지(學知)로써 곤학지(困學知)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바탕이 같지 아니하나 그러나 그 아는 데에 이르러서는 한가지라.
故로 君子惟學之爲貴요 困而不學然後에 爲下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오직 배움을 귀중히 여기고, 곤(困)하여도 배우지 않은 연후에는 아래(賤民)가 되니라.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知(알 지)는 ❶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이다.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말한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이나,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등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知자는 '알다'나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知자는 矢(화살 시)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知자는 소전에서야 등장한 글자로 금문에서는 智(지혜 지)자가 '알다'나 '지혜'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슬기로운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智자는 '지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知자는 '알다'라는 뜻으로 분리되었다. 智자는 아는 것이 많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말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知자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知(지)는 (1)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작용하는 힘. 깨닫는 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알다 ②알리다, 알게 하다 ③나타내다, 드러내다 ④맡다, 주재하다 ⑤주관하다 ⑥대접하다 ⑦사귀다 ⑧병이 낫다 ⑨사귐 ⑩친한 친구 ⑪나를 알아주는 사람 ⑫짝, 배우자(配偶者) ⑬대접(待接), 대우(待遇) ⑭슬기, 지혜(智慧) ⑮지식(知識), 앎 ⑯지사(知事) ⑰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을 지식(知識),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지적 활동의 능력을 지능(知能),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지식이 있는 것 또는 지식에 관한 것을 지적(知的),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 능력을 지각(知覺),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아는 사람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봄을 지인(知人),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은혜를 앎을 지은(知恩), 지식이 많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을 지자(知者),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자기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앎을 지지(知止),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어떤 일을 느끼어 아는 것을 감지(感知),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지(朋知), 기별하여 알림을 통지(通知), 인정하여 앎을 인지(認知), 아는 것이 없음을 무지(無知), 고하여 알림을 고지(告知), 더듬어 살펴 알아냄을 탐지(探知),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거나 알게 함을 공지(公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나이 50세를 말함으로 50세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나이를 달리 이르는 말을 지천명(知天命), 천명을 알 나이라는 뜻으로 나이 오십을 이르는 말을 지명지년(知命之年),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 또는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행합일(知行合一),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지명인사(知名人士), 지식과 행동이 한결같이 서로 맞음 또는 지식과 행동이 일치함을 일컫는 말을 지행일치(知行一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뜻으로 믿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지부작족(知斧斫足), 알면서 모르는 체함을 일컫는 말을 지이부지(知而不知),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물러서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난이퇴(知難而退), 모든 일에 분수를 알고 만족하게 생각하면 모욕을 받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지족불욕(知足不辱),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함을 이르는 말을 지은보은(知恩報恩), 지자는 도리를 깊이 알고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미혹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지자불혹(知者不惑), 사리에 밝은 사람은 지식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함부로 지껄이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지자불언(知者不言),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대우大愚의 덕을 지키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백수흑(知白守黑), 대우를 잘 받아서 후의에 감격하는 느낌을 이르는 말을 지우지감(知遇之感), 족한 줄을 알아 자기의 분수에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지족안분(知足安分),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지족지부(知足知富) 또는 지족자부(知足者富), 간악한 꾀가 많아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꾸며 대어 상대방을 곧이 듣게 함을 이르는 말을 지족식비(知足飾非)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