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할 일이고 또 언젠가는 내가 인정해야 할 일이기에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있었다.
하지만...
"너 방금 뭐라고..."
"저기 한은광 보이잖아.가서 인사 안해도 돼?"
"인사?"
"여자친구 생겼나본데?쟤가 너말고 다른 여자랑 있는건 내가 살면서 처음 본다야."
수많은 상상을 했었다,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을.1년이 될지,10년이 될지 모르는 그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만나는 순간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어떤 눈빛으로 그를 쳐다봐야 할지,또 어떤 말을 주고 받아야할지......
하늘도 무심하시지.어쩜 이리도 기막힌 상황을 나에게 내려주신걸까.
겨울방학이 시작된지도 어느덧 한달째.늘 그래왔던것처럼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카페 카운터에서 머그컵을 닦으며 시간을 때우던 중이였다.
'저거 한은광 아니야?'
잠시 컵에 집중하고 있는사이 하루도 빠짐없이 도와주러 오는 예슬이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정작 나를 충격속으로 몰아넣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른채 카페문을 열고 들어와 저앞 창가쪽에 자리를 잡았다.문제는...이쁘장하게 생긴 여자애와 함께.
"주문 니가 갈거지?"
"아니.나 가기 싫어."
"왜?싸웠어?"
"싸운건 아닌데."
"그럼?"
"절교했어."
"뭐?"
"나 한은광이랑 절교했어.2년전에."
* * *
무슨 생각으로 가게를 마감하고 나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오랜만에 여자까지 끼고 나타난 한은광의 모습은 장사를 하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닐 이유로 충분했다.실제로 본건 고작 이십분 남짓한 시간이였지만,그 망할 놈의 자식은 어찌된게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아른거리냔 말이다!
"나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또 그소리야?"
"어떻게 니네 둘이 절교를 해?다른사람도 아닌 김현이랑 한은광이?"
"일곱번째로 들었어."
"70번도 말할수있다고!너 어쩜 나한테 한마디를 안할수가 있어?"
한은광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저 주둥아리때문.집에 가는 내내 놀랍다고 했다가,기가 찬다고 했다가,심지어 자기에 대한 배신이라고 마무리를 지어버리는 이예슬때문에 안그래도 복잡한 내 머리통이 점점 더 커지는듯한 느낌이다.
"예슬아,내가 전부 잘못했으니까 이제 내앞에서 그 이름 좀 꺼내지 말아주라."
"왜?"
"왜라니?절교했다니까."
"절교했는데 아직도 좋아하는거야?"
"미쳤어?그런거 아니건든요."
"미친건 카운터밑으로 기어들어간 너겠지.그 몸이 숨겨지는게 더 이상하더라."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런거라고 했잖아."
"니가 피할게 뭐가 있는데?"
"피한게 아니라...!휴,그래.솔직히 마주치기 싫어.그자식앞에서 내가 어떻게 서있어야 될지도 모르겠고...안부조차 묻기 민망하고 창피하고..."
"그렇다고 니가 피할게 뭐가 있어?죄진것도 아닌데,마주쳐야 할 상황이 오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어?"
"맞잖아.그리고 어차피 만나게 될 사람은 니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거 아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니네 뭐때문에 절교했어?왜 싸웠는데?"
진지하게 얘기해준다 싶더니만 또 얘기가 그쪽으로 튀는구나.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심히 부담스럽다.오늘따라 가게문을 일찍 닫은것도 빨리 마감하고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전화때문이였는데 여기서 이예슬이랑 농땡이를 칠 시간이 어디있을까.
"나중에 내가 천천히 다 설명해줄게.오늘은 먼저간다!"
"야!!!김현 너 거기안서?!!"
저 고함소리를 내일도 들어야 하다니.눈에 불을 킨 예슬이가 쫓아올가 두려워 평소보다 두배는 속도를 내어줘서 달렸더니,어느덧 집앞.
문을 열기도전에 벌써부터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내귀에 전해진다.아마도 우리집에 오랜만에 손님이 오신듯하다.하긴,그 동안 고3인 나때문에 우리집에 다른사람이 놀러오는 일은 드물었지.나만큼이나 고생하신 우리 엄마아빠를 생각하니 괜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우리 딸 왔나보다."
"언니 왔어?"
"누나 오랜만."
신발을 벗기도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을 하려던 찰나,나의 시선이 현관문앞 바닥에 꽂혔다.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고 목에는 복숭아씨가 걸린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얘가 안 들어오고 뭐하지?"
움직일수가 없었다.
한동안 바닥에 보이는 낯선 운동화를 뚫어져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저앞에 보이는건 얼마전 친동생 혜아 생일에 내가 선물한 구두,그 옆에 운동화는 저번에 진광이가 신은걸 본적이 있으니까 당연히 진경이 녀석의것일텐데.그렇다면 지금 내가 뚫어져라 보고있는 내 눈앞에 이 운동화의 주인은......
"현이 왜 안들어오니?바닥에 뭐 있어?"
"제가 가볼게요."
무려 2년만에 듣는 귀익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했다.
안돼.너 오지 말란 말이야...니가 여길 와서 어쩌겠다고...나 너랑 이렇게 마주치고 싶지...
"뭐하냐?"
"......"
"안 들어올거야?"
"너..."
'그렇다고 니가 피할게 뭐있어?마주쳐야 할 상황이 오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오늘만해도 갑작스런 녀석의 두번째 등장으로 멍해있을무렵,순간 머릿속에서 예슬이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맞아,내가 이 녀석을 피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잖아? 그냥 지금 상황 그대로 받아 들이면 되는거지.오바할 필요도 없고 애써 친철하게 대할 필요도 없다.그냥 오래만에 만난 친구처럼,아니 평범한 남.자.사.람.처럼 대하면 된다.
그래,담담하게.
"아...너...누구...?"
"......뭐?"
"하하.하도 오래 안봐서 생각이 잘 안나네,하하."
여기서 그만 두어야 했다.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나의 어이없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오히려 흥미롭단 표정으로 피식-거리고 웃는 녀석이 나는 심히 거슬렸다.
"너 한국에는 언제 들어왔니?내가 요즘 좀 바빠서 말이야.니가 왔다는 소식도 못들었네?이렇게 만나니까 좀 의외다."
"에이~언니 왜 그래?내가 어제 은광오빠 한국 들어왔다고 얘기했잖아."
타이밍 한번 죽여준다,동생아.안그래도 창피해서 뭔말을 해야될지 모르겠는 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유유히 사라지는구나.
"내가 원래 기억력이 안좋잖아,그새 까먹었네..."
"김현."
"......왜?"
"오랜만이다.여전히 밝아보여서 잘 지냈냐는 말은 묻지 않을게."
"...그래.오랜만이야."
"봤냐?안부인사는 이렇게 하는거야,바보야."
잊고있었다.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어떻게 변하든 자신과는 하나도 상관없다는듯한 저 표정.내 마음속을 꿰뚫고 있는듯한 저 눈빛때문에,예나 지금이나 나는 또 한번 인정하고야 만다.
한은광,그는 언제나 나보다 훨씬 위에 있다는것을.
첫댓글 다음편도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잼써영 :) 잘보구 갑니당~
고마워요:)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