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이정표 없이 무작정 달리는 기차와도 같이 앞만 보고 무심코 달리는 세월. 창문 틈에 비치는 풍경이 어제와 또 다르다. 가는 속도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 안양을 떠난 지 햇수로 35년이 넘는다. 흘러간 세월만큼 너무도 변한 안양! 동구 밖에 포도밭 고추밭 냇가가 그대로 있는 정감어린 안양도 아닌데 여전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삶의 깊이만큼이나 골 패인 마음은 어쩌면 고향 땅의 흙냄새, 그 순진함으로서 비로소 치유가 가능하다고 여겨서일지 모른다.
동심의 고향은 엄마의 품속 같고 따스한 정감을 지녔다. 하지만 잡다하다 싶은 작은 기억들은 그림자조차도 너무도 희미해 자꾸 맘속으로만 숨는다. 그러기에 이제는 잊을 건 잊고 조용히 살다 미련 잠재운 그리움만으로 허술한 집이나 겨우 짓다 허물어버리고 말 것이란 생각을 또 한다. 이미 고향은 그리움 넘어 체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안양은 전후기 나누어 두 얼굴을 지녔다. 비교적 전원적이던 풍경이 달라진 것은 바로 안양시내를 가로질러 새로 난 신작로로 부터다. 달라진 길 하나로 사람의 운명은 물론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나는 똑똑히 목도했다. 신작로가 뚫리자 군포 쪽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공장이 들어섰다. 예전 수리산 끝자락을 잇는 병목안 깊숙이 자리하던 채석장하고 왜정시대부터 들어선 금성방직은 쇠퇴하고 안양역 바로 앞에 한국특수제지를 필두로 삼덕제지등 골판지 만드는 회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60년대 말 제지회사가 재계 서열 10위 안에 두세 개 들어갔었던 때가 그 무렵이다. 시내 한복판에는 고려석면이 있었고 기찻길 건너서는 태평방직이 있었으며 국내 최초의 나일론공장인 한일 나이롱 공장이 지금의 명학역 너머에 들어서고 이어서 금성전선 금성통신등 지금도 유명한 공장이 생겨났다. 당시 기계를 전공한 젊은이들이 들어간 공장은 현대양행으로 박달동(지금의 만도기계)이나 군포(지금의 농기계를 제조하는 LG기계)공장에 들어갔다. 내가 기계공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공장들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그밖에도 유한킴벌리나 동아제약을 비롯한 많은 제약회사와 페인트에 잉크를 만드는 화학공장이 안양유원지까지 파고들었고 그쯤 안양천은 제 색깔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제 색깔을 잃은 것은 안양천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취직자리가 생겨나고 땅 값이 오르자 순박한 표정들도 모두 달라지고 말았다. 경제 성장률이 높은 산업사회, 특히 신흥개발국 중에 땅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는 알고 보면 돈 버는 게 아주 간단하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돈 버는 장사로 땅만 한 대상은 없다. 공장이 사람을 끌어 모아 주택이 들어서고 번화해지면 땅값은 오른다. 그쯤 공장은 물건 팔아 돈 벌고 땅값 올라 또 돈 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어느 것도 땅 값 오르는 속도를 못 쫓아간다는데 있다. 도심지에서는 땅은 투자가 아니고 투기다. 지금도 부동산 투기는 끝 없는 화제이고 저명한 사람치고 이 짓을 안해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도박, 경마, 로또 등 지나친 사행행위로 패가망신을 했다지만 땅 투기는 속성은 같은데 이와 다른 게 현실이다.
명예도 얻고 돈도 벌고 권력도 쥐는 지름길에 땅이 있다.
대한민국 부동산 투기꾼의 대명사,복부인! 그들이 답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부동산투기의 역사는 1963년 강남지역개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재(理財)에 밝은 소위 강남복부인들이 전국을 누비면서 부동산가격을 천정부지로 뛰게 만들고, 그 와중에 자신들은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겼다. 옆에서 이를 보고 부럽기도 하고 배 아프기도 한 이웃동네 아줌마들도 부동산투기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사이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줌마뿐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투기꾼이 되었으며 또한 전 국토는 투기장화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땅 투기에서 시작된 부동산투기는 점차 아파트 등 건물투기로까지 확산되어갔다. 프리미엄이라는 말이 상식어가 된 지금도 이 부동산 투기광풍현상은 잠재워지지 않은 채 여전하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수백 채의 집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고, 1000채 이상을 보유한 사람도 꽤 있다고 전해진다. 도대체 이들은 어디서 이런 많은 자금을 조달했으며, 이 수많은 집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때론 농민도 되고 어민도 되며 돈이라면 안가는 곳이 없는 투기꾼. 그들은 염치도 없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위장전입을 밥 먹듯이 한다. 또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교묘한 방식을 동원해서 탈세도 서슴치 않는다. 임대회사라 하여 상속에 증여를 교묘히 빠져 나간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는 겉으로는 제조업을 한다고 신고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땅 투기에 골몰하는 곳도 꽤 많았다. 바로 세금회피를 위해서이다.
양도세를 덜 내려고 실거래가격을 속이고 훨씬 낮은 가격으로 거래한 것처럼 위장하는 소위 '다운계약서' 작성 행태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들이 떵떵거리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전셋집과 월세 집을 전전하거나 쪽방촌에서 연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부동산 투기로 인해 불로소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성실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고 일할 의욕을 잃게 된다. 건전한 사회활동을 통해서는 경제적 부를 축적 할 수가 없다는 상대적 상실감은 실로 큰 문제다. 이제는 부동산 투기는 법망에 걸려도 솜 방방이 처벌로 관심도 끌지 못하며 돈 없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용서받지 못할 죄명은 단호한 것만 같다.
지체 높은 분들 청문회에 단골로 나오는 것이 업그레이드 계약서에 부동산 투기이고 가짜 주소 이전이다. 세금 덜 내려는 다운계약서도 있지만 여기서 업그레이드란 세금 내기는 싫고 돈이 넘쳐나 주체를 못한 나머지 일부러 땅을 비싼 가격으로 산 것처럼 꾸미는 작태를 말한다. 손해보고 샀다는데 어쩔 것인가. 나중에는 권력자를 위해 일부러 비싸게 사주는 경우도 생겨났다.
안양이라고 예외 일수는 없었다. 순박한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만지게 되니 너도 나도 모두 땅을 팔았다. 지금의 안양 전화국자리 맞은 편 중심에 위치한 결혼예식장은 친구인 익이네 옛날 논, 거화 예식장은 풍년원 포도밭집, 태평방직하고 교화동 사이에 포도밭은 섭이네 땅, 지금의 남부 순복음 교회 자리는 우리 집 고구마 밭이었는데 땅을 팔자 정말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달라져 버렸다.
연을 날리면 저 멀리 쌍개울 지나 날라앉은 벌터라 불렀던 곳은 당시는 냇가근처 절대농지로 꽁꽁 묶여 있었는데 평촌 신도시로 변신을 하고 수리산 언저리의 산본리는 산본신도시라는 호칭을 달고 아파트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당시 친구네는 뭣도 모르고 논값을 싸게 쳐 강제로 LH공사에 넘겼는데 지금은 그곳이 안양의 제일 번창한 거리로 백화점이 우뚝 서 있다. 어릴 적 멀리 번개가 번쩍인다고 번개 동네라 불렸던 호계는 당초 이름을 버리고 범계라는 이름으로 재 탄생을 해 인덕원 지나 과천으로 향하는 지하철 4호선이 지난다. 그 바람에 논많기로 소문난 그 친구네는 신도시 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나 정작 돈은 벌지 못했다.
수리산 기슭 저 넘어 근명여중 밑 호박밭은 주인이 끈질기게 갖고 있어서, 아들인 권수창씨는 그로 덕보고 국회의원도 했지만 대개의 순진했던 안양사람들은 발전도 되기 전 모두 땅을 팔아 돈방석에 앉아 있는 안양사람 소린 거의 들어보질 못했다. 아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누구도 땅을 팔지 않을 것이다. 두 눈 꾹 감고 가만 밥만 먹고 버티면 어느 날 노른자 땅이 되는데 누군들 땅을 소홀히 할까. 안양사람들은 그 시대 ‘똠방 각하’란 소설에 나오듯 괜스레 들떠 실속을 챙기지 못했다. 아니 복부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안양이 급속도로 달라지고 내 살던 주접동이 부자동네가 된 것은 1977년을 경계해서 부터다. 안양시내 냉천동 부자동네 아이들하고 티격태격한 게 엊그제인데 양상이 확 바뀌고 만 것이다. 1977년 안양에 큰 물난리가 나 안양시내가 거의 침수되고 서울 가는 안양대교가 절단 나는 큰 사건이 발생되자 언덕을 올라 선 우리동네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안양국민학교를 가로질러 지금의 평촌신도시와 인덕원을 향한 비산동을 연결시킨 고가도로가 생기고 안양에 전체적인 도시정비가 이루어졌다.
안양 뿐 아니라 이 나라는 다시 순진한 옛모습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순진과 순수라는 개념, 이에 열을 올린다. 거친 문명을 이겨낼 방도는 순수함의 터전에 있다. 명예를 존중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충만한 사회,시민사회의 건전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대다. 순진함은 몰라서 마냥 착한 것이고 순수란 바로 좋고 나쁜 것과 옳고 그름을 정제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인문을 거의 팽개쳐버린 사회, 철학이 없는 사회는 질주하는 문명을 버티기가 어렵다.
각박한 현실을 해갈할 해법으로 나는 인문학적 접근을 강조한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양심이 실종되어 죄를 짓고도 증거를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법적 망령에서 허덕이는 것은 바로 순수함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법을 너무 잘 알아 문제인 사람들에게는 '인간성 회복 명분의 재판이라도 따로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서양 선진국은 단지 돈만을 추종하지는 않는다. 돈을 가진 명예, 사업가가 추앙을 받는 이유다. 기실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확고한 뿌리 깊은 선비적 사고가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선비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는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한 '의리'(義)이다. 따라서 선비정신은 곧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한 언급에서도 의리와 이익의 대립적 분별의식(義利之辨)과 군자와 소인의 대립적 분별의식(君子小人之辨)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전환하는 왕조 교체기의 선비들 사이에는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킨다는 정몽주 등과 '혁명'의 당위성에 따라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鄭道傳) 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했다. 그러나 혁명기를 지나 세종 때에 들어오면 선비의 의리는 충절로 확인되었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에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절의보다 한층 더 큰 의리로서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를 제기한다. 도학적 의리의 가장 큰 과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중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중화문화를 수호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중화문화의 존숭은 사대주의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춘추대의'는 특히 외민족 침략자를 오랑캐로 항거하는 신념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의리'에 따라 죽는 순의(殉義) 정신을 발휘했다. 병자호란 때에도 마지막까지 오랑캐에 대한 화친과 항복을 거부하는 척화론(斥和論)이 의리정신으로 나타났다.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자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 의식이 이 시대 선비들의 의리정신의 중심과제를 이루었다. 우리 선조들은 선비의 품격과 지조를 철저히 각성했다.
과연 이 세상 난세가 닥쳐오면 과거 선비들처럼 분연히 일어설 수 있을까. 그쯤 요즘 항간에 떠돈 말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우리나라도) 신분제를 정했으면 좋겠다.” 하여 민중을 앞세우고는 위정자나 복부인들은 모두 숨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IMF때 반 돈짜리 금가락지 빼어든 서민의 행렬은 보았지만 한냥 닷돈의 금목걸이 복부인은 보지를 못했다. 자식들 태생을 미국으로 돌려 놓은 마당 돈이 많으니 전세비행기로 조국을 떠나도 떠날테지만 사놓은 땅은 다 어쩔 것인가.
문명의 시달림에 지친 안양, 특색 없이 북적거리고 화장을 짙게 한 모양새가 이제는 목석연한 서울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오늘 같이 부슬부슬 비 오면 떠오르는 그곳. 쓸쓸함이 넘치는 거리에 추레한 예전 모습만 출렁인다. 구시장, 읍민관, 화단극장, 소골안, 포도밭, 수푸루지...... 정오를 알리는 읍내 성당의 종소리는 십리 밖을 넘어섰다. 그 시절 이보다 큰 읍내는 없었다.
번개, 산본, 평촌, 인덕원, 석수.. 수리산 물과 산본에서 내려온 물이 합쳐져 불린 이름 쌍개울. 그 물이 넘쳐나 비산리 다리가 떠내려가고 그 덕에 학교를 쉬었는데. 이젠 온 동네가 흔한 종소리일 뿐 더 이상 가난 심은 황토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비오면 으레 흔적 남은 기차 소리로 그리움마저 채우고 돌아서곤 한다. 이세상의 물질만능이 야속할 뿐 내게 안양은 여전히 비 같은 우수이고 순박한 처녀 모습으로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