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信稱義를 말하다(1) (롬4:1-8) / 다시 읽는 로마서(25)
롬4:1a의 “그런즉”([운] - therefore / 그러므로)에 의해서 롬4장은 독립된 주제가 아니라 롬3장의 내용(특히, 以信稱義)을 계속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롬3장의 내용 요약
① 율법의 소극적 기능 (롬3:19-20)
- 律法은 유대인에게만 주신 死亡 告知書 이다.
- 律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
② 율법의 적극적 기능 (롬3:21-30)
死亡 告知書인 율법으로 인해 절망 중에 福音(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며, 구원은 구속(속죄 – 구원의 시작으로서 主體이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므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쉬운 복음이며, “은혜” 혹은 “값없이”로 표현됨)과 聖化(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主體인 ‘나’ 자신이 직접 피 흘려 싸우는 치열한 복음임)로 이루어짐.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 구속을 구원의 완성으로 오해하여 자신이 이루어야 할 성화를 구속의 은혜 속으로 떠넘기는 심각한 과오를 범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架上七言 중 6째 선언(“다 이루었다”) 역시 구속에 관한 것이지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며,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以信稱義는 구속으로 시작하여 성화의 과정을 지나 稱義로 완성되는 구원의 全 과정에 대한 함축어임
[ 성경적인 구원의 서정 : 구속 -> 중생 -> 회심 -> 성화 -> 칭의 -> 收養 -> 영화 ]
③ 그렇다면 율법을 어떻게 해야 하나 (롬3:31)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오해(율법을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사랑/선택하셔서 구원해 주신 證票로 여기고 그 율법을 행하면 된다고 생각함)로 지금까지는 율법이 본래의 목적인 死亡 告知書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구원함)을 받음을 믿음이 증명(롬3:28)함으로 인해서 율법이 본래의 기능인 死亡 告知書의 역할을 회복함
* 롬4장 - 以信稱義
바울은 롬3장에서 이미 언급했던 以信稱義(구속으로 시작하여 稱義로 완성되는 구원의 全 과정에 대한 함축어)에 대해서 롬4장에서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지난 週 “이것이 복음이다(4)” 中에서
- 구원의 시작인 구속(속죄/속량)은 主體이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획/실행/완성하신 것으로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萬人을 위해 값없이(‘나’ 자신이 지불하지 않고) 주어진 것임(롬3:24)
- 以信稱義의 “믿음”의 주체는 ‘나’이며,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 이후 구속의 은혜에 반응하여(구속의 은혜에 대한 반응의 여부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려있음) ‘나’ 자신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회개와 거룩함으로 나아가 끊임없이 성화를 이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칭의]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의미함
-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음”(以信稱義)이 예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인정/동의/시인만 할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음
- 로마서에 의하면 구원은 ‘예수님의 믿음’(구속 – 예수님에게는 치열했으나, 인간에게는 쉬운 복음임)과 ‘나의 믿음’(성화 – 치열한 복음 - 회개에 합당한 열매/계속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감/자기 부인/자기 십자가/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매일 매순간 죽음/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성령님의 것인 그 열매)으로 이루어짐
- 칼빈주의는 구속과 믿음(성화)의 차이, 예수님의 믿음과 ‘나’의 믿음의 차이를 없앴으며, 이 철학 사상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몫인 “나의 믿음”에 의한 의무감/책임감/두려움을 망각하게 하며,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포기하게 하며, 치명적으로 구원의 시작인 “구속”을 “구원의 완성”으로 생각하도록 미혹하며, 이는 사탄의 기막힌 戰略戰術임
② 롬4장의 내용 분석
1. 以信稱義의 시작 (롬4:1-16)
1> 아브라함의 예 (4:1-3)
2> 다윗의 고백 (4:4-8)
3> 以信稱義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4:9-16)
2. 以信稱義의 완성 (롬4:17-22)
3. 以信稱義는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롬4:23-25)
[1] 以信稱義의 시작 (롬4:1-16)
1. 아브라함의 예 (롬4:1-3)
① 구속 - 구원의 시작
1> 롬4:1
“그런즉 육신([살크스] - flesh)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의역 : 그러므로 타락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성경에는 몸([소마] - body), 육체/육신([살크스] - flesh / 타락한 인간의 정신세계), 혼([푸쉬케] - soul), 영([프뉴마] - spirit)이란 단어가 있는데 육체와 육신을 구분 없이 번역했으며, [소마](body)는 육신으로, [살크스](flesh)는 육체로 통일성 있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 모두가 구속에 관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타락한 육체[살크스]의 소욕/충동 속에 있는 인간의 본성에게서 구속에 관한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타락한 인간은 以信稱義의 시작인 구속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으며, 구속에 관한 모든 것의 시작/진행/완성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예수님이 행하셨습니다.
2> 롬4:2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들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는 아니다.” [직역]
만약 以信稱義의 시작인 구속에 아브라함의 행위들이 포함되었다면 그는 스스로 자랑거리를 가질 수 있겠으나, 실상은 구속에 아브라함의 행위들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3> 창15:9-1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쪼갠 고기”는 예수님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 죽으심을 상징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 間의 雙方言約에서 아브라함은 참여하지 못하고 오직 언약의 主體이신 하나님만이 홀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며, 이는 하나님이 은혜가운데 일방적으로 계획/실행/완성하신 구속에 아브라함이 관여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② 義로 여기심 - 구속 이후 ‘나의 믿음’의 시작
1>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elogisqh autw eiV dikaiosunhn [엘로기스데 하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 [직역] 그에게 의를 향하여 간주하셨다)”
성경의 선언에 의하면 以信稱義의 시작인 구속을 위해 아브라함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는 단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義로 여기셨을/간주하셨을 뿐입니다. 즉 구원의 全 과정 중 시작 부분인 구속(“하나님의 은혜”/“값없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그가 義를 향하여 (가는 것으로) 간주하셨으며 ([로기조마히] - reckon/count/think/suppose – 헤아리다/계산하다/생각하다/상상하다/가정하다/간주하다/여기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義를 향하여 방향전환 함을 義로 생각하셨음을 의미하며, [로기조마히] 이후에 義를 위해 피를 흘리는 치열한 복음의 전투를 통해 최종적으로 실제적으로 義로운 사람이 되었을 때 終末的으로 부여되는 칭호인 稱義와는 전혀 다릅니다.
2> 창15:1-6
“...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義를 향하여 가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하나님은 以信稱義의 시작인 구속에 대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반응하자 그가 義를 향해 방향전환 한 것으로 인정하고 義로 여기셨습니다[로기조마히]. 즉 “義로 여기심”은 ‘義를 향하여 가는 方向의 轉換’을 의미합니다.
③ 稱義 - 구원의 완성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22:1-18)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2:21-23)
아브라함의 “義로 여기심”은 창15장(“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창15:6)에서 시작되었으나 “稱義”는 아브라함이 죽기(창25:8) 前인 창22장에서야 이루어집니다. 단지 믿음으로만 시작된 “義로 여기심”은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해[텔레이오스] 질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稱義”가 부여되며,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④ 성경이 말씀하시는 以信稱義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구속을 ‘나’가 믿음으로 곧 구속을 인식/이해/동의/확신하는 것에서 以信稱義는 “義로 여기심”으로 시작되며, 행함으로 ‘나’의 믿음이 온전해[텔레이오스] 질 때 비로소 終末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稱義”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以信稱義의 시작과 완성이 구분되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以信稱義의 시작을 완성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예외 없이 바로지금이순간 ‘칭의 – 입양(수양[收養])’의 단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치열한 복음의 전투를 하고 있는 현재진행의 과정 中에 있으며, 아직은 “聖徒” / “하나님의 子女”가 아닌 “敎人”의 수준에 있음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구원의 서정
구속 -> 중생 -> 회심 -> 성화 -> 칭의 -> 收養 -> 영화
동영상이신칭의를 말하다(1) / 다시 읽는 로마서(25)설명www.youtube.com
첫댓글 질문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형제님. 윗글과 동영상에 나옵니다. 우리 성령에의해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은 구속되고 거듭난 백성들은 서로 권면하고 주의 진리안에서 내것을 내려놓고 진리에 귀를 여는 칭의 받는 성도 되십시다.
주님의 성령안에서 축복하며 사랑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사람에게 긴 생애를 주신 것은 성화되는 과정에서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인재로 키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세상에 택함받은 자들을 던졌을까요.
자신이 자신의 신념의 결과를 안다는 것은 넌센스 입니다. 오늘날 기독회관에 동성애자를 초청하여 그들을 합리화 시키려는 의도를 가진자들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하고 구원이 자신의 믿음 안에서 완성된 자들에게 물어 본다면 무어라 대답할까요? 아마 모른다거나 구원받지 못했다 할것입니다. 이와같이 타인의 구원을 모르는 것처럼 각개인의 미래도 모른다 하여야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저에게 그 초청자에 대한 구원의 결과를 물어 온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ㅡ 행실과 열매가 그들의 믿음의 증거라고 말이지요.
믿음의 증거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알고자 하시는데 감히 어떻게 사람이 증거가 필요없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한달란트 받은 자의 변명과 너무 똑같은 변명입니다. 칭화의 삶이 필요 없다면 하루살이 인생으로도 충분히 구원의 길을 여실 수 있는 하나님임을 압니다.
생명을 살리는 은혜가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csc6970 본 글은 특정인들과 상관이 없으며 그러한 논리를 반박하는 글일 뿐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csc6970 아멘아멘~ 너무나 성경적으로 합하고 옳으신 믿음과 표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종종 귀한 글을 올려주시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길을 밝혀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요. 정말 이 카페에 귀한 인도자라 생각합니다. 감사해요,
주님의 성령과 말씀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좋은 지적 감사하며 희문님의 의견도 부분적으로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또한 장로교인(이제는 초교파) 이었어서 믿음을 갖는 자체로 칭의라 간주해주심을 주장하고 있지만 , 신목사님처럼 좀 더 상세히 분석한다면 성경적으로
믿음은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영접으로 중생, 이후 더욱 깊어지는 회심,회개로 열매가 나타나는 성화의 단계, 이를 칭의하시는 은혜의 과정이라 보는 것이죠. 압축시키면 믿음이란 단어에 함축되고. 늘려 풀면 그러한 여러과정이라 이해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은후엔 여러시험들이 있을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죠. 믿음갖은 사람에겐 어떤시험도 없는 확정된 것이기 보단, 몇가지 유형의 시험이 믿는자에게
@오직주를사랑 믿는자에게도 언제나 있을수있고 , 믿는 우리는 죄를 따르지않고, 성령과 말씀을 쫓아 각 자신의 믿음의 의지결단으로 능히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이라 봅니다. 믿음으로 천국행이 확정되기도.될수도 있지만 , 그 믿음안엔 여러단계가 있어 순종의 행함으로 증거해야 칭의되는 아브라함이 된다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희문님과 저에게 주 예수님의 크신 사링과 은혜과 늘 함께 하시길 주예수그리스도의 거룩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며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희문 샬롬!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리고 싶은데 먼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모든 의와 생명 나아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주셨으므로 예수님이 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생명과 의는 예수님이 계실 때 부터 동시에 존재 했으리라 봅니다. 고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생명과 의도 동시에 주어 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준 생명과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동시에완성 되었는데, 그 전의 아브라함의 생명과 의는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 인정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이 순서가 있다면 하나님의 시간의 흐름은 사람이 정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로 의와 생명은 태초부터
@csc6970 게휙하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담보로 존재 했을것입니다. 이를 말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와 생명은 하나라도 존재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희문 희문님의 평안한 답변 존중 합니다.
^^.
저도 지식이 없는터라 생각나는 성경구절 말씀을 토대로 적은 것입니다. 보증에 대한 구절도 바울 서신서에 나온걸로 압니다.
자꾸 수정해서 죄송합니다.
@csc6970 희문님 저의 답변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님의 수고로운 답변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것입니다. 답을 제시 한것이 아니고 그냥 저의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저는 30년 평신도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