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미스터리
세종 왕위책봉
- 이 수 광 -
양녕대군 李 禔 묘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불리는 군주는 세종대왕. 한글을 창제했을 뿐 아니라 대마도를 정벌하고 6진을 개척했는가 하면 박연 등을 발탁하여 예술발전에 기여했고 천민출신인 장영실을 발탁해 과학발전을 이룬 임금이다. 그러나 세종은 본래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는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세종과 양녕대군은 은밀하게 권력투쟁을 벌였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 형제는 양녕대군을 지지하여 전제론 하나의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버려야 한다는 주장. 양녕대군 외에 다른 왕자를 죽여야 한다는 뜻 을 내세웠다. 이들은 태종의 다른 아들을 추방하려는 공작을 했고 충녕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택현론어진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세종을 지지했다.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은 어리於里라는 아름다운 유부녀와의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결정적인 원인은 충녕대군 세종의 밀고였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고 부인은 심은의 딸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책을 좋아해 《대학》을 수십 번 읽었을 뿐 아니라 왕실 서고의 책들까지 섭렵한 학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양녕대군은 아버지 이방원을 닮아 다혈질이고 호방한 성격이었다. 이방원이 두 번째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 보위에 오르자 그의 장남인 양녕이 자연스레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빈 김씨는 태종과 공부를 같이하여 동방同榜이라고 불리는 김한로의 딸이었다. 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으나 제왕학을 익혀 통치술이나 국가경영을 배우는 것보다 활쏘기와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유흥을 즐겨 제왕의 도 익히기를 게을리 하였다.
세자는 단순한 왕자가 아니라 왕위 계승권자이기 때문에 그런 세자가 학문을 등한시하고 유흥에 몰두하자 태종은 근심했다. 태종이 여러 차례 경고했으나 양녕대군은 기어이 ‘어리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리는 전 중추 곽선의 첩으로 한양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었다. 양녕대군도 어리가 조선 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나 그녀가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장안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가마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어리를 보았다. 양녕대군은 어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었다.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으나 그가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뒤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했으나 그 집에서 숨기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강요했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나 한 번 보았어도 미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집 사람더러 말을 대령하여 태우라고 했으나 그 집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태우고 나는 걸어서 가겠다”고 했더니 그 집 사람이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그래서 나는 어리의 옷소매를 끌어 말을 타게 하니 어리가 말하기를 “비록 나를 붙들어 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탈 작정이다”하고 곧 말을 탔다.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 같이 모여 구경하였다. 그날 밤에 광통교에 있는 오막집에 와서 자고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왔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조선왕조실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양녕대군이 자신의 둘째 동생인 충녕대군, 뒷날의 세종에게 고백한 부분이다. 양녕대군은 곽선의 첩 어리와 광통교 근처의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대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양녕대군의 어리에 대한 사랑은 무섭게 타올랐다. 대궐에 데려다 놓고 매일같이 정을 통하니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어리가 기어이 임신해 아이를 낳자 태종까지 알게 되었다. 태종은 노발대발하여 세자와 함께 어리를 강탈한 하인들까지 모두 검거했다.
“세자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실상 신등이 능히 바르게 교도하지 못한 탓입니다. 신등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이런 무리를 대의로 처단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대신들은 세자인 양녕대군을 처벌할 수 없어 그 수하들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경등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도 능히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등이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옛날에 이윤은나라의 충신은 신하이나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유배를 보낸 장소에 거처하게 하여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게 하였으니 태갑은 능히 고친 자라 하겠지만 세자는 고치지 못한 자라 하겠다.” 이렇듯 태종이 양녕대군을 비난했다.
“세자께서는 천자天資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고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같은 무리를 제거하신다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할 것입니다.” 양녕대군의 스승인 변개량이 아뢰었다. 그러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세자를 가르치는 빈객인 이래는 양녕대군의 잘못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폐위하면 안 된다고 눈물을 흘렸다. 실록에는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려 말씨가 간절하니 민여익 변계량과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여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자는 반성하고 어리는 대궐에서 추방하라.” 태종은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녕대군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어리는 추방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여전히 어리를 잊지 못했다. 양녕대군의 부인 김씨는 양녕대군이 어리를 잊지 못해 침식을 거르자 친정어머니와 상의하여 어리를 다시 대궐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풍류를 좋아하고 방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양녕대군은 필체가 뛰어나기로 유명한데 2008년 화재로 불에 탄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손수 쓰기도 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필적을 보면 당대의 어떤 인물 못지않게 필법이 뛰어나나다. 다음은 양녕대군의 시다.
산허리 도는 안개 아침 짓는 연기인가 / 넝쿨 사이 걸린 달은 밤 밝히는 등불이네 / 나 홀로 고적한 암자에서 자고나니 / 탑 하나 저만치 홀로 서있네
양녕대군 폐세자 문제는 태종의 본처인 원경왕후에게서 낳은 네 아들 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이 치열하게 왕세자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열되었다. 양녕대군의 외숙부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세자인 양녕대군을 둘러싸고 그 아우들이 권력투쟁을 벌이자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은밀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 소문이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대로하게 되었다. “경진년에 효령과 충년이 나이 겨우 다섯 살과 네 상이었는데 네가 이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작은 왕자가 또한 장長 왕위 계승권을 다투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고 또 병술년에 이르러서도 이 두 자식을 가지고 말을 하였는데 언사가 심히 불쾌하였다. 만일 내가 이 말을 누설하였다면 네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태종은 민무구를 무섭게 질책했다. 태종의 말에 따르면 민무구가 효령과 충녕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고 이는 효령과 충녕을 둘러싼 무리가 세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양녕대군이 아우들을 모두 죽이려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의 자식은 오직 맏아들마누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죽여야 하느냐?” 태종은 이천우 김한로 이응 황희 조용 김과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대신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태종은 왕세자 양녕대군을 따르는 무리가 작은 아들들을 죽일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국 민무구 형제는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양녕대군이 어리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인 일이 태종에게 알려져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한경漢京 이 무렵 태종은 개성에 있었고 세자는 한양에 있었다 에 가서 세자빈을 그 아비 집으로 내보내라. 다만 노비를 주어서 보내라. 그 맏딸과 맏아들은 은혜를 베풀어 전殿에 머물게 하여 옛날대로 공급하라. 막내딸은 그 어미를 따라가 거주하게 하고 또 그 첩의 딸들로 하여금 숙빈을 따라가 같이 거주하게 하라.” 태종이 조말생에게 영을 내렸다. 세자빈 김씨를 동궁에서 내쫓은 것이다. 말 그대로 억울하게 축출된 셈이다. 세자의 아들과 딸도 모두 대궐에서 내쫓겼다. 태종의 친구이자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인 김한로까지 귀양을 보냈다. 태종은 자신의 큰아들이자 왕세자인 양녕대군을 내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했다. 양녕대군이 개성에 와서 알현을 청해도 만나주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실망하여 대궐에서 나오다가 충녕대군과 맞닥뜨렸다.
어리의 일은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형인 양녕은 동생 충녕대군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충녕대군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태종에게 반발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거세게 반발했다.
전하의 시녀는 다 중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신의 여러 첩 어리와 숙빈을 내보내니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고 있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처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광廣이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나중에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조선왕조실록》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반성문을 올렸으니 내용인즉 아버지는 첩을 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자신의 첩은 쫓아내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고조 유방의 예까지 들면서 웃날 자신도 성군이 될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이를 본 태종은 대로했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망령된 일이다.”
태종이 분노하자 대신들은 더 이상 양녕대군을 구할 수 없었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폐만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ㅜ써서 두 장이나 늘어놓아 심히 무례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의 복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조목조목 하는 일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와 언어의 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때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충녕은 비록 술은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조선왕조실록》
태종이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며 내린 교지인데 둘째인 효령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야 했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어 결국 셋째인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고 세종대왕이 된 것이다. 세기의 로맨스로 조선을 뒤흔들었던 양녕대군과 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양녕대군은 풍류남아로 한평생을 보내다가 죽고 어리는 자살했다. 폐위되어 대궐에서 추방되자 양녕대군은 극심한 혼란을 느껴 방황했던 듯하다. 태종 이방원이 광주에 거처하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어느 날 밤 돌연 행방불명이 되어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뒤에 거지꼴로 한양에 나타나 정신적으로 방황했음을 보여줬다.
상왕은 이배와 김경에게 임소로 돌아가서 양녕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양녕이 달아남에 있어 상하가 다 그 허물을 애첩 어리에게 돌리니 어리는 근심스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날 밤에 목을 매어 죽었다.《조선왕조실록》
양녕대군은 왕세자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비교적 오래 살았다. 세종은 자신의 두 형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역대 어느 임금보다 형제들을 잘 돌보았다. 세종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양녕대군과의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형의 방탕한 행동을 밀고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孝寧大君
조선 태종의 2남. 불교에 독실하여 수많은 儒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僧徒를 모아 불경을 강론하도록 했으며 원각사를 창건하게 되자 조성도감 제조가 되어 役事를 친히 감독했고《원각경》을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출생-사망 1396~1486 활동분야 문학
이름 補. 초명 祜. 자 善叔. 시호 靖孝.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元敬王后 閔氏.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이며 6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태종을 따라 항상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형인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하였다. 충녕과는 우애가 깊었고 세종이 자기 집에 들르게 되면 밤이 깊도록 국사에 대해 의논했다고 전한다. 특히 불교에 독실하여 수많은 儒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僧徒를 모아 佛經을 강론하도록 했다.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했고 1464년(세조 10) 圓覺寺를 창건하게 되자 造成都監提調가 되어 役事를 친히 감독했고《圓覺經》을 國譯하여 간행하였다. 문장에도 능하였다. 성격이 원만하여 친족들과 우애가 깊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거치면서 91세까지 장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