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의성 고운사를 가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추워지면 찾아가기 쉬운 절에 가야하리라. 찾아갈 절집을 정하지 못하였는데, 영남문화회에서 연락이 있다. 이번 일요일은 의성의 고운사를 답사지로 정했다고 하였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운사는 꼭 찾아가야 하는 절로 선정해둔 절이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찾아가기가 여간 불편한 곳이 아니었다. 고운사로 간다니 더 이상 반가울수가 있겠는가.
영남문화회는 답사를 위한 문화모임이다. 대학에서 퇴임하신 교수님이 많이 계셔서 답사에 참여해보면 배울 것이 많았다. 김두희 교수님도 말해야겠다. 대학의 은사님이시지만, 직계 스승님은 아니다. 선생님이 회장을 하실 때 총무로 모신 일이 있었다. 이후로는 선생님이 관여하는 모임에는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여서, 영남문화회에도 들어왔다. 답사를 많이 다니는 모임이어서 나로서는 더 좋을 수 없는 단체였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거의 3년 가까이 답사를 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원로님들이 많이 타계하시어서 멀어지고 있던 참이라서 더 반가웠다.
답사일의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고 하니 옷을 두텁게 입고 오라는 안내 연락이 또 왔다. 집사람과 함께 버스 출발지에 가서 오래 만나지 못하였던 회원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낯선 분도 있었고, 알고 있는 분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 많이 내린 것 같다. 나보다 원로님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여행이 불편한 나이가 되셨다고 하였다.
오늘의 답사지는 고운사 외에도 대표적인 양반 마을 사촌과 금성면의 탑리 석탑, 조문국 고분군과 박물관 등등 여러 곳이다. 예전에 모두 찾아갔던 곳이다.
고운사도 두 어 번 찾아갔던 절이다.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 매우 한촌인 곳이고, 절도 매우 낡은 모습이었다. 골짜기의 길도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로 기억된다. 길가의 동네도 낮은 지붕의 초가여서, 그때에도 무척 구석진 곳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28인승의 리무진 버스를 타고, 그 길을 달리지만, 길도, 길가의 집도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포장이 잘 된 길과, 새로 지은 듯한 농가들이 발전된 오늘의 우리나라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절로 들어가는 골짜기의 입구 마을이 조선 말의 대유학자 대산 이상정 생가라는 안내판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보인다.
절의 입구에는 최치원 문학관이 있어서 의아했다. 어쨌거나 안내를 맡은 박선생은 최치원과 인연으로 절 이름도 호인 ‘고운’을 따사 고운사라고 하였다니, 인연이 있음은 분며애 보인다. 하기야 고운 선생의 말년은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면서, 곳곳에 전설을 만들어 두신 분이니이 절도 선생의 발길이 머물렀으리라.
신라 말의 도승 도선스님이 석탑과 약사여래불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오나 정말 전해오는 말 뿐이니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안내하는 박선생은 의성이 고향이다. 의성의 자랑이 대단하다. 고운사는 안동, 의성 지역에 있는 54개의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16본사 사찰이라고 하였다. 영주의 부석사와 안동의 봉정사도 말사라고 하여 놀랐다.
고운사는 안동군 일직면과 거의 경계지역인 의성군의 단촌면 구계리의 등운산 자락에 있는 절이다. 안동-의성이라면 유가를 숭상하는 양반네들이 수두룩한 지방이다. 조선시대 유가들이 불교를 억압하고 절을 핍박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견디지 못한 절은 스님이 떠나고 폐사가 되었다. 양반 고을에 터잡은 고운사는 더 심한 고초를 받았으리라.
절은 살아님기 위해서 왕실과 연을 닿으려 노력했다. 마침 영조의 어첩을 보관하는 중책을 맡았다. 영조의 어첩을 보관하는 ‘연수전’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고운사에 들리면 일반적인 사찰 건물 양식과는 다른 건물이 한 채 누에 뜨인다. 연수전이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연수전을 건립했다. 어첩(기로소에 보관하는 문서로 왕의 생년월일, 아호, 어명 등 왕의 개인기록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을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연수전은 솟을 대문 삼문 양식인 정문 만세문과, 사방에 담을 둘러 절의 다른 구역과 구분하였다. 돌 석축 위에 정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영조 어첩을 보관하고 있는 이 절을 누가 감히 건드리겠는가. 조선시대는 연수전 덕택에 지방 관리들도 이 절을 우대하고, 이 지역의 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유명 사찰을 제쳐두고 종무일을 보는 사살이 되었다.
그런데, 연수전 뜰에서 팔작 건물을 관람하면서, 건물을 살펴뵤니 건물의 나무들이 썩어문드린 체 그대로여서 볼품이 사나웠다. 번듯한 절집 건물들과 대비가 되었다. 세월무상이라고 해야할까. 영원한 영화는 없다는 가르밈일까.
석조여래좌상은 1963년에 보물로 지정하여 약사전에 모셔두었다. 약사여래불이라고 해야겠다. 마침 스님이 서서 목탁을 두드리면서 독경하고 있다. 나도 두손을 모우고 복을 주십사 하고 빌었다. 불상의 모습이 항마촉지인 인데 왜 약사불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통불교 시대를 거쳐서 부처님의 수인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니, 아는 척 하지 말고 소원만 빌자.
요사체의 툇마루에 앉으니 법당 지붕 너머로 등운산의 산능선이 완만한 곡선을 짓고 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래서 수양하는 학승들이 이 마루에서 등운산 마루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였다. 나도 툇마루에 앉아서 지붕 너머 산능선을 바라보았다. 정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주문을 지나 산길을 오르다보면 절의 전경이 나타난다. 그 중에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개울 위를 가로질러 세운 우화루(羽花樓)이다. 경관이 뻬어났을텐데, 뒤에 계곡을 메우고 종루를 지으면서 풍광을 흐려놓았다. 가운이나, 우화는 도교 용어이다. 그러나 우화루의 안에는 불교 용어인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雨花는 꽃비라는 뜻으로,하늘에서 천녀들이 부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꽃비를 내린다는 경전을 나타낸 것이다.
108사 답사계획을 세우고 절집을 찾고 있다. 절이라면 오랜 세월을 연상하지만, 요즘의 답사에서는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 그저께 건립한 절이 아니냐 싶을 정도로 산뜻하고 깨끗하다. 절이라고 하여 우중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 미진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고운사는 그럴 정도로 손 본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방문 때를 생각하면 많이 바뀌어져 있다.
이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인 사촌마을도 들렸고, 탑리 석탑도 보았고, 조문국 박물관도 들렸다.
절집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지만 조문국 박물관 방문 이야기는 조금 하기로 하자.
고분군을 발굴하신 이명식 교수가 동행했고, 고분발굴을 하신 우리나라 분묘학의 대가인 영남대 김용성 교수가 박물관의 소장 유물을 안내해 주었으므로 여기에 적으려 한다. \
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김용성 교수가 고분의 특성와 발굴 유물의 특징을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40대로 보이는 여직원이 나와서 시끄러우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3층의 문화해설사에게 가서 설명을 들으라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이명식 교수와 김용성 교수는 아무 말도 않고 예, 예, 라고만 한다. 우리는 뒤에서 어, 어, 소리를 냈다. 문화해설사에게 설명을 요청하라는 말이 어이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의미로 새겼다.
이 고분군을 직접 발굴하신 교수님과 고분의 대가이신 교수님이 해설사에게 부탁하라는 주의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그런데도 공손하게 예, 예 라고 하는 것이 낳선 풍경으로 보았다. 세상을 살면서 손톱보다도 작은 지식으로, 감투로, 권세로, 등등의 이유로 내노라 하는 사람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못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순간만은 나도 그래야지, 겸손해야지 하는 다집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