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쓴 <문화재를 품은 아름다운 사찰 108> 불국사 편의 삼행시를 먼저 소개한다.
불교로 온나라 극락정토 꾸미려
국가가 앞장서서 불심을 펼친나라
사부중 한마음으로 꿈을 이룬 신라여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문지회가 받은 답사날이니 우천불구일 수밖에. 버스 2대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가까운 곳이라 발걸음이 닿은 분이 많은가보다. 오늘 초행인 분은 딱 한분밖에 없는 걸로 봐서 욕심이 아니었나 보다.
오늘 일정은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 탄생지 용담정, 국립경주박물관, 교동쌈밥(17000원), 불국사 순이다. 가랑비에 옷젖는다지만 별 문제가 없는 촉촉한 날이라 답사에 별다른 지장은 없어 다행이었다. 용담정과 박물관 답사기는 따로 올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불국사만 올립니다.
고찰을 인정해 주는 것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럴싸한 창건 설화가 뒷받침해 주면 더욱 관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문지회에서 찾은 불국사도 아름다운 창건설화가 있고, 절 이름에 대놓고 부처님 나라임을 표방하고 있어 깊은 호기심으로 살펴보게 된다.
삼국유사에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에 불국사 창건자 김대성이 두 부모를 위해 효도를 다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신문왕(재위 681∼692) 때 모량리의 가난한 집 아들 김대성이 품팔이를 하고 있었는데 점개라는 흥륜사 스님이, ‘시주를 하면 1만 배의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조그만 밭을 보시하자고 어머니에게 권했고 이를 따랐다. 얼마 후 김대성이 죽었고, 그날 밤 김문량 재상집에 하늘에서 ‘모량리의 대성이 곧 네 아이로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대성은 전생의 부모도 모셔와 함께 살게 되었고, 불심이 깊어진 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김대성이 있기 전 효자 김대성이 먼저였던 셈이다.
경주 불국사 외에도 서울 강남, 양주, 김포 등 6곳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으나 경주 불국사와는 전혀 다른 절이며, 같은 이름의 절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누군가가 제재하여야 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1.불국사 내력
불국사 창건은 법흥왕 15(528) 때이고, 진흥왕 때(574) 중수했고, 문무왕(670) 때 무설전을 지어 화엄경을 강의했으며, 경덕왕 10(751)년부터 김대성이 크게 중창하여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등을 준공하였다. 임란 때 2000여 칸에 이르는 불국사 절집이 왜병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다. 임란 후 일부가 복원되었고, 1970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불국사의 위치와 위상
신라 5악 중 동악(東嶽)인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것은 그만큼 불국사의 위상을 생각한 것이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중심에 건립한 것도 역대 왕실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절에 국보7점(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고, 금동아미타불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 석가탑에서 발굴한 사리자엄구)과 보물5점(사리탑, 석조, 대웅전, 가구식석축, 영산회상도)이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인 곳이다.
3.왜 불국사일까
불심이 깊었던 신라인들은 위로 임금을 비롯하여 문무대신들과 미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으로 오직 부처님만을 공경하고 의지했으며, 임금이 계신 곳이 곧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동일시했다. 부처님 나라다운 절을 짓는 게 소원이었을 것이다.
얕은 경사지에 대석단을 쌓아 평지로 만들고, 구품연지(九品蓮池) 위의 33계단(33천 의미)으로 된 백운교(아래,18단), 청운교(위, 15단)를 올라 자줏빛 노을 그윽한 자하문(紫霞門)을 들어서면 사방 회랑(回廊)으로 감싼 부처님 나라가 전개된다. 숱한 절을 답사했지만 회랑을 둔 곳은 기억에 없다. 부처님 나라를 꾸리면서 궁궐을 생각했던 것이다. 금당(대웅전), 다보탑, 석가탑, 석등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불국토이다. 대웅전(보물)의 석가모니불은 문화재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왼손은 선정인, 오른손은 아미타불의 9품을 연상하는 수인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다보탑을 볼 때마다 탑 돌 위의 앙증맞은 사자상은 하나만 남았고 셋은 흔적조차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 탑은 국내 유일한데 층수를 알 수 없지만 묵직한 바윗돌을, 빚은 이의 뜻대로 너무도 정교‧섬세하게 만들어 다보여래의 존재를 확인해 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 따르면 “불국사 석축은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다. 그 정상이 수미산인데 범영루(泛影樓)가 이를 의미한다. 누각에 108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자하문에서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 범영루를 지나면 또 다른 계단인 연화교(아래, 9단), 칠보교(위, 7단)를 만나고 이어서 안양문이다.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이 문을 통과하면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을 모신 극락전이다. 여기도 회랑으로 장엄하였고, 극락전에서 대웅전을 가려면 16계단 3열로 된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48은 아미타여래 48원을 표현한 것이다. 대웅전 뒤 불국사에서 가장 큰 집 32칸의 맞배지붕 무설당이 있다. 지금도 뭇 신도들이 모여앉아 스님의 설법을 듣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 뒤로 사모지붕의 아담한 전각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그 옆에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을 모신 비로전이 있다. 비록 비로자나불 수인이 일반적인 표현과는 반대로 왼손이 위로 올라 있어 의아한 느낌이 들지만.
4.대석단
부석사 대석단 만큼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남쪽과 서쪽 사면을 축대로 쌓아 절터를 평면으로 만들었고, 가로와 세로로 중심이 되는 긴 돌로 틀을 짜고 그 안에 작은 돌을 채운 서쪽 사면의 축성방법은 그 유례가 드물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그랭이 법(윗돌을 밑돌에 맞춰 깎음)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니 다시 한번 눈길이 간다.
물론 이 가구식석축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국보로 승격해도 충분할 것 같다. 앞면 석축은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를 끼고 있고, 그 위에 자하문, 범영루, 안양문 등을 건립하여 외관상 아름답기 한이 없다.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불국사 사진의 핵심을 이룬다. 아쉬운 것은 1970년대 복원 공사 시 관람객 편의를 위해 구품연지를 조성하지 않았다는 점, 국보인 쳥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의 보호 차원에서 통행금지 시켰다는 점이다. 1년에 단 하루라도 통행을 허락하소서.
마무리하며
우리나라 사람치고 불국사를 한 번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재학 시 단체로 우~몰려 다니며 본 추억을 되새겨 보면 그건 남는 게 없는 낭비에 불과하다. 성인이 되어 역시 단체로 찾았다해도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제대로 공부하려고 작정하고 해설서를 읽고 해설자를 동반하여 제대로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 문화해설사가 되기 위해 전문 해설사를 동반해 공부힌 일이 있지만 세월이 흐르니 다 잊고 만다. 이번 답사는 불국사 공부를 주목적으로 해 계획했지만 이동거리가 짧아 관광버스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고, 다른 관광지도 있기에 집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체로 왔으니 수박겉 핥기가 될가 두렵다. 나름대로 책(신영훈의 불국사,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주수완의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등을 읽고 책에 실린 사진을 찍어 올리고, 내가 직접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완하여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역시 부족함을 자책한다. 당연히 이번 불국사 답사가 마지막이 아니기를 기원하며.
<불국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 찰칵>
<불국사 절집 배치도>
<일주문>
<잘 생긴 반송 한그루>
<불국사 바로 앞 연지, 그 아름다움에 취하다>
<몇 걸음 더 와 돌아본 연지>
<천왕문>
<향해서 오른쪽, 왼쪽부터 지국천왕-비파,동쪽 수호, 증장천왕-킬, 남쪽 수호.>
<향해서 왼쪽, 광목천왕-용과 여의주(여기서는 보이지 않음), 서쪽 수호.
다문천왕-삼지창과 보탑, 북쪽 수호>
<청운교(위), 백운교(아래)를 올라 자하문을 통과하면 대웅전이다>
<좌경루, 경전을 수장하던 곳인데 지금은 목어와 운판을 설치하다>
<범영루, 수미산을 상징하고 만든 누각, 108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란다. 지금은 법고가 있으며, 당초 이름은 우경루로서 경전을 보관했었다>
<연화교(아래)와 칠보교(위)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이다, 연화교답게 커다란 연꽃문양이 선명하지만 칠보교에는 없다.>
<경주의 지킴이단체 구품연지 황삼동 회장님이 해설을 멋지게 해 주셨다. 같은 단체 사무국장님도 일부 회원에게 해설을 주셨는데 대단히 고맙습니다. 궂은 날인데도>
<극락전에서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한줄이 16계단이며 석줄이니 48계단이 되고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한다>
<불국사 전각배치도>
<관음전, 사모지붕>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과 창살>
<극락전, 팔작지붕>
<나한전, 맞배지붕>
<극락전 주불,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
<극락전 복돼지, 현판 뒤에>
<대웅전, 5×5이며 매우 큰 건물이다. 보물>
<목각(木刻)의 석가모니불상 좌우에는 목각의 미륵보살(彌勒菩薩)상과 갈라보살(羯羅菩薩)상이 협시(脇侍)하고 있고, 그 좌우에는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弟子像)이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미래의 부처이며, 갈라보살(羯羅菩薩)은 과거의 부처이다. 이는 과거.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부처님이 불국사라고 하는 부처 세계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상(釋迦像)과 두 보살상(彌勒菩薩 . 羯羅菩薩) 그리고 두 제자상(像)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복장기(腹藏記)에 의하면 이 5구(五軀)의 상(像)은 681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대웅전이 소실(燒失)되었을 때, 함께 불에 탓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다섯 구의 상은 1659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730년과 1769년에 각각 도금(鍍金)을 하였다. 대웅전은 681년 4월 8일 낙성(落成)되었으며1436년-1470년 . 1564년에 중건하였고, 1765년에 중창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쌓은 기단 위에 정면5칸, 측면 5칸에 다포계(多包系)의 팔작(八作)지붕 건물이며, 내고주(內高柱)와 뒷면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여 벽화(壁畵)를 그렸다. 조선 후기 불전(佛殿) 건축의 대표적 건물이다.>
<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靈山會上圖 四天王 壁畵(보물 제1797호)>
무설전(無說殿) 경론(經論)을 강술(講述)하는 강당, 말로써 경론을 강술하는 곳 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라고하는 수단으로써는 도달 할 수없는 언어도단 (言語道斷)의 경지임을 표현한 것이다. 670 년 개창(開創)되자 중국에서 돌아온 의상(義湘) 대사가 최초로 강론을 하였다.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48년과 1708년에 중건하여 1910년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그 뒤 허물어 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유지(遺址)의 기단 위에 옛 크기대로 32 칸으로 지은 맞배집이다. |
<무설전 영산회상도 및 교각지장보살상>
<무설전에 보존한 감은사서석탑사리>
<역시 무설전에 설치함>
<역시 무설전에서 볼 수 있음>
범영루(泛影樓) 범영루는 750 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12 년과 1688 년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 년 불국사 복원 때 정면 1 칸, 측면 2 칸, 3 층의 옛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이다. 범영루에 지금은 법고(法鼓)가 매달려 있으나 원래는 범종각(梵鐘閣)으로써 범영루는 범종각의 이름이다. 누각의 모양을 하였으므로 루(樓)라 하였고 범영(泛影)은 범종의 소리를 그림자에 비유하여 범종의 소리가 온 누리에 번져서 넘치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최초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한다. 이는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팔각(八角)정상에 108 명이 앉을 수 있도록 누를 짓고 아래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설계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정상은 욕계(欲界)33 천의 위이다. 108 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번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미범종각이라는 이름은 소리가 33 천의 온 세상에 울려 퍼져 인간의 모든 번뇌를 씻어 없애주는 것을 뜻한다. |
<조선시대 말기 폐사가 된 불국사, 사진 나무위키>
<일제 강점기 임시 복원된 불국사, 사진 나무위키>
<1970년대에 복원한 불국사, 사진 나무위키>
<범종각>
<불국강원>
<불국사 박물관, 우진각 지붕, 불국사에서 4종류의 한옥지붕을 볼 수 있다>
<불국사 박물관 입구의 탑>
<박물관 입구 조형물>
<박물관 건물, 우진각임을 알 수 있다.틈이 없어 내부 관람을 하지 못함>
<불국선원>
<불이문, 서쪽에 새로 낸 문이다>
<비로전, 751년경 18칸으로 건립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탄 것을 1660년에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웠다. 건축 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
비로자나부처(毘盧舍那佛)님은 화엄세계(華嚴世界)의 본존불(本尊佛)로서 부처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밝고 광대무변함을 상징한다.
이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 제 26 호로 8 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77cm이다. 원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로전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손 모양이 좌우가 바뀜. 비로전 현판>
<아사달의 무영탑(석가탑)이 완공되면 이곳 영지에 그 그림자가 비칠 것을 믿고 아사녀는 무작적 기다렸으나 끝내 무영이라 지친 나머지 영지에 빠져 죽었고, 나중에 이를 안 아사달이 아사녀를 위해 위 불상을 만들어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지는 불상, 영지 부근에 있다고 한다>
<마치 석등처럼 생겼지만 사리탑(보물)이다. 유홍준 교수 책에는 광학부도로 소개하고 있다. 비로전 서쪽에 위치. 높이-2.06m, 1905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어 도쿄 우에노공원 지역의 한 요릿집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다시 행방불명되었다가 1933년 불국사로 반환되었다. 국보급 보물이 아닐까>
<사리탑 각면의 조각들, 두 불상과 두 보살상을 세김>
<연화교에 새긴 연꽃무늬. 칠보교에는 무늬의 흔적을 볼 수 없다>
<쉴참과 연화교가 이어지는 부분, 완벽하게 결구되다>
<극락전 서편의 석단>
<그랭이 기법 적용하다.노란색 표시, 밑돌에 맞춰 윗돌을 깎아 맞춤. 해설사에게 정확한 위치를 물었지만 알지 못해 아쉽다. 앞쪽 대석단에 있다는데?>
<다리 쉴참과 그 아래는 홍예>
<속틀 홍예는 크기가 같은 홍예돌로 아치를 쌓아 올려 무지개 형상을 하고 정상부에 크기가 조금 다른 홍예 종석을 꽂아 마감하다>
<겉틀 홍예의 홍예 종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이다. 수평의 쉴참은 처마곡선이 휘어 올라간 얇은 눈썹 지붕을 얹어 날렵하고 경쾌한 맛을 살렸다, 상단 우측>
<자하문의 돌난간, 석재들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다>
<아사달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석가탑, 1966냔 수리 해체 시 금동제사리장엄구, 은제 사리 내외합, 금동방형사리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이 나와 국보로 지정되었다 >
<다보탑, 사자 한 마리만이 외롭게 탑을 지키고 있다.한 마리는 대영박물관에 있단다. 192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했으나 기록이 없고, 탑속의 사리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에 있는 석등. 석등 앞의 네모진 판석은 봉로대(奉爐臺)>
|
첫댓글 불국사의 문화재적 가치와 중요성 자세하게 탑재 하셨네요.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고 많았고요 !
佛國淨土의 大伽藍 佛國寺 경내를 소상하게 잘 설명하셨습니다,
연하여
부처님 오신날이 4월 초팔일이 곧 당도 하겠습니다,
올해는
코로나로 막혔던 3년간을 잘 견더온 고마움에 석가탄일을 기하여 사찰을 찾아 合掌奉祝 코져 마음을 가져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국사 몇차례 갔지만 그냥 수박 곁핥기식으로 보았습니다.
요번 기회에 명예회장님께서 상세하게 설명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쫓아서 불국사를 더 다녔던,
아!! 옛날의 어린 시절이여!!
사천왕이 무서워서 정직하게 자라야겠다고 생각했던,,
아!! 옛날의 어린 시절이여!!
중학교 시절 '유흥준의 문화답사기를 읽고..
문화재를 알게 된 그 때가 - 귀한 시간 이였고,
.....................
넘 수고가 많으신 이미선 - 산토끼 님!!
감사합니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
엄청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