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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장터와 연결된 런던 스퀘어는 붕붕 벌집을 방불케 했다. 통제 불능으로 요리조리 왔다 갔다 마차와 보행자가 왕래했다. 엘러릭은 필요 없다 거절했으나 마부가 한사코 시내까지라도 데려다 드리겠다 우겨 레베카와의 장거리 산보는 무산되었다. 후작은 입을 일자로 닫고 마차의 창밖을 보고 있었다. 레베카는 억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그를 심려 있게 쳐다보았다.
"정각 6시에 오겠습니다. 조금이라도 편찮으시면 사진사를 통해 편지를 보내십쇼. 근처 어딘가에 전문의(specialist) 병원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만일을 위해 셀튼 씨(베드로 후작 주치의)에게도 연통을 넣어 두겠습니다."
마부는 눈곱만큼이라도 속이 또 안 좋으면 꼭 연락하라 당부하고 떠났다. 시내 입구에 내린 후작은 사진관이 시내 언저리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짧게라도 그녀와 조용히 거닐고 싶었다. 사고친 아이가 사과하듯 그녀의 손을 헐겁게 잡았다. 극락과 지옥이 충돌했다. 또다시 속 뒤집어질까, 몸 흥분할까 조마조마하며 다소 우울한 눈을 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어. 놀랐나?"
"심장 마비 걸릴 뻔 했어요."
"그래?"
"웃지 말아요, 진심이니까."
"자주 아파야겠군. 당신은 걱정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워."
"아프면 나와 이렇게 걷지도 못할 탠데요?"
레베카는 후작에게 팔짱을 꼈다. 그는 움찔했으나 불평하지 않았다. 행인들이 지나가며 각기 최소한 두 번이나 할긋거렸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가는 건가요?"
"사진관. 당신 사진 찍으러."
"사진? 갑자기 왜죠?"
"한 시라도 당신을 안 보면 보고 싶으니까. 주머니에 넣고 틈틈이 보려고."
"사진은 비싼데… 화가한테 초상화 그려 달라고 하지 그래요?"
후작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예술은 아름다워 감상할 뿐 의미를 두어선 안 돼. L'art pour l'art."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누구보다 눈부시지만 캔버스에 담기엔 당신 자체가 너무 소중하거든."
그녀가 미소 지었다. 가을 오후 햇살 같은. 그는 고개를 숙였다. 목이 메였다.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이 아팠다.
"초상화 그리는 동안 서있으려면 다리도 아프고 성가셔. 비용은 내가 부담할 태니 걱정 마."
"돈 아까운 줄 모르네요."
"쓰라고 있는 돈이야. 악착 같이 저축해봤자 죽으면 다 소용없어. 쓸 수 있을 때 써야 여한이 없지."
"기부도 하는 게 어때요?"
"또 그 소리야?"
"공장 다니는 어린 아이들 보면 안타까우니까요. 한창 뛰어 놀 나이에 밤낮으로 노동하니까.."
"우리 잘못 아냐. 지 자식들 일 시키는 부모들이 글러먹은 거지. 상류층이 책임질 이유는 없어. 기부해봤자 서민들도 술 사먹고 도박하고 금새 탕진할 탠데, 엄한 돈 낭비할 바에 차라리 당신 새 드레스나 사주겠어."
"부정적이네요."
"현실이야. 당신도 아니라고는 말 못 하잖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인하고 바꾸고 싶어하는 게 인간이에요. 인류가 발전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백날 구슬려 봤자 난 기부하는 일 없을 거야. 이익 없는 투자 안 해."
"결과가 어떻든 어떠한 노력도 헛되지 않아요.”
"그럼 천재는 왜 있고 승패는 왜 있지? 빈부 격차는? 모든 노력이 값지단 사상은 궤변이야."
"궤변이래도 난 믿을 거에요. 안 그럼 삶이… 너무 슬프지 않나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거짓은 믿을 수 없다. 좌절 속에 사는 한이 있더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미사여구로 꾸며낸 환상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난국과 맞설 수 없다면 포기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현실은 회피할수록 잔인해진다. 외부의 인물에게 의존하여 현실을 도피하는 것, 그가 종교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베드로 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 이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잭 볼튼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잭은 황송해하며 후작과 악수했다. 투박한 잭의 귀수와 천지 차이 나는 보드라운 손이었다. 남자의 손이란 게 놀라웠다. 이게 서민과 귀족의 차이라는 건가 보다.
"두 분이 함께 찍으실 겁니까?"
"아니, 여기 이 레이디만. 독사진으로 부탁하네."
"네. 아가씨, 부디 저 의자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조명이 레베카를 비추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다소곳이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후작은 애틋함과 승리감을 느끼며 입가에 곡선을 머금었다.
잭은 각도가 잡히자 사진기의 그라운드 글래스 프레임(ground glass frame)을 빼고 건판보지기(plate holder)를 껴 넣었다. 습판 슬라이딩 박스 카메라였기에 양해를 구한 뒤 커튼을 치고 조명을 껐다. 어둠이 찾아오자 그는 화학 제품으로 유리 감광판을 소독했다. 흠뻑 젖은 습판을 받침용 용기에 넣었다. 그리고 용기를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 모양 카메라 안에 넣었다. 조명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진관 안을 다시 밝혔다. 잭은 후부 그라운드 글래스 스크린을 보며 렌즈 랙(rack)과 피니언(pinion)을 이용해 파인 포커스를 조성했다. 레베카의 전신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찍겠습니다. Three Two One-"
-펑-
"한번 더 가겠습니다.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네, 그대로. Three Two One-"
-펑-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찍게 되다니. 잭은 감격과 경외에 젖었다. 신나게 어깨가 들썩거렸다.
"숙녀 분께서 참 아름다우셔요. 아프로디테도 질투하겠습니다."
"칭찬 고마워요."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 강림한 것 같다. 저 입술하며 굴곡하며… 벌레 들어가라 입 벌린 잭은 침을 꼴깍 삼켰다. 레베카는 익숙하게 도외시했으나 엘러릭은 발기발기 찢어 죽일 듯 잭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어찌나 살벌한지 잭의 머리에 구멍이 뻥 관통될 것 같았다. 천한 서민 놈 주제에 감히 누굴 넘보는 건가. 그도 안지 못한 그녀를 제까짓 게. 빠득, 이가 갈렸다. 레베카는 연인의 질투에 설핏 웃었다. 그는 자동적으로 화답하고 무시무시한 살기를 방출하며 잭에게 말했다.
"이왕 찍는 거 기념으로 한 장 같이 찍지."
"네?"
"맘이 바뀌었소."
"아… 네… 조명 앞에 서시지요."
후작은 잭에게 가볍게 미소했으나 그 모습이 묘하게 살인적이었다. 잭은 고양이한테 잡힌 생쥐처럼 움츠러들었다. 잭이 위축되자 더더욱 미소 지은 엘러릭은 지키듯 레베카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찍, 찍겠습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서주세요. 네. Three Two One-"
-펑-
"한 장 더 찍겠습니다. Three Two One-"
터지는 플래시. 그녀와 접촉했는데도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잭이 끝났다, 수고 하셨다며 조명을 끄자 레베카는 어깨에 놓인 후작의 손을 감쌌다. 손만 맞물렸을 뿐인데 마음도 합체했다. 생이 다할 때까지 이대로만….
"사진을 보면 당신이 덜 보고 싶겠지…?"
"아마도요."
"이런. 자칫하면 이거 찍는데 들인 거금이 말짱 도루묵이 되겠군."
"보고 싶을 때마다 보러 오면 되지 않나요?"
"큭. 그랬다간 당신 아버지한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곤란해. 한 시도 당신한테서 떨어지지 못할 태니까."
"한 시도?"
"욕실까지 쫓아갈 거야."
"하하."
레베카는 기쁘면서도 가슴 한 켠이 시큰거렸다. 그는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안색은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그는 진정 매일 내가 그만큼 보고 싶은 걸까?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나일까? 내가 보고 싶어 잠 못 이룬 긴긴 밤이 있을까? 끊기지 않는 내 생각에 속절없이 웃어본 적이 있을까? 내가 그의 곁에 남고 싶은 만큼. 아릴 만큼… 함께 보내는 여생은 어떨까 상상해봤을까?
달콤한 꿈 속, 노인이 된 나는 지팡이 대신 그대의 손을 쥐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그대가 내 웃음에 마주 웃어줄까요. 날 그리워해줄까요.
그녀는 염원했다. 그가 끝에 그녀를 택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가 알아주길 바래본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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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아니더라도 사랑엔 누구나 미숙하다. 불안해하며 의심하고 불화를 키운다. 이 때의 베드로 후작과 레이디 얼낫 사이엔 이미 균열이 있었다. 하지만 후작과 달리 그녀는 그 균열을 뛰어넘었다. 무지했던 후작처럼 후에 허우적대지 않고. 그녀는 사랑의 본질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사랑이 있으면 의심도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그 어둠은 쇄도할 수 없다.
"과분했네요."
그는, 그걸 감당하기에 너무 어리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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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는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방금 전 엘러릭은 그를 데리러 온 마부에게 오늘밤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 청천벽력의 변덕을 부렸다. 이유는 '자꾸 속이 안 좋다'. 아무리 대충 둘러대도 그렇지 식사한 스테이크 냄새, 버터 냄새, 와인 냄새 폴폴 풍기면서 그리 하였으니, 마부는 거짓말 하시지 말라며 고용인답지 않게 떼를 썼다. 레베카와 산책하고 싶으니 한 두 시간 뒤에 오라 해도, 안 된다며 울고불고. 공작님한테 죽는다며, 호소하고 징징대는 마부를 후작은 '안 꺼지면 내 손으로 네 일가 밥줄을 끊어놓겠다'고 일갈했다. 결국 마부는 너무 하시다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 뿌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후작은 훗일이 걱정되지도 않는지 태연자약하게 걷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공작님한테 혼날 탠데요."
"내가 앤가? 형한테 혼나는 걸 겁내게? 형과 버니(마부 이름) 둘 다 소심해 두고두고 쪼아대겠지만 무시하면 돼. 오히려 끈덕지게 달라붙는 지인들이 무섭다면 무섭지. 그 돈 귀신들 하면 아주 신물이 나."
"그대의 지인들은 대부분 갑부들이지 않나요?"
"꼴에 상류층이라고 허세 부리는 거야. 씀씀이가 헤픈 만큼 적자라서 빚쟁이들이거든. 보기엔 통이 커 보여도 공짜라면 목숨 걸고 사수하지. 스스로 돈 벌 궁리는 안 하고. 피라미. 아니, 피라나가 더 적합 하려나? 물론 진짜 갑부 지인들도 있지만 나와 친분 있는 것들은 애석하게도 죄다 괴짜라. 하나는 해괴한 것만 모으는 수집벽에 하나는 이중인격 호색한, 하나는 형 버금가는 구두쇠, 하나는 몇 년 째 세계 일주 중인 여행 광. 전 대부터 알고 지낸 재벌 가(家)에 내 또래가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집 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 집 귀신이라서 만난 지 꽤 됐어."
"여행 광이라는 분은 허버트 후작님. 수집벽은 그 유명한 켄트의 클레이튼 러브가드 공작님이시겠군요."
"정답. 러브가드 공작은 내가 당신보다 일찍 죽으면 내 해골을 자기 컬렉션에 추가 시키겠다 떠벌리다 형과 개인 면담을 했었지. 그는 실제로 유명 인사 해골을 여러 구 통째로 갖고 있어."
"유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탠데요."
"직계 자손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고대 인사들이라. 도굴꾼들이 무덤 파헤치다 얼떨결에 같이 훔친 거야. 치아에 관한 기록이 없는 사람이면 그 해골이 그 사람이다 증명할 수도 없고. 그걸 역으로 당해 사기 당한 것들도 몇 구 있겠지. 하지만 러브가드 가는 우리 가문만큼 돈이 썩어나는 집안이니까 타격은 없을 거야. 알렉센더 대왕의 시신을 찾는 게 꿈이라더군."
레베카는 몇 년 전 모임에서 뵌 러브가드 공작을 떠올렸다. 엉성한 보라색 슈트에 희귀한 모피를 걸친 공작은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웃음이 헤픈 루퍼는 공작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피멍이 들도록 허벅지를 꼬집었었다.
"No more guesses?"
"나머지 분들은 모르겠어요."
"기대 이하군."
지나가는 말인데도 그녀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추스르고 콧방귀를 꼈다.
"실례에요."
그녀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그의 입가가 씰룩.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가 여태까지 다른 사내들의 파렴치한 눈에 노출돼 있었다니 환장하겠다.
"이중인격은 누군지 내 신변상 알려줄 수 없지만 제임스가 구두쇠인 건 안다 하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 상관 없겠지."
"제임스?"
"제임스 와이글 영주. 꼬장꼬장하기론 얼낫 백작을 빼면 영국 내 최고야. 헌데 다행인 건 남의 일에 잘 참견하지 않는다는 거지. 안 그랬음 난 그와 절교했거나 형과 쌍쌍으로 짠돌이가 됐을 거야."
"분명 전자였겠죠."
"묘하게 날 비하하는 발언이군. 실례야."
그가 큭큭대며 그녀의 말을 인용했다. 무장무애한 걸 보니 아침보다 기분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특히 산책하면서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게으른 여느 귀족과 달리 그는 걷는 걸 좋아하는 듯 했다. 아니, 그는 정말로 걷는 걸 좋아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땡볕 뒤 찾아온 어두운 밤하늘처럼, 폭염 뒤의 서늘한 그늘처럼 편안해졌다.
나의 마돈나. 내 사랑스러운 레베카.
그들은 보도를 벗어나 템스 강의 하안에 다다랐다. 기슭엔 빈 나룻배만 물결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하늘을 갈망하는 아름드리 녹음. 한 여름 밤의 꿈을 연주하는 갈대. 치맛자락과 코트 자락이 연풍에 펄럭였다. 일렁이는 마음처럼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
메아리 치는 정자(Gazebo) 오케스트라의 화음. 3/4의 박자. 경쾌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왈츠군. 슈트라우스 작품인가?"
"Abschied von St. Petersburg… Op. 210."
음악에 대해 해박한 레베카는 무도회에서 들은 적이 있는 곡의 원제를 읊조렸다. 작곡가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번역하면 'Farewell to Saint Petersburg'인 이 곡은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한번쯤 다시 듣고 싶은 가락이었다. 후작은 과장된 몸짓으로 연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보아하니 레이디도 독신이신 것 같은데. 외로워 잠 설치는 불쌍한 청년 하나 구제한다 생각하시고 부디 미천한 이 놈과 한 곡 춰주시겠습니까?"
"글쎄요."
불확실한 대답과 달리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바심 내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 당겼다. 완력을 자제했다. 평소 여자들을 대하듯 하면 놀랄 거다. 자극적인 행동에 실망할 거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최대한 살짝 잡았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파트너의 허리와 등을 더듬던 그는 없었다. 늑대는 순한 양의 탈을 썼다. 하지만 레베카는 후작이 거리를 두자 '왜 이러지' 의아했다. 혹시 그녀의 춤 실력도 기대 이하인가?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반항하듯 그에게 더 육박하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정수리가 그의 턱에 이르렀다. 당황한 후작은 나무 토막처럼 굳었다. 그녀는 아예 그의 허리를 꼭 포옹했다.
안 된다. 그녀는 처녀다. 내키는 대로 다룰 수 있는 계집이 아니다. 그는 그녀의 향을 맡지 않으려 숨을 멈췄다. 선율에 맞춰 움직이던 그들은 어느새 음악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음 좋겠어요."
아아.
"사랑해요."
안 돼. 이성이 혼미해졌다.
"정말로……"
인내심이 날아갔다. 그는 그녀의 턱을 쥐고 키스했다. 돌파하듯 인정사정없이. 그녀는 그의 뜨거움에 호응했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사교계에서 그대만큼 강한 영향력을 가졌더라면… 그대가 멀지 않게 느껴졌을까요? 차라리 남자 경험이 많았더라면… 덜 불안했을까요?’
‘내가 안하무인이 아니었더라면. 수많은 계집과 뒹굴지 않았더라면 날 제어하지 않아도 됐겠지? 백작한테 좋은 사윗감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겠지…?’
비밀스런 속마음이 뭉쳤다. 핏덩이처럼. 떨어진 입술. 1mm 간격의 아슬아슬함. 그의 허스키한 음성이 유혹했다.
"레베카…"
"……"
"오늘 밤… 같이 있어주겠나?"
‘…이런 날 경멸하지 말아줘.’
-13-
"다 나가.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마."
엘러릭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고용인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묵을 친정 없는 하인들에겐 여관비를 던져 주었다. 침실 문을 닫자마자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성급하게 굴지 않으려 해도 억제가 되지 않았다. 여문 월하(月下),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긴 그녀. 이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분석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찰나주의였고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은 듯 그녀를 취했다. 이름도 모르는 여관에서 안을 수 없어 집까지 데려왔다. 스륵- 드레스가 카펫에 떨어졌다. 빵 가루처럼 침대까지 옷가지의 허물이 남았다. 하나씩 하나씩. 목을 애무하고 쇄골에 서성였다. 그의 손길은 능숙하고 절묘했다. 능수능란한 그의 애무가 조금 서글펐지만, 몸이 내리는 욕망의 지령에 부응했다.
‘지금 그대가 사랑하는 건 나니까.’
그의 발가벗은 등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죄인처럼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다.
"레베카…"
그녀는 그를 더 꼭 껴안았다. 그의 떨림이 거세졌다. 한번 준 순결은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당장 내일 떠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의 굵은 땀방울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
그가 눈을 떴을 땐 동녘이 밝아지기 전이었다. 엘러릭은 창에서 들어오는 여명을 멀거니 응시했다. 뻐근한 허리를 일으키는 대신 레베카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내리는데 속절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밑을 확인하자 시트 위 핏자국이 도드라졌다. 사내 새끼가 울다니, 얼마나 꼴불견인지 알면서도 그는 하릴없이 잠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에겐 동정(童貞)이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녀 아닌 계집과 몸을 섞은 게 태반이었다. 몇몇 계집에겐 절정에 다다르며 사랑한다 토해낸 적도 있었다.
그가 동정을 뗀 건 연령 열 넷 때. 상대는 눈 여겨두고 있던 반반한 하녀였다.
바론은 레베카와 자면 애정이 식거나 더 타오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예견했다. 엘러릭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늘 여자와 섹스 한 뒤엔 기분이 좋았으니까. 근데 현재 그는 너무 아팠다. 아파 미칠 것 같았다.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만 갈래로 갈렸다. 그는 그녀의 순결을 빼앗았다. 끝내 더럽히고 말았다. 조급해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어서…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의 몸 곳곳에 멍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온전히, 고스란히 가졌다.
쾌감과 자기혐오가 교차했다. 그는 이불을 물고 포효했다.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흐느낌 같았다.
차갑게 식은 옆자리. 비어 있다. 춥지 않은 데도 레베카는 알몸을 옹송그렸다. 그녀의 목까지 라벤더향 나는 이불이 덮어져 있었다. 그녀는 온몸 곳곳과 아랫배의 통증을 참으며 속옷을 걸쳤다. 드레스를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 보다가 구석의 쿠션 의자가 보였다. 팔걸이에 다림질 된 드레스 두 벌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어제 그녀가 입었던 거고 하나는 새 거였다. 고소가 나왔다. 그녀가 바란 건 그와 함께 일어나는 거였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하룻밤의 대가로 비싼 드레스를 받은 것 같아 마치 정부가 된 기분이었다.
새 드레스는 보라색 팬지 빛으로 염교한 색상을 뽐냈다. 앙가장트(engageante) 위에 파고다 소매가 퍼져 있었고 높은 네크라인이 태팅 된 옷깃으로 이어져 있었다. 세입트 패널(shaped panel)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탁자에 놓인 상자를 개함했다.
정사각형 숄. 리본 루슈 장식의 스누드. 보닛. 손 장갑. 양피지 한 장. 펼치자 그의 필체였다.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er gold complexion dimm'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레베카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묻고 싶었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섹스 한 뒤에 드레스를 사주고 시로 환심을 산 적이 있냐고. 어젯밤 그가 하인들에게 대뜸 나가라고 했을 때 그들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일렬종대로 물러갔다.
침대에서의 그는… 무척 뜨겁고 거칠었다. 생경하고 아팠지만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질투가 났다. 다른 여자들도 이렇게 뜨겁고 열정적인 그에게 안겼다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그가 웃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장난감이 아닌 ‘사랑’이라는 걸, 영국 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그의 유일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가 만인의 우상이 아닌 그녀만의 별이었으면. 헛된 독점욕이었다. 그와의 결혼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연인 그 이상이 되고 싶었다.
바빴어도, 업무를 보러 가기 전 그녀를 깨워 인사할 순 없었나. 언제 보자 다음을 기약해줄 순 없었나. 이 애매한 시 대신 '사랑한다' 짧고 굵게 써줄 순 없었나.
다리가 풀렸다. 힘없이 주저 앉았지만 물색 없는 청승임을 깨닫고 혼신을 다해 눈물을 지웠다. 예의에 어긋나지만 램프 데스크 서랍을 뒤적거려 비상용 깃펜과 잉크를 찾았다. 그녀는 양피지 뒤에 답변을 써 내려갔다.
[‘How do I love thee? Let me count the ways.
I love thee to the depth and breadth and height
My soul can reach, when feeling out of sight
For the ends of Being and ideal Grace.
I love thee to the level of everyday's
Most quiet need, by sun and candlelight.
I love thee freely, as men strive for Right;
I love thee purely, as they turn from Praise.
I love thee with the passion put to use
In my old griefs, and with my childhood's faith.
I love thee with a love I seemed to lose
With my lost saints, I love thee with the breath,
Smiles, tears, of all my life! and, if God choose,
I shall but love thee better after death.’]
깃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배추 나비처럼 커튼이 팔랑거렸다. 레베카는 천천히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가 누웠던 쪽에. 한참을 그의 희미한 체취를 맡으며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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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마차를 부탁하고 갔다고."
"네. 지시하신 대로 욕조 물도 받아 드리고 테라스에 별도로 테이블을 준비 해드렸으나 전부 물리셨습니다."
"…그래."
몇 시간 전 만에도 꽉 차있었던 방인데. 원래부터 혼자 쓰는 방이었지만 레베카의 부재가 침실을 낯설게 했다. 원래 내 침대가 이리도 넓었던가? 후작의 손에서 양피지가 바스락거렸다. 그녀를 안았다는 게 실감이 좀 나지 않았다. 혹 욕구불만의 망상은 아니었나?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무작정 도피하려 하니 실감이 날 리가 없었다.
그대로 남은 새 드레스, 치장거리. 그는 보고를 마친 시녀에게 이만 가보라고 손짓했다. 오후 비가 지짐거리고 있었다. 유별나게 빗소리가 컸다. 성마른 발소리가 근접하고 있었다. 엘러릭은 담배를 물었다 경첩 부러지는 듯한 소리에 무심코 놓쳤다. 그리고 목이 홱 돌아갔다. 에드먼드는 탁자 위를 닥치는 대로 쓸었다. 꽃병, 잉크 병, 성경이 나동그라졌다. 파열음에 쫓아온 노르만은 눈치껏 문을 닫고 빠졌다. 후작은 터진 입가를 닦지도 않았다. 말없이 새 담배를 물었지만 공작의 두 번째 공격에 성냥갑도 떨어뜨렸다. 공작은 거의 광기에 차있었다.
"기반도 안 잡힌 놈! 니가 그래도 내 동생이야? 꿇어! 뭘 잘했다고 내 앞에서 면상 꼿꼿이 쳐들어, 쳐들긴!"
미동조차 없던 후작은 공작이 중국에서 무래한 도자기를 치켜들어서야 대응했다. 무력은 후작이 확실히 월등했지만 도자기를 빼앗았을 뿐 연타 주먹을 전부 맞아주었다. 에드먼드의 폭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레베카의 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네가 누구랑 놀아나든, 몇 명을 임신 시키든, 마약을 하든 말든, 난 관여 안 했어. 네가 주주들한테는 알아서 처신 잘 했으니까. 널 믿었는데… 돌아도 유분수가 있지. 가문의 위상이 걸린 자리였는데. 내가 그 자리 마련하려고 뿌린 돈이 얼만데 겨우 계집애하고 희희낙락하느라 그걸 펑크 내! 사업을 폴란드까지 확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Why, tell me, 나 병신 만들고 레이디 얼낫이랑 뒹구니까 기분 째지디? 그녀가 다리 벌리면서 매달리니까 좋아? Was fucking that damn bitch whore worth screwing up your only brother’s niche?!"
엘러릭은 서릿발이 섰다. 누구도 그녀를 깎아 내릴 자격 없다. 그녀는 그의 것이다. 웃게 하든 울게 하든 그것은 그만의 권리다. 그녀는 완전히 그의 여자니까.
갑작스레 엘러릭이 반격하자 에드먼드는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카펫에 비릿한 피가 튀었다. 형의 턱주가리를 잡고 말하는데 얼음장 같은 음성이 음산했다.
“그래. It was perfectly worth it.”
공작은 부들부들 떨며 욕을 벙긋거렸다. 자존심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키는 그가 너무 우습고 짜증나서 확 밀어버리고 손을 털었다. 자신이 다 커서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형으로서 사랑했고 그의 사업 수완을 존경했다.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가문과 공장을 늘 운운하지 않아도 되던 나날. 종손과 문중이 아닌 형과 동생이었던 때. 에드먼드가 종교와 율법에 목숨을 걸기 전, 사이가 소원하지 않았고 바라보는 미래가 비슷했던 어렸을 때의 그 봄날로.
"노르만."
후작은 그가 문밖에 계속 서있는 걸 알고 있었다. 자칫 공작이 다치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해하고 있었을 태지. 후작의 부름에 급히 들어온 노르만은 기겁했다.
"공작님!"
일사천리로 주치의가 도착하고 에드먼드는 마차에 실려 자가로 운송되었다. 시녀들이 피 얼룩진 카펫을 걷어내고 엉망진창 된 침실을 정돈하는 동안 후작은 서재로 내려갔다. 바닥에 방치된 레베카의 시는 잊혀졌다.
-똑똑-
[도련님.]
"들어와."
-끼익-
노르만의 얼굴은 허옇게 굳어 있었다. 부각된 주름은 칼로 파놓은 것 같았다. 그는 평균 기대 수명을 훨씬 넘은 노인이었지만 평생 베드로 가(家)에 종사하고 두 대에 걸쳐 공작을 보좌한 베테랑이었다. 권력의 흐름과 정세에 노련했고 베드로 가를 위해서라면 어느 죄악도 불사하는 무자비함이 있었다. 그래서 에드먼드는 그를 동생에게 붙였다.
"엘러릭 도련님. 어쩌자고 공작님께…"
"뭣하면 호적에서 파버리라 그래. 파문하는 게 낫지, 당주라고 군주 행세하는 거 더는 못 봐."
"…도련님. 레이디 얼낫과 그만 만나십시오."
"자네와까지 싸울 여력 없어. 들어온 이유가 그거라면 나가게."
"레이디 얼낫을 괴이시는 거 압니다. 다만 그녀 때문에 공작님과 골을 내는 건 아니 되십니다. 공작님께서도 언사가 지나치셨으나 도련님께서는 여자에 눈이 멀어 후작으로서의 소임을 저버리셨습니다. 공작님께 가 사죄하고 오세요."
"자네는 원래 내가 아닌 형의 비서가 되길 바랬지.”
“레이디 얼낫과의 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어 오르지마.”
“그건 불가능합니다.”
노르만이 보기에 후작의 가장 큰 결점은 가문에 대한 긍지가 부족한 것이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할 줄을 몰랐고 부귀와 함께 오는 책임들을 무시했다.
"모후 마마의 별세 이후로 폐하의 상심이 무척 크시다 합니다. 하여 모후 마마를 임종까지 간호하셨던 앨리스 공주님께 크게 의지하고 계시다더군요. 그런 공주님과 도련님께서 결합 되신다면 온 대영제국의 경사가 될 것입니다. 도련님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엘러릭 하웍 베드로 후작이십니다. "
"그만."
"어리광 그만 부리십시오. 결혼과 연애는 다릅니다, 도련님."
"후우. 내버려 두라고 좀. 제발."
후작은 갓 엄마를 잃은 남아처럼 서럽고 지쳐 보였다. 퀭한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잠을 잘 자지 못해 피폐했다. 평소의 오만함도 거의 없었다. 열 여섯 살, 부친이 타계한 뒤로 그의 경거망동과 부주의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어도 그럴만한 작위가 있었다. 세간의 논란이 되어도 영국은 동조하거나 쉬쉬했다. 주변에서 ‘뿌린 씨앗은 언젠가 거두게 된다’ 훈계해도 멈추지 않았었다. 어떠한 지옥이 와도 맞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그토록 계집들을 농간하고 난동을 피워도 아무 탈 없었거늘. 오랜 방황 끝에 사랑을 찾았건만 반대가 참 많다. 레베카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착잡한 심정에 줄어드는 건 남은 담배 개수였다.
"헤어지십시오. 그게 레이디 얼낫에게도 좋을 겁니다."
후작은 킥 웃었다.
"얼낫 백작이 그렇게 녹록해 보이나? 국회의원에서 퇴출시키겠다 협박해도 눈 깜빡 안 할 양반이야 그 양반은."
"잘못 보셨군요. 얼낫 백작은 가문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겁니다."
"아니. 백작이 가문을 그토록 위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 레베카를 엮으려 했을 거다."
"백작이 도련님을 멀리하는 이유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족에게 있어 결혼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급이 맞지 않는 가문과 사돈을 맺을 경우 어떤 고난이 오는지. 지나치게 더 우수한 가문과의 사돈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백작은 저녁 식사를 핑계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도련님을 떼어내려고 했습니다. 도련님의 성향이면 손해도 맘고생도 얼낫 가의 몫이 될 태니. 베드로 가를 모욕하지 않는 선 안에서 막으려 한 겁니다.”
“맘고생?”
“도련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레이디로 지목하고 책망하실 겁니다."
"뭐?"
"나르시스트이니까요."
노르만은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다. 엘러릭은 알아듣게 설명하라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자유도, 인기도, 신념도 절대 못 버리실 겁니다."
"…감히 하인 따위가 주인을 분석하려 들어?"
"그럼 레이디와 야반도주하실 수 있습니까? 모든 걸 버리고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사실 수 있습니까?”
“……”
“레이디께서는 아십니까? 도련님의 아이를 지운 여자가 무려 넷이라는 걸. 물론 후작님의 씨를 받은 여자가 부지기수라는 건 런던 전체가 알고 있습니다만 낙태는 극소수만 알고 있죠."
"That does not have anything to do with this!"
"왜 상관이 없습니까? 도련님은 평생을 책임이란 걸 모르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종교도 법도 전부 권력으로 눌러 버리고 사랑하는 쾌락을 위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뿌리셨지요. 네 명의 여인을 낙태란 죄를 짓게 하고, 공작님을 시름에 잠기게 하고도 나 몰라라 도외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만 술 중독자가 술 쫓듯이 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겨우 하룻밤 가지고 한 여자 때문에 변하시겠다고요? 정말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일단은 변하셨다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진정 레이디 얼낫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하셨다면 과거를 전부 청산하셔야 하는데, 낙태란 살인을 저지른 여자들의 영혼을 지옥에서 구제하실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도련님이 내팽개친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낙태는 그것들이 스스로 결정했어! 그들이 내게 책임을 물었다면 내 아이의 아비 노릇은 기꺼이 해줬을 거야!"
"아뇨. 사생아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으셨을 겁니다.”
"네 놈이 뭘 알아!"
"레이디 얼낫과 혼례를 올리셔도 몇 년 뒤면 다른 여자를 찾으실 겁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요. 이미 전의 방탕했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으십니까? 한 곳에 정착하고 있으려니 답답하시겠군요."
"나가.”
"자격지심은 원래 귀족에게 치명적입니다만 도련님은 좀 있으셨으면 합니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언제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사실 겁니까!”
엘러릭이 재떨이를 들자 노르만은 벌개진 얼굴로 서재를 나갔다. 닫힌 문에 재떨이를 던지자 우직하며 문이 움푹 들어갔다. 간헐적으로 손가락이 떨렸다. 엘러릭은 필사적으로 아편(opium)을 찾아 촛불에 태웠다. 몽롱한 무아경이 오자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노르만의 말이 옳다.
"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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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릭이 쓴 시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Sonnet 18이고, 레베카가 답변으로 쓴 시는 Elizabeth Barrett Browning의 "How Do I Love Thee?"라는 시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의심도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작가님의 이 한 문장 속에 이번 12,13편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노르만의 말에 끝까지 반박하지 못한 엘러릭의 마지막 비명이, 앞으로의 미래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구요. 레베카와 끝까지 행복하면 좋으련만, 그래도 저는 작가님의 결말이 벌써부터 대단히 궁금해집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감사합니다 ㅠ.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