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상당히 강국이었던것처럼 다들 말씀하셨는데,
전 아직도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공돌이의 한계...ㅆㅂ...ㅠㅠ)
정말 알고 싶어서 그러는거고, 잘 모르는 분야라서 그런것이니 친절하게 답해주세염~
전 둘다 한반도내에서 분투하셨던 고려와 조선을 비교하기를 좋아하기때문에 고려에 대한 질문도 함께 올립니다.
1. 조선의 상비군, 정예병은 얼마나 되었나? 그들의 훈련도와 무장수준은 어떠했는가?
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의 상비군은 17만여명, 그리고 정예가 8천명 이하였던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의 국력을 이 시기만으로만 따지기는 머시기 하다만, 어쨌든 이 17만명과 8천명은 정말 사실이며 어느정도수준의 군사력이었습니까?
2. 조선군의 기병은 정말 기병의 구실을 할 정도로 많은 수이며 그럴만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나? (수군도 좀 궁금함.)
우리나라는 원래 기병의 비율이 높았다고 말들 하시는데, 이 기병들이 단순히 군역대상자들만을 따진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여러곳에서 읽어본 바로는, 당시 기병들은 자기가 알아서 대부분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갑옷은 구하기 어려움은 물론이고(뭐 이건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것입니다.) 말도 빌려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기병이라고 부른다면 적어도 말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어야 기병이 아닙니까? 말을 제대로 타고 전장으로 나갈수 있던 기병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의문이 좀 갑니다.
또한 고려때도 별무반의 창설할때 기병을 강화시키려 한 이유가 고려군의 군대가 보병위주라서 그랬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려때도 기병의 비율이 정말 높았기는 했었습니까? 거란의 기병이 질이 높았더라고 해도 그냥 고려가 기병을 훈련시켰다 라고 말하지 않고 고려가 보병이 주력이라서 그랬다 라고 여러 책들에서 나와있는것 같은데, 고려의 기병비율이 얼마나 높은지 아직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제주도에서 대량의 말사육이 있었다는 말만 들어봐서...
근대전의 우리나라 기병의 위력이 적어도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논할수 있을정도의 수준이기는 했습니까?
또한 조선 수군은 전선은 뛰어나지만 군사들의 대우가 너무 취약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병만큼 사람들이 피하려했던 직업이었던것으로 알고있었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3.조선의 군력이 강력하다고 하다면 큰 전쟁에서 밀린 이유가 무엇인가?
이건 좀 질문이 애매한데요, 여진족과의 잦은 전투들보다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같은 대규모 침략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당한 지역은 많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관군이 너무 지나치게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한 느낌이 듭니다. 조선은 왕권의 강화로 관군이 많아졌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일본군을 요격해내기 쉬워야 하는것이 아닌지요? 정유재란때 일본군이 일부러 전라도를 먹으려고 느릿느릿 진격을 했을때 지방에서 지방군이나 의병들이 더 잘 싸웠던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제가 조선시대 왕의 관군에 대한 정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쨌든 아무리 일본군이 당시 조총이 있었더라도 조선이 밀린정도를 보면 좀 조선의 군력에 의심이 갑니다.
아니면 장수들이 안좋아서 그런거였나요? 제승방략등의 장수들의 전술수준이 군력에 비해 너무 낮았던것인가요? 훈련도감이나 어영청같은 기관들은 얼마나 그 효율을 발휘했었나요?
4.조선의 상비군등의 군대규모가 군역과 같은 것에 의해 계산이 된것이라면, 그 기록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당시의 군역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것인지도 잘 모르겠다만(이것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초기엔 그러지 않았지만 조선 중후기에 오면서 지방정치의 부퍠로인해 미성년자, 죽은 사람들도 군역에 올랐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록으로 나오는 조선의 군사수를 얼마나 신용할만 합니까?
5.고려의 군사력은 조선에 비해 약했다?
고려가 조선보다 인구수도 적을수가 있었을테니 국가의 규모가 작은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그에비해 고려의 군사력이 조선보다 컸으면 컸지 더 작지는 않았을거란 생각이 아직도 듭니다.
언젠가 어떤분이 고려는 지방호족의 힘이 세고 왕권이 조선때만큼 세질 않아서 재대로 전쟁에 쓸수 있는 상비군이 조선에 비해 적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은 되지만 실제로 그 원리가 적용이 되었는지 의심이 갑니다.
감강찬이 이끌던 군대도 20만이었고, 강조가 거란을 토벌하기 위해 이끈 군대도 30만명, 그리고 윤관의 별무반도 17만명이 되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 초기때 왕권강화를 위해 일부러 중앙군 30만명을 모았다는것을 읽어본 바도 있습니다. 오히려 무신의난 이후부터 고려의 힘이 쇠퇴하여 군사력이 줄어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나라의 침공 이후엔 더 약해져서 고려후기땐 왜군 만명도 안되는 군세를 고려측에서 장수를 10명이나 보낼정도로 군사력이 저하된 상태였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고려는 공격하려고 출진할때 17만명을 뽑아내기도 했는데, 조선은 그런 원정 활동을 안해서 군사력이 드러나지 않는것인가요? 만약 위에서 제가 물어본 17만 상비군이 맞다면 조선의 군사력은 고려에게 너무 뒤지는 꼴이 아닌지요?
아니면 고려가 아무리 군사수가 많아도 주위의 국가들은 훨씬 많았으니까 주위 인접국가들과 비교를 할때 조선때가 군사력이 강했다는 말인가요? 고려가 30만명을 끌고나와도 거란은 40만명을 끌고 나왔었으니...
아니면 아무래도 기술과 시대차도 있으니 조선의 10만은 고려의 20만에 필적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6.조선시대때가 고려때보다 평균 삶의 수준이 높았나?
이건 저도 잘 아는바가 거의 없어서 알고 싶습니다. 고려시대때 여자들의 사치가 너무 심해서 조선시대때 그로 인해 유교를 강화했다고 들은바가 있습니다. 이 여자들의 사치는 귀족들만 적용되던 사항이었습니까?
또한 전 '삶'의 수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생산력이 높아도 평민들이 이리저리 세금이나 정치인들의 부퍠로 생산해낸것을 다 뜯기면 의미가 없죠. 고려와 조선때 삶의 수준은, 즉 'standard living level'은 어느정도였습니까?
7.이런 질문들 자체가 무의미하다?
고려와 조선, 둘다 각각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죠. 그런만큼 조선 초기와 후기를 같이 동일시 할 수도 없고, 고려와 조선을 동일시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너무 긴 시간을 가지고 비교를 하려는 만큼 어쩌면 무의미 한것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세종때와 영조때의 시대와 환경을 동일시하게 생각하면서 비교 하는것은 객관적으로 좀 무모한 짓일지도 모르겠군요.
조선과 고려의 국력을 따지는 일은(비교뿐만이 아니라.) 무의미한 짓일까요?
친절히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
첫댓글 우선 아는 것만 대답해 드리겟습니다. 자세히는 모르는 것이 많아 글의 완성도가 많이 떨어질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2. 물론 정군을 지탱하는 자영농층이 장비 준비하다가 재산을 잃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조선 기병대 자체는 건재햇습니다. 우선 압록강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계속해서 전투를 벌어야 했으니 말이죠. 또한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군과 맞선 충주정병들도 2~3차례 돌격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만큼 적어도 기병 자체는 건재햇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중종 4년 8월 3일에 함경도 감찰사 고형산의 장계를 보면 함경도의 기병비율은 50%정도 됩니다. 후삼국시대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면
한반도 국가들은 대대로 기병을 중시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3번은 그 동안 전쟁을 해온 방식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조선은 이성계부터 수만명씩 대적하는 그런 전투가 아닌 수천 단위의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그 이유는 적들이 주로 왜구, 여진족 같이 많아야 수천도 넘기지 뫃사는 그런 적들과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진관체제가 상당히 효과가 있었죠. 비록 조선 중기 이후 수천명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제승방략 체제를 채택하지만 이것도 당시 10만명을 동원하며 열심히 싸우던 일본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한반도 국가들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수성전에 특화되었습니다.
여자가 사치가 심했다는 것은 평민들에게 적용될지는 의문입니다 ㅡ.ㅡ;;;
수 만명씩 모와서 회전하는 경우-특히 조선의 경우는- 거의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당시 10만명 단위로 큐슈와 호조를 정벌하며 대륙침략 사전연습을 하였던 일본군에게는 초기에는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4. 17만이라는 것은 1593년 1월 11일에 경략찬획인 원황이 조선의 병력을 조사하면서 선조에게 회산한 내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총 합치면 17만 2천 4백명이죠. 당시 이미 적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때라서 군사수를 대충 조사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임진왜란 때의 병사 수는 상당히 정확하다고 봐도 됩니다.
군적을 따질 경우 이시기의 조선은 30만 정도를 군적에 올려놓고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평시엔 육군 5만, 수군 4~5만 해서 10만 정도 유지하던가.
조선의 군사력에 대해 까먹지 않아야 하는 건 조선이 거의 육군에 필적하는 규모를 지닌 상비수군을 운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육상전에서 당장 드러나는 것만 보고 조선군이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한마디로 말해 It's a trap! 인 거죠. 특히 남도 일대의 경우 평시 수군의 규모가 육군보다 더 큰걸로 기억합니다.
30만명이요? 언제쯤에 그정도가 있었나요?
세조 때입니다. 그 때 모든 성, 진에 병력을 채워서 30만명이 있었죠.
35만 - 팔도군안, <서애집 18권>
301,280 기사년(1509년) 군적
311,765 계미년(1523년) 군적
동원 규모가 아니라 전시에 이정도를 동원할 수 있게끔 군적에 올려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정도를 동원한 적은 없습니다.
넹.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유문기님이 설명하셨음.
5. 그것은 3번과 통하지만 고려가 싸우는 적은 조선이 마주한 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거란의 경우는 대다수, 특히 소손녕은 최정예부대 10만명을 이끌고 내려오니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숫자를 모와야죠. 게다가 동북전쟁 같은 경우는 고려가 '침략'을 한 것입니다. 도요토미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30만명을 모았던 것처럼 고려도 여진을 쳐서 9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를 모와야 했죠. 고려가 맞섰던 적에 따라서 전쟁 양상이 달라졌던 것은 몽고와의 싸움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 그렇게 설명이 되는군요.
이 때문에 누가 쎄고 누가 약하고는 한번 두 나라가 부딪쳐봐야지 알 수 잇는 것이죠. 게다가 고려나 조선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군사체제가 달라지니 어느 한 시대를 가지고 '이것이 고려, 조선의 군사력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6번의 경우는 권문세족이 자영농의 땅을 빼앗어 한 토지에 수 명의 권문세족이 차지하고 있어서 이리저리 세금을 착취당해야 했던 고려농민과 세도정치 하세어도 구휼 시스템이 상당히 돌아갔던 조선을 비교해 보면 간단하게 풀리리라 생각합니다.
6번은 다시 생각해보니 정답이 보이는것 같군요. 아무래도 조선시대때 시스템이 고려때보다 좀더 구체적이었죠. 그건 맞음.
뭐,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제 조선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군요. 조선은 국력이 나름 강했어도, 그것이 이벤트로 표출되기가 어려운건 최대한 국가의 힘소모를 피하는 노력을 해와서 그런거였군요. 사대주의라는 것도 그런 노력에서 나온거군요.
대체로 그렇죠. 근데 사대주의란표현은 좀... 조공책봉은 동아시아에서 대부분 했던것이고 오히려 조공무역에서 얻어오는 이득이 조선이 더많았습니다. 근데 조선도 전시체제로들어갈시에는 이벤트때 고려보다 더강력하게 표출할수있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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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런 사실들이 있어왔군요. 수군은 밥이라도 잘 주게 되어있었군요. ㅋㅋㅋㅋ
일단은 조선이란 나라는 500년을 지속한 나라임 때에따라 국력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데 까는사람들은 항상 막장때만을 들어서 까는게 문제. 대한민국이 꼴랑 60년 남짓한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부침을 겪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될듯.
중앙집권적인 면에서는 조선이 고려보다 월등했죠. 아마 군대를 일으키는 것도 고려보다는 조선이 수월했으리라 봅니다. 조선은 국초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기획하여 전국의 모든 사병을 삼군부 휘하에 두죠. 이는 당시 조선의 지방장악력이 고려보다 능가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고려-거란 2차 전쟁을 보면 고려 현종이 나주로 몽진을 갈 때 비적들이 공격하고, 호족들이 현종을 무시하는 처사를 보입니다. 이는 당시 고려가 지방행정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죠. 더군다나 고려 전성기인 문종시기를 지나 인종대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그리고 무신정변기의 조위총의 난, 삼별초의 난을 보면 고려의 지방장악력이 낮았
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지방장악력이 낮으니 군대동원도 그리 쉽지 않았겠죠.
오항녕 본좌께서 조선의 힘에 저런 내용에 대한 해답을 내셨어야 했는데 ㅠㅠ
오본좌께서는 너무 공부 좀 한 사람들만 바라보고 조선의 힘을 쓰셨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
저게 지방관아에서 군적갱신을 못해서 임란 전후해서 어떤 장계를 가져와도 이미 불확실한 정보라는 기사를 보았지염
일단 좀 까여야 될듯염 ㅇㅅㅇ)
참고로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조선이 심심하면, 잊을때면 혹은 당하면 하는 것이 여진족 정리 사업-_-이었습니다. 한때 조광조를 그렇게 신임하던 중종마저도 조광조가 "여진족을 선제공격 or 정리사업 벌이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자 반대파한테 까이고, 중종마저도 난색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카페에서 조선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조선이 정치적으로 꽤 세련되고 군사적으로 동원력도 괜찮았고 백성들 삶도 어느정도 먹고 산듯해서 예전에 생각하던 '허접조선'이 아닌 꽤 국력이 강했군...이라곤 생각하지만
안타까운건 어째서 그렇게 전쟁만 나면 그리도 털렸는지 말이죠 ㅡ_ㅠ 꼭 안좋을때만 전쟁이 터진듯합니다.
(뭐 애초에 집권층의 무사안일주의가 제일 큰 원인이긴 하지만 말이죠.)
그 상대한 나라들이 무시할만한 나라였는지요 임진왜란때만 해도 명나라도 일본군 제대로 상대 못할 지경이었고 여진족이 우습게 보이는 군사력이었나요? 게다가 무사안일이라고 하기에는 전쟁 준비 상당히 진행되었고 임진왜란 승리의 이유도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한 전쟁준비의 결과였는데 말입니다.
이미 50년전부터 판옥선과 2세대 화포들은 대량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조총이 들어와서 생산되기 시작했을 때 말입니다. 그리고 20년전에는 서양화포 불랑기도 들어옵니다
무시할만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시 산해관을 못넘었던 청과 일본이 이전에 붙어왔던 한,수,당,거란등에 비하면 전체적인 국력은 한수 아래지욥. 명의 경우야 왜란초 참전한 북군은 남군에 비해 전투경험도 적었고 수뇌부의 삽질에 전혀 좋은모습이 안보이니,,,, 그리고 조선의 '준비'란게 축성같은거 하긴 하는데 제대로 끝내놓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끝난데다 그렇게 오래 준비한 국가가 전시 긴급동원병력이 신립의 '수천'밖에 되진 않았습니다.'';물론 육군한정이고 시간이 매우 촉박하긴 했지욤. 이전에 판옥선건조등은 잘한일이지만 여러 일들을 보아 그리고 초기 대응으로 볼때 조선이 준비를 잘했다고하긴 좀 힘들죠.
수군의 경우는 거의 전적으로 이순신 장군 덕택이라고 밖에 볼수 없구요'';(물론 다른 몇몇 장수의 경우도 착실하게 준비하긴 했지만)
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은 말해봐야 입아프고... 광교산전투와 금화전투등 소수로 분전한 경우도 있지만 청의 전격적인 기동에 당황해서(게다가 김자점은 침입을 하루 늦게 보고 하질 않나)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남한산성에 갇힌건...아무리 에누리하고 에누리해도 '';
청나라가 산해관을 못 넘은 것이 약하다고 볼수는 없죠 당시 산해관은 기존에 그냥 성벽위에서 인력으로만 지키는 성벽이 아니라 적이오면 대포를 날려대던 성이었으니까요-_-;;
임진왜란 일어나자마자 대구에서 집결한 병력이 5만 이상이고 울산(경주였나?)에서도 2만 정도 모였습니다 ㅡ.ㅡ;; 다만 이를 지휘할 지휘관이 제때 오지 못해 결국 해산했지만 병력 동원력에서 조선 무시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원균 같은 경우 제외하면 전라우수사 이억기나 이외 이순신의 부장들 및 충청수사도 이순신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이끌 수준이었고. 조선수군이 하루 이틀만에 만들어지는 전력이 아닙니다만 일본도 조선수군처럼 구조개편하려했지만 실패합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수군이 더 무서운 것은 서양보다 훨씬 앞선 소프트웨어 기반입니다. 당시 제대로된 수군 신호체계 확인되는 나라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신호체계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좀 많은데 넬슨 제독도 트라팔가르 해전 전에 가장 중요하게 점검했던게 폴햅의 깃발 신호체계를 다시 점검하는 거였습니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을 때는 시간적으로 그닥 준비하기에 충분하다고 보기도 힘들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전체적인 조선수군 인프라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 혼자 할수 있는게 아니지 말입니다. 참고로 말하면 이순신 장군이 썼던 진형과 그리고 부대운용 방식은 모두 이미 조선수군이 기존의 운용하던 방식에 크게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다들 위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세염. ^^ 젤레돈님이 위에 써져있는 유문기님 댓글을 또다시 쓰고있다는 느낌...^^;; 임진왜란은 순전 전략에서의 크나큰 미쓰였습니다. 그런 대군이 바다를 건너올줄 예측하지 못한거죠. 아무리 군대가 많아도 제때에 한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죠.
나욱/ 산해관을 못넘어서 약하단건 청의 군사적인 능력이 약하단게 아니라 산해관을 넘기이전 만주 요동일대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으니 인구,경제력등에서 요 금 당 수 등에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젤레돈//글쿤요. 부산 함락후 신립과 싸울때 까지 이렇다할 병력이 모인적이 없는줄알앗는데 상당히 모이긴 했네요.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건 전쟁발발이 임박함에도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는거죠. 그런 인프라 즉 수군이나 동원력에 관한 인프라는 선조 이전 왕들부터 추진해 오던거구요. 잠재적인 전쟁 발발에 대비해 추진해오던 정책은 계속하고 전쟁이 확실해짐에 따른 대비도 햇어야하는데 젤레돈님이 언급하신거처럼 그런류의 대비는
잘해놨지만 전쟁에 임박해선 확실히 점검하고 부족한거 있으면 더 했어야 했지만 선조때에 전쟁발발징후를 포착하고 추가적인 준비를 하긴 하는데 이게 제대로 안되거나 부족했다는거쥬.
뭐 어쨋든 조선이 승리한 임진왜란이긴 하지만 조선의 동원력이나 군사 기술력등이 좋으면 좋앗지 나쁘지 않았기에 더 안타깝달까요.
그런 대비만 좀더 했다면 조선이 그?게까지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전쟁이엇던거 같아서요.
젤레돈//제 추측입니다만 대구의 병력와해사건... 지휘관이 이일이 아니라 김수일 가능성은 없나요? 김수가 지휘관이면 지휘관 안 와서 붕괴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롱기누스//그거 이일이 이끌어야 할 병력이 맞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신립이 도착하면 신립이 이끌어야 했는데 문제는 너무 지체되었다는 것과 사실 당시 교통 수준 등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신립이 서울에서 데려갈 병력을 소집하는 것도 원래 제승방략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물론 신립입장에서는 믿을만한 간부를 한명이라도 더 끌고 가고 싶었겠지만) 사실 이런식의 지체는 오히려 제승방략의 강점을 날려버린 것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대구의 병력이 흩어진 것도 결국 그 많은 병력을 이끌 지휘관이 오지 않아 지휘권 단일화가 불가능하여 결국 어쩔 수없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참고로 지휘권 단일화를 우습게 볼 수가 없는게 진주성 전투의 경우에도 김시민이 일본군에게 패퇴해서 오는 조선군을 성에 안 들여보낸 것도 당시 조선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김시민 목사보다 위치가 더 높았기 때문입니다(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것처럼 왜군이 가까이 있어서 안 열어준게 아닙니다)즉 이미 김시민을 중심으로 군민이 뭉쳤는데 갑자기 지휘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그 혼란이 심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카페에서 보면 조선이 괜찮지만 눈부신재님 말씀대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지나치게 털린 이미지가 크다고 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단한점도 많지만..여자의 허리끈을 오른쪽이냐 왼쪽이냐..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나 등으로 인재와 집안이 풍비박산되는걸 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기 힘듭니다.
근데 사실 털린 레베루로 봐도 고려에 비하면 조선은 새발의 피라는 걸 많이들 무시하더라구요. 대거란 전쟁도 "침략을 당한 후에 물리친 것"이니, 실상 왜란, 호란과 별 차이가 없죠. 피해 범위도 결코 왜란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단지, 마지막 침입을 단순히 물리친 수준을 넘어서 "확실하게 발라 버렸다"는 것 뿐인데, 조선까들은 그걸 가지고 고려를 미화하지요. 하지만 실상 고려는 발라버린 뒤에도 계속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어떻게든 추가 전쟁을 막으려고 싸바싸바를 했는데, 그건 모르거나 무시하죠.
그.리.고. 대몽항쟁에 들어서면 이건 뭐 답이 안나온다는....
상복 몇년입어야하는거는... 고려말기때 이방원이 자기 어머니 상복입고 제사지내는것만봐도 조선에만있었던것도아니고요. 오히려 고려가 님이 말하는 관습측면에선 조선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진 않았지말입니다?...
아하스페르츠// 거란의 2차침입의 경우는 "물리친 것"도 아니지요...-_-; 개경까지 쑥대밭으로 만든 거란군이 "(약탈) 할 거 다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 그나마 고려 현종은 나주로 파천하는 와중에 수차례 역모에 시달려야했구요. <요사>에 보면 고려포로 분배에 관한 기록도 나오죠...ㅡㅜ
왕이 파천하고, 나라 절단나는 와중에도 조선왕들은 역모로부터는 안전했으니...
그리고 고려와 조선을 직접비교하기 보단.. 주변국에 대한 상대적인 위치와 발전도에서 조선의 이미지가 않좋게 굳어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