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성과 숲이 적당하게 어우러져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곳을 오가는 모든 사람은 새소리 들으며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에 놀라고 만다. 그래서 필자도 자연에 취하고 말았다. 자연의 향기와 은은하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도 함께 어우러졌다. 거기다
필자의 힘찬 발걸음 소리도 한 수 거든다. 제2남옹성(第2南甕城)이 있는 곳에서 성 밖을 바라보니 가물가물하게 검단산이 보인다. 무한한 자연의
신비로움을 감상하며 걷는다. 송광 선생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남장대터까지 왔다. 걸어가는 곳마다 옛 선조들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걷다 보니 필자는 자연의 신비로움에 취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넓은 휴식 공간이 쉬어가라고 유혹한다. 젊은 연인들은
사랑스럽게 속삭인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으며 껴안는다. 그러곤 여자는 웃음을 입에 가득 물고 나도 몰라 몰라 하며 사랑의
주먹으로 남자의 어깨를 지긋이 두들긴다. 애정표현으로 젊음의 특권을 마음껏 누린다. 참 보기도 좋고 아름답다. 연인들의 사랑이 넘치는 대화도
듣고 보았다. 우리는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기에 무작정 걸어야 한다.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난다. 그곳엔 꾸불꾸불하게 쌓아 놓은 성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예술이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고 말았다. 중간쯤 내려와 앞을 바라보니 유명한 망월사가 반쯤 산에 가린 채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마치 아리따운 여인의 옆모습이 살짝 보이는 듯했다. 그 자태가 왜 이리 아름다울까? 나뭇잎이 떨어진 주위의 전경은 잿빛으로 보인다.
태양이 안개를 삼키고 토해내 잿빛이 되었나 보다. 그래서 그곳의 숲이 엷은 재색 빛으로 보이는가? 운치 있는 그 잿빛의 숲은 절을 살짝 에워싸고
있다. 앞엔 탑이 하늘 높이 우뚝 서 있다. 절이 있다는 암시를 해준다. 한 구릉지를 차지한 망월사는 자연과 어우러져 멋을 마음껏 누리는
듯하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다. 이곳은 조선 시대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가서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았다.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峰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26년)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성곽(城郭)을 걸으며
송광(宋光) 선생과 구수한 대화를 나눈다. 엷은 겨울 햇살이지만 따사롭다. 걷는 것이 힘들었는지 햇살과 결합해 에너지를 발생한다. 그래서 등에선
기분 좋게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동문(東門)까지 왔다. 동문(東門)은 일명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한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다. 동문(東門)은 성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東門)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左翼門)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 앞으로 큰 길이 나 있고 동문 좌측으로도 길이 있다. 좌측길은 비탈길이다. 우리는 즐겁게
그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동문(東門)과 장경사(長慶寺) 사이에 송암정터(松岩亭址)가 있다. 알림판에 의하면 송암정터(松岩亭址)란
우리말로 "솔바위 정자터"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랫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내부(內府)" 벼슬을 내려 "대부송" 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
장경사(長慶寺) 일주문을
가기 전부터 목탁 소리와 불경 소리가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 산사(山寺)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필자의 마음을 향기로움으로 가득
채워준다. 그래서 들떠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도 한다. 때로는 그 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려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 때도 있다. 일주문의
현판은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라고 쓰여 있다. 풍수지리의 대가이신 송광 선생의 말에 의하면 장경사(長慶寺)는 풍수 지리학적으로
남한산성에서 가장 좋은 절터라고 한다. 일주문을 통과해 장경사(長慶寺)로 들어갔다. 필자가 보았을 때 장경사(長慶寺)는 넓은 터를 소유하였으며
아늑해 보였다. 앞이 확 트인 곳에 자리 잡은 이 절은 무엇인가 불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을 지닌 듯했다. 그래서 필자의 마음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느낌이었다.
장경사(長慶寺)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성 안에 있는 절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건립하였다. 남한산성을 수축할 때 전국 8도의 승군을 소집하여 성을 쌓게 하고 이후
그대로 거주하면서 평상시에는 지역별로 구간을 나누어 성곽을 관리 보수하게 하였다. 장경사는 충청도 출신의 승군들이 머물던 사찰이었다.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다.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 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谷底部:산골짜기의 밑바닥 부분을 말함)의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장경사(長慶寺)는 해맞이로도 유명하다. 해는 매일 뜨지만, 어제 떠 올랐던 해와 오늘 떠 있는 해 그리고 내일 뜰 해가 똑같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해의 소원을 빌려고 꼭두새벽부터 나와 해돋이를 본다.
"광주군지"에는 장경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 수축 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사찰이다. 병자호란
당시인 인조 15년(1637년) 1월 적이 동쪽 성을 침범하여 성이 함몰위기에 빠지자,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이 장경사에 있다가
죽을힘을 다하여 몸소 군사를 독전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왕이 친히 납시어 위로하고, 가선의 품계를 더하였으며, 완계군(조선시대 관직의 등급을
말함)에 봉하였다고 한다. 1907년 8월 1일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의해,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할 때 다른 사찰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그중 장경사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창하였다.
잠시 장경사(長慶寺) 경내를
살펴보았다. 넓은 대지에 앞에는 9층 탑이 서 있고 뒤에는 대웅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옆에는 현판을 장경사(長慶寺)라고 쓴 건물이 있으며
중심에는 매우 크면서 고풍스러운 심향당(心香堂)이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절에선 은은하게 불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추녀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면 자기를 예쁘게 쓰다듬어 준다고 좋아서 울어댄다. 필자는 그 소리에 매료되어 한참을 멍하니 듣고 사색에 젖기도 했다.
자연과 사찰이 어우러져 이렇게 하나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2편은 장경사(長慶寺)까지 마무리한다. 3편에서 만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