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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중앙시장
양구 중앙시장은 일제강점기에 9개 장이 있었으나 1970년대에 중앙시장과 5일장만 남았다.
현재는 읍내 중심에 위치해 상설시장과 5일장을 운영하며 곰취·시래기·버섯 등 특산물을 판매한다.
2007년 시설 현대화로 아케이드·바닥·간판·화장실·주차장을 정비해 시장 환경을 개선했다.
군사시설 인근으로 면회객이 꾸준히 찾으며 지역 주민과 군인들이 오전·오후에 장을 보러 온다.
양구 중앙시장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중앙길 68
시장 유형 : 상설시장 겸 5일장(매월 5, 10일)
형성 시기 : 1954년
시장 현황 : 점포 수 58개, 시장 면적 5,075m2
특산물 : 시래기, 곰취
먹을거리 : 시래기 밥상
주변 볼거리 : 두타연, 펀치볼, 박수근미술관, 국토정중앙천문대
전화번호 : 양구 중앙시장 상인회 033-481-3594
1. 양구 중앙시장 개요
양구는 버드나무 들판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버드나무는 강변에서 많이 자라는데 양구는 서울로 흘러드는 북한강이 시작되는 입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이 수로를 통해 강원도 내륙에서 생산된 물산들이 한양으로 흘러갔고 수도권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흘러들었다.
양구의 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시장 활성화 정책에 따라 무려 9개의 장이 개설되었지만 1970년대에 양구 중앙시장과 5일장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이는 양구 지역이 해방 이후 대부분 북한으로 편입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되찾은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데다 오랫동안 군사 지역이었던 탓에 시장 경제가 성장할 동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양구 중앙시장은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인근에 군사시설이 많아 면회객들이 끊이지 않고 양구를 찾고 있고, 양구의 하나뿐인 시장과 5일장을 보러 오는 사람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양구의 특산물은 곰취와 시래기, 버섯 등이며 특히 곰취는 전국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2. 양구 중앙시장의 어원
양구의 역사적인 지명은 온통 버드나무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 때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 불린 것 외에는 신라 때 버드나무 기슭이라는 뜻인 양록(楊麓), 고려 때는 버드나무 도랑이라는 뜻인 양구(楊溝)를 거쳐 버드나무 우거진 들판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해서 양구(楊口)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 쓰이고 있는 양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새로 부임한 감사가 금강산으로 가는 첫 길목인 양구를 지나다가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것을 보고 양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
중앙시장은 대부분 도시 중심에 있는데 그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구 중앙시장은 양구 읍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3. 시장의 형성과 발달 · 변천 과정
1) 정기시장의 생성과 소멸
양구시장에 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헌은 18세기에 쓰인 《동국문헌비고》이다. 당시 양구 읍내에서 5, 10일마다 장이 섰다는 기록을 보면 그때에 양구 지역에는 장이 하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만큼 도시의 규모가 작고 인구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양구의 인구가 317명이었다고 나오며 19세기 초반의 기록인 《관동지》에는 1,769명로 나오는 것을 보면 인구의 증가가 미미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수로를 통해 물자를 운송하는 일이 많았다. 양구는 북한강이 시작되는 곳이라 수로를 이용한 교통수단이 발달했고, 강을 끼고 있는 나루터는 장이 시작되고 성장하기 좋은 장소였다. 양구에서 장이 발달한 것은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뱃길을 따라 움직이는 물자들은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현물이 많았다. 가을이면 추수한 곡식들로 세금을 걷어 겨우내 조창에 보관했고, 얼음이 녹고 봄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3월에는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양구읍에서 80리 정도 떨어진 낭천강에 배를 띄우고 물품을 실었다. 양구를 출발한 배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의 두물머리에 이르게 된다. 양평(楊平) 또한 버드나무가 들어간 이름이다. 뱃길에 문제가 없을 시 양구를 떠나 5~6일 후면 현재 한강대교가 있는 용산에 도착했고, 싣고 온 세금을 군자감에 바쳤다. 용산을 조금 지나면 버드나무 꽃을 의미하는 양화(楊花) 나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강변의 버드나무가 사라지고 양화대교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이렇게 물길을 따라 세상과 연결되던 강원도 벽지 양구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20세기 초반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제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시장 활성화 정책을 펼치면서 양구에도 정기시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인구도 크게 증가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1913년 양구 지역에 4만 619명이 거주했고 1940년에는 5만 6,016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양구는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에서 일본인의 거주가 가장 적었던 도시였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던 것을 고려하면, 양구가 2차 산업 기반이 약한 도시였다는 측면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구의 증가와 맞물려 발생한 시장의 변화를 보면 기존의 양구장(읍내장)에 더해 9개의 장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임원경제지》에 등장했던 우망장은 1912년의 조사에서는 존재했지만 1923년의 조사에서는 사라졌다. 양구장과 불과 1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망장은 양구장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시대 양구의 중심이었던 방산면 장평리의 장평장이 1912년 조사에서 나타났다가 해방 이후 사라졌다. 장평이라는 말은 넓고 긴 들이 있어서 생긴 말이다. 장평리에서 주로 생산되었던 자기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방 이후 자기의 수요가 크게 줄면서 장평장 또한 소멸되고 말았다. 인제와 춘천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했던 용하장도 1963년의 조사를 끝으로 사라졌고 1970년대 이후 양구에는 양구장만 남았다.
해방 이후에는 양구의 많은 지역이 북한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 끝에 대부분의 땅을 되찾았지만 군사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그 이후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시장이 발달할 여지는 현격히 낮아졌다. 전쟁의 여파로 인구 또한 큰 폭으로 줄었다. 양구의 인구는 1966년 4만 1,606명을 기점으로 계속 감소 추세에 있다. 1960년대에 일시적으로 인구가 회복된 것은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이 그대로 정착하고, 군부대가 늘어나면서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이주해온 것과 관련이 있다. 양구에서 살았던 토박이들이 40% 정도로 감소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때 정책과 교통의 변화, 인구의 증가와 맞물려 늘어났던 양구 지역의 정기시장들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줄어들다가 종국에는 양구장 하나만 남겨놓은 채 모두 사라져버렸다.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양구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2) 양구장의 변화
양구장은 1960년대에 상설시장이 생겼고 정기시장도 여전히 공존했다. 양구읍 상리에 위치해 상리장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조선시대 말기 하리에 있던 장이 상리로 옮기기 전에는 우시장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영동의 물산과 영서의 물산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큰 시장이 열렸다고 전해진다.
영서의 물산은 주로 약초, 나물, 송이, 콩, 팥, 옥수수 등 밭작물이었고, 영동의 물산은 소금, 미역과 같은 어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동과 영서의 물건들을 유통시킨 것은 보부상들을 비롯해 선질꾼이라 부르는 행상단이었다. 선질꾼은 중간에 휴식을 취할 때 서서 쉰다고 해서 선질꾼 또는 선지게꾼이라 불렸다. 이들은 해방 이후 트럭 등의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양구에는 과거의 경제 상황을 알려주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주막이 늘어서 있던 주막거리, 신라 말기에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이곳에 군량을 쌓아둔 것에서 유래한 군량리, 이 군량을 생산했을 둔전밭골, 옹기점이 있었던 옹기점말 등이 그렇다. 이들은 또 대부분 강변에 위치했던 것이 특징이다.
양구읍에는 상설시장과 정기시장 외에 가축시장도 열렸다. 과거 하1리에 있던 우시장을 중1리로 옮겨 1994년에 새로 개장한 우시장은 5일장과 같은 날에 장이 섰는데 새벽 6시에 열어 오전 9시가 되면 파장을 했다. 한우, 돼지, 개 등이 거래되었으며, 가장 많이 거래된 품목은 역시 한우였다. 하지만 홍천이나 횡성의 우시장이 확장되면서 양구의 우시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양구중앙시장은 2007년 12월에 시설 현대화 작업을 추진했다. 아케이드 설치 및 바닥 포장, 홍보판 설치, 간판 정비, 화장실과 주차장의 정비 등을 통해 시장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시장 안에는 꿀과 백자, 산나물 등 양구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판매하는 매장과 쉼터가 동일한 공간에 있다.
4. 양구의 지리 · 지역적 특징 및 생산 품목
1) 군사 지역 양구
조선시대에 송구빈이라는 사람이 양구를 두고 ‘고을이 고요하니 마음마저 고요하고 사람이 드무니 할 일도 드물구나’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 양구의 지리와 분위기를 잘 표현한 시 구절이라 하겠다. 그만큼 양구는 궁벽하고 외진 땅이었다.
양구가 지금의 행정 체계를 갖춘 것은 1979년의 일이다. 20세기 초반인 1908년에 일시적으로 화천에 병합된 적이 있고, 1940년 화천댐 건설과 1973년에 완공된 소양댐으로 인해 수몰 지구가 생기면서 지도에 변화가 생겼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 편입된 적도 있다.
화천댐과 소양강댐은 양구군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었던 중망평야를 비롯한 많은 논밭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로 인해 그나마 많지 않던 양구의 평지가 많이 사라졌고, 도로까지 함께 수몰되어 교통이 더욱 불편해졌다. 북면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땅이 잠기는 탓에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에는 양구읍을 비롯해 남면, 동면, 방산면, 해안면을 포함해 5개 읍면과 76리가 양구군에 속해 있다.
양구는 강원도의 한복판에 있어 서쪽에 화천, 서남쪽에 춘천, 동남쪽에 인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 내륙 지방이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산지가 많은 산간 지역인데, 의외로 주요 산업은 농업이다. 산업 구조는 1차 산업과 3차 산업이 거의 절반씩 양분하고 있으며, 2차 산업은 2%에 그칠 정도로 미미하다.
산간 지역이지만 농업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수입천과 서천이 북한강과 만나는 지역에 평야가 펼쳐져 농사짓기에 좋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데다 대표적 군사 지역으로서 군부대가 많은 탓에 숙박업소와 같은 서비스 산업(3차 산업)의 비중이 높다. 다만 소비성이 강하기 때문에 물가가 강원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렇게 군부대가 많아서 다른 농촌 지역에 비해 젊은 사람들의 거주 비율이 높다는 점은, 부식이나 먹을거리 개발을 통해 시장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2) 양구의 관광자원
양구는 군사 시설이 많아 2차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양구에서 첫손에 꼽히는 풍경은 두타연이다.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통제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드나들 수 있다. 울창한 산림과 시원한 폭포, 맑은 계곡이 절경을 이루는 두타연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야생이 주는 싱싱한 힘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두타연 안쪽에는 동굴이 있는데 반석 위에 말발자국이 찍혀 있어 신비함을 더하고, 주변에는 산양들이 더러 눈에 띄어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 하나의 뛰어난 풍경은 해안면에 있는 펀치볼이다. 펀치볼은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분지로, ‘해안 분지’라는 이름보다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산꼭대기에서 분지를 내려다보면 ‘화채(Punch) 그릇(Bowl)’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8년에 세워진 을지전망대에 올라가면 펀치볼의 아름다운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펀치볼이 속한 해안면은 과거 호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해안이라는 이름은 원래 ‘바다 해(海)’를 썼는데 지금은 ‘돼지 해(亥)’를 쓰고 있다.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해안면에는 사람이 마음 편히 다니기 힘들 정도로 뱀이 많았다. 큰 불편을 겪던 사람들이 도가 높은 스님에게 좋은 방도를 물었더니 뱀과 상극인 돼지를 이름에 넣으라고 조언했다. 이름을 바꾼 뒤에는 기적처럼 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또한 양구에는 양구가 낳은 걸출한 현대화가 박수근의 미술관이 있다.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명을 받아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는 박수근은 18세에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서 수채화로 입선한 이후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시장〉, 〈빨래터〉, 〈절구질하는 여인〉 등 서민들의 삶을 담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2001년에 건립된 박수근미술관은 국토정중앙천문대와 함께 양구를 상징하는 명소가 되었다.
3) 양구의 특산물
양구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해 감자와 같은 서류, 잡곡, 콩류 등이다. 해안면에서는 시래기가 많이 나고 약재인 당귀도 많이 생산된다. 이 중에서도 양구 쌀은 특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양구의 모래 한 말은 쌀 한 말과도 바꾸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구의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는 쌀은 밥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름을 떨친 이천 쌀이나 여주 쌀과 함께 왕실에 진상될 정도였다.
산지와 초지가 많은 양구는 목축업도 활발한 편이다. 양구 지역 전체에서 한우나 돼지, 산양, 사슴 등의 사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방산면은 양봉으로 유명해서 양구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숲에서는 밤이 많이 나고 도토리, 잣, 대추도 풍성하다. 송이버섯, 표고버섯 등 버섯류의 생산도 많다. 내륙이지만 화천댐으로 만들어진 파로호에서 수산물을 거두기도 한다.
최근 들어 양구에서 가장 이름난 특산물은 곰취라는 나물을 꼽을 수 있다. 봄을 상징하는 나물이라 할 수 있는 곰취는 어린잎을 날로 먹기도 하고 살짝 데쳐서 먹기도 하는데, 짙은 향과 쌉쌀한 맛이 난다. 뿌리와 줄기는 한약재로도 사용할 정도로 몸에 좋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곰취의 주산지는 양구이며, 주요 산지는 대암산 자락이다. 양구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곰취를 널리 알리고 재배 농가를 돕기 위해 2004년부터 곰취가 제철인 5월에 곰취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곰취축제에서는 곰취로 만든 전병과 찰떡, 절임, 장아찌 등 곰취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 양구의 자기
조선시대에 양구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자기를 많이 생산했다. 방산면 장평리에 자기를 만드는 원료인 고령토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고령토가 100만t 이상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산지가 많아서 자기를 굽는 데 필요한 땔감도 풍부해 자기를 생산하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18세기에는 양구에 자기를 만드는 곳이 21곳이나 있었다고 하니, 과거 양구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기는 양반들이 제기나 그릇으로 사용했기에 수요가 많았다. 양구에서 생산된 자기는 물길을 통해 운송되거나 보부상이나 선질꾼 등에 넘겨졌다. 이들은 동면에 있는 돌산령을 넘어 인제로 간 다음 진부령을 건너 고성으로 가거나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나가 해안 지역에 자기를 판 뒤 그곳의 해산물을 사서 양구장으로 돌아와 장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면의 돌산령은 평소에도 나무를 하고 약초를 캐던 곳으로,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돌산령지게놀이’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전해준다.
물길을 따라 춘천 지역으로 나간 자기는 한양과 인근 지역으로 팔려 나갔다. 그러나 해방 이후 놋그릇이 흔해지면서 자기는 수요를 잃었고, 여기저기서 뜨겁게 타오르던 가마는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방산면에 가면 2006년에 개장한 양구 백자박물관이 있어 양구 자기의 발달사를 돌아볼 수 있다. 방문객을 위한 일일체험이 가능하며, 3개월짜리 과정에 참가해 백자 굽는 법도 배울 수 있다.
5. 양구 중앙시장의 위치와 구성
양구 중앙시장으로 가는 길은 춘천이 길목이다. 춘천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 양구에 이르게 되고 읍내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왼쪽으로 양구 중앙시장이 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주차장이 보이고 그 안쪽에 로마자 ‘Ⅱ’ 모양의 양구중앙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 가면 차 없는 거리로 조성한 호젓한 골목을 지난 뒤 골목 어귀에서 양구 중앙시장의 입구를 찾을 수 있다. 금강초롱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가로등과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1990년대까지는 5, 10일에 열리는 5일장이 양구 중앙시장으로 들어가는 약 100m에 이르는 소방도로에 길게 늘어섰다. 지금은 주차장 맞은편에 ‘양구 5일 장터’라고 쓴 입간판을 중심으로 주차장 전체가 5일장터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양구장에서는 지역에서 생산된 면화나 면포, 마포와 같은 옷감들과 어염, 사기 등이 주로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까지 양구에서는 자기 외에도 인삼이나 오미자, 복령, 꿀, 송이버섯, 잣 등의 한약재와 특용작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시장을 통해 팔려 나갔다.
오늘날 양구 중앙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양구읍을 비롯한 인근의 방산면, 남면, 수입면 사람들이다. 보통 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오전에 장을 보러 나오고 양구읍에 사는 주민들은 오후에 장을 보러 나온다. 다시 말해 오전에는 어르신들이 소일거리 삼아 많이 찾아오고, 오후에는 반찬 재료를 사러 나오는 가정주부가 많다 할 수 있겠다. 상설시장인 양구 중앙시장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류, 식료품과 공산품 등을 주로 팔면서 양구 지역의 중심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정기시장인 양구5일장은 5, 10일로 끝나는 날에 열리는데, 상설시장 옆에 있는 주차장과 그 인근에 5일장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말 그대로 북적거리는 ‘장터’로 변한다. 지역의 5일장들이 대부분 그렇듯, 양구의 5일장도 가벼운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이야기와 정을 나누는 친목의 공간이 된다.
6. 먹을거리
양구에서 가장 유명한 먹을거리는 시래기이다.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시래기는 무청, 즉 무의 줄기와 잎을 말린 것을 가리킨다. 시래기와 우거지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거지는 배춧잎을 말린 것이다.
시래기는 무청을 두 달 정도 말려서 만드는데, 사실 겨울이면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익숙한 식재료다. 무치기도 하고 국을 끓여 먹기도 하는 시래기는 비타민과 미네랄, 식이섬유가 풍부해 김치와 함께 겨울철 건강을 지키는 데 뛰어난 음식이다.
시래기 생산이 왕성한 곳은 펀치볼이 있는 해안면이다. 해안면은 해발 600m에 이르는 고지대라는 자연환경 덕분에 밤낮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부드럽고 구수한 맛을 지닌 시래기를 만들어낸다. 해안면에서는 시래기의 재료가 되는 무청을 풍부하게 얻기 위해 특별히 시래기 전용 무를 재배한다. 시래기 전용 무는 일반 무보다 작아 상품성은 낮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는 무는 말려서 무말랭이로 먹거나 동치미를 만들어 먹는다.
영양이 풍부한 시래기는 된장국을 비롯해 갈비나 고등어찜, 부침, 무침 등 다양한 형태의 요리에 사용할 수 있다. 양구중앙시장에서 큰길 건너편에 시래기가 들어간 음식을 파는 전문 식당이 있으며,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다.
양구 [인문학박물관&파로호 꽃섬&양구 중앙시장]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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