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14일 (금) 9호선 가양역 <허준 박물관>
양천허씨 대종회 : http://www.heo.or.kr
허준 박물관 : http://www.heojun.seoul.kr
허준(許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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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별칭/관직명 : 구암(龜巖) |
ㆍ세수(世數) : 20 |
ㆍ봉군(封君) : 양평군 |
ㆍ공신(功臣) : 호성3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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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시조 허선문의 20세손 / 동의보감 완성 /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선조조) / 봉군은 양평군(陽平君)
1539년(중종34)∼1615년(광해군7). 조선 중기의 어의(御醫).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시조로부터 20세손이다.
부인은 안동김씨.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許碖)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어머니는 일직손씨(一直孫氏=安東孫氏)이며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그런데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1574년(선조 7)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내의·태의·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수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 [찬도맥결 (纂圖脈訣)]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 (纂圖方論脈訣集成)] 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楊禮壽)·이공석(李公글)·남응명(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일영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政院)·사헌부·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加資)를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으며, 그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 태의 양예수·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왜란을 만나
의인(醫人)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었다.
그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년 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25권 25책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 출판하였다.
1601년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救急方)]을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任元준)의 [창진집(瘡疹集)]을 [두창집요(痘瘡集要)]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新纂癖瘟方)]
1권과 [벽역신방(癖疫神方)]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신찬벽온방]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瘟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簡易癖瘟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 후자인 [벽역신방]은 그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태의·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熟馬) 한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陽平君正一品輔國崇祿大夫)를 가자(加資)받았다.
그런데 종래 우리나라의 계급으로는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東班)의 부군(府君)과 보국(輔國)의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청에 할수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승하 했을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
선조가 승하한 뒤 종래의 예에 따라 주치의 수의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대죄(待罪)를 하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었다.
1615년 8월에 77세를 일기로 별세하게 되자, 호성(扈聖)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2003년 2월 20일 정부에서 우리나라 과학사를 통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과학기술인의 발자취를 소개, 영구 전시보존하기 위하여 "과학 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건립하여
의학 부분에 양평군 허준(陽平君 許浚) 선조를 선정하고 모셨다.
또한 2009년 7월 31일 칼리브해 바베이도스 수도 브릿지타운에서 유네스코는
우리나라의 동의보감 초간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의성 허준(1539-1615)이 조선조의 선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동의보감이
의학서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이 됐다.
첫댓글 한의사 보수교육 받을때 마다...가는곳.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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