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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르 신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창살 너머의 인영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고해소에 들어와 성호경을 바친 지 40분, 신자는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자매님. 죄를 고백하십시오. 자매님께서 진정으로 통회하고 계신다면 그 분께서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겁니다."
신부는 신자의 침묵에 '낙태라도 했나 보다' 막연히 유추했다. 다른 고해자들이 없길 망정이지, 안 그랬음 항시 정숙해야 하는 고해소가 항의로 들끓었을 것이다. 신부의 하해와 같은 인내심도 이제 막바지였다.
"자매님."
"…죄를 지었습니다."
목소리는 동심원 퍼지듯 차분하게 울렸다. 신부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흥분을 감추며 "말씀하십시오." 재촉하곤, "고해하신 지 몇 달, 몇 주, 몇 일 되십니까?" 물었다. 신자가 불쑥 말했다.
"반성한 적 없습니다."
"예?"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 해도 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성서도, 아버지도 죄라 하시지만 전 하느님을 모독한 게 아닙니다. 그저 함께 하고 싶었던 건데. 왜 음란하다 책망 받아야 합니까."
"…연인 분과… 혼전에 한 이불을 덮으셨습니까?"
"그이기에 한 결정입니다. 혼전이건 혼인 후이건 상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마… 절 떠날 겁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한테 맞은 자리가 쓰라렸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주사위를 던진 건지도 몰랐다. 외박하고 귀가했을 때, 욕조에 온수 받아 두었다며 도미닉은 눈을 피했다. 아버지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송연하게 날뛰었고 고용인들은 쉬지 않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레베카는 눈을 감았다.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별을 고하면 그를 보내줄 수 있을지."
고저 없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성서의 말을 어겼음에도 죄책감조차 없는 저지만. 힘을 주십시오. 이기적인 저라도 사하여 주십시오. 그를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는 사흘 째 연락 두절이었다. 연락 없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피가 말랐다. 가슴이 난자 당했다. 하여 버틸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신부는 고개 숙이는 레베카를 곤혹스럽게 보았다. 얼핏 보이는 차림새론 명문가 영애인데. 반성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용서해 달라니, 남편도 아닌 사내를 잃지 않게 해달라니 기가 막혔다. 페도르 신부는 황소처럼 눈꺼풀을 껌벅거렸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자매님."
"……"
"저는 비록 교황은 아니나 그 분의 후덕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께서는 한 문이 닫히는 곳에 새 문을 열어주십니다. 이별은 시작일 수도 있어요. 결과가 어떻든 사랑이란 것 자체가 축복이고 기적 아니겠습니까."
"…흑……"
"보속은… 감내하시는 겁니다. 반려께서 떠나시더라도, 살아서.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스테인드글라스. 햇살이 남실거렸다. 레베카는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분께서 열어주신 새 문으로 가세요."
바야흐로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의 여단이 아직 걸려있는데도 레베카는 잠에서 깨어났다. 요 며칠 계속 잠을 자지 못했다. 기척을 읽은 도미닉이 노크를 하고 진입했다.
"아가씨. 베드로 후작님께서 전보를 보내셨습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이리 줘요."
놀란 그녀는 조급하게 전보를 펼쳤다.
[내 친우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니 11시까지 준비해]
멍하게 보다 전보를 바삭 구겼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후작님께서 11시까지 데리러 오신다네요."
그녀의 안색은 어둑했다. 매연처럼. 도미닉의 가슴이 잘게 부서졌다.
단장하고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말굽 소리가 들리자 대문으로 나갔다. 마차에서 후작이 하강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갛게. 그녀는 불철주야 그를 그리워하며 생각했는데. 역지사지하여 생각하면 그날 밤 뒤 그녀가 얼마나 불안했을 지 짐작할 수 있었을 탠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포옹하려 두 팔 벌린 그의 따귀를 세차게 때렸다. 그의 낯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는 눈을 매섭게 치켜 떴다 그녀의 표정에 말을 잃었다.
"…… …레베카."
얼마나 학수고대했던 연락인데. ‘잘 지냈냐’도 없었다. 몇 시까지 준비하란 명령이 다였다.
"……미안해."
그가 고개를 돌리자 바스러졌다. 변명이라도 해주지. 아팠다, 바빴다, 얼굴 보기 계면쩍었다 해명하는 척이라도 해주지. 진정 날 떠날 속셈인가요? 야속해 울음 참기도 벅찼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참고 마차에 탔다. 후작은 마부에게 일을 비밀로 하라 명하고 문을 닫았다. 저번과 같은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도미닉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질책의 푸른 불꽃이었다. 후작은 그를 외면했다.
"출발해."
-이럇!-
바론은 런던에 이런 미인이 있었나 감탄하고 있었다. 그 놈의 깐깐한 얼낫 백작 여식만 아니었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지할 탠데. 바론의 눈이 번뜩였다.
"레베카, 이쪽은 바론 안토니오 사바토 씨. 여기는 레이디 레베카 로즈메리 얼낫."
"Molto piacere, signore."
"Mi piaci, mia bellezza. 이탈리어가 수준급이시군요."
"그럴 리가요. 아직 많이 부족하죠."
"하하. 환영해요. 자, 앉으시죠. 자네도 앉게."
하녀가 홍차와 여러 맛 키세스(kisses: 구운 머랭 종류의 디저트로 땅콩, 체리, 코코넛 등이 들어 있다. 질감은 가볍고 쫄깃쫄깃하다)를 도일리 위에 내왔다. 키세스는 언덕 대신 장미 모양이었다. 그 외설적인 조롱에 후작이 도끼눈을 했지만 바론은 시치미 뚝 떼고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실례가 아니라면 연령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올해로 스물이에요."
"오호. 사랑하기 가장 좋을 때군요."
바론은 너무 아쉬워 아랫배가 땡겼다. 아름다운데다가 영계이기까지. 엘러릭은 이런 떡을 두고 품을지 안 품을지 숙고했다니. 어이가 대기권 밖으로 날아갔다. 갑자기 갑갑해졌다. 혈기는 이팔청춘이지만 몸과 체면은 30대에 속박되어 있었다. 10대, 20대로 돌아가 원 없이 사랑해봤으면. 생각만으로도 데일 정열적이고 거침없는 사랑을! 공공장소에서 무람없이 키스하고, 사랑에 단단히 미치는!
"Alerick, you naughty boy. I hope you are treating this fair lady well?"
"I am."
"Is he telling the truth?"
레베카는 후작을 잠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키세스를 한 입 먹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달아서 오히려 찝찝했다. 입에 넣은 걸 뱉을 수도 없고 오물오물 대충 삼켰다. 그리고 귀퉁이 갉아먹은 과자를 접시에 내동댕이쳤다. 갑자기 신경질이 났다.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는 '사랑' 때문에 그의 정체성을 저버릴 순 없다. 옳은 선택을 하는 건데도 뭐야, 이 더러운 기분은. 이럴 줄 알았음 차라리 그 파티 때 그녀에게 말 걸지 않고 관망만 할 걸 그랬다. 남남으로 살아갈 걸 그랬다. 옆에 그녀의 손이 보였다. 잡을까 말까 지체하다 거두었다. 후작은 벌떡 일어나 "잠깐 실례하지" 정원을 나갔다. 바론이 체리 키세스를 집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15-
엘러릭은 담밸 꼬나들다 그것마저 바닥에 집어 던져 짓이겼다. 미치광이처럼 말이다. 단순한 화풀이일까? 아님 자신 안의 뭔가를 뭉개고 있는 걸까. 그는 담배 잔해까지 걷어차고 입술을 깨물었다. 담배와의 한바탕 후에도 가시지 않는 역정에 성나게 철문을 통과했다.
투레질과 말굽 소리에 레베카는 박차고 일어나 담벼락 쪽으로 달렸다. 바론은 얼떨결에 따랐다. 철문 밖으로 나오니 요연해지는 베드로 가(家)의 마차가 보였다. 바론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마구 웃어제꼈다. 주저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녹진한 구석이 있는지 레이디는 바른 걸음으로 테라스로 돌아갔다.
"아하하하하… 아, 실례. 아가씨, 괜찮아요?"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침착하게 반박했지만 그것은 체념이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가 놓는다면 그녀도 놓을 것이다. 막지 않을 것이다. 인연이든 운명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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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선 신사는 계단에서 제동한다. 그리고 상공을 우러른다. 호프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다운 금천. 막원하게 종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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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득. 비둘기들이 구구구구 울며 날아올랐다. 결혼을 축하하는 성당 종소리. 뎅그렁뎅그렁. 합창단의 노랫소리가 쟁쟁한 여음을 남겼다. 레베카와 엘러릭은 세인트 제임스 팰래스(St. James' Palace)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한 어린아이가 빵 부스러기를 뿌리자 뿔뿔이 있던 비둘기들이 한 곳에 모집 되었다.
- Happy, happy, happy pair!
None but the brave,
None but the brave,
None but the brave, deserve the fair ♪ -
후작은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이번 만남은 그가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를 그녀는 독촉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그녀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문을 닫은 채로 정적이 흘렀다. 그의 얼굴은 며칠 사이 훌쭉해져 있었다.
-구구구구-
비단이 바스락거렸다. 여러 번 연습했지만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스러지듯 이별을 선고했다.
"I’m afraid this is the end for us."
그녀는 목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그의 손 바로 옆에 내려놓았다. 후작의 공허한 눈이 커졌다 얼었다. 그녀는 그에게 장미보다 싱그럽게 웃었다. 사고 회로가 중단 되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싱긋. 사뿐하게 일어섰다.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베드로 후작님. 조심이 들어가세요.”
그게 다야? 그는 곧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되물었다. 날 잡지 않을 건가? 왜 헤어지는 지 묻지 않을 건가? 최소한 눈물이라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산뜻하게… 날 사랑하지 않았나?
뒤돌아봐. 바론의 집에 혼자 두고 가버려 심통 부리는 거라고 말해봐. 그 짧은 순간 얼마나 절실히 기도했는지 모른다. 차단하고 부인했던 신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졌다. 분명 자신이 잘라낸 사람인데. 진탕 속을 구르는 듯한 상실감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고이기 시작했다. 이별이란 생각에 그는 술, 마약에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쩔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오면서 울분이 팽창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웃는 얼굴에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은 믿었다. 그가 마음을 바꾸고 두 가문의 반대를 무릅써줄 거라고. 하지만 그녀를 부르는 음성도. 꿈결 같던 손길도. 그는 그녀를 포기해버렸다. 그게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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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게 끝입니까?"
눈썹을 치켜 올린 채로 찡그리자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나온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더니.”
알렌은 비웃는다. 가관이다. 좋으면 ‘얼씨구 좋다’하면 되지 사람들은 구구절절 이유를 대고 헤어진다. 신파극도 아니고. 너무나 허망한 이별이다.
“사랑 어쩌고 하시더니, 그냥 인연이 아니었던 거네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인연이 아닌가요?’
"이루어지지 않은 것 자체가 운명일 수도 있죠."
'후후. 운명이라. 솔직히, 처음엔 실망했어요. 평소엔 그렇게 반항적이면서 상류층의 룰엔 쉽게 굴복해버리는 그에게. 그가 진정 내 ‘운명’이라면, 야반도주라도 해서 해피엔딩일 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나 혼자 허영심에 젖어 멋대로 기대한 건데, 실망했다 하면 불공평하겠죠? 그대, 알렌이라고 했던가요?’
“네.”
‘아버지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귀족은 아무리 방황해도 끝엔 가문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운명이란 건, 그저 허울 좋은 변명이에요. 나 때문이다, 자책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에게, 인간보다 뛰어난 자에게 기대는 게 쉽죠.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알고 보니 나도 약한 사람이더군요. 그와 헤어지고 나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신의 뜻이라고… 이게 그와의 운명이라고, 순응하고 나니까 편해졌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엘러릭은 앨리스 대공비 마마와 혼례를 치르고 런던에 남았을 거에요.’
“결론만 말하세요. 저 배고픕니다.”
그녀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귀신은 목소리가 없는데도 종소리 같은 그 웃음이 들리는 듯 하다.
'결론은, 운명은 무슨, 다 개소리라는 거지요. 우리가 헤어진 건 우리 탓이에요.’
“공주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는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귀신은 정색하고 씁쓸해진다.
‘미혼으로 남았어요. 윗폴크로 돌아간 뒤에도 애인은 많았던 모양이지만.’
“마담은요?”
‘저도 미혼이죠.’
“아니, 그럼 왜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 늙어서라도 이어질 수 있었을 탠데요.”
그녀는 조그맣게 웃다가 말한다.
‘누군가 의뢰한 거겠죠? 나와 그와의 사이를 조사해달라고.’
“후작님께서 친히 의뢰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갑자기 그녀가 어디로 떠난 것도 아니고, 둘은 만나서 표면적인 합의하에 헤어졌다. 그녀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면 그와 만나기 전이나 헤어진 다음이어야 하지 않나? 단순히 그녀와의 추억을 위해 의뢰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는 그녀의 인생사를 전부 훑는다.
“아.”
.....
“후작은 개뿔.”
.....
“그럼 이승을 떠나지 않은 건 후작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귀신은 대답이 없다.
여전히 고린내가 고약한 거리. 어느덧 계절이 정복해 더 살풍경하다. 한때는 번잡했던 상가가 얼마나 으스스해질 수 있는지 실천한다. 귀뚜라미 시체와 동사한 쥐가 보인다. 사람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이 곳에 다시 출몰한 인영. 저번처럼 곧장 한 곳으로 향하지만 마냥 막힘이 없는 건 아니다. 목적지 앞에 도착해도 문을 열지 않으니까. 대신 옷매무새를 추스른다.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 몇 분이나 손잡이를 노려보았을까? 눈앞에 추접한 가게 내부가 두 번째로 펼쳐진다. 추위 덕분에 숨 쉬기가 전보다 약간 수월하다.
“…계시오?”
안쪽에서 부스럭. 머리 새집 진 알렌이 나와 인사한다.
“오셨습니까?”
알렌의 행실은 건성 그 자체다. 잔상을 읽느라 체력을 왕창 소모해 노곤한 탓이다. 이틀을 내리 잤지만 아직도 맥아리가 없다. 신사는 사흘 전에 앉았던 구석에 좌정하고 알렌은 기계처럼 그 차를 대접한다. 신사는 묵묵히 들이킨다. 한시 빨리 꿈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알렌은 탁자 위에 엎어져 입만 빼놓고 웅얼거린다.
“전 당신이 베드로 후작인 줄 알았습니다. 덕분에 아주 멋지게 엿 먹었어요.”
“역시 들켰군.”
신사는 찻잔의 온기가 남은 손으로 깃을 내린다.
“베드로 후작과 당신의 어머니. 둘은 참 어이없는 이유로 헤어졌지만 그녀가 했던 말은 사실입니다. 당신은 색정이 아닌 사랑으로 인해 태어났고 그녀에게 진정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참 어이없는 이유라 하면, 뭔지…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이야기가 기니까 요악해서 말하겠습니다. 후작은 베드로 가의 사람답게 떠받아지며 곱게 자랐는데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면서 상황이 복잡해지고 자기의 쾌락주의 신념을 위협받았습니다. 당시 앨리스 대공비와의 혼담도 있었고 얼낫 백작의 반대도 있고 해서 당신 어머니와의 결혼이 힘들어지자 짜증도 났습니다.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멍청하게도 그 상황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고 도망쳐 당신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상류층의 암묵적인 룰을 깰 용기가 없는 후작에게 당신의 어머니는 당연히 실망. 그녀는 내가 뭘 바라냐, 식으로 이별을 상큼하게 받아들였는데 그에 후작은 자기가 헤어지자 해놓고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괴로움만 알고 남의 것은 모르는 터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날 사랑하기는 했나 이를 갈다가 그 해 윗폴크로 떠났습니다. 왕족과 형을 포함한 런던의 모든 인연을 끊고. 그 길로 당신의 부모님은 연락 두절되었습니다. 고로, 참 어이없는 이유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이 그렇게 간단히 헤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서로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차근차근 신용을 쌓아가야 하는데. 첫 눈에 반해 갑자기 사귄 거였으니. 아,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짧고 굵게, 뭔 말인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
신사는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더 따라 마신다.
“…후작이 어머니와 헤어질 당시, 그는 내 존재를 알고 있었소?”
“당신 어머니도 그와 헤어진 다음에야 안 걸, 설마.”
“…아직도…?”
“모를 겁니다. 후작과 당신의 어머니는 지난 30년간 서로에게 편지 한 장 쓴 적 없으니까요. 당신에 관해 뒷소문이 돌았어도 런던에서만 돌았지 윗폴크까지는 무리. 베드로 공작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후대 당주는 그의 장자니, 당신을 호적에 올릴 가치를 못 느꼈을 겁니다.”
“…후작이 내 존재를 알았다면… 달라졌을 것 같소?”
“전 예언가가 아니라서. 15년 이상 전의 일만 취급합니다.”
“현실이 두렵소?”
“귀찮습니다.”
“…그렇군. 수고했소. 돈은…”
“제가 말 안 해도 대충 점 찍어둔 가격이 있으실 태니 여기에 두고 가십쇼. 여기, 사진.”
알렌은 레베카와 엘러릭의 사진을 꺼내놓고 곧장 일어난다. 늘어지게 하품하고 불퉁하게 말한다.
“내고 싶은 만큼 내란다고 쥐꼬리만 내시면 인생 힘들어지실 겁니다. 살펴 가십시오.”
신사는 사진을 아련하게 보다 품 속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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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 따뜻함이 생각났다. 회초리를 들고 계실 때도, 꾸중을 하고 계실 때도 그녀는 왠지 한결같이 따스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악다구니에 가까운 야단을 맞으면 그녀는 그를 꼭 안아줬는데 그에 울적함이 녹아버릴 정도였다. 그와 반대로 할아버지는 차갑고 지독한 분이라 어머니에게 응석을 유난히 부리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미혼인 처녀가 아이를 배다니, 가손(家損)도 이런 가손이 없다며 하나뿐인 딸을 얼낫 가 영토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했고 손자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트집을 잡아 종아리에 불이 나게 했다. 왜 어머니는 시내에 나갈 수 없냐며 대들었다가 매를 맞고 울면, 전(前) 집사 도미닉이 사탕을 쥐어주었다. 도미닉은 고용인인데도 대하기 어려웠지만 다감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듯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린 그는 불운했다. ‘아버지’의 ‘아’ 자만 꺼내도 회초리를 드는 할아버지. 쓸데없이 넓어 그를 오히려 초라하게 했던 저택. 그의 하루는 가정교사의 잔소리로 시작해 끝났다. 어머니와의 좋은 추억도 많은데, 이상하게 유년기를 생각하면 아주 무섭고 싫었던 기분만 떠올랐다.
진실은 나중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았다. 아이를 낳겠다는 딸의 고집에 일부로 져주신 것. 미혼모와 사생아는 사회에서 배척, 매장당하기 때문에 딸과 손자를 숨기신 것. 하룻밤 장난의 산물이라고 욕하면서도 그를 후대 얼낫 백작으로 키우신 것. 베너딕트(Benedict). 축복이라는 뜻의 그의 이름도 할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제안하신 거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를 당시. 할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부의 빈 자리를 느꼈을 때, 그는 철없게도 그의 상처에만 급급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이기심 때문에 임신한 어머니를 버렸다고 했다.
사춘기가 심해질수록 비겁한 그 작자를 증오했지만, 문제는 아무리 물어도 누가 그의 아버지인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거였다. 커서 사회에 나가고, 혼자서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갖춰졌을 때는, 그를 버린 생부 찾아서 뭐하나, 하고 그 존재를 속에서 죽여버렸다. 1년 전, 밀봉이 풀리기 전까지.
어머니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기아처럼 앙상한 그녀의 손을 잡고 끄윽끄윽 우는데, 그녀는 그를 ‘엘러릭’이라고 불렀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미소 지으며 그리 불렀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가문을 벗어나 듣도 보지도 못한 달동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는 미루었던 아버지의 신원을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한 퍼브에서 ‘알렌’이라는 자에 관해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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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도착했습니다.”
회상에서 깬 그는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베드로 가의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저택이다. 웅장하기보다는 아담하지만, 총안 있는 흉벽이 위풍당당하고 그림 엽서에 나올 법한 경치다. 격자 모양의 높은 창문들이 수십 개고 5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상을 한참 내려다본다. 갈색 수풀과 경사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산울타리. 이웃이 없는 인근이라 평화롭지만 추운 계절을 보내기엔 쓸쓸할 것 같다. 지나치게 큰 정원엔 우람한 하인들이 나무를 다듬는다. 오크나무, 소나무, 전나무, 다른 식물도 많지만 유독 장미 덤불 천지다. 제철에 백화요란하면 신의 꽃동산이 될 거다.
어머니도 장미를 좋아했지. 그는 대문으로 가 종을 울린다. 부리나케 나온 하녀가 누구시냐며 인사하다 소스라친다. 그가 비장하게 말한다.
“후작님께 손님이 찾아왔다고 고해드리시오.”
하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응접실로 안내한 뒤 서재로 달린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지만 급해지는 걸음을 주체할 수 없다.
-벌컥-
“후, 후작님!”
초로의 노인은 안경을 벗는다. 그의 손엔 시집이 들려있다.
“어인 일이냐?”
“후작님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헌데 그 분이…”
하녀는 벽에 걸린 노인의 초상화를 일별한다. 25년 전 그려진 초상화로 여기 여고용인들 사이에선 유명하다.
“브랜든(에드먼드의 셋째 아들)이냐?”
“아닙니다. 그러나 꼭…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라 하시더냐?”
“미처 묻지 못하였으나… 현재 제 1 응접실에 계십니다.”
“대체 누구길래 이리 호들갑인지 모르겠구나. 왕실 분이라도 되느냐?”
노인은 마르나 정정하다. 군더더기 없는 거동으로 응접실로 간다. 그는 바르게 앉아 있는 방문객을 본다. 왜 하녀가 수선을 떨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우뚝 멈추어 그의 축소판 같은 손님을 주시한다. 손님은 엄숙하게 일어나 허리를 굽힌다. 그의 아들임이 자명한 남자에게 노인이 바들거리며 하문한다.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느냐?"
남자는 톱해트를 벗는다.
"…아……"
태양의 황금 같은 금발. 노인의 심장이 콩닥거리며 저며온다.
“……아……아………”
"…베너딕트 핏츠윌리엄 얼낫 백작. 후작님을 뵙습니다."
질끈, 억누르듯 감은 엘러릭의 눈에서 진한 눈물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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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일 완결편과 함께 찾아 뵙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고 힘한 2011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