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하나의 지배적인 인식 때 때문에 다른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4월 1일이 무슨 날이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만우절이라고 답한다. 만우절은 4월 1일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움켜쥐고 있는 지배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만우절 외에는 다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4월 1일은 매우 다양한 인식을 제공하는 날이다.
4월 1일이 무슨 날이냐는 질문에 나머지 한 분에 해당하시는 이들은 무슨 말을 할는지 궁금한 일이다.하니리포터를 아시는 분들은 하니 리포터 창간일 아니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니 리포터는 2000년 4월 1일 창간되었고 올해로 2주년을 맞는다. 공교롭게도 하니 리포터와 동아일보의 창간 일이 동일하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다. 동아일보의 친일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설립된 지 21년 되는 날이 아니냐고 말이다. 81년 4월 1일 공정거래법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 시행되면서 공정거래제도가 본격 도입됐다. 경제기획원 산하의 공정위는 개발 연대의 그늘인 독과점적 시장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81년부터 해마다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선정해 규제하고 각종 불공정 거래행위를 단속, 기업들엔 '경제검찰' 로 불려왔다. (매일경제신문사, 『경제기획원33년-오욕의 한국경제』, 1999, 중앙일보, 2001년 4월 2일자 참조)
또 나이 많으신 어머님들 중에는 가족 계획의 본격적인 시행을 떠올리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가족계획이 국가 사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1961년 4월 1일이다. 1961년 4월 1일 대한가족계획협회의 창립과 함께 국책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시작된 것이다. (한겨레신문, 2001년 4월 25일자, 가족계획40년 변천사 한눈에)
이밖에 4월 1일은 급행열차가 본격적으로 개통된 날이기도 하다. 1908년 4월 1일부터 부산과 신의주 사이에 급행 열차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됐다. (오늘 속으로, '경의선 개통', 한국일보, 2001년 4월 3일자) 경부고속철도에 비하면 엄청 느리지만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생활에 많은 변화를 준 계기가 되기도 됐다.
그러나 이것만인가 이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시설, 제도와 기관의 탄생뿐만이 아니다. 근현대사의 고통과 투쟁이 배어있는 날이다. 일제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뼈아픈 이데올로기의 와중에서 투쟁하고 고통받았던 우리 민족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날이기도 하다.
1978년 우리 나라 민주 노조 운동의 기폭제로 꼽히면서도 똥물 사건으로 더 유명해진 동일방직 노조 사건 관련 124명 농성자 전원이 4월 1일부로 해고됐다. 최근 중앙정보부의 개입사실이 밝혀지면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되었다. (동아일보, 2001년 3월 19일, 78년 동일방직 노조사건 '민주화운동' 입증 길 트여)
또한 이 날은 비전향장기수였던 손윤규 옹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비전향 장기수로 유신 반대투쟁을 했고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76년 3월 교도관 등에게 집단 구타당한 뒤 동료들의 단식투쟁에 동참했다가 6일만에 사동으로 옮겨져 강제급식을 당하던 중 4월 1일 변사체로 발견됐다. (한겨레신문, 2001년 1월 22일자 비전향 장기수도 의문사 진상규명)
1955년 4월 1일은 남한의 빨치산을 토벌하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가 해체된 날이다.(경향신문, 2000년 7월 12일자 <한국전쟁 50년>(10) 북측의 빨치산 활동) 이는 빨치산의 토벌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더 이상 빨치산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잔여 조직으로 확고해졌고 이후 남한에서 사실상 사라진다. 아직도 그들에 대한 규명과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4월 1일은 일제 시대 항일 운동과 매우 밀접한 날이기도 하다. 4월 1일은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날이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만 17세의 나이로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유 열사의 부친 유중권(重權)씨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같은 4월 1일 경기고 안성에서도 이 같은 독립운동이 있었다. 1919년 4월 1일 원곡·양성 두 면의 주민 2,000여명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경찰관주재소 등을 불태우고 일본인들을 몰아내 이틀간 이 지역 4개 면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틀 뒤 일본 군·경이 투입돼 투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일로 무자비한 고문 등을 겪어 주민 24명이 목숨을 잃었고 (옥중 순국자 9명 포함), 127명이 기소돼 최고 12년(2명)까지 징역형을 받았다. 이는 민족대표 33인보다 더 무거운 형량이었다. (대한매일, 2001년 4월 2일자 참조)
4월 1일은 독립운동가 유림 선생이 1961년 세상을 떠나신 날이기도 하다. 선생은 189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11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을, 다른 한편으로 비밀결사를 조직, 항일운동을 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안동 임동면 장터에서 협동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신채호 선생을 도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이 때 선생은 무정부주의를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수용했다.
1931년 ‘원산 흑색사건’으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10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대표로 참여했고 임시 의정원의원,외교위원회 연구위원,선전위원회 선전위원,무임소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 1945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신문’을 창간, 노농 대중의 계몽과 권익보호에 힘쓰다 1961년 4월 1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매일, 2001년 4월 4일자 참조)
또한 우리 독립운동사와 현대사에서 4월 1일은 빠뜨릴 수 없는 날이다. 1921년 북경에서 임정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행동을 규탄하는 성토문이 발표된 날이다. (역사신문 6, 서울: 사계절출판사 1998)이 성토문에는 독립운동가 54명의 이름이 서명되었고 대표 집필자는 바로 신채호 선생이다.
『...우리 3천만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청원을 제출한 것을 엄중히 성토한다. 조선이 이미 멸망하였다하여도 조선인의 마음에는 영원 독립의 조선이 있어 총이나 칼로 아니면 맨손으로라도 조선의 정신이다. 친일자는 일본에 친미자는 미국에 노예되기를 청원한다면 조선 민족은 영원히 노예의 길을 걸을 것이니 이승만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 보다도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찾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이는 이승만이 파리강화 회의에 미국이 장악하고 있던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것을 청원한 행동에 대한 성토이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할 즈음 미주지역을 중심으로 미국위임청원권을 제기한다. 이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진영에서 비난과 질책이 쏟아져 나온다. 이에 이승만은 변명하기를 1차 세계대전이 끝나 한국문제에 대하여 국제여론의 환기를 도모하고자 일시적인 외교책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라고 했다. 몇 해 동안만의 위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파리강화회의에서 고안된 위임통치제도란 식민지 재분할에 따른 승전국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약소민족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 실제로는 특정수탁국의 식민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고정휴,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는가,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1991 겨울 통권 15호 pp199-200)
신채호 선생이 성토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승만은 아직 찾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 사실상 우리 나라를 미국에 팔아먹었다. 대표적인 것이 1953년 10월의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이다. 조약체결 과정에서 이승만은 적극적으로 나라를 미국에 넘겨준다.
먼저 한국영역에서의 미국군대 주둔 작전권 부분에서 미국초안에는 미국 자신이 원하지 않아 넣지 않은 것을 한국정부가 자진해서 넣어주기도 했다. 군사원조부분에서는 미국은 이 원조 방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승만 측은 군사력을 포함한 즉각적인 개입을 의무화하려 했다. 이것은 당시 나토(NATO)에 지는 미국의 의무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도 반대했다. 또한 외부로터의 공격 대상을 미국안이 불명시(不明示)인데 반하여 단시 한국 안은 영토군대 뿐만 아니라 공용선박, 항공기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리영희,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북진통일과 예속의 이중주, 『역사비평』 역사문제연구소 1992 여름 통권 17호 pp44-45)
이런 대미예속적인 조약 때문에 부작용이 너무 많이 생겨서 협의에 들어가지만 1966년 7월 9일 체결되는 한미행정협정(SOFA)도 불평등하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마찬가지이다.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의 근원은 이승만의 예속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서주석, 한국전쟁과 이승만 정권의 권력강화,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1990 여름 통권 6호 pp143-145)
이승만의 대미 예속적인 성향과 개인주의 성향이 결국 우리 현대사와 현재, 민족의 뼈아픈 고통을 낳게 했다. 이런 선견 지명적인 경고를 한 것이 신채호 선생의 이승만 위임통치청원 규탄 성토문 발표였다.
이것이 1921년 4월 1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우절로 기억하기에 바쁜 4월 1일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이 성토문의 중요성을 더 깊이 인식하고 이승만과 그를 이용할 미국에 대비하는데 능동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4월 1일이다. 그리고 아직도 주한 미군의 기만적인 기지 이전과 반환, F-15 구매 강요, 악의 축 발언 등 미국의 패권주의가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시점에서 미국의 본질에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을 때이다.
이렇게 4월 1일은 단지 만우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이다. 또한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이런 날을 거짓말해도 좋은 날로 여기고 해프닝 만들기만을 생각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것 같다. 오늘의 현존재를 과거의 유산에서 감사하고 그것을 다시 후손에게 이어줄 우리로서는 4월 1일의 사회 역사적인 자취를 한 번 뒤돌아보고 현재적 미래지향의 의미와 행동을 모색 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