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탁본
이 정 모
이 공중의 어느 틈 속에 숨어 있었을까 멀고 먼 직립의 시간을 죄다 건너왔을 이 하염없는 적요의 손手들 단지만 오래 묵은 장 뜨는 줄 알았는데 세월에 젊은 날을 담아 기억을 밀봉한 당신, 적막을 두드려 시큼한 습탁濕拓을 얻네 잠시 비는 생각에 젖을 물렸을까 우연히 내게 온 것들, 잘 가시라 하니 술잔에 뛰어드는 비릿한 맨발 그녀처럼 스며들어 어쩌자고 얼비치는지 떠난 애인은 앞모습이 없어서 다시 찾아와 말 걸고 눈짓한들 지느러미 파닥이던 세월 돌아올 수 없지만 마음을 팽개쳤던 이들은 속으면서 아네 서둘러 떠났던 날들이 새삼스럽게 찾아오고 그러니까 잊혔던 날들이 등을 밝히면 햇살처럼 붙잡지 못한 것들 몰려오고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는 바다로 온다는 것을, 빗줄기도 아직 제 할 일이 남았는지 입술 새파래진 공중에 대고 끝없이 몸 열어라 하지만 너는 군식구 너는 군식구 비 그친 봄밤이 해찰거리는 것은 이 공중의 필체를 포함하여 달빛이 두드려 건탁한 청춘의 유묵遺墨*까지 반쯤은 비의 살 속에서 떠보라는 것이네 *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 시집〈허공의 신발〉천년의시작 -
허공의 신발 - 예스24
2007년 『심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정모 시인의 시집 『허공의 신발』이 시작시인선 0275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생生’과 ‘사랑’을 주제로 한 시편들이 주를 이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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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시집 〈허공의 신발〉 천년의시작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