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동네아이 프로젝트 두 번째
동네 아이/이미영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셨어요?”
엄마는 가늘지만 거칠게 입 숨을 쉬는 할아버지의 곁에 앉아 다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달걀 껍데기 속의 하얗고 얇은 막처럼 닳아버린 살갗 위를 손이 닿을 듯 말 듯 어루만졌다. 조금 열린 창으로 귀뚜라미의 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사람들이 동구는 착하다, 착하다고 하니 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나는 온 동네 아이였거든.”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동네 마당을 누비는 동구로 돌아갔는지 통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일이야. 서우 댁 아주머니는 글을 읽지 못했거든, 군대 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 나를 불렀어. 보고 싶은 아들아, 하고 말로 편지를 쓰면 내가 글로 써서 부쳐 주었지. 한 달 후쯤에 답장이 오면 다시 나를 부르셨어. 나는 가서 큰소리로 여러 번 읽어 드렸어. 아주머니는 읽지도 못하는 편지를 늘 가슴에 품고 다녔어.”
할아버지는 서우 댁 아주머니의 칭찬을 막 들은 소년처럼 들뜬 기분이 되어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중학생 동구가 학교에서 상을 받으면 금세 소문이 퍼졌다.
“동구는 천재야,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만나는 어른들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었다고 한다.
“너는 하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을 테지? 그때 우리 집은 동네에서 소문난 가난뱅이였지.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이 없어서 혼자 수돗가에서 서성이다가 물로 배를 채웠어. 집에 갈 때는 배가 등에 붙으려고 했다니까.”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에 어른들이 우리 착한 동구야, 우리 똑똑한 동구야 하고 불러주면 허기져서 슬픈 기분이 사라졌단다.”
낮은 소리로 신음을 토해내던 할아버지가 목소리에 힘을 주고 착하고 똑똑한 동구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는 슬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할아버지의 다리만 살살 쓰다듬었다.
볼이 홀쭉하고 파리하게 변한 할아버지 동구는 착하고 똑똑한 소년 동구를 추억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동네 아이 동구가 되어 마음껏 뛰어놀라고 귀뚜라미가 잠이 들 때까지 할아버지의 다리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엄마는 낮에 아파트 정원에서 산책 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미소를 지었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할아버지가 왼발을 딛고 오른발을 떼려고 땀을 뻘뻘 흘리던 장면이었다. 걷기를 잠시 멈추고 한숨을 돌릴 무렵, 노란 버스들이 하나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 버스에서 폴짝폴짝 뛰어내렸다. 마중 나온 엄마들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씽씽 카를 건네받았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우리 할아버지 앞을 쌩쌩 지나갔다. 할아버지의 움찔거리는 몸이 곧 넘어질 것 같았다. 엄마가 할아버지의 허리를 꽉 붙들어서 겨우 균형을 잡았다.
“이 녀석들이.”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노여움이 튀어나왔다.
“아이고, 어허, 하하.”
할아버지는 몇 걸음 앞에 있는 의자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겨우 자리에 앉고 나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저어주었다. 꼬맹이 몇몇이 운전 솜씨를 뽐내며 할아버지 주위를 맴돌았다.
“잘~한다. 잘~한다.”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할아버지는 허허했다.
“동네 아이였던 아버지가 동네 아이들을 키우고 있구나.”
엄마는 혼잣말했다. 그날 밤도 엄마는 할아버지의 옆에 누워 야윈 몸을 오래 쓰다듬었다. 나는 엄마 옆에서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새 창밖에서 새들의 아침 인사가 들렸다.
엄마의 종숙부님이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왔다. 할아버지는 침대 머리를 등받이 삼아 일어나 앉았다. 엄마는 아저씨가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올 때마다 땅 자랑한다고 싫어하는 눈치다.
“나는 안목이 있어서 좋은 땅을 샀지, 동구는 전부 이상한 땅만 샀지 뭐야.”
그래서 아저씨가 지금은 땅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엄마의 언짢아진 얼굴을 보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땅을 보러 가기 좋아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는 엄마의 차에 타고 고향 땅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날이면 오래 흐뭇해했다. 고향 마을의 대부분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땅에는 여전히 선산을 돌보는 아저씨가 와서 들깨와 참깨 그리고 갖가지 채소를 키운다. 가을이면 선산 아저씨는 땅을 빌려주는 할아버지에게 깨가 들어있는 자루를 가져다주었다. 할아버지는 선산 아저씨가 심성이 착해서 농사를 잘 짓는다고 칭찬했다.
“아버지도 좋은 땅을 사지 그랬어요.”
엄마의 볼멘소리에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복이 있으면 우리 땅도 좋은 땅이 될 거야.”
그날 밤 할아버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119 구급차가 와서 할아버지를 데려갔다. 한 달 후에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할아버지가 영영 떠난 후 엄마는 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고향의 땅을 둘러보러 갔다.
“할아버지는 왜 이런 땅을 샀을까? 그런데 엄마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 왜 이런 땅을 샀는지.”
엄마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잡풀들이 우거진 들길을 걸으며 할아버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이고, 따님이 오셨네, 아버지가 많이 그립지요.”
“동구 어르신은 태바우 형님이 아들 대학을 보내려고 산 밑에 있는 밭을 사달라고 찾아갔을 때 두말 안 하고 사주셨지요. 이바우 형님이 딸을 시집보낸다고 이 논을 사달라고 했을 때도 당장 사주셨고요. 그래서 동구 어르신의 땅은 다 이렇게 길도 없는 곳에 있어요.”
“동네 아이로 자란 아버지는 어른이 되어서 동네 어르신이 되셨구나.” 엄마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첫댓글 약간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움은 많은 동네아이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슬프지만 동네 어르신은 아름답지요.
엄마 잔소리를 피해 다니시던 아버지는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만 ㅎㅎ
나는 수필 기법에 소설의 이야기 기법을 도입하자고 주장해 왔다. 수필을 독백 문학이라면서 작가의 주장을 담은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수필이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목소리를 이야기 속에 담았다. 정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수필이 이런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읽었습니다.
보여주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늘 고민합니다.
저는 독자로써 보여주기를 선호합니다만 쓰는 사람으로 소설 기법은 더 어렵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