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서남부 카르나타카주의 마이소르에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화려한 궁전이 있다. 유럽의 웅장함과 아랍의 섬세함에 인도의 색을 입혔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은 이 건축물은 18세기 중·후반, 영국에 저항하다 사라진 마이소르 왕국의 <티푸> 술탄 재위 때에 지은 왕궁이다. 그는 제국의 부당한 침략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칼을 쥔 채 전장에서 사라져간 인물이다. 이 인물은 힌두교도와 기독교도를 잔인하게 탄압한 무슬림왕국의 군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힘겨웠던 독립투쟁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이 조국에서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데 왕국을 무너트린 스리랑가파트나에서의 전투에서 명성을 드높인 젊은 영국인 장교가 있었다. ‘아서 웰즐리’라는 인물이다. 16년 후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쓰러트린 웰링턴 공작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인도의 근·현대 역사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조국인 무굴제국을 무너트린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 인도를 영국식민지로 몰고 간 분기점이 되었던 플라시전투에 참가했던 영국 보병은 불과 800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2,200명의 인도인 용병이 합류하여 무굴제국군을 격파한다.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이 함락된 것도 인도 내의 영국 동맹국 협조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산업혁명을 먼저 경험한 나라이긴 하지만 유럽의 변방국가가 소수 병력과 행정관만으로 거대한 인도를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분열된 인도인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발전하여 분명한 정체성을 갖춘 영국과 그렇지 못했던 인도의 차이가 빚어낸 비극이다.
그런데 1944년 2차 대전이 막다른 곳으로 치달을 즈음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일본은 인도양 동부 안다만해의 영국령 니코바르제도를 점령한다. 그리고 그곳을 영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인도임시정부에 넘겨준다. 당시 인도에는 비폭력 투쟁을 벌이던 간디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장독립투쟁 그룹들이 있었는데, 인도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인도국민군>도 그중 하나였다. 전쟁 막바지에 인도 서북부에서 벌어진 전투데서 일본군과 연합하여 영국군에 맞서 싸웠던 이 부대가 패퇴하고 만다. 영국군에도 인도인이 섞여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일본군+인도독립군)과 (영국군+식민지인도군)의 전투에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일본제국군과 연합한 독립세력이 대영제국에 빌붙은 친영세력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잔인했던 일본이 인도에서는 독립투쟁의 후원자였던 것이다. 이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앞서서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의 대부분은 일본보다 연합국이었던 영국에 호감을 갖고 있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그 훌륭한 처칠조차도 인도인을 ‘짐승 같은 종교를 믿는 짐승 같은 인간’으로 비하하였고, 그 땅에서 영국은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결국 식민 지배를 받던 한국인이나 인도인의 관점에 서면 도움을 주는 나라가 연합국이냐, 동맹국이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도덕적으로 조그만 차이도 없었던 것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 눈먼 그저 그런 부류의 나라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사냥감을 두고 다투었던 것이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은 그런 전쟁이었다. 이 비도덕성은 대전 후, 몇몇 승전국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45년 종전 후,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일본에 빼앗겼던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되찾으려고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곧 물러갈 수밖에 없었지만. 인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중서부 해안의 이곳 고아를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인도 정부의 반환 요구를 거부하고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1961년 그들은 인도군과의 전투에서 무참하게 패하고 망신스럽게 본국으로 쫓겨간다.
종전 후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이 독립을 했다고는 하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식민** 기간에 뿌리내린 기득권층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대만이나 동남아시아 각국 대중의 일본이나 지배층에 대한 거부감이 약한 것은 지배 기간이 그 이전 그들을 괴롭혔던 제국에 비하면 매우 짧았고 식민 시절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지배자들의 문화가 내재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도 이 나라들을 낮추어 볼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식민시대의 잔재는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가 정리된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을 우리 스스로의 입장보다 힘센 나라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때 우리를 압도했던 지배자의 가치가 그들 정체성의 일부로 뿌리내리면서 비판적인 입장에서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깝지만 아직도 우리는 정신적 독립을 온전하게 이룩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수천 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민족정체성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나폴레옹군이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주축의 연합군과 폰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패함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다.
*** 플라시전투: 1757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벵골지역(오늘날의 방글라데시)에서 영국이 주도권을 쥐게 되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