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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것을 차근차근 되짚고 하나씩 생각을 해볼까 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자유의지 내지 의사론은 기본적으로 일정 구조 내에 속해 있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상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 그러한 본질적 한계는 내적 구조와 외적 구조로 나누어져 있고, 내적 구조의 한계로서 인간이 본래부터 선악분별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 외적 구조의 한계로서 환경에 의한 자기결정의 제한이 있으므로 자유의지는 부정된다.
셋째, 책임의 존재 목적은 본래적 귀책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사회 유지를 위한 방식으로서 있는 것이다.
넷째, 신의 완전성에 있어서 의지에서 벗어나는 창조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전지전능성을 상실하고 결국 신의 선 관념이란 불완전 한 것이다.
1. 인간의 자유의지 내지 의사론은 기본적으로 일정 구조 내에 속해 있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상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논의에 앞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적인 입장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부터 체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부분 교부 철학자들의 스타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호교론자들이지 체계적 신학자들이 아닙니다. 즉, 그들을 논리적 완결성 측면에서 치고 들어간다면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호 맞물려서 아귀가 맞지 않는 경우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그러한 변론을 진행하였는가입니다.
이하는 반론에 대한 의견입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대논지는 자유의지론 뿐 아니라 이른바 은총론도 함께 진행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양 논지는 당대의 시대적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마치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지금에도 완전히 적합한 양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은총론의 주 논점은 불완전한 인간의 설정과 그 타락의 회복에서 신의 은총에 의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의 은총에 의하여 인간이 '회복'된다는 것은 가톨릭 전통에 부합합니다. 물론 개신교는 조금 다릅니다만, 본질적 한계 가운데서 서 있었느냐란 질문에 가톨릭 전통에서는 그렇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성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기본적으로 가톨릭 전통에서는 은총의 회복을 통해 다시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즉 인간의 한계라는 그 상태는 기독교 전통에서 인식되고, 인정되어 왔습니다. 한계가 없다고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개진되었느냐입니다.
(2) 요컨대 반론에서 나왔던 인간의 본질적 한계라는 것은 인식론적 한계인 것이지, 그것이 존재론적 한계인 것은 아닙니다. 말씀하신 한계점은 분명 있습니다만, 그것이 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는 짚어볼 필요는 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떼어낼 수 없지만, 인식론의 결론은 결국 존재의 부정확성으로 귀결되고, ‘의미 없음’의 극단적 결말로 치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임의적으로 달자면), 존재의 부존재화(不存在化)라고 할 것입니다. 그 인식론적 한계는 인간이 ‘선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라는 인식론적 한계를 표상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전통 하에서 인간 그 자체의 한계성은 존재론적으로 논해져 왔고 인식론적 관점과 현상학의 접점에 선 기독교 신앙은 최근에야 들어서 차츰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신관(新觀)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3) 그렇다면 선악의 분별이란 무엇입니까? 내적 한계가 있어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인간이 무슨 수로 선악을 분별한다는 것입니까?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에서는 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완전한 인간을 상정합니다. 이 같은 상정 속에서 자유의지는 신율(神律 - 자율, 타율, 신율 중에서 신율은 자기에 의해서도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도 아닌 제3의 의지로서 그려집니다. 신율은 단순히 신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의와 부합하여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의지는 신율의 속성을 띈다고 보았으므로, 단순한 신의 지시에 의해서도 아니고, 단순히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신율이론은 인간의 ‘전면적’ 죄책 부정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었던 것입니다.)로서 드러납니다.
자유의지는 중세 가톨릭 신학에서 선의 방법을 택할 자유로서 그려집니다. 신으로부터 근거한 ‘선’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입니다.(신의 절대성 부정과 선의 개념간의 문제는 뒤에 다루겠습니다.) 선(善)개념의 근거가 신(神)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 관념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인류를 구속하기도 했습니다만, 동시에 중세 초기의 신플라톤주의와 막 융합되던 가톨릭 전통에서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일자(一者)와 이로부터 나오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들로서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선의 개념 역시 최종적 근거가 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을 한데 모아 끌어들여 하나의 원동자를 형성하면, 그것이 바로 당대의 신(神)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개념이 바람직한 견해인가에 대해서 현대의 신학자들은 부정합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신을 박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대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현대의 시각에서 논박한다면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왜곡된 형태로 그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근거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합니다. 어떠한 학설이나 논설이든지, 당대의 시간적 상황에서 그 근거를 유추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근거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박한다면 훌륭한 논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세계관도 지금은 많은 부분 극복되었고, 현대 신학의 한 단면에서는 종래의 플라톤주의를 혁파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서구 가톨릭 교회 및 개혁교회의 분파)에 있어서 선악의 분별에 대한 기준이 왜 신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역사적인 연원을 잠시나마 간략하게 소개해드렸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의 선악분별이 가능하냐의 문제는 신의 개입이 없이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신의 개입이 없이는 선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가톨릭 신앙은 이에 대해서 은총론을 도입하면서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우게 되었습니다.
2. 외적 구조의 한계 – 인간의 본질로서의 자유의지와 소설《페스트》
(1) 외적 구조의 한계에 의하여 인간이 자유의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처절한 상황 속에 처해있는 자가 대체 어떠한 선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부분에서는 마땅히 그러한 질문이 타당합니다. 먹고 살기 어렵고, 죽음을 직면한 자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선’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자유의지론이 변용되는 것은 까뮈의 《페스트》입니다. 작품 페스트에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자유의지론에 대한 근대-현대로 이어지는 인상을 짚어낼 수 있습니다. 페스트의 등장인물들 중에는 그 스스로 페스트 속에서 병마와 싸우는 자들도 있고, 동시에 그에 대해서 회피하거나, 그 상황을 심지어 즐기며 악을 행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소설작품에서의 자유의지론은 병마와 싸우는 의사들과 그 보조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책임 없는 상황에서의 고통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이른바 부재하는 신과 인간의 책임성 확보라는 것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론의 부정은 단순히 신학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론의 핵심에는 신의 부재 가운데에서 인간의 책임을 묻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페스트 속의 회피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직자였습니다. 그들은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사람들이었고, 이러한 고통과 고난 역시 예지된 것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 이 장면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종교가 아니며, 그것은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신의 책임을 버리는 행위이며, 자신의 인간성, 인간 존재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다.’
(2) 현대의 자유의지론은 분명 이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자유의지론의 의미만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주의의 핵심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의지론의 변용이라는 것은 단순히 신학적 도그마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인간의 본위 존재의 기저로서 원용되곤 합니다. 외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펼칠 수 없으니, 자유의지는 없는 것이다라는 것은 말씀하셨다시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자들 때문에 오히려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주체성을 확보하고 신의 부재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Telos를 생각할 수 있는 기반으로 드러나는 셈입니다.
3. 책임의 존재 목적 –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자유의지론을 말하였는가?
(1) 앞서서도 말씀드렸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에 이 자유의지론을 들고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점이 오히려 더 중요한 점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저에 있는 대부분의 도그마의 바탕에는 ‘필요해서 형성된 것’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그마들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그 도그마가 대체 어떤 필요로부터 나타난 것이냐에 대한 해답이 필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이렇게 신에게 죄책을 돌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대의 상황을 잠시 조망해본다면, 그가 살았던 시기의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존 당시에 서로마가 무너지고, 서유럽 전역이 박살나던 시기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로마의 존재가 무너지고 있었고, 그러한 시대상에는 허무주의가 무척이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당시의 마니교는 중동 일대와 소아시아를 휩쓸었습니다. 마니교의 교리 상으로 세계는 악과 선이 대립하고 있고, 인간은 단순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악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선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남북조시대와 2차 대전 이후의 시대상을 보게 된다면 쉽게 짐작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대항했던 것은 일체의 허무주의, 그리고 죄책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고자 하는 무책임적 사회에 대한 일갈이었습니다. 조금 과격하게 풀어내자면, 내 책임이 아니니 나는 도덕과 윤리 없이 산다. 나는 책임 없이 나답게 살고 싶은데 그것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 신의 예지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 물론 나답게 사는 것과 결부되어 있는 자기책임성을 부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답게 산다면, 분명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 회피현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학 내에서 이에 대하여 일갈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마니교라고 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이교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던 것입니다.
(2)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책임론을 말했다는 것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였다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 책임성의 부정은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신학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졌다고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당대의 예지론적 성격이 강력한 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반대로 책임의 주체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자기주체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그 조화의 결과물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가톨릭 전통의 ‘신율적 인간관’일 것입니다.
(3) 조금 과격하게 정리를 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측면에서 칸트의 선험적 도덕론과 연결되는데다가, 인간 책임성을 강조하여 신에 대하여 독자적인 인간상을 구축. 이후 까뮈의 페스트 등으로 이어지면서 신의 부재 가운데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단순히 신학구조로서만 응용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체성의 강조를 의미하는 뜻에서도 사용된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음.)
4. 신의 완전성의 부정
(1) 마지막 요소는 조금 간략하게만 정리해두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군요...
(2)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내의 ‘신의 완전성’ 개념 자체가 그리스의 철학구조 내에서 형성된 것. 기본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요소가 잔존하고 있는 것. 인간에게 완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 있어봤자 인식이 안 되는데 무슨 수로 논하는가? 덧붙여 그리스도교의 현대적 흐름은 이와 같이 단순히 절대적이고 최고지존자적 성격에서의 신을 인격적 만남이 필요한 상대적 신으로 변용하려는 시도가 커지고 있음. 신이 선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서 신이 보증하는 것이 선의 개념이 아니라, 신 그 자체가 선의 기준이 되는 것임. (신에게 선과 악을 구별짓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자신에게 반하면 그것 자체가 악이 되는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음.)
5. 정리하면서
죄, 악과 선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것을 많이 빼먹은 듯 합니다.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보완하겠습니다. 간단하게만 말씀드리면, 죄는 악을 동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로부터 악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은 맞습니다만, 악으로부터 죄가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죄를 방증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그렇다고 죄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질구레한 질병들이 모두 죄로부터 나타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요컨대 죄와 악, 선은 서로 분리되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지, 죄와 악을 결합시켜서 설명한다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악은 죄보다 표시하는 그 범주가 더 넓습니다.죄는 악의 근원이지만, 악은 죄의 필연적 결과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