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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말하는 노랫말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대중가요. 대중가요가 클래식이나 재즈 등 마니아층에게 머무르는 음악과 달리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무얼까. 물론 대중성이라는 강한 공감능력 때문이다. 누구나 겪는 사랑과 이별, 아픔, 삶의 기쁨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노랫말은 당대를 살아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교감하게 하며 하나로 묶는다. 요즘 취향이 많이 바뀌고들 있지만 그래도 이러한 정서를 산파 적으로 거침없이 잘 드러내는 것은 트로트다. 어째 우리는 질질 짜는 음악을 수십년 들으며 감동받고 찾는 것일까.
공감이라는 전제하에서 보면 세상은 기쁨보다 슬픔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연 아픔과 슬픔 이별에 연민이 갈 수 밖에는 없다. 감정의 찌개미가 남는 듯 앙금이 엉킨 듯 사람들 가슴속에 오랫동안 저장되고 각인된 어느 아픔, 슬픔과 가수의 돌출한 짙은 호소력이 순간적으로 충돌하여 부싯돌 지지직거리듯 전율이 일고 마음 한 구석을 들먹이며 멍든 가슴 속에 비를 내린다. 팝을 즐겼다지만 트로트의 대명사 ‘가슴 아프게’를 수 없이 들어온 대로 ‘가슴 아프게’가 주는 감정을 여전히 내 몸 속에 간직하고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슬픔에 익숙하다.
그 시절의 노랫말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잘 알려진 구체적인 지명은 노랫말이 갖는 공감의 힘을 더 높여준다. 실감이 나고 분위기를 연상하는 상상으로도 애틋하여진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노랫말에 구체적인 지명이 사용돼온 사례는 많았다. 사실 앞으로는 이러한 특이성은 상실될 우려가 크다. 지방화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과거보다는 덜 지방적이며 특색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밭 무성한 안양도 아니고 사과밭 많은 대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곳곳에 흩어지고 모인 작물이나 볼거리들은 산만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시대는 상징성으로서도 감정이 북받치기 충분했다. 역사적·시대적 의미를 갖든, 개인적 추억의 장소가 됐든 구체적 지명이 들어간 노래는 실재성이 부여돼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이 짤막한 노랫말로 당시를 엿볼 수 있듯이 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지명은 역사적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현장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곡은 반야월이 지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 폭탄이 떨어지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간 임을 그리워하는 이 곡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피란수도 부산을 배경으로 한 노래들 ‘굳세어라 금순아’는 피란민으로 뒤덮인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를 부산 국제시장과 영도다리 위를 헤매며 찾아다니는 애끓는 이야기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린 노래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이별의 부산항’에도 피란민들의 애환이 짙게 배어 있다. 전쟁으로 미국이 특별히 각인된 시기기도 하다. 백설희가 부른 ‘샌프란시스코’,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은 당시로선 지명도, 발음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이국의 땅을 언급했다. 전쟁 직후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한 동경과 허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 노래를 불렀다.
1960년대 발표된 노래들에선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만날 수 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고 모든 자원이 서울로 집중되기 시작하던, 그 당시 서울은 이상과 욕망의 상징이었다. 패티 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 ‘서울의 모정’에 나타난 도시 서울은 꿈이 이뤄지는 희망의 도시다. 반면 여전히 지방은 소외된 현실이었다.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는 노래들이 많다.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서울이여 안녕’ ‘소양강 처녀’가 그렇지 않던가.
대중가요 가사에 등장하는 지명의 절대다수는 서울이다. 가요계에서는 서울의 지명이 들어간 노래가 1000곡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도시 서울을 노래한 곡도 있고 서울 내의 구체적인 지역을 이야기하는 곡도 많다. 거론되는 구체적인 지역들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이를 보면 유행과 트렌드의 중심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서울의 중심은 명동이었다.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었고 젊음의 상징이었으며 가장 트렌디한 공간이었다.
‘서울의 모정’에 묘사된 명동은 꿈을 꾸듯 행복한 장소이다. 전영이 부른 ‘서울야곡’,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거리’에 등장하는 명동은 뜨거운 사랑을 쏟아냈던 청춘의 한 자락이 남겨진 곳이다.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등에는 명동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목에 쓰인 이들 지역은 명동과 가까운 곳이었다. 강남개발이 본격화하는 1980년대가 되면서 대중가요가 노래하는 지역도 강남권으로 급격히 변했다.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는 지금의 한남대교다. 한남대교는 용산과 신사동을 잇는 다리로, 현재의 ‘강남권’과 강북지역을 연결하는 최초의 한강다리다. 이후 주현미(‘신사동 그 사람’ ‘비내리는 영동교’), 문희옥(‘사랑의 거리’ ‘강남 멋장이’), 박영민(‘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등 당시 등장한 가수들은 강남을 노래하며 스타가 됐다.
강남을 향한 행렬에는 기성가수들도 동참해 나훈아가 ‘영동부르스’를, 현철이 ‘추억의 테헤란로’ 등을 불렀다. 사람과 돈이 몰리는 곳, 이름만으로도 흥분이 넘실거리는 대상, 유행과 첨단문화를 이끄는 강남은 2000년대 들어 ‘비 오는 압구정’(브라운 아이즈), ‘강남 스타일’(싸이)로 이어지며 그 지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노래에 들어간 지역명 중에는 항구도시도 많다. 항구와 부두가 갖는 이별, 그리움의 정서 때문이다.
지역명이 들어간 노래 중에 가장 사랑받는 곡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1976년 발표된 이 곡은 20세기 최고의 히트곡으로도 꼽힌다. 노랫말에 나오는 ‘그리운 내 형제’를 만나 위로를 받는 듯 한 공감대를 주는 노랫말 덕분에 이 곡은 나온 지 4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여전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수년 뒤 나온 ‘부산 갈매기’는 이 같은 부산의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 항구도시 목포도 빼놓을 수 없다.
호남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의 역사, 상처가 배어 있는 ‘목포의 눈물’은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이 지역의 정서적 애착과 자부심을 대변한다. 조용필이 리메이크했던 ‘대전 블루스’에서도 목포의 한과 눈물의 정서는 계속된다. 이별과 그리움의 고향땅은 도피 욕구를 감싸 안는 이상향으로도 묘사된다. 1975년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에 등장하는 동해바다는 억압된 1970년대 사회적 분위기에서 절망한 청춘들이 외치던 탈출구였다.
그렇게 청춘들이 탈출을 감행하여서인지 1990년 이후는 실로 다양한 소재의 개인취향의 노랫말이 나온다. 시대적 의미를 갖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소에서 추억을 노래한다. 주로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고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는 다양한 장소들이다. 전통적 데이트 코스였던 명동, 광화문, 신촌부터 2000년대 이후 부상한 이태원, 홍대, 북촌 일대가 많은 노래에 등장한다.
포스트맨이 노래한 신촌(신촌을 못가·2013년)은 여전히 사랑과 이별이 교차하는 장소다.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역에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에 등장했던 광화문은 최근 아이돌 가수 규현이 내놓은 ‘광화문에서’를 통해 새로운 감성으로 태어났다. 2003년 윤건은 ‘홍대 앞에 눈이 내리면’을 발표했으며 루시드폴은 ‘삼청동’(2005년)을, 에피톤 프로젝트는 ‘이화동’(2010년)을 노래했다. 얼마 전 서태지가 발표한 ‘소격동’은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에 대한 추억과 역사적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교차시켜 표현한 곡이다.
세월따라 가요도 장소를 옮기며 감정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어느 경우 도심과 변두리를 나누어 극적 대비를 나타내기도 한다. 노랫말에서 윤건의 ‘가을에 만나’에 나오는 부산 해운대는 사랑과 추억이 머무는 장소로,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 역시 여수를 전국적인 청춘 여행지로 변모시켜 주었지만 왕십리나 영등포라 표현한 동네는 여전히 노래속에 비주류인 추억적인 취향으로 대변되고 있다.
이제는 시대가 아니라 개인의 감성에 치중한 노랫말이 많다. 그렇다 하여도 노랫말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별이나 그리움이다. 내 고향 안양도 이쯤 예쁜 노랫말이 나왔으면 싶다. 삶의 애환과 이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살자니 헤어지게 되고 헤어지니 슬프기도 한 노릇이 아닌가. 고운 여러 노랫말이 있지만 나는 그 중 은방울자매가 불렀던 ‘마포종점’을 제일 좋아한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도심을 관통하는 밤차의 종착지 마포는 1960년대만 해도 변두리였고 강 건너 영등포는 아득히 멀고 고단한 곳이었다. 이 노랫말을 작사한 정두수선생, 그가 작사한 노래가 3천곡이 넘는다. 일반인들은 작사가를 그저 유행가 가사나 적는 사람으로 여길지 몰라도 시대의 정서를 정확히 읽는 작사가가 그가 아닐까 싶다.
1961년 어느 봄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서울 서대문에 살던 그는 걸어서 남대문 직장까지 출퇴근했다. 하여 덕수궁 돌담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어다녔다. 당시 돌담길은 우마차도 안 다니던 한적한 산책로였다. 그러나 주말이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를 걸었던 연인들은 대부분 사랑에 실패한다.’는 속설도 생겨났다.
대학을 나오면 대체로 남자는 군대를 가고 여자는 시집을 가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다. ‘덕수궁 돌담길을 가지 마라, 징크스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며 약간 취기에 젖은 채 늦은 밤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제대복을 입은 한 청년이 돌담길에 기대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그는 집에 와서 펜을 들고 써 내려갔다.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 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이 있기에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그로부터 2년 후였다. 부산문화방송 전속 가수로 있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시 한 편 달라기에 ‘덕수궁 돌담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건네줬다. 어느 날 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 노래로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게다가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서정가요로 선정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제1회 국제신보사 제정 작사상을 비롯해 문화공보부와 전국예술인총연합회 제정 작사상을 받았다. 그는 정공채 시인의 동생이다.
시인은 작사가를 한 수 아래로 보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행가 노래 한번 만들어 보라고 하면 쉽지가 않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거다. 가수의 성향과 음색, 작곡자의 취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우리가 모르는 고충이 있다. 조용필, 이미자가 생명력이 긴 것은 바로 옛 가요의 정서를 바탕으로 현실을 노래하기 때문이고 대중의 정서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마포종점은 내게는 여전히 갈 곳이 없는 비 내리는 곳으로 남아있다. 오래 간직한 정서나 감흥은 그렇게 가슴속에 총총히 박혀 떠나지 않는 것이다.
비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밤도깊은 덕수궁 돌담장 길을
비를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을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에
첫댓글 대중가요는 그당시의 시대상을 담고있는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는 노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