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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의 심리학]
산책하면서 혼자 중얼거린 적 있다면…
출처 매경이코노미 : https://www.mk.co.kr/news/columnists/12007336
‘내 안의 나’와 대화하기
심리학자 존 플라벨의 ‘메타인지’ 개념이 도입된 이후, 학습 능력을 메타인지로 설명하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됐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안다’라는 가설이 실제 연구로 확인된 것이지요.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글을 읽고 문제를 풀게 한 뒤, 두 가지를 동시에 측정했습니다. 첫째는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 둘째는 ‘스스로 얼마나 이해했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학습 성과가 높은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반대로 학습 성과가 낮은 학생들은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학습 결과의 차이는 단순한 지식의 양이 아니라 자기 이해 상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점검할 수 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비슷한 실험은 많습니다.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일부러 의미가 어색하거나 모순된 문장의 글을 읽게 합니다. 예를 들어 ‘기차가 바다를 항해하며 하늘로 날아갔다’와 같은 문장입니다. 메타인지 능력이 높은 학생들은 이런 문장을 읽자마자 “이상하다”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바로 알아차리지만, 메타인지 능력이 낮은 학생들은 특별한 의심 없이 그냥 읽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능력을 ‘이해 점검(comprehension monitoring)’이라고 부릅니다.
메타인지 능력이 높은 학생들은 공부하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일단 멈추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생각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 읽거나 자료를 찾아봅니다.
반면 메타인지 능력이 낮은 학생들은 이해되지 않아도 그대로 읽거나 문제만 풀어댑니다. 결과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할 때 전략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교육심리학에서는 좋은 학습자는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다시 읽고, 질문을 만들고, 전략을 바꾸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벨이 제시한 메타인지 개념은 바로 이 사고의 상위 구조, 즉 ‘생각을 다시 바라보는 능력’이 학습과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메타인지 능력은 학생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부지런히 읽는다고 그 내용이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메타인지적 읽기 전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자기 질문하기(self-questioning)’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문단의 핵심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집니다. 이러한 질문은 자신의 이해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두 번째는 ‘이해 점검(monitoring)’입니다. 글을 읽는 도중에 “내가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다시 읽거나 다른 자료를 찾아보는 식으로 읽기 전략을 조정합니다. 세 번째는 ‘주석 달기(annotation)’입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여백에 메모를 남기고, 중요한 부분에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네 번째는 ‘요약하기(summarizing)’입니다. 글의 핵심을 요약하려면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해 정도를 점검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토론(discussion)’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활동입니다. ‘상호 가르치기(reciprocal teaching)’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해석을 접하게 되면 자신의 이해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책을 깨끗하게 보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16세기 후반 한 학생이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책에 남긴 메모의 흔적. 이런 메모를 ‘마지날리아(marginalia)’라고 한다. 책에 남겨진 메모, 밑줄, 낙서의 흔적은 독자가 ‘책과 대화하며 읽었다’는 흔적이지만,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읽었다는 ‘메타인지’의 기록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관점 바꾸기’ 가능하려면
‘내 안의 나’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자기중심적 언어’와 관련된 심리학자 장 피아제와 비고츠키의 논쟁에서 언급했듯, 혼잣말은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메타인지입니다. 비밀번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생일이나 전화번호의 끝자리를 비밀번호로 사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외우기 쉬워서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외우기 쉬운 번호로 정하라고 시켰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나’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외워야 하는 ‘나(1)’와 생일이나 전화번호로 정하면 잘 외우겠다고 생각하는 ‘나(2)’가 있습니다. ‘나(2)’는 내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요. 폴란드 출신의 논리학자 타르스키의 논리학을 동원해서 설명하면, ‘나(1)’은 대상언어의 차원이고, ‘나(2)’는 메타언어의 차원입니다.
나(1)과 나(2)의 소통방식은 타인과의 소통방식과 동일합니다. 타인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설득하듯, 나(2)는 나(1)에게 끊임없이 말을 겁니다. 비고츠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내 안의 속삭임은 과거 타인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사용했던 언어가 내면화(Internalization)된 결과입니다. 즉, 내가 나에게 비밀번호를 제안하는 과정은 마치 친절한 조언자가 미숙한 친구에게 요령을 일러주는 ‘사회적 대화’와 동일한 형태입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와 관련해 그가 평생에 걸쳐 집필했던 미완성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냅니다. 파리를 산책하는 산책자(Flaneur)가 혼자 중얼거린다는 것입니다. ‘이 건물은 아까 지나온 광장과 비슷하네.’ ‘여기에서 지하철역이 가까울 것 같은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도시를 걸으며 경험하는 나(1)와 그 경험을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나(2) 사이의 대화입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의미 생성의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관찰은 독일 철학의 전통적인 개념인 ‘Selbstreflexion(자기반성, 자기성찰)’과 연결됩니다.
독일어에서 ‘반사’를 뜻하는 ‘Reflexion’을 ‘Selbst(자아)’와 연결한 단어 ‘Selbstreflexion’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인 피히테와 헤겔입니다. Selbstreflexion은 의식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를 비추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지나치게 추상적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나 사회적 맥락 속의 개인보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나 ‘정신’의 내적 활동에만 매몰돼 현실의 모순이나 물질적 조건과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벤야민은 Selbstreflexion을 도시 산책자의 구체적인 경험 속으로 끌어내립니다. 산책자의 중얼거림을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성찰의 순간으로 분석한 것입니다.
도시를 읽어내는 산책자의 중얼거림은 오늘날 심리학에서 말하는 ‘메타인지’의 핵심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메타인지란 단순히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조절하는 상위의 인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이 도시의 산책자 속에서 발견한 내면의 대화는, 철학의 자기성찰이 심리학의 메타인지로 이어지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자기반성’이 아니라 ‘휴식’입니다
독일어 Selbstreflexion을 ‘自己反省(자기반성)’이나 ‘自己省察(자기성찰)’과 같은 한자어로 번역한 사람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어를 오늘날의 ‘메타인지’와 개념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반성’이나 ‘성찰’이라는 단어에는 엄격한 자기 검열의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인지 활동을 객관적으로 조율하는 메타인지의 중립적이고 기능적인 속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문화심리학자인 필자가 만약 근대화 시기의 지식인이었다면, ‘휴식(休息)’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한자 ‘휴(休)’의 자형을 풀면 사람이 나무(木)에 기대어(人) 쉬는 모습입니다. ‘식(息)’은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형상입니다. 휴식은 단순히 육체적 노동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기대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는 메타인지적 사건입니다. Selbstreflexion을 ‘휴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성찰을 고통스러운 자아비판의 영역에서 ‘나를 돌보는 지적인 여백’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일입니다.
성찰을 한다면서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찰의 방향을 ‘존재의 회복’이 아닌 ‘도달하지 못한 완벽한 기준’으로만 돌려, 끊임없이 자신을 심판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결함과 후회를 찾아내는 가혹한 감시의 시선에 고립됩니다. 현대인의 우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철학적 자기반성’과 ‘심리학적 우울’은 동전의 양면이 됩니다. 19세기 파리의 고독한 산책자였던 보들레르는 자기반성과 우울의 악순환을 자신의 시 ‘자신을 고문하는 자’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내 심장의 상처이며 / 동시에 칼날이로다! / 나는 뺨이며 동시에 손바닥이요 / 수레바퀴이며 동시에 사지(四肢)로다 / 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사형집행인이로다!’
성찰은 나긋나긋하게 나와 소곤거리며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나무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사람만이 숲 전체를 조망하는 ‘조감도 능력’을 가질 수 있듯이, 진정한 메타인지는 자극을 낮추고 나를 타자화해 바라보는 평온한 휴식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휴식’과 ‘놀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휴식은 자극의 강도를 낮추는 일이고, 놀이는 자극의 강도를 높이는 일입니다. 이 차이를 ‘적정 각성 수준(optimal level of arousal)’이라는 심리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극이 너무 낮아 지루하면, 인간은 자극의 강도를 높여 ‘최적의 각성 상태’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놀이의 심리학적 기능입니다. 반대로 자극이 너무 과도해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자극을 낮춰 다시 최적의 상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자극 낮추기가 바로 휴식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결정적 약점은 ‘놀이’와 ‘휴식’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쉬라고 하면 놉니다.
이미 현실의 자극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데, 더 높입니다. 그러니 항상 극도의 각성 상태입니다. ‘건들기만 해봐라’ 하며,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낼 기회만 노리고 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잘 쉬어야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반나절은 푹 쉬어야 합니다. 한 달에 하루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과의 소통이 제대로 작동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리더들이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그 바쁨을 ‘성공’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다 같이 정신없이 바쁠 것을 강요합니다. ‘바쁜 성공’은 틀렸습니다. ‘바쁜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행복은 느린 겁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4호(2026.04.08~04.14일자) 기사입니다]
빛명상
빛명상
빛VIIT마음의
소리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요히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세상의 소음,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에 묻힌
내 마음이 하는 소리
묵묵히 땀 흘리며 나아가야 할 때
새로운 변화를 위한 용기가 필요할 때
고통스럽고 괴로워 마음이 아플 때
행복하고 감사할 때에도
고요히 내안의 나, 빛VIIT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빛마음의 소리 빛마음 듣는 은자隱者
출처 : 빛VIIT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2021년 1월 18일 초판 1쇄 P. 356-357
마음의 색 중에서
세월이 지나 우리 육체가 노화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처음과는 다른 색으로 변합니다.
하루하루 그 변화의 차이는 느낄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바라보았을 때
큰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색인지
바라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길 때가 되면
마음은 이미 어둡고 칙칙하게 변해버려
육체도 같은 색으로 물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커먼 색이 안에서 계속 배어 나오고 있는데
겉만 닦아내거나 덧칠을 한다고 괜찮아질까요?
내안의 나. ‘빛VIIT마음’을 원래의 색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빛VIIT명상을 통해 마음과 몸을 정화해보세요,
출처 : 빛VIIT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2021년 1월 18일 초판 1쇄 P. 126
마음의 색 중에서, 적심寂心, 베풀고 나누는 지혜
온몸으로
햇볕을 쬐고
음미하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라. 모든 존재에 생명을 부여한 우주의 마음, 그곳으로부터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처럼 내려오는 힘을 느껴보라. 그 느낌에 잠기노라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당신은 가장 낮고 겸손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운명이 바뀐다.”
학회장님은 이처럼 자연계에서 특히 태양을 강조한다. 태양은 지구의 전 생명을 살리는 막강한 에너지원이다. 태양의 소중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태양은 지구를 암흑과 빙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여 무수한 생명체를 번성하게 한다. 인간의 탄생 역시 태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태양은 때때로 강하게 지구를 끌어당기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바닷물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또한, 당신의 머리칼을 휘날리게 하는 바람 역시 태양에 의해서 생긴다. 당신이 바라보는 바닷가의 해류도 태양에 의해서 움직인다. 태양의 열에 의해 생기는 온도 차이로 바람도 생기고, 바닷물도 움직이는 것이다.
실제로 학회장님이 감사제를 올릴 때면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온다. 그 미풍은 곧 태양의 숨결인 셈이다. 태양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태양은 미풍으로 응답해 온다.
앞서 언급했듯이 학회장님이 펼치는 빛VIIT현상 가운데서도 특히 경이로운 것이 태양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VIIT현상이다. 학회장님의 감사제 동안에 태양이 보여주는 온갖 현란한 빛VIIT현상을 보면, 태양은 불타는 물질로만 볼 수 없게 된다. 태양은 인간의 마음을 읽어보고 그에 따라 감정을 형형색색의 빛으로 연출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빛VIIT이 태양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빛VIIT은 우주마음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이며 우리는 학회장님을 통해 그 에너지를 전달 받을 수 있다. 다만 그 에너지가 학회장님과 함께 하는 다양한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신은 고대인들이 하나같이 태양을 섬긴 것을 미신이라고 생각하는가? 현대인들은 우주와의 교감과 대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태양에서 아무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태양에게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안온함과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고대의 동서양은 똑같이 ‘태양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해 경축해왔다.
페르시아의 미트라교(Mithraism)에서는 12월 25일이 ‘태양 탄생일’ 이다. 로마의 기독교에서는 12월 25일이 ‘세상의 빛’ 즉,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다. 중국 주역(周易)의 동지(冬至)는 양력으로 본래 12월25일이다. 그런데 2000년 동안의 세차(歲差)에 의해 며칠 앞당겨져 현재처럼 12월 22일경이 되었다. 주역에서는 이날을 일양시생지(一陽始生地)라고 해서 어둠 속에서 태양이 다시 살아 떠오르는 복괘(福卦)로 본다.
현재까지 고대의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디언은 태양을 경배하고 있다. 인디언에게 태양은 늘 새로운 힘과 지혜를 주는 정령이다. 『인디언 도덕경(Native American Code of Ethics)』은 말한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기도하라.
혼자서 그리고 자주 기도하라.
그대가 무엇을 말하건 위대한 영혼은 귀를 기울이리라.
이렇듯이 태양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죽은 물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태양은 우리가 인지 못하는 파동과 우주근원으로부터 오는 힘, 빛VIIT을 지구로 매순간 쏘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제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다르다. 어린아이들이 스케치북에 그리는 태양을 보라. 태양에는 눈과 입이 달렸다. 어린아이들은 태양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겸허히 묵상 할 때, 비로소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해야 당신은 진정한 빛명상 인이 될 수 있다.
당신에게 태양을 노래하는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독일 발도로프 학교에서 4학년 수업 시작 전에 암송하는 시이다. 이 시를 읽고 나서 온몸으로 태양의 햇볕을 받아들이길 바란다. 태양의 숨결이 느껴질 것이다.
사랑스러운 태양 빛은 나에게 낮을 밝혀줍니다.
영혼의 정신력은 모든 신체에 힘을 줍니다.
태양 안의 빛의 광채
나는 존경합니다.
오, 신이여,
당신이 내 영혼 안에 그토록 귀하게 심어준
인간의 힘, 그를 통하여 나는 일을 잘 할 수 있으며
배우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당신에게서 빛과 힘이 시작되고,
당신에게로 사랑과 감사가 흘러갑니다.
나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 안에는 태양이 빛나고,
별들이 반짝이며,
돌들이 누워 있습니다.
식물들이 생기 있게 자라고,
동물들이 정답게 살며,
바로 그 안에 인간의 생명을 지니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 살고 있는
영혼을 들여다봅니다.
신의 정신은
태양과 영혼의 빛 속에서
세상 공간 저 바깥,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도 활동합니다.
오, 신의 정신
당신에게로 향하길 원하여,
배우고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소서.
* 시력 보호를 위해 정면으로 태양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태양의 자외선이 눈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바라보면 된다.
출처 : 해독제 2012년 7월 7일 초판 1쇄 P. 189~193
첫댓글 빛과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을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빛명상을 할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과함께 살아 갈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하루를 감사히 시작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잘 담습니다.
제 안의 빛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살아가겠습니다.
빛명상과 함께 몸과 마음을 정화하여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명상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안의 나와대화...빛VIIT책속의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해점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극이 너무 낮아 지루하면, 인간은 자극의 강도를 높여 ‘최적의 각성 상태’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놀이의 기능입니다.
반대로 자극이 너무 과도하면 자극을 낮춰 다시 최적의 상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자극 낮추기가 바로 휴식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놀이’와 ‘휴식’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쉬라고 하면 놉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가장 낮고 겸손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운명이 바뀐다".
깨우침의 귀한 빛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볼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귀한 빛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