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쥘 르나르의 ‘홍당무’
작가 ; 쥘 르나르(1864-1910)
초판 ; 1894
‘홍당무’는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아픈 기억을 독특한 익살과 유머가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승화시킨 걸작 성장 소설이다. 사춘기 소년의 일상을 통해 어린이 학대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그려 낸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작가가 직접 희곡으로 각색·상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다.
작가는 일기에서 자신의 유년기가 투영된 분신으로 설명했다.
"저는 홍당무 덕분에 이중적인 삶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4년 2월 22일.
세 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홍당무의 이야기를 써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홍당무의 가족의 분위기는 친자식인 홍당무를 대놓고 차별하는 비정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현대라면 가히 아동학대로 분류될 행위 가 판치는데다, 홍당무의 형제들도 그에 동참하고 있다. 가족에게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3] 모자간의 불화라는 상황상 꽤 심각한 전개로 갈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등장하는 개그와 상황의 반전때문에 분위기는 무겁지 않고, 오히려 홍당무의 수난을 재밌게 묘사해놔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작가인 쥘 르나르는 어릴적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았고 평생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는데 본인 스스로 홍당무는 어릴적의 자신을 모델로 삼은 소설이라고 밝힌적이 있다. 가정 내에서 매번 학대당하는 홍당무인 만큼 애정결핍적인 행동양상이 에피소드 곳곳에 드러나는데 애정결핍증세가 대놓고 보이는, 또한 이로 인한 홍당무의 비뚤어진 안타까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붉은 뺨 에피소드[5]를 좀 보자면 다음과 같다.
홍당무가 주먹으로 다른 유리창을 힘껏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제길! 왜 쟤한테는 뽀뽀해주고, 나에게는 뽀뽀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유리에 찢겨 피가 흐르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나도, 내가 원한다면 뺨을 빨갛게 만들 수 있다고요!"
집의 하녀인 오노린 할멈은 눈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어느 날, 늘 집안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찾던 홍당무는 난로를 보게 된다. 물이 전부 졸아 없어진 냄비를 치운 것이 화근이랄까. 눈이 거의 장님이다시피 한 오노린 할멈은 냄비가 그대로 있는 줄 알고 난로에 물을 부었고, 난로안의 재가 구름처럼 일어나 오노린 할멈을 덮쳐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잘됐구나 싶은 어머니는 오노린 할멈을 해고하고 그녀의 손녀인 아가트를 고용한다. 오지랖 부리다가 한명의 실직자를 만든 셈. 물론 홍당무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으나 어머니는 꺼지라며 으르렁댄다. 네놈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면서.
어느 날, 어머니는 홍당무에게 버터를 한근 사오라며 심부름을 시키는데 끝까지 가지 않겠다고 보틴다. 이에 어머니는 분노가 폭발하여 가족들을 불러모았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어! 아가트도 나와보거라. 저놈이 내 지시를 거역하는구나? 세상이 뒤집히려나보다. 누가 저 사나운 짐승을 길들일테냐?'라며(진짜 엄마란 사람이 할 소린가...). 이에 아버지는 조용히 홍당무를 끌고 나간다. 둘만의 시간을 갖게된 부자는 서로 속내를 터놓게 되고 어머니를 피해 독립을 하겠다는 둥, 나도 일을 하며 자립할 수 있다는 둥,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둥 그간 참고 지내느라 응어리진 한을 성토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은 넌 학생으로서 공부를 해야하며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누구나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고 누구나 죽고싶어할 때가 있다고 한다. 덧붙여 '나라고 니 엄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라고 대꾸한다. 아버지의 속내를 좀 알게 된 홍당무는 개운하게 집을 향해[7] 욕을 한다. "야이 망할놈의 여자야! 난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싫어!!" 이에 아버지가 "그래도 네 엄마다."라고 말하자 홍당무가 재빠르게 "엄마한테 말한 건 아니야!"라고 대답하며 끝. 아동용으로 개작한 버전에서는 그냥 '홍당무가 아빠에게 위로받고 사는 착한 아이가 되기로 한다'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만... 엄마란 사람이 하는 짓을 보면 글쎄다...
형의 실수로 이마를 다친 홍당무에게 ‘조심성이 없다.’고 야단을 치면서, 제풀에 놀라 기절한 형을 감싸는 등 편애한다. 어머니는 홍당무가 ‘잘못하기를 기다렸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달려들어 나무라며 우스갯감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침내 상냥하고 낙천적이던 홍당무도 집을 싫어하게 되었고, 어머니에 대해 반항한다. 심지어 가출과 자살까지도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홍당무는 아버지도 자신과 똑같이 어머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불쌍하고 딱한 어머니였다. 홍당무는 마음을 돌려 예전의 순진하고 솔직한 아이로 돌아갔다. 어찌 됐든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먹는다. 홍당무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이것은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작가 쥘 르나르는 중부 프랑스의 시골 출신으로 1887년에 ‘쥐며느리’를 발표했다. 이후 장미꽃, 혈조를 자비로 출판했다. 시골에 은거하여 살다가 46세에 지병으로 병사했다.
홍당무는 작가의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첫댓글 우리나라 동화책은 어른으로 성장할 필요가 없을 만큼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완벽한 인격이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우리나라의 동화책에 관하여 따끔하게 꼬집은 변학수 셈의 글을 보자.(일일문학회 2회 문학세미나에서)
동화작가 황선미가 너무 착한 어린이를 묘사한 동화책에 대해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방정환, 권정생 식의 계몽적, 교육적, 유교적 이야기 전통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아이의 ‘아이다움’, 즉 아이는 어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갖고 있다는 통찰력을 뺏어간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선생님의 문학은 아동들을 향한 교훈과 도덕을 초월하여 그들만의 특수한 내면성과 상상, 감성을 결여하고 있어요. 이제 출판되는 아동문학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상상력을 구조화하기보다는 교육을 위한 어떤 특정 이슈나 소재에 대한 것들을 기술하는 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왕따, 폭력, 환경 문제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백희나 작가와 이호백 작가는 예외가 되겠지요.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님은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 “결과만 보고 아이들을 판단하는 잘못된 훈육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고 말하고, 계속해서 그는 “‘나쁜 어린이표’를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학교와 선생님, 나아가 어른들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현실을 비판하고 […] 아이와 어른이 올바른 방식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작품의 교훈을 느끼게 된다.”고 평가하고 있네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작품이 르포나 수기, 일기, 수필과 어떻게 구별되는가요? 지금 쓰는 저의 편지와 어떻게 다른가요?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은 왜 그렇게 많이 팔리지요? 선생님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100만권을 훌쩍 넘어섰구요. 『나쁜 어린이표』 또한 150쇄를 넘어섰어요. 가히 신화적인 책이지요. 외국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 수백만 권을 넘어섰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뜻이겠지요?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 대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네요? 런던 도서전에서 작가상을 받았다구요? 그런데 그것 혹시 한국의 출판사에서 기획한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의심이 들어요. 아이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부모가 아이들에게 이런 책을 읽히고 싶어서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의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강의하던 중이었습니다. ‘실수 행위’란 부분을 강의하였고, 실수의 상황을 모으던 중 재미있는 유머를 들었을 때였답니다. 아이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한 엄마가 친구들 틈에서 우연히 그림책을 많이 사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리고 당장 『아기 돼지 삼형제』라는 그림책을 사기 위해 서점엘 갔답니다. 그리고는 점원에게 “저기요! 아기 돼지 삼인 분 주세요.” 아차 실수로 말을 했네요. 그러나 실수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어떤 의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사주느니 차라리 내가 돼지고기 3인분 사먹는 것이 낫겠다”는 의도 같은 것 말이지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동화(아이의 이야기)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화를 쓰는 사람도 어른이지만 동화책을 사는 사람도 아이가 아니라 어른입니다. 그러니 자칫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가 원하는 세계가 아니라 어른이 원하는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른이 아동의 세계를 모르고 아동문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동문학의 기능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 앞으로도 선생님의 동화는 꾸준히 팔릴 것입니다. 중세시대 우리는 아이의 모습을 어른의 축소판으로 그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이 발견되고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어른들이 원하는 세계는 그만 강요했으면 합니다. 불편한 이야기를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선생님의 작품에 열광하는 일이 생기길 바랍니다.“
변학수의 지적은 우리나라 동화가 어린이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무 미화하고, 착하고, 천사같은 어린이를 표현한 동화는 어린이를 올바르게 표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자칫하면 어둡게 그려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쥘 르나르는 독특한 유머와 시적 분위기를 살려 향기 높은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작가로서 어린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을 꼼꼼하게 그려 나갑니다.
여담으로 르나르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홍당무처럼 자라지 않았다.시의원 및 시장까지 지내며 정치인으로서도 활동하고 드레퓌스 사건 당시 드레퓌스와 에밀 졸라를 옹호하기도 했다.하지만 시장으로 재임할 당시,형과 아버지를 일찍 죽게한 집안 유전병에 결국 그도 걸려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덧붙이자면, 전 세계에서 소아과 선생님들이 공부하는 교과서, '넬슨'의 첫 페이지에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가 쓰여 있다.
홍당무를 읽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요.
아들이 어릴 적에 읽길래 이런 걸? 하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홍당무는 어떻게 엄마를 이해 or용서 같은걸 하게 되었을까요
진짜 이런 모자관계를 보고 나서 (얼마 전 일입니다) 알게 되었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요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군상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됩니다. 이해는 못하겠어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요.
보여주는 것만으로 문학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르나르가 보여주는 유머가 문학의 장치인가 싶고요.
수필을 쓰면서 자꾸 선도하려고 하는 저를 보면 잘못된 도덕 교육의 결과인가 싶기도 합니다
늘 애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