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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요유 (逍遙遊) 원문보기 글쓴이: 山木
"깨달음이 깊어지면 너의 전 존재가 춤을 추리라"
어서 오십시오.
그래요, 바로 당신, 여기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이 책은 당신을 위한, 당신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껏 당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던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외모만으로, 당신의 이름과 성, 족보, 개성의 빛깔,
당신의 과거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으로,
당신 자신을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적은 없습니까?
당신의 깨어남에 관한 이야기이고,
진정한 당신을 기억하는 문제에 관한 책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는 대로
어느 장이나 펼치고 읽으십시오.
당신 안에 이미 내재된 지혜가 당신에게 맞는 글들로
당신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댜샨티-
깨어남
몇 해 전 내가 결정적으로 깨닫기 전까지,
나는 깨달음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선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조금은 미쳐야 합니다.
나의 스승님은
"미치도록 열심히 하는 자라야만이 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앞뜰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런 의문이 솟았습니다.
'저 소리를 듣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불현듯 새소리를 듣고 있는 자와 새,
그리고 소리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물이 하나의 근원으로 비쳐진 이후 곧바로,
나는 근원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근원인 '하나'또한, '하나'라고 할 것도 없었지요.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은 생각과 느낌과
기억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마치 바람직한 영적 상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히려 생각을 '통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생각이란 단지 생각일 뿐이고, 느낌일 뿐이고,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보탬이 됩니다.
18p~ 25p
+
깨어남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는,
그것이 희귀한 어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당신 자신을 향해 "깨달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라야, 깨달음은 당신에게 작동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희귀한 것일 수도, 어려운 것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헤아려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나의 참모습인가? '나'라고하는 생각이 멈추어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것이 사라지고 없을 때도 여전히 있는
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마음은 이를 알아내고자 활발하게 작용합니다.
"가만 있어봐, 이것 또한 생각의 연장일 뿐이잖아."라고
지성적인 헤아림을 멈출 때까지는,
이리저리 마음을 쓰면서 생각을 계속합니다.
그러다가도 생각과 생각 사이에
고요한 틈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의식하면,
당신은 그동안 늘 익숙해왔던 '나'로서 행동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딱히 누구라고 할 것이 없는
그 상태는 마음에 혼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마음은 즉각 그 틈을 메워버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어?" 하지만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채운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26p~27p
(문)
"그 모든 것을 내가 지어냈다고요?"
(답)
"모든 것을요. 하지만 당신 안에 있는 '깨어난 의식'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마음만이 꿈을 꿉니다.
깨어난 의식 상태가 되면 당신은
"잠깐만, 이것 모두가 꿈이잖아!
마음이 현실을 꼬아 놓은 거야. 가상현실을 창조한 거야.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아. "
생각은 의식의 내부에서
백만 가지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 자체는 한 조각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몸이 느끼는 방식뿐입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몸은 거기에 반응합니다.
당신이 자아를 부풀리는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면,
당신의 몸은 득의양양하여 자만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스토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당신은 온갖 마음의 장난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사실 당신은 깨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깨어나 있는 당신의 실체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됨됨이 자체는 영원히 깨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30~31p
사트상
"나는 누구인가? 아무런 스토리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아무런 요구도 받지 않는,
어떤 것도 희망하지 않는, 아무 대본이 없는,
지금 여기에서의 나는 누구인가?"
마음은 어떻게든 대답하려 애쓰면서 "나는 몰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무장해제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역할이나 배역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연기하는 배우는
'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트상의 부름에 기꺼이 응할 때,
그 배우는 자기 역할을 계속하고,
마음은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그 뒷배경을 찾다보면, "내가 여기 있어."라는
외침이 빈 방에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지 그것을,
진정한 자아를, 진리를, 깨달은 나를 찾을 것이다."
깨달은 자아를 구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역할이고,
대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구도자가 쓰는 대본의 일부입니다.
그러한 대본이 없을 때의 당신은 누구인가요?
34~36p
가장 진실이 담긴 질문은, "이것이 진짜 나란 말인가?"처럼
언뜻 어린애같이 유치하게 여겨지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그러한 질문을 통하여 점던 더 무장해제된 상태가 되도록,
당신 자신을 허락하십시오.
마음이 무장해제된 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모든 개념과 대본에 아랑곳하지않는 것에 대해
근심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말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깨달음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그 무엇도 얻지않았습니다. 나는 깨닫게 되면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걱정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는 다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가지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니,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꿈이었습니다!
38~39p
열림
열려있다는 것은 특정한 곳에 무게를 싣지 않는 것입니다.
열림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열림은 어떤 것을 위한 공간을 따로 두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고, 무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감각이 있을 수도 있고, 무감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소리가 있을 수도 있고 침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열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 어느 것도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진정한 본성은 특정한 견해로
우리 자신을 규정지을 때, 내가 누구라는 개념으로나,
내가 믿고 있는 신념으로, 혹은 이런 저런 감각으로
우리 자신을 묶어둘 때에만 방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활짝 열려 있어서
우리의 진정한 본성으로서 존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어떠한 것에도
반대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열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만사오케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영위되게끔 허용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42p
마음을 여십시오. 가슴을 여십시오.
보호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정적인 장벽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 당신 자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주어졌고,
그것을 보호할 생각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장벽을 쳐 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든 부적절한 인간으로서든
자기 이미지에 집착하면, 그러한 이미지를 보호하고자
일련의 정체성을 쌓아올려 가게 됩니다.
이것은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성을 쌓은 것은 이것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자기 이미지와 보호 장비, 이것들은 같은 상자 안에 있어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진실이나 깨달음, 혹은 깨어남에 관해 재미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것이 전혀 감추어져 있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놓치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질 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럴 만한 순간을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은,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 부르든 열림이라 부르든,
이미지 없는 진아는,
무슨 말로 불러야 당신의 기억을 자극해 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매우 고요합니다.
하지만 내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 말의 안쪽에 있는 것을 당신 스스로 발견하십시오.
당신이 바로 열림 자체임을 깨닫을수록,
당신의 육신은 보호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당신은 스스로를 열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차원에서 당신은 이것을 당신의 근육과 뼈 속에 있는 하나의 감각으로써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대신 진리의 표현으로써
육체적인 형상안에 있는 '열림'의 표현이 됩니다.
44~46p
천진무구
깨어남이 깊어지면 개인적인 자아가 설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생각들도 나와 상관이 없고, 감각도 나와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것들도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에고의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나'에게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것이 '정상적인' 의식 상태입니다.
개성을 입은 '나'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느낄 뿐입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의 중심을 나타내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봄에 따라,
우리는 개별적인 자아가 우리의 진정한 됨됨이가 아니며,
처음부터 우리의 본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자신의 진정한 현존 상태와
친밀해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개성을 입은 나의 경험 속에
천진무구함과 사랑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거기에 내내 있어 왔지만,
'나'라는 생각과 느낌의 뭉치에 의해서 덮여져 왔던 것입니다. 이런 천진무구함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어서
나를 놀라게 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영적인 통찰이나 깊이가 아무리 성장하고 자라도,
천진무구함은 계속해서 거기에 존재하고 점점 더 자라납니다. 에고적인 자아로 살때,
우리는 알면 알수록 천진무구함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알면 알수록 더
친진무구해지게 됩니다. 53~54p
깨어나게 되면, 개인적인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 역설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사랑 이외에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진리가 진리 자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신이 신인 자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랑은 매순간 사랑인 자신을 만납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순간이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에고의 의식 상태를 통해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필터를 통해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천진무구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만납니다.
나의 근원인 '하나'가 그 자신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천진무구함의 이런 자질은
지혜를 최대한 자유롭게 풀어 줍니다.
그것들은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 꽃피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당신을 깨어 있게 해주는 것들이며,
깨어남의 아름다운 표현이기도 합니다. 57~58p
조화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물질인 육신을 자기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물질은 미료하고도 거칠게 육화된 것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물질은 만져지고, 보여지고, 느껴지고, 인식되는,
생각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감각이나 감정도 물질이 있기 때문에,
물질을 기반으로 인식되고 느껴지게 됩니다.
물질의 정수는 영입니다.
물질은 영에 의해, 생명력에 의해, 활성화됩니다.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마치 두 가지 것인양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력을 빼놓는다면, 거기에는 물질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은 물질이란 것은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이는 물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깨닫기 전보다 훨씬 더 깊은 조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약간의 부조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매순간 있는 그대로 내맡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피부를 태우려면 태양에 우리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있듯이
말입니다. 피부를 태우려면 옷을 걸치지 않고 벗어야 합니다. 자유를 원할 때에도,
개념이나 사상, 견해의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벗어야 합니다.
그때 저절로 원하던 일이 일어납니다. 60p
스승님과 함께 수행을 하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깨달았습니다.
수련회에서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때로 흥미를 갖고 매우 열심히 들었지만,
어떤 때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시곤 했지요.
"때로는 이야기가 잘 되지만,
때로는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안 나와. 말이라는 게 다 그렇지."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자체에
그리 집중되지 않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공상에 빠져 있지도 않았지만,
주의 깊게 듣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갑자기 연기처럼, 미묘한 현존의 흐름 같은 것이
감지 되었습니다. 나는 알았습니다.
"저것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야.
그는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말, 말,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겉으로 보이는 것은 진행되고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그가 얼마나 은밀한 방법으로 존재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미소들 띠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에서, 그분 자신이나 참석자 중
누구도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미묘하지만 널리 퍼져 있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날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때까지,
나는 그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에야 미묘한 근원을 경험했고,
그것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감지했고,
나의 내면에서도 빛나고 있었습니다.
내면에서도 똑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보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 나의 진면목이었습니다!
그것이 만물에 생명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맛보기 같은 것이었고,
신성한 현존을 알아차리는 일이었습니다. 62~64p
의식의 빛은
어떤 것도 바꾸거나 변경할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바꿀 필요가 없지만, 의식의 빛은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도사들이 자리에 앉기만 해도
모든 것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더 나아졌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런 분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태양을 보지 못한다면,
깨달은 존재가 떠나고 나면
모두가 예전처럼 혼동의 상태로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도사는 거기에 대해서 냉정을 유지합니다.
태양은 어디를 비출 것인지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왜 비추느냐고 태양을 향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로 원할 때만이 깨닫고 변화됩니다.
그때까지는, 모든 변화가 일시적일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영원히 깨달으라고 당신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진면목인 빛을 보기 시작할 때,
그 빛이 당신 안에서 깨어날 때, 아무런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진리는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저 스스로 흘러가는 유일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나름대로 계획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리가 그렇게도 강력한 이유입니다.
66p
자유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성자는 어떻게 깨닫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은 제가 곧 만물의 최고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지고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는 숙고한 끝에 그 말이 진실임을 알았고,
저 자신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스승님께 들은 말을 믿었으니까요."
자유는 이런 깊고 깊은 평화와
이런 '알려지지 않은 것(Unknown)' 이
당신의 진정한 본질임을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그것의 확장일 뿐입니다.
몸은 그런 '알려지지 않은 것'의 확장일 뿐입니다.
생각과 느낌 또한
시간을 통한 '알려지지 않은 것'의 확장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 전체가 사실은,
이런 '알려지지 않은 것'의, 이러한 고요함의 확장일 뿐입니다.
67~68p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 '나'라고 불리는 이것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 시작의 연원인 뿌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의 정수인 사랑과 천진무구함과 말없는 감응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사랑의 상태에서 빠져나와서
'생각으로' 이럴 것이라고 가정하는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천진무구한 감응의 상태에서 다른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자유가 상실된 지점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최초로 그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매순간 있는 그대로의 천진무구함이 있고,
모든 것과 있는 그대로 감응하는 '나 아닌 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때 마음이 나타나서, '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내것이야. 그것은 내 생각이야. 그것은 내 문제야."
물론 그 생각, 그 문제가 '내 것이 아닌 네 것'이라고
반대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고통과 분리의 근원에,
그 뿌리에 있습니다.
몸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바라봄으로써 만이
자유로워집니다.
잡초의 윗부분이 아닌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당신의 신경만 제어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깨어나서 당신의 영원한 진면목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인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신이 집착하고있는
모든 정신적인 구조물을 기꺼이 놓아버릴 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우는 역량을 발휘합니다.
이것을 깊이 숙고하십시오.
진정한 믿음으로써 이만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68~74p
찬란한 마음의 중심
겨울은 일년 중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성스러운 절기는 대부분 겨울에 몰려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라마단, 유대교의 하누카, 기독교의 크리스마스, 불교의 성도일이 모두 겨울에 치러집니다.
겨울은 신성한 출입구이자 기회입니다.
나뭇잎들이 모두 땅에 떨어지고,
갖가지 열매도 모두 땅에 떨어집니다.
가지는 텅 비어버립니다.
만물은 저마다 자신들의정수인 뿌리로 돌아갑니다.
외부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내부 세계에서도,
자연적인 벌거벗음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때로 나에게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해온 것과는 달리, 분리된 나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깨닫게 되면,
그때에는 누가 이 삶을 살게되는 거죠?"
당신이 만약 찬란하게 빛나는 공의 심장에 한 번만이라도
접속이 된다면, 당신은 이 삶을 누가 살고 있는지,
무엇이 지금껏 살았던 것인지,
이 순간부터 누가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실제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이 심장- 텅 빈 마음과 더불어- 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생각해 왔던 당신임을 포기하고
진정한 당신 자신으로 존재할 때,
찬란하게 빛나는 이 심장이 당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는 '없음'이 당신 자신의 현실이 되고,
비이원적인 깨달음이 당신의 진정한 됨됨이가 됩니다.
75쪽~ 81쪽
사람들은 너무나 상처받기 쉬워서,
늘 방어벽을 세우곤 합니다.
하지만 방어벽을세운다는 것은,
별이 빛나는 밤에 무한한 허공을 향해 선 채로
작은 외투 하나를 들고, 당신 자신을 그것으로 보호하려고
하면서, 언젠가는 단추를 풀고 영적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영적인 자유는, 어리석은그 작은 외투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그만두는 어느 날, 풀려나갈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그 모든 제한된 정체성에서 당신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무한함을 두루 껴안으십시오.
우리가 광대하게 열려 있는 침묵을 허용하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그 열려 있음의 끝을 찾을 길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태초 이전부터 내내 여기에 있어 왔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은 이제야 기꺼이
자기 자신을 여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낯설고 이상하고 기이한 신비에
우리 자신을 여는 일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 자신이었던 것에 문을 여는 것입니다.
82~83p
침묵
선을 배우는 사람들은 숨을 의식하면서 명상을 하곤 합니다. 호흡을 하면 집중이 잘되는 것 같지만,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의식하다 보면 마음은 어느 곁엔가
자기 인생의 드라마를 좇고 있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수행을 매우 잘합니다.
그들은 초점을 유지하고 거기에 머물면서 고요해집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그렇게 유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거듭해도 늘 완전한 실패로 끝나자,
스승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만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구나."
초점을 맞추는대신,
나는완전히 열려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초점을 맞춘다기보다는,
귀를 열어놓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소음의 반대편에 있는 고요함은 진정한고요함이 아닙니다.
진정한 고요의 상태에서는,
드릴로 바위를 뚫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것을고요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도 그것은 그저 '고요함이 일시적으로
어떤 형태를취하고 있는 것' 입니다.
진정한 고요함은 만물을 포용합니다.
당신이 고요해지면, 당신은 자기 자신을 쉬게 하여
그 순간과 더불어 함께 숨을 쉽니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과 함께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경험의 어떤 부분도 피하지 않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도피하는 마음에서 고요함을 추구한다면,
진정한 고요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85~93p
의식
의식은 자기 자신을 잊어 먹고,
온갖 종류의 실수를 저지릅니다.
첫 번째로 저지르는 실수는 자기 자신을 창조된 것
(이 경우에는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바다에 속한다는 것을 잊어먹은
파도와 흡사합니다. 파도는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바다의 표면에서 출렁거리는 하나의 파도에
지나지 않다는 끔찍한 망상을 하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렇게 파도는 자기 자신의 지극히 작은 겉가죽만을 경험합니다. 물론 파도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만,
그가 의식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고 표면적인 것뿐입니다.
자기자신이 하나의 파도일 뿐이라고 동일시함으로써,
파도는 온갖 종류의 혼동을 창조합니다.
자신의 정체성부터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은 어느 것이든 필연적으로 고통을 가져옵니다. 고통이나 갈등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진실에 대한 무지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무지에서 시작되지만,
흔히 그렇듯이, 이것들이 쌓이게 되면
그 결과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게 됩니다.
98p
문)
명상할 때마다 저는 제가 깨어있다는 자각에 도달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저는 즉시 말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 머리가 빙글빙글 돕니다.
그래서 무념의 경지가 제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이 제게는 도움이 됩니다.
답)
거기에 머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항상 실제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차릴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당신은 지금도 깨어 있습니다.
깊은 명상 상태에 있는 것만큼이나 깨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만큼이나 확실하게,
당신은 깨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합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지?' 당신은 당신 자신에 관한 당신의 모든 가정에 깊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것들은 너무나 빨리 와해되어버립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지점에 도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모든 방식이
하나의 개념일 뿐이고, 그러니 거짓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음은 더 나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멈춤은 물론 수행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멈춤을 수행하는 것은 어떤 것도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멈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멈춘다고 하는 것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110~112p
깊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흡수하고 축적해도,
그것이 영적인 깊이를 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저 당신으로 하여금
더 많은 수평 이동을 하게 할 뿐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깊이를, 탁월한 깊이를 원한다면,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마음은 말할 것입니다.
"나는 널 조금은 놓아줄 거야. 하지만 나는 여행을 위해
내 주머니에 많은 지식을 쌓을 거야. 가다보면 내가 쌓아놓은 개념들이 필요하게 될 거야." 마음은 여러 질문들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건 안전한가? 이건 현명한 짓인가? 내가 어리석은 건가?" 모든 지혜가 마치 지식의 모음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축적된 지식을 완전히 간과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획득된 지식을 남겨둠에 따라, 당신이 그동안 익숙해 있었던 자아에의 감각 또한 뒤에 남겨지게 됩니다.
자아는 지식과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만 존재했습니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날 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부모의 정체성을 떠나고,
당신이 생각하고 믿는 모든 것을 떠나게 됩니다.
어제는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때 매우 흥미로운 것이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는데도 당신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존재합니다. 118~120p
"바른 길이 없다고? 말해지는 모든 것,
읽은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참된 것일 수가 없다고?
지고의 깨달은 존재도 진실을 말할 수가 없다고?"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시봉으로 벽 위를 가리키며 "저 길을 보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거짓된 영적인 화살은 그 벽을 향해서 "이 길을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참된 화살은 개념의 벽 너머를 가리킵니다.
지시봉들이 가리키는 바는 다소 참될 수 있지만,
지시봉이무엇을말하든, 거기에 도달하는 법을 어떻게 말하든, 무엇이 그 너머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너머에 있게 되자마자, 당신이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무엇도 거기에는 적용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많은 위대한 영적인 교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아는 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있음'뿐이므로,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만 있다며, 거기에 대해 알게 되는 '하나'는 누구입니까? 그 '하나'는 "나는 그것이다. 나는 이것이다."하고 알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달은 앎입니다. 다른 모든 앎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124~125p
에고
에고란 녀석을 한 번 찾아보라고 하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노의 마음이나 생각은
에고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부추깁니다.
"맞아, 이게 바로 나의 에고야. 그놈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우리 인간들, 특히 영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일어난 모든 일들이 에고가 존재한다는 증거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고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분노와 기쁨과 우울함과 축복의 표정을 보아 왔지만, 그런 것들의 연출자라는 에고를 함께 보여준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타락한 어떤 녀석이
버티고 있어서, 그녀석이야말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가정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개는 에고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에고가 아닙니다. 어떤 일들의 진상은,
나타난 그대로의 단순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고,
느낌은 그저 느낌일 뿐이며,
행동은 그저 행동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에고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설령 에고라는 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존재하는 것은 거기에 에고가 있다는 생각뿐입니다.
131p
언젠가 스승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멈추기를 기다린다면, 넌 영원토록 기다려야 할 것이야." 나는 갑자기 깨달음에 이르는 나의 길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마음을 멈추려고 애써 왔었는데, 그제야 실천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그냥 멈추라."는 영적인 지침은 마음이나 느낌이나 개성을
향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게 나야."라고 나중에 갖다 붙이고,
거기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생각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나'라고 갖다 붙이는 그 생각을 멈추십시오! 바로 그 순간, '나'라고 하는 그 인식이 얼마나 완벽하게 무장해제되는지를
가만히 느껴보십시오.
몸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떤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들도 서로 부딪치며 갈등하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에 마음을 열어놓고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그러한 호기심이 당신을 분열되지 않는 상태에 열어놓습니다.
분열된 마음은 자아 관념을 기르는 토양입니다.
우리가 분노한다면, 거기에는 바로 '나'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분노이기만 할 때, 그래서 그것이 '나'와 동일시되지 않을 때는, 분노조차도 자기 자신을 갑자기 펼쳐놓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에너지로써, 저 혼자서 생겼다가 저 혼자서 흩어져버립니다. 그때, 나는 누구일까요?
분노가 일어날 때도 분노가 '나'의 것이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분열된 존재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깨어있는 상태로 존재하면서 점점 더 밝아집니다.
우리는 살아있음을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설탕을 물 속에 넣을 때처럼 자아 관념이 녹아버립니다.
하지만 자아라는 것이 녹아버려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135~137p
사랑
참된 사랑은 그런 법칙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지어내는 게임의 법칙에 따라 노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이유가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당신이 고상하고 거룩하고 가치 있게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제나 있는, 당신이 육체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항구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어 왔고
언제나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 당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분리되었다는 당신의 환상을 깨는 첫걸음입니다.
당신들이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상할 때,
그렇게 되는 진짜 이유는 사랑이 거기에 있는 데도
당신이 사랑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은 머물러야 할 때와 떠나야 할 때를 저절로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됨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어떠한 그릇에도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당신 안이든 어디든,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8~151p
황홀경
구도자의 체험이 이와 같습니다.
한 가지 경험에만 머물고 다른 경험들은 피하려고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경험은 하고 싶어 하고
나쁜 일은 피하고 싶어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습니까.
영적인 황홀경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고 고상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아라는 것이 남아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의 체험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한, 그것은 자유의 경지가 아닙니다.
자유의 본질상 어떤 특정한 체험을 유지하는 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이란 부단히 변화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쾌종시계처럼,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154p
문)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깨달음의 순간들과
영적인 체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일시적으로 맛보게 된 비이원적 깨달음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애쓰는 것에는,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답)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체험은 체험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구도자가 완전히 깨치지 못했다면,
구도자는 그러한 체험에 대해 확신하고 또 확신하면서,
비이원론 상태를 그것의 부산물과 연결짓게 됩니다.
찾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비이원적,
비경험적 상태의 부산물은, 크게 "아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구도자가 완전히 깨치지 못했을 때 저지르는 실수는,
"아하!"라는 감탄의 순간을 비이원적, 비경험적 상태와
연관짓는 것입니다. 물론 "아하!"는 구원일 수 있고,
행복이고 웃음이고 눈물이고 축복일 수 있습니다.
구도자가 보았던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구도자가 완전히 깨치지 못했을 때 구도자는 그런 경험적인
부산물을 깨달음 자체와 연관시키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부산물이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모든 부산물들을 깨끗이 지울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부산물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볼 수 있겠습니까?
...
당신은 깨어 있건 깨어 있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161쪽~167p
환상
세상은 환상이고 그림자일 뿐이며,
브라만이 홀로 실재한다.
그러니 세상은 브라만이다.
-라마나 마하르쉬
세상에 대한 관점들은 문자 그대로 자기의 관점일 뿐입니다. 저마다의 마음이 지어낸 생각과 느낌으로 인식되는 세상은,
마음속에서가 아니고서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세상을,
당신의 세상 전체를 상실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입장과 견해가 옳다고 증명하려고
애쓴다면 자유롭기는 글러먹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생각과 이미지로 덧입히는 일을 중단할 때,
그것은 꿈에서 개어나는 상태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유일한 길은 ,
잠에서 깨어나는 것뿐입니다.
'나란 없다,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동방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직접적인 체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근본주의적인 이론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것 또한 있는 그대로의 실상 위에
마음이 덧입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168~171p
질문)
가끔씩은 세상을 바라보는 저의 입장과 견해가
환상임을 깨닫고, 전체성을 자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전체와 분리된 개체로서의 느낌이나
생각에 사로잡혀버리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전체성과 개체성을 왔다 갔다 하는
이것을 멈추고, 순간의 간헐적인 깨달음을 항구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요?
답)
"순간의 깨달음을 항구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그 일은 언제나 가능하게 될까?"라고 요구하고 있는
그 사람을 용해시켜버리십시오.
그것을 묻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나요? 그것은 생각의 특별한 움직임에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단지 개념적인 덧입힘에 불과합니다.
선에는 이런 금언이 있습니다.
"한 순간에는 붓다이다가 다음 순간에는 중생이 된다."
때로 당신은 붓다이지만, 때로는 중생입니다.
하지만 둘 다 가면입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가면이고,
붓다라는 것도 역시 가면입니다.
가면이 벗겨지면, 중생과 붓다가 똑같습니다. 173p
통제
"아댜, 제 생각에, 저는 모종의 영적인 깨달음 상태를 경험한 경험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생각에는요.
깨달음을 경험하긴 했지만, 완전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진 않습니다. 저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긴 한 것 같긴 합니다. 그건 대단히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하지만 아댜, 뭔가 완전하지만은 않습니다."
뒤를 잇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서도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신의 문제를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문제로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전적으로 자유롭지 않는 한,
이를 정면으로 문제시해야 하는데도,
모두가 다 통제의 주변 문제만을 다루려고 할 뿐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영적으로 심오하게 깨달은 사람과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과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다면, 자유롭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빌딩 바깥으로 몸을 던지면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력이 당신을 아래로 잡아당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전적으로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온전한 자기실현,
자기 깨달음을 마무리 짓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2~183p
질문자:
그러니까 존재론적인 움켜쥠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에 대한 것인가요?
아디야:
존재론적인 움켜쥠은 육체적으로 느껴지지만,
육체적인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당신 자신이 최근 자신에 대해 생각하듯이, 당신의 육신이
죽어도 당신은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는 경험을 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신념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고 신앙도 아닌,
100퍼센트의 확신으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당신의 육신이 쓰러져서 죽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까요?
질문자:
아닙니다.
아디야:
내 생각에, 대다수의 인간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자기 몸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내 육신이 죽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입니다.
질문자:
" 나 자신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아디야:
그렇습니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내 육신이 죽어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매달리고 집착합니다. 내가 나 자신이라고 아는 내가,
나의 개성이 불에 구워집니다. 그것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익숙한 생각들의 집합일 뿐이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죽음이라는 환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개성과 동일시한다면,
죽음이 환상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190~191p
내려놓기
에고가 얻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당신 자신의 진정한 본성입니다.
에고는 수십만 번의 영적 체험을 얻을 수 있지만,
당신의 진정한 본성은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에센스는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항구적으로 계속되는 것이어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별다른 무엇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항상 존재하고,
항상 존재해 왔고, 항상 존재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얼핏이라도 엿보고 경험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바쳐 얻으려고 애써 왔던 것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고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주머니 속에서 보석을 발견한 걸인과 흡사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과 연인이 된다는 것은
처음에는 매우 낯설고 기이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해진 사랑의 방식은,
특정한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그것 역시 기이한 방식으로 친숙해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멀고 먼 옛날부터 그래왔었던 것 같지만,
동시에 이제 막 태어난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기가 어린아이로, 어린이가 젊은이로,
젊은이가 어른으로 성숙되어 가듯이,
깨달은 사람들도 그렇게 자신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200~203p
자비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연적인 고통입니다.
베고품이나 육체적인 상해의 위협,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오는 심리적인 고통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이런 차원의 고통에 대해
자비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는, 그 고통이 펼쳐지기 위한 여유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런 여유를 가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런 여유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차원의 고통에서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품고 있는 비이기적인 본성이
깨어나게 되면, 이러한 본성은 어떤 것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고통은 심리적인 고통으로, 분리되었다는
내면의 마음가짐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모든 고통의95~99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배고픔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애초의 슬픔을 훨씬 더 큰
슬픔으로 만드는 내면의 분열 상태는 느끼지 않습니다.
204쪽~ 205p
'나'라는 상이 있으면 중심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온 우주의 드라마 속에 자리한 중심적인 플롯입니다.
'나'라는 상을 갖고 사는 사람은 존재의 매순간,
심지어 꿈을 꿀 때조차도, 스타로서 역할극을 펼칩니다.
그래서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그 중심과 연결되고,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자기 개인과 관련시켜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중심은 없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저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인식의 관점들이 존재하지만, 거기에 중심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몸 안에 조첨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초점을 만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자비심은 진실에의 헌신입니다.
이러한 자비심이 베풀어지는 첫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아닌 다른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세상을 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최상의 자비는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일임을
저절로 깨닫기 시작합니다. 209쪽~210p
지금 이 순간의 시간 자체는 아무런 이야기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지극히 단순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을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인식하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당신의 모든 일정표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을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충분하다고 느끼는 일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어떤 문젯거리가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당신의 이웃이나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풀어야 할 어떤
문젯거리가 아닙니다. 당신 자신이 전혀 문젯거리가 아닌 상태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을 문제라고 여기는 마음은
어떠한 것이든 생각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본성에 깨우치게 되면,
당신은 안도 바깥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깊은 자비심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것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깊은
내면에 접속될 때, 당신은 절대적인 무저항의 상태가 되고,
이것이 만물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신성한 연금술이며, 그것이 자비입니다.
213쪽~ 215p
진실의불
어떤 경험이든 그 경험을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세상을 안과 바깥으로, 나의 것과 그들의 것으로,
나의 소리와 바깥의 소리로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안이든 바깥이든 모두가 경험일 뿐입니다. 나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고요한 현존에 몸을 열고, 당신 자신을 거기에 푹 적시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십시오.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고요한 깨달음이 오지만,
말로는 그것을 옮길 길이 없습니다.
이 위대한 선물을 당신 자신에게 허용하십시오.
거기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단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이, 이것을 경험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무엇이 그런 경험을 합니까?
생각 속에서 길을 잃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당신의 내면에 깨어 있는 '이 깨어 있음'은 자기 자신을 압니다. 마음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몸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감정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깨어 있음'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알 뿐입니다.
진실은 단순합니다. 모든 이해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지체되는 법이 없어서,
모든 구함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것은 늘 현재입니다.
늘 현재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의 모든 면모를 남김없이 보여줍니다.
220~222p
문)
뉴스를 볼 때마다 수많은 견해와
어지러운 논쟁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이런 진실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아디야샨티)
특별히 어떤 까닭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삶이라는 것이 당신을 통하여 일어날 뿐입니다.
마치 간디처럼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면서, 모종의 액션을
취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마나 마하르쉬처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그러니 왜 개입한단 말인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항상 "이것들 중 어느 쪽이 옳은가?"를 따지기 좋아합니다. 당신은 대개 세상을 위해 어느 쪽이 옿고 좋은지
선입견을 갖고 있고, 거이에 따라 선택합니다.
이것은 기만입니다. 마음은 알지 못합니다.
삶이 참나무나 연못, 바위, 호수, 자동차일 수 있고,
그래서 매우 역동적인 삶이나 매우 수동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은 동일한 근원에서 옵니다.
저는 tv를 켜고 당신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
당신을 가장 자극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대단한 영적인 수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신을 볼 때,
당신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분노가 끓어올라 그 사람이 나올 때마다
tv를 꺼야 한다면,
당신은 아직 깨어나야 할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226~230쪽
깨달음
선 수행자들은 대개 '벽을 보고 말없이 정좌한 채
앉아 있노라면, 무슨일인가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행하여 즐거운 체험들을 했습니다.
몇 분, 혹은 몇 시간 동안, 또 정말 운이 좋으면 수행 기간 동안 내내, 확장된 기쁨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느낌을 명상 중에 몇 초간만이라도 경험하게 되면,
마음은 뇌까리기 일쑤입니다.
"내가 이런 경험을 내내 하게 된다면,
그것이 자유로운 삶이지 뭐."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깨달음이란 내가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 체험들은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당신이 무엇을 체험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체험은 사라지게 마련이거든요. 그것이 체험의 본질입니다.
깨달음은 해체 프로젝트입니다.
깨달음은 당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님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당신 자신에 관해 당신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 모든 거, 당신의 이미지가 좋든 나쁘든, 혹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든,
그런 것들 모두가 진정한 당신은 아닙니다.
세상에 관해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닙니다.
깨달음에 관해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들은 모두 정확히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제 감이 잡힙니까? 깨달음은 '제거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무엇을 제거 하느냐고요? 모든 것을 제거합니다.
모든 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궁극의 자유가 아닙니다.
제거되지 않은 오직 하나의 것,
오직 하나의 관점이 있다고 해도,
아직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232~237p
'하나됨'이란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존재 합니다. 안도 없고 바깥도 없습니다.
오직 이것뿐입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존재하고, 이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을 그것이 아닌 것으로 규정해버린 셈입니다.
'무아'가 의미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인식이 있든 없든,
자기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때문에 다른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신이라 부르든,
충만함이라 부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깨어날 때,
우리의 마음은 더 이상 공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있고 바라보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분리된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텅 빈 공을 지켜보는 유일한 것이 있으며
그것은 공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은 개인은 없으며 오직 깨달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나 내가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중요하지 않게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깨달음이 깨어납니다.
진실을 알고 나면 남은 생애 동안 내내 어떻게든 킥킥거리고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을 알고 나면 세상을 죽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은 마치 사탕을 손에 쥔 것처럼 생각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사탕이 아닌 칼을 쥐게 된 것인데도 말입니다.
240~245p
암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나는 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체험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이런 곳에 오지 않을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누구인지 본질을 알게 되었고
깨어남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그런 체험을 한 분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몸과 마음이 아니며, 자유롭게 되어야 할 개성이 아님을 실제로 알고 생생하게 체험하여 깨어나게 되면
처음에는 매우 자유를 느끼지만, 놓치는 것들 중 하나는
완전한 '하나'의 계시,
당신이 곧 궁극의 근원이라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나와 남이 있다는 것을 기반으로
꾸려집니다. 하지만 나와 남이 따로 없다는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면, 갑자기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에만 관심을 갖는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자유롭다면, 누가 나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오랴?", 혹은 "내가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애쓰겠다."
개인적으로 자유를 구가하겠다는 데에는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개인으로서의 내가 없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가 없다면 깨달은 자는 누구입니까?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영성을 일상생활과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까요?"
통합할 수 없습니다. 통합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게 통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무한함을 당신의 제한된 삶 속에
구겨 넣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직 깨달음만이 있고,
그 깨달음은 항상 완벽한 파괴자입니다.
깨달음은 분리되어 있다는 모든 인식을 죽이고,
진실되지 않는 모든 것을 죽입니다.
당신의 삶을 '진실' 속으로 던져 넣으십시오.
'진실'을 삶 속에 구겨 넣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246~250p
질문)
더 많이 깨어 있으라는 뜻은 무엇인가요?
아디야샨티)
많은 스승들이 밤중에 꾸는 꿈에 비유를 합니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서 깨어나긴 했지만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닐 때가 있습니다.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은 듯싶고,
깨어나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깨어나게 되면, 당신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잠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도 당신이고,
가르쳐 줄 스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신입니다.
당신이 창조하고 있습니다. 똑똑히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그것을 창조하는 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며,
듣는 자와 말하는 자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겉모양에 불과함을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당신을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도록 유혹합니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꿈 자체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영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사물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251쪽~253p
진실한 관계
여러 해 동안 앉아서 선 수행을 하면서 터득한
가치 있는 것 중 하나는,
그렇게도 많은 나 자신과 함께 앉아 있으려면,
나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고요히 앉아서 나 자신에 관한 오직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내려고 하고 신성을 알려고 했던 시도는,
늘 끝없는 내면의 지절거림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찬란함 비어 있음으로서 관계를 맺는다면, 그 관계는 아름답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신비와 사랑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비가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꽃이든, 새든, 바람이든, 추위이든, 혹은 인간이든,
신비는 자신과 동일한 자신의 표현으로써
이것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관계 속에서 깨어 있는 빛으로서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입니다.
아직 만나지 않거나 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나를 눌러 주세요."라고 쓰인 스티커 버튼 같은 것입니다.
아직 만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무의식 속에 있다면,
그것은 "나를 눌러 주세요."버튼을 가진 셈입니다.
버튼을 누르면 그것은 무의식 속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그것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누릅니다.
그러면 붕!하고 벨이 울리고,
죄나 허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납니다.
우와! 그리하여 죄책감이 의식에 떠오릅니다.
거기에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잽싸게 무의식 속에
감추어버립니다. 오랜 기간 동안 그 아이가 나와 더불어
동거해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만약 알아차렸다면, "그게 그러니까
프로그램되어 있었단 말이지? 우와 재미있네.
그게 뭐지?" 그렇게 물음으로써 "이게 뭐지?"라는
의식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버튼이 눌러질 때, 무의식에 갇힌 어떤 것이 나타나고,
그것은 깨어 있으라는 초대장입니다.
단지 깨어 있으십시오. 255쪽~262p
새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깨어 있기는 쉬운 일입니다.
신성이 아름답게 구현된 것들, 기분 좋은 것들,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함께 깨어 있기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미 페이지의 기타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거기에 초대장이 들어 있습니다.
"저게 뭐지? 저것과 나는 어떤 관계지?"
내가 깨우친 것은, 그것은 단지 다른 소리일 뿐이고,
그래도 만사 오케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는 나의 영적인
감각을 넓혀 주는 아름다운 소리였습니다.
단지 그럴 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록 스타인 척하는
신이 있습니다. 신은 항상 기분 좋지만은 않습니다.
모든 순간들이 좋은 기분인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고요하고 잔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합니다.
"오케이, 그래, 넌 신을 보기를 원하는 걱지? 여기 신이 있어. 신의 한부분만이 아닌 전체가 여기에 있어.
네가 발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가 여기에 있어."
나자신에 대한 영적인 개념들이, 높든 낮든,
여지없이 무너져버립니다.
힘들다는 생각도 나중에는 없어져버립니다.
그런 붕괴를 통해서, 나는 겉가죽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무너져 내래는 것은 멋지고, 아름답고 성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경험에서,
그럴 것이라는 어떤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하나(Oneness)'를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개념이 붕괴돌 때, 신성이 현실에 솟아오르게됩니다.
신성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보면,
생각이나 개념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264~266p
영원한 현재
잠시 멈추고 돌아봐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옳고 그름이 있기 이전에,
우리는 다만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죄인이나 성자가 있기 이전에,
우리는 다만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 주목하면, 거기에는 침묵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거기에서 당신은 어떤 것도 더 덧붙이거나 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텅 빈 '무'입니다. 277~268p
당신은 [나의 삶]이라 불리는 책을 내려놓습니다.
당신은 이야기도 없고, '나' 또한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나'는 한 가지 이야기일 뿐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무에서,
영에서,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자발적으로 솟아나옵니다.
그것은 당신이 읽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여러 차례 경험하고, 친구도 갖고, 적도 가지면서, 읽어내려가지만, 진지하게 사로잡힌 적은 없습니다.
시속200킬로미터로 급선회하면서 달리는 기차 안에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기차 안에서는 기차 위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바퀴와 철로 사이의 마찰음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항의 미세한 진동조차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기차 안에서는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고, 그래서 마치 움직이지 않고 있느 것처럼 여겨집니다.
존재의 고요함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영원이라 부르는 것은 끝없는,
저항 없는 움직임입니다.
이 순간의 살아있음을 저항 없이 경험할 때,
그것은 온전하고 고요하게 움직이고,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움켜쥘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움켜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것 차제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모든 분별이 사라지는'지점입니다.
거기에서는 하나조차도 아무런 지각이 없습니다.
통찰력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고
가슴 또한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거기에는 존재의 단순한 기반 속에서 쉼만이 자리합니다.
273~277p
충성심
진정한 자아를 체험하게 되면,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실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게 되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예전의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곤 합니다.
"이 과정은 언제 다 끝나게 될까요?"
그런 질문은 아주 작은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서, 걸릴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 깨가 오게 될까요?
그런 때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선택이 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이 책임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편안한 삶을 자유로운 삶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진실은 사랑합니다 진실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손에 큰 칼을 들고, 거짓된 것과 진실된 것을 거침없이 분별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고통받을 것입니다.
진실은 숟가락을 들고 당신에게 먹여주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278~ 281p
나의 스승님은 말하곤 했습니다.
"아주 작은 틈새라도 막아라, 틈새를 막아라."
존재하는 것과 당신이 그렇게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 사이의
틈새를, 나타난 것과 당신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 사이의
틈새를 메우십시오.
당신이 곧 진리입니다. 당신이 생명입니다.
꽃과 나무는 생명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생명은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것에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생명은 항상 스스로의 표현을 제공합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오고, 오고, 오고, 옵니다.
그것은 '무'에서 나옵니다,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는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꽃이 피어나듯이.
생명은 자기 자신을 꽃으로, 인간으로, 통찰력으로,
통찰력을 잃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자신의 표현물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다 날아가더라도, 거기에 생명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생명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라마나 마하르쉬는 죽어가면서,
걱정이 많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사라질 거라고들 하지만,
내가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꽃은 죽지만 생명은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타난 것은 사라지고, 통찰력은 사라지고, 개성은 변하고,
믿음은 변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건재할 것입니다.
281~284p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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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요유 (逍遙遊) 원문보기 글쓴이: 山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