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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사랑방 스크랩 1909년 10월 26일의 안중근
湖亭 추천 0 조회 78 09.10.27 08:3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하얼빈 역에서 조선통감으로 조국 즉 대한제국의 말살을 강압적으로 자행하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10.26)를 격살한 의거의 날이다. 구국의 기틀을 다진 민족의 영웅이었으며 또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동양평화론]을 옥중에서 글로 밝혀 세상을 놀라게 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의 [영구평화론]과 닮은 것으로 밝혀지거나, 유럽공동체(EU) 보다 70년이나 앞선 평화공동체 임이 국제 학술회의에서 차차 증명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열강의 침략속에 암울하던 국제 평화문제에 대하여 높은 탁견과 혜안을 지녔던 사상가 였음이 100년이 지나 그 진가가 역사의 흐름속에 국제적으로 차츰 밝혀지고 있어 더욱 뜻깊은 일이 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참략을 같이 받았던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과 장개석은 안 의사를 호국신(護國神)으로 받들 정도였고 10억 인구의 중국인 중에서 안의사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음을 한없이 부끄러워 하였다 , 오늘날도 대만과 중국에서는 그를 ‘동아시아 제일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뜨거운 나라사랑은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사 안중근-도마] -신성국 신부

 

안중근 토마스(多默) 의사는 참된 천주교 신앙인이자 애국자의 표본으로 살다 가셨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전기 중에 신성국 신부가 쓴 <의사 안중근-도마> 가 있다. 줄거리는 안중근 의사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천주교 신앙의 관점에서 안중근의 영성을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90년간 감추어진 안중근 의사의 진면목을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낱낱이 발견할 수 있다    

 

 

1. 안중근의 천주교 입교

 

황해도 해주 진사 안태훈의 3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안중근( 아명 : 안응칠)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됐으며,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0~1938 한국 이름 : 홍석구) 신부를 만나 성서를 읽고 교리를 익힌 후 19세 때인 1896년 7월 황해도 안악군 매화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도마, 多墨)이다.

 

 조셉 빌렘 , 한국명 洪錫九 신부

 

2. 안중근의 천주교 선교

 

안중근은 교리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교의를 토론하면서 천주교 선교에 나섰다. 점차 신앙이 깊어지자 안 의사는 빌렘 신부와 장터 등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전도하고 설교했다. 1898년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을 설립하자 숙부 안태건(가밀로)회장과 함께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당시 안 의사는 빌렘 신부와 함께 공소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사 복사도 하고, 비신자에게는 천주교를 안내하는 등 빌렘 신부의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99년에는 청계동본당 총대(지금의 사무장직)에 추대돼 7년간 금광 감리사건 등 교회 안팎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3. 안중근의 신앙

 

신성국 신부(청주교구 대소본당 주임)가 안 의사를 신앙인 관점에서 상세하게 연구하여 펴낸 <의사 안중근>(도서출판 지평)에는 안 의사의 천주교 교리 설교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그의 천주교 교리 설교는 곧 그의 신앙고백이었는데, 천주교의 핵심 교리인 인간 존엄성, 영혼의 존재, 영혼의 불사불멸, 상선벌악, 구속강생, 교회 등에 이르기까지 교리 설명이 매우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이며 분명하다. 또한 깊이있는 동양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접근이 돋보이며, 안 의사의 철저한 신앙관과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다.

 

4. 당시 천주교 한국교구의 행태

 

그러나 당시 한국교구청의 모습은 바람직한 목자의 모습 그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 프랑스인으로 한국교구장에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9년 대한제국정부 내부(內部) 지방국과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교민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한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수록 어려움에 처해졌지만, 프랑스 주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한국인들의 자주독립 열망을 사실상 외면했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무리한 박해의 칼날을 경험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보다는 교회의 보호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빌렘 신부는 1897년에 인천에서 최초로 건립된 답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  

 

5. 천주교 성직자들에게 대항한 안중근의 의기

 

그러나 안 의사는 신실한 신앙인인 동시에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였으며, 비록 자신이 따르는 성직자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거침없이 나서서 지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안 의사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이 따르던 빌렘 신부와 크게 다툰 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나는 홍 신부(빌렘)와 크게 다툴 일이 생겼다. 즉, 홍 신부는 언제나 교우들을 억압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교우들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성스러운 교회에서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소. 만일 홍 신부의 행위가 개선되지 않으면 서울로 가서 주교에게 청원할 것이고, 만약 주교가 듣지 않는다면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이를 청원하여 이와 같은 폐단을 없애도록 할 것이오."...>

 

당시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손찌검을 해대는 무례를 범하는 일이 많았는데 처음엔 빌렘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 의사가 저렇게 교우들을 대표해 항의하자 빌렘 신부는 크게 노하여 안 의사를 무수히 때렸다. 안 의사는 분했으나 욕됨을 참았다. 뒤에 빌렘 신부는 안 의사에게 용서를 청하여 둘은 화해하였고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안 의사는 빌렘 신부 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앞날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였고 빌렘 신부와 함께 서울에 가서 뮈텔 (Mutel, Gustave Charles Marie 민덕효,1854-1933) 주교를 만나 대학 설립을 청원하게 된다.

 

"지금 한국인 교인들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없어서 선교를 하는데 손해가 많습니다. 서양의 수도회에서 박학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학을 설립하고, 국내의 재주가 뛰어난 자제들을 교육한다면 얼마 안 가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뮈텔 주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만약에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에 좋지 않소, 앞으로 또다시 이와 같은 말을 내어놓지 마시오."

 

안중근은 주교에게 여러번 대학 설립을 권고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여 그 분함을 참지 못하여 "서양의 교회(천주교)가 진리임에는 믿을지언정 서양 사람의 마음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고 개탄하며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던 프랑스어를 더 이상 배우지 않았다.

 

뮈텔 주교가 조선의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 총 책임자이던 뮈텔 주교가 바란 것은 천주교 선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당시 한국 내 프랑스인 교회 지도자들의 비뚤어진 대(對)한국관과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안 의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지만, 성직자들의 잘못에 대하여는 솔직하게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참된 용기도 함께 갖추고 있던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초상]

< Portrait Of Patriotic Martyr An, Jung-gun >, 65.2 x 50.0cm, Oil on canvas, 2008 년 작품,

 

2008년, 갤러리 라메르 (제5회 개인전) 및 안양 롯데화랑(제6회 개인전)에서 전시 

 

 

 

6. 안중근 의사의 의거

 

안 의사는 의거 전에 "하느님 성공을 주십시오."라며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한 의거를 위한 하얼빈 역 사전 답사 후 의거를 함께 준비해온 동료 우덕순에게 건네준 총알에는 총알 끝에 십자가형이 새겨져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코레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체포된 안중근은 저격 직후 이토의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는데, 안중근을 지켜본 간수는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기도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6. 안중근 의사의 옥중 고해성사, 성체성사, 유언

 

1910년 안중근과 빌렘신부의 옥중 재회를 상세히 묘사하여 보도한 제호를 알 수 없는 만주의 일본어 신문(2002년 발견)을 인용하면,안 의사는 1910년 3월 중국 뤼순(여순)의 일본군관동도독부에서 순국하기 전 감옥으로 찾아온 빌렘 신부를 3월 8일, 9일, 10일 3차례에 걸쳐 만났다.

 

고해성사를 위해 안중근은 8일 밤에 가로 34cm 세로 24cm 가량의 얇은 양지 20여장에 자신의 고해할 내용을 조목조목 적어 참회를 했다. 9일 고해성사를 위해 빌렘 신부를 만날 당시 면회실에는 이 기사를 기록한 신문기자와 교도소장, 통역관, 감리, 간수 1명이 배석했는데 빌렘 신부는 교회법을 인용하여 고해성사를 위해 그들이 물러갈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그래서 안중근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20분에 걸쳐 빌렘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백을 하였다.

 

고해성사를 본 후 후 안중근은 “이제 아무것도 참회할 것이 없다”고 말했고, 빌렘 신부는 “이처럼 용의주도하게 (성사를) 한 것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라며 “안중근은 고해성사를 통해 영아처럼 깨끗한 몸이 됐다”고 말했다. 이 고해성사 광경을 지켜본 일본인 통역관 소노키는 “고해 후 안중근은 평상시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신비적인 모습을 보였다”서 말했다.

 

또 다른 일본인 배석자는 “한국어로 귓속말로 고백을 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안중근과 빌렘 신부는 이심일체(二心一體)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묘사했다.

 

10일 빌렘 신부는 안 의사 앞에서 미사를 집행하고 성체성사를 주었다. 이를 보도한 신문은 “홍 신부(빌렘)는 미리 휴대한 제기(祭器) 중에서 진주로 만든 긴 주배(酒盃)를 꺼내서 공손하게 이것을 받들고 이 속에 한 방울의 포도주를 떨어뜨리고 그 위에 냉수를 붓고 또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상이 붙은 과자를 넣고 주문을 외면서 그 과자를 둘로 나눠 작은 쪽은 안에게 주고, 남은 한 쪽은 그대로 냉수의 컵을 스스로 기울여서 마셔버렸다”고 상세히 묘사했다.

 

영성체 후 안중근은 한복을 차입해 달라고 빌렘 신부에게 요청했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현재 매일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론’이라고 답했다. 빌렘 신부와 헤어지면서 안중근이 눈물을 흘린 모습을 본 통역관 소노키는 신문 기자에게 “오늘까지 100여일간 거의 매일 얼굴을 보았지만 안중근이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면서 “중근의 낙루는 아마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사의 사형 집행일은 3월 25일 또는 2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25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성 금요일이었고 27일은 부활절이었다. 안중근은 그리스도교 교인답게 성 금요일인 25일에 집행을 받기를 원하였고, 27일은 부활절이어서 빌렘 신부가 집행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집행일은 26일로 결정되었는데 25일은 순종황제의 탄신일이고 27일은 부활절이기 때문이었다.

 

집행 전날인 25일 안중근은 동생인 정근과 공근을 면회하며 "친척들과 논의하여 가사를 정리하고 자식들은 빌렘 신부와 의논해 양육할 것",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끝없이 노력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 장면을 지켜본 소노키 통역관은 "자신이 건 도박에서 이긴 사람"이라며 감탄하였다. 그리고 이 면회에 입회한 미즈노 변호사가 자신을 위로하자 그에게 “천주교에 입교하면 어떻겠느냐”며 “천주교에 입교하면 장래 언제든지 천국에서 다시 만나 천천히 이야기를 듣겠다”고 말해 그를 아연케 하였다.

 

7.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대응

 

안 의사의 의거 당시 뮈텔 주교 하의 한국교구의 반응은 실망스러움 그 자체이었다. 안 의사의 의거소식이 전해지자 전 한국인들은 크게 고무되었으나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로 이루어진 한국천주교회 지도부는 상기한 바와 같이 한국독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바, 교회에 피해가 돌아올까봐 전전긍긍하였으며, "안응칠 도마라는 신도가 있느냐"는 일본정부의 물음에 '천주교인이 아니다'라며 교인인 사실을 부인하였다.

 

결국 빌렘 신부는 안 의사를 면회하지 말라는 뮈텔 주교의 명을 거역하고 홀로 뤼순감옥으로 가서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안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던 3월 26일 오전 10시 바로 그 시각, 서울 명동성당과 황해도 신천성당에서 안 의사를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빌렘 신부는 "우리 모두 함께 깨어 그분을 보내자"라며 신자들을 새벽에 성당으로 모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밝혀지자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2개월 미사 집행 정지 처분을 내리고 본국 프랑스로 송환조치하는 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바티칸 교회법원에 상고하여 승소하였고, 그가 안 의사에게 집행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가 정당함을 확인 받았다.

 

8. 현재 천주교회의 안 의사 평가

 

해방 후 1979년 노기남 대주교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추모 미사가 열린 이래, 여러 차례 안 의사를 추모하는 미사를 열었다. 또한 2000년에는 과거사 참회미사를 봉헌하면서 비록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당시 천주교회의 행동을 반성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1999년 <의사 안중근>을 펴낸 신성국 신부는 안의사는 '순교의 맥'이며, 실학을 몸으로 완성한 '실학의 맥'이며, 해방자로서 '한국의 모세', 선교열정의 측면에서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평하였다.

 

또한 2000년에 한국천주교 군종교구 대표단은 제31회 국제군인사도직총회에서 한국의 군인신자상으로 안중근 의사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1997년부터 한국교회사연구소 등 많은 천주교 단체에서 순교자이자 순국자인 안중근 의사를 복자위, 나아가 성인위에 올리는 시복시성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변기찬 박사는 <안중근 의사의 시복시성을 위한 소고>에서 안 의사를 성녀 잔 다르크(요안나 아르크)와 비교하여 시복시성의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천주교회에서 안중근 의사가 정식으로 성인이 되어 '중근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연구와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정적인 어려움은 잔 다르크는 한 사람의 인명도 해하지 않은 반면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실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의사는 의거 직후 법정에서 자신의 의거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만국공법(국제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 의사의 요구는 묵살되었으나 그의 주장대로 그는 일본 국내법(당시 한국은 사법권도 일제에 강탈당함)에 의한 범죄인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전단체의 일원으로서 국제법에 의거한 포로대우를 받는 것이 법적으로도 정당한 것이었다.

 

교회법적으로도 안 의사의 의거는 교황들의 사회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년)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신앙교리성 훈령’(1986년)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의 교도권은 개인의 기본과 공동선을 심대하게 손상시키는 명백하고도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자유의 자각’ 제79항) 무력저항이나 폭력, 혁명적 반란이 용인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한국 교회에서도 안 의사의 의거는 전시에 허용되는 군인의 정당한 행위로 보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안 의사의 의거를 이렇게 평했다. "안 의사의 의거는 가톨릭 신앙과 상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일제의 무력앞에 민족의 존엄과 국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 방위와 의거로 보아야한다."

 

또한 안 의사가 신앙인으로서 보여준 모습과 교회에 대한 헌신, 그리고 현대에 적용하여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이론인 '동양평화론' 등 일본인들까지 감화시킨 그의 인격은 우리가 반드시 받아 공경해야할 자세이기도 하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더라도 좋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로마 9, 3)

  

 

민족의 구원사 안에서 바라본 안중근 토마스(Thomas)

 

안중근(安重根 1879~1910)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10.26)

 

한국천주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 성월로 정하고, 순교 신앙을 이어받자고 호소한다. 과연 순교란 무엇인가? “순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이다. 순교란 죽음에까지 이르는 증거를 가리킨다. 순교자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죽음을 참아 받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73항)

 

교회의 교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안중근 토마스는 분명히 순교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규정하였다. 당시 서울 교구장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대하여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는 항의문을 서울 프레스(Seoul Press)에 보냈다. 나아가 그는 서울에서 거행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장에 수녀들이 만든 조화를 보내는 한편, 신부들을 대동하고 직접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토마스는 사형 판결을 받고 본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하였다. 당시 본당 신부였던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사형수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허가해 달라고 4번이나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빌렘 신부는 사목자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주교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여순 감옥을 방문하고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사형수의 성사를 거절하신 데 대해서, 그리고 제 사랑의 행위가 저에게 가져다준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에 대해서 항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 그 성사 거부는 주교님 측의 부당하고도 교회 법규에 어긋난 처사임이 명백했으므로 저로서는 그런 점에서 그런 장애에 저지당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빌렘 신부는 2개월간 성무집행정지라는 교회적 벌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뮈텔 주교에 의해 프랑스로 추방된다. 민족 독립과 조국 사랑에 헌신한 안중근은 교회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에게 범한 잘못으로 인해 한국교회엔 하느님과 민족 앞에 진정으로 부끄러워하고 사죄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를 올린 주교와 신부들은 있었지만 안중근의 사형장에는 단 한명의 성직자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안중근 의사를 공식적으로 추모한 것은 1979년 9월 2일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 집전으로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거행한 기념 미사가 처음이고, 1986년 3월 26일 그의 순국 76주기 추도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90년부터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성서의 관점에서 본 안중근

 

나는 성서를 묵상할 때마다,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묵상한다. 민족의 역사, 가정의 역사, 개인의 역사 그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를 이끄시는지 올바로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이 성서적 신앙이라고 본다. 신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걸었던 길을 증거하는 신앙의 생생한 기록이다.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표본으로서 성서가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민족사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이끄시고, 개개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지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작업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지난날 한국교회는 안중근 토마스를 살인자로 보고 제도 교회 안에서 그에 대한 추모를 계속 거부해 왔다. 당시 교회에서 발간하던 「경향신문」에서는 ‘이등공(이토 히로부미)의 내력’이라는 제목 아래, “고매한 사람의 죽음인즉 매우 원통하다.”고 보도하는 동시에 논설을 통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죄로 몰아 붙였다.

 

십계명에 따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안중근 토마스가 살인자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성서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을 못살게 하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게 한 이집트 감독을 죽이고 도망갔다. 하느님은 살인자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내세우고, 성서는 모세를 위대한 해방자로 칭송하고 있다. 모세는 분명히 살인죄를 저질렀다.

 

안중근 의사와 어떻게 비교될 것인가? <다윗>을 보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와 간통죄를 범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의 살인을 지시하였다.

 

<사도 바오로>를 보라.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단정적으로 안중근 토마스를 살인자로 규정한 행위는 성서 교리적 관점과 민족 해방사적 관점에서 볼 때 심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대외 팽창 정책을 강화하여 청일전쟁(1894-1895)을 시작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러일전쟁(1904-1905), 한일합방(1910), 만주사변(1931) 등을 일으키고 이어서 중일전쟁(1937-1945), 그리고 급기야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이 아시아 국가와 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은 참으로 비극적이고 불행한 일이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었고, 무차별 폭력에 맞선 정당방위였다.

 

국민의 생명과 공동선을 보호하는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사명에 자신을 헌신한 것이다. 1993년 8월 21일에 봉헌된 안중근 추도 미사에서 서울대교구장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한국가톨릭교회가 취한 친일적인 태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죄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 제국의 말기,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침략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안중근 의사가 행한 행위는 정당방위였기에 정의로운 행동으로 이해해야 한다.”안중근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올바른 평가로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매도하는 분위기는 사그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안중근 의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엄존하고 있다.

 

참회와 쇄신의 역사 앞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2000년 대희년 준비에 관하여 33항」은 새로운 제 삼천 년 기를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해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노력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 년 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유혹과 도전에 직면하도록 우리를 각성시키고 이를 극복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며 과거사 반성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문구만 나열되었고, 반성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희년을 맞는 요식행위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일본천주교주교회의는 1998년에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책을 출간하여 일본 가톨릭교회가 지난날 저지른 숱한 과오에 대하여 반성하고 참회하는 150쪽 분량의 고백적 기록을 정리하였다.

 

매우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정리된 일본 교회의 과거사 참회록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역사 인식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가 민족과 역사 앞에 진정한 복음화와 구원의 선포자가 되려면 먼저 안중근 의사의 문제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에 행한 숱한 친일적 행위와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 야합한 반복음적 행위들에 대하여 진솔하고 겸허하게 반성하고, 참회와 쇄신을 통하여 거듭나야 한다.

 

신성국 노엘 신부 , 저서 「의사 안중근 토마」에서

 

 

 

안중근 의사의 일본법정 최후진술

 

(재판장)

변호인으로부터 이미 상세한 변론이 있었지만, 피고들이 마지막으로 할 말 이 있으면 진술하라.

 

(안중근 의사)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 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

 

나의 이번 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하는 것이 지당하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중에 할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 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 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 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토 그는 영웅(英雄)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십수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 처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라고 위로했더니, 그 군인은 '본국 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것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 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 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 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 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다.

 

재판장은 이것으로써 심리를 모두 마칠 것을 알리고,……. 이 판결에 대해 오 일 내에 항소할 수 있음과, 판결의 정본·등본·초본을 청구 할 수 있다는 뜻을 알리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자인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직전에 촬영된 사진

 

한국 왕래 22차례...통감직 3년반1906년 2월 1일 한국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2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伊勢)신궁을 참배하고, 28일 시모노세키에서 군함[和泉]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3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날 통감부에 모습을 드러냈고, 9일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부임인사를 올렸다. 3년 반의 통감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만큼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그리고 한국에 오래 체류한 사람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1873년 ‘정한’문제가 중요한 정책 이슈로 등장했을 때 이토는 반(反)정한 편에 섰다.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도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그가 30년 전 반대했던 ‘정한’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하면서 총지휘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생애에 22차례나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그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밟은 것은 1888년이다. 사이고 츠쿠미치(西鄕從道)와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부산, 원산 등 동해안의 항구를 거쳐 갔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머물렀던 흔적은 없다. 두 번째 한국방문은 1889년 한국과 만주를 유람하는 개인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서울을 보고,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비록 관광객으로서의 여행이었지만 수상과 추밀원 의장을 역임한 이토에 대한 대접은 융숭했다. 세 번째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 한국을 통제하기 위하여, 네 번째는 을사강제조약을 총지휘하기 위한 천황의 특별대사로, 그리고 다섯 번째 이후는 통감으로 현해탄을 오갔다. 이토는 1905년 말 이후 약 3년 반 가까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감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정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하얼빈 역에서 자신의 삶의 종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성도 없는 빈농의 아들, 혁명운동에 몸을 던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22일(음력 9월 2일) 조슈(長州, 오늘의 야마구치(山口)현)의 츠가리무라(束荷村)라는 빈촌(貧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리스케(利助). 히로부미(博文)라는 이름은 메이지 유신 후 그가 정부의 고위직을 맡으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쥬조(十藏). 성(性)씨는 오치(越智)라는 설도 있고 하야시(林)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무사가 아니면 성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성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정보도 안 되는 농지를 일구면서 살아야 하는 쥬조의 집안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리스케가 6살 때 아버지 쥬조가 홀로 출향(出鄕)하여 조슈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하기(萩)로 흘러들었다. 온갖 궂은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번(藩)의 창고 관리인인 이토 나우에몬(伊藤直右衛門)의 눈에 들어 그의 머슴살이를 하면서 최저의 생활이지만 그런대로 안착할 수 있게 됐다.

 

처와 아들을 하기로 불러와 다시 가정을 꾸렸다. 리스케가 9살 때였다. 후사가 없었던 이토 나우에몬은 충실한 종복인 쥬조 부자를 1854년 양자로 삼았다. 비록 야우에몬이 무사계급의 최하위인 아시가루(足輕-武家에서 평시에는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졸이 됨)에 불과했지만, 그의 양자가 되면서 쥬자 부자도 무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리스케도 이름을 이토 ?스케(伊藤俊輔)로 바꾸었다. 비록 그것이 최하위의 계급이지만 평민 하야시 리스케가 무사 이토 ?스케로 신분상승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스승 요시다 쇼인

 

그러나 그가 일본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막말 최대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유신3걸(維新三傑)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배우고, 기도 다카요시의 ‘종자(從者)’로서 막말(幕末)의 ‘지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863년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영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쥠으로서 출세의 기반을 닦았다.

 

영국체류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양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서양의 위압 속에서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척[攘夷]하는 것이 아니라, 막부를 무너뜨리고[倒幕] 새로운 체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본의 정국이 존왕(尊王), 양이(攘夷), 좌막(佐幕), 도막(倒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그의 주인인 기도 다카요시를 도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

 

 

총리 4차례...헌법 만들고 청일-러일전쟁 주도

 

유신운동에 참여한 경력과 서양의 경험을 가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수립 후 ‘순풍에 돛단 듯’ 출세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특히 유신 3걸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가 죽게 되는 1878년 이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안에서 확고부동한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정부조직을 제도화하고 법규화 함으로써 행정부와 관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헌법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독일에 유학(1882)하여 장기간 체류하면서 유럽의 헌법을 공부한다.

 

그리고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고 천황제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885년 내각제가 실시된 이래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내각을 이끌었고, 세 차례 추밀원(樞密院) 의장, 귀족원 의장, 원로(元老)의 일원으로 메이지 일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물론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이어진 강화조약을 직접 또는 배후에서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 보수정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여 정당정치의 길을 열기도 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1906년 이전, 네 번의 총리대신을 위시하여 일본에서 중요하다는 모든 직책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가 메이지 국가건설의 일등 공신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토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인이면서 외교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경륜가(statesman)"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천황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고, 동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정치가로 평가 받는, 그리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를 한국의 통감으로 임명한 까닭이 무엇일까? 한국병탄은 일본 최대의 국가목표임을 뜻하고 있고, 또한 병탄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상 대안을 만든 자

 

격동의 시기에 이토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나 시대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대단한 주선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던 것처럼, 이토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의 미움을 사는 일이 별로 없었고, 또한 항상 윗사람 눈에 들게 행동했다. 이토는 “선배로부터 사랑받고 그들이 쓰기에 편리한”인물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보살핌, 기도 다카요시의 보호, 오쿠보 도시미치의 후원,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쿠토미 소호가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메이지시대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동시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도 지위 상승을 위한 노력가였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가 더 오를 수 없는 지위까지 오른 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토는 스스로 출세의 비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출세를 하려면 “지위 높은 선배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오쿠보 도시미치 내각의 참의경보로 임명됐을 때 내가 내각에서 제일 어렸다. 이미 고인이 됐으나 그 때 산조 (사내토미)나 이와쿠라 (도모미), 또는 기도 (다카요시)나 오쿠보 등이 필요로 하는 문제의 해답을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여 준비해두었다가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적시에 제시하고는 했다.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 드디어 크고 작은 정치의 중요한 정무에 참여하게 됐다. 비결이라면 이런 것이다.” 즉 항상 대안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훈장 차고 칼 차기를 좋아한 명예욕

 

동시대 인물들의 이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했고, 대단히 관료적이었다는데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능력은 평가받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자신의 외양을 더욱 권위적으로 치장했는지 모른다. 이토와 동시대의 한 정치평론가에 의하면 “훈장을 만든 것도 이토 공(公)이고 귀족을 만든 것도 이토 공이다. 이토 공은 명예를 표창하는 기구(器具)를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많이 취했다”라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갖추는 외양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고 늘 훈장을 많이 단 제복입기를 즐겨했고, 무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는 항상 대검(帶劍)을 즐겨했다. 

 

 그는 또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주인이기도 했던 기도 다카요시가 옛날을 회상하면서, 이토는 “에도 번의 저택에서 나의 수발을 들 때 나를 찾아오는 무사들을 위해 내놓은 술안주용 두부 값이 한 달에 한량 세 푼이나 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 갑에 여덟 량이나 하는 담배를 닷새 만에 다 피워버리고, 열다섯 량이나 하는 모자를 쓸 정도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이토의 사치스러움을 은근히 탓했다.

 

그러나 이토는 국내정치를 지배하기 위하여 파벌을 키운다거나, 또는 권력을 이용한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토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동지면서 정적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자주 비교된다. 조슈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함께 유신운동에 뛰어 들었던 두 사람 모두 요시다 쇼인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유신 후 이토가 관료제를 다듬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갈 때, 야마가타는 육군을 건설했다.

 

 야마가타는 군을 배경으로 거대한 파벌 망(網)을 궁중, 정계, 관료의 세계로 넓혀나가면서 국내정치의 향방을 좌우했다. 그러나 이토는 파벌에 초연했다. 그리고 국내정치보다 대외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메이지 초기 야마가타를 위시하여 많은 정치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권력형 부정축재에 관여됐고, 또한 권력자의 이러한 행태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는 이상할 정도로 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대부분의 권력자들처럼 골동품, 분재, 다도, 별장 등에도 관심이 없었다. 야마가타의 별장[無隣庵]에 비하면 이토의 별장[滄浪閣]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토가 노년에 검(劍)에 흥미를 가지고 수집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독서 이외의 취미가 있었다면 ‘여색(女色) 즐기기’였다. 메이지 천황도 인정했던 그의 ‘여성편력’은 비밀도 아니었고 숨기려하지도 않았다.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滑稽新聞, 1903.9.5)

 

강자에 굽히고 약자를 제압하는 호색한 "나의 취미는 여자뿐"

 

 그는 스스로가 “나는 본래부터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고 축재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자[藝妓]를 상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자신의 ‘여색취미’를 거리낌 없이 밝히기도 했다. 이토는 겨우 160cm(5.3尺)에 이르는 단구(短軀)의 체격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강장자(强壯者)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정력이 강한 건강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정치인이었던 오자기 유키오(尾崎行雄)에 의하면 이토의 “최대의 결점은 그의 호색성”이었다. 이토는 “늙은 기생, 어린 기생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싫증나면 곧 잊어버리고, 자신이 관계했던 여자들을 사람들에게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괴팍한 ‘여색습관’을 지닌 호색한이었다.

 

이토가 정부의 중책을 맡고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양이운동이 한참일 때 외국영사관을 앞장서서 방화하거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총리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서 전전과 전후를 통틀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인 것이 아닌 ‘암살’을 자행한 인물은 이토가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늘 실리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정책을 다루었으나, 적절한 시기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결정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결단력과 과단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고종을 위협하기를 주저하지 않거나, 또는 헤이그 사건 이후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낼 때 보여 준 태도가 그의 이러한 성품의 한 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포용력이나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미는 부족했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성격을 지녔던 인물이다.

 

일본 근현대사의 대가로 알려진 오카 요시다케(岡義武)는 이토의 한국병탄정책과 하얼빈에서의 그의 죽음을 일본 외교의 특성과 이토의 성품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오카에 의하면 메이지 대외정책의 특성은 “[구미의] 여러 나라에 대한 관계는 대단히 신중하여 일반적으로 종속적 색채”가 짙었으나,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대단히 공세적 태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본 외교의 특성을 한 개인에 비유해서 본다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토라는 사람을 닮았다.

 

통감 취임전후 이토가 한국에서 연출한 역할을 되돌아본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대한국책’을 집행하는 데 썩 잘 어울리는 대표자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오카는 “이토는 이 ‘국책’을 전적으로 자신의 성격대로 수행했다. 한국에 있어서 그는 정말로...‘전투적 인사’ 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흉변(兇變)을 자초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즉 강한데 약하고, 약한데 강한 이토의 성품과 일본의 외교노선이 결국 그로 하여금 하얼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얼빈 10.26...안중근 의사 손에 쓰러진지 100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쓰러진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니 꼭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국제정세, 동아시아의 형세, 한국과 일본의 관계 모두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사는 제국주의와 냉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화와 지역화가 국제적 흐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에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굴욕의 19세기와 20세기를 보낸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일본의 위협적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메이지의 영광에서 주권상실로 전락했던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다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21세기를 향한 국가진로 모색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마감했으나 한국은 그 시대의 후유증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북쪽의 절반은 아직 일본과 식민지 시대의 연속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토가 그의 인생의 마감 길에 남긴 아래의 시구는 한일관계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乾坤不變 (천지는 변하지 않고)

古今相通 (어제와 오늘이 서로 통하고 있다)

魚躍淵水 (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뛰어 오르고)

鳶飛太空 (솔개는 큰 하늘을 나르고 있다)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의 글

 

 ● 의거직후 실린 외국언론의 일부는 왜곡된 기사내용,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굴욕적인 기록 등

 

The New York Times 기사 1909. 10.27   

SLEW ITO TO AVENGE CONQUEST OF KOREA; Assassin at Harbin Accompanied by Other Koreans and They Admit a Conspiracy. PRINCE SHOT THREE TIMES Was About to Meet Russian Minister When Murderer Rushed Forward -- Three Other Japanese Shot.

 

The New York Times 기사 1909. 10.27 

 JAPAN MOURNS FOR ITO.; His Mission to Harbin Was Peaceful -- Korean Prince Shocked.

 

The New York Times 기사 1909. 10.27  윌리엄 태프트- 1909년 당시 미국 29대 대통령

TAFT EXPRESSES SORROW.; Will Make No Comment Till He Gets an Official Report

 

조선왕조실록-純宗 3卷, 2年

(1909 己酉 / 대한 융희(隆熙) 3年) 10月 28日(陽曆)

 태자 태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주다

 

조선일보 2009.10.24 (토)

 테러리스트는 안중근 아닌 이토 히로부미

"동양 3국 평화구상은 칸트의 '영구평화론' 닮아"

 

 ●  이문열 조선일보 소설 안중근-불멸(안중근 일대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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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0.30 03:13

    첫댓글 오뉘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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