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훼손]
① 화재로 인한 훼손
성종 6년 1월, 양심당(養心堂)에 불이 났으나 완전 소진은 면하였다. 중종 38년 1월, 동궁에 화재 발생해서 중건 의견이 있었으나 음양지설로
보아서 불길한 해라고 연기되었고, 명종 8년 9월, 화재로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欽敬閣)이 소진되었다.
고종 10년 12월 10일, 순희당에서 불이 나 내전이 삽시간에 타 버렸다. 역사당, 자경전, 복안당,
자미당, 교태전, 복도, 행각 등 364.5간이 소실되었고, 고종 13년 11월 4일, 복원 완공 7개월만에 화재로 내전과 외전 일부가 소진되었다.
교태전, 비로당, 건순각, 자미당, 덕선당, 순인문, 자경전, 협경당, 복안당, 순희당, 연생전, 경성전, 함원전, 흠경각, 홍월각, 사정전, 강녕전 등 830여칸 이었고, 고종 27년 6월 다시 경성전이 불탔다.
② 임진왜란으로 인한 훼손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5월 3일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고 경복궁은 대화(大火)를 맞아 모두 불태워졌다.
③ 일제시대의 훼손
조선시대 궁궐은 절대권력자인 왕이나 왕실의 거주지로서 그 어떤 장소나 시설보다
중요시 되었고, 풍수상으로 볼때도 중요한
명당 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궁궐을 훼손한다든가 그곳에 일제의 침략기관을 세움으로서 일제 침략자는 실제적인 지배와 상징적인 지배의 두가지 효과를 거두려고 했다.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한편, 한국민족에게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장소를 차지함으로 무력감을 심고 조장한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덕수궁 앞에 경성부 청사(현 서울시청)를 지었으며 창경궁 안에 창경원을 만드는 등 궁궐을 파괴하였다.
그중에서 경복궁에
대한 훼손은 다음과
같다.
1910년 이후로 궁내의 건물을 마구 헐고
방매하였다. 특히 1912년에 경복궁의 소관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가면서 더욱 심해졌다. 예로 건춘문 안의 비현각이 장충동의 남산장 별장으로 옮겨지고, 많은 전각들이 일본인 요리점이나 일본인 주택(남산동, 필동, 용산, 회현동, 인현동)으로 옮겨졌다.
1915년 가을에는 일인들이 통치 5주년기념으로 소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내에서 개최하여 조선조 정궁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추락시켰고, 궁내 건물을 철거하여 진열관을 신축할 뿐 아니라, 경내에 불교유물을 수집 전시함으로서 억불정책의 본거지가 여지 없이 사상적인 유린을 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진회 개막식에서는 일인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가 근정전의 어좌에 올라앉아 개회사를 읽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고,1916년부터는 총독부 건물을 짓는다고 궁궐의 정면을 마구 허물었으며, 1917년에 창덕궁의 내전에 불이 나자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옮겨 짓기도 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진보적인 상업 및 기타 문물을 전시함으로써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자리였다.
또한,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 사실화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
근정전 동편에서 건춘문까지, 남쪽 오위장도에서 북쪽 선원전까지
7,200여평에 있던 전각들을 헐었다. 그리고 정원에 조선개국 사상인
유교사상과는 상치되는 불교유물인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각지에서 옮겨 일제 마음대로 배치하고 음악당까지 설치하였다.
흥예문과 좌우 회랑, 집화문, 용성문, 협성문, 금천교,
유화문. 1918년부터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까지 유물의 전시 진열실로
사용했다.
1917년 11월에 창덕궁에 불이 나서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중건을 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여러 전각을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옮겼다. 이때는 총독부 청사 공사가 한창이었다. 헐린 전각 은 교태전, 강녕전, 경성전, 연생전, 만경전, 흥복전, 함원전, 연길당, 흠경각 등이다.
- 1920년 건춘문에서 영추문까지의 궁성을 헐었다. 이때 동십자각이 동떨어지고 서십자각이 무너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 낙성으로 왕궁을 압도했다. 1927년 9월 15일, 왕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1929년 5월, 신무문 북쪽에 있던 육무당, 육문당이 헐려 한강로의 일본인 절 용광사 건물로 변했다. 한편 그 자리에는
경무대와 그 관사를 지었다. 1932년 10월, 건춘문 서북쪽에 있던 선원전을 헐고 그 재목으로 장충동에 일본인 절 박문사를 지었다. 선원전은 왕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이었다. 1935년 봄철부터 경복궁을
일반인에게 공개함으로써 왕궁의 기능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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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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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 동래부순절도
- 두번째 : 경복궁을 압도하는 총독부건물
- 세번째 : 총독관저로 추정
- 네번째 : 창경궁의 공원화
- 다섯번째 : 근정전에 휘날리는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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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방상궁님! 그렇게 일제는 우리의 궁궐을 야금야금, 그리고 완벽하게 훼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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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지킴이 김승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