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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원문보기 글쓴이: Ψ알콩달콩
[귀뜸- 바쁘신분은 뜻있는 글이니 추천한방을 부탁드리며
여유가 되시는분은 글이 길어도 차분하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글은 효창원에 대한 설명하는글이며 또한 안중근의사님의 추모식을 알리는글입니다]
지난글
1)- 효창원의 유래와 그역사적 의미 그리고 수난사
2)- 민족의 성지-효창원의 통곡의 수난사 - 자세한 내용
3)- 효창원속의 임정주요인물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4)- 삼의사의 묘 와 안중근의사의 실묘
3) 효창원속의 임정주요인물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 효창원 임시정부요인 묘역 >
백범 김구선생님은 많은분들이 이미 잘 아실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정주요 요인들에 대해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셔서,
그분들을 소개 시켜드릴려고 합니다.
읽는 여러분들이 시간적 여유가 갖게되신다면 효창원에 와 그분들에게 조그마한 묵념이라도 할수 있었으면합니다.
또한 이번 3월 26일 안중근의사 순국 101주기 추모식이 있으니..와서 함께 참배하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이동녕 선생 (1869.10.6∼1940.3.13)
충남 천원天原 사람이다.
1885년 17세 때 일가가 상경하여 서울 종로 봉익동에 정착하였다. 1892년 24세 때 국가시험인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25세 때1893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28세 때1896 독 립협회에 가담, 개화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해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준․, 이승만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30세 때1898 7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끝내고 출옥, 이후 더욱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종일 이 창간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 이종일 의 가르침을 받고 본격적인 민족의식과 그 사상정립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수련하였다.
34세 때1902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그가 36세 때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그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 등과 같이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김구, 이회영 등 지사와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투옥생활을 감수하였다.
풀려 나온 그는,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 이상설, 여준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 동포와 그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 냈다. 이때 동지 이상설 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휘, 이갑,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안창호,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학교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그는 만주 서간도 요령성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 운영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 훗일 독립군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 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대종교에 입교 활동하는 등 광복운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는 이상설 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 3개월간 투옥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 때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 ≪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 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성에서 대종교 김교헌 외에 조소앙, 조완구, 김좌진, 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건너가 정부조직을 모색하였다.
마침내 국내에서 3․독 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13일 동지들과 임정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 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이동휘 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그는 안창호, 여운형, 조소앙, 이시영, 차리석, 홍진, 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4년 그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 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하였으나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11대 의정원의장이 되었고, 1926년에는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다음해 그는 임정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30년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韓報, ≪한성≫韓聲을 발행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 되어 임정의 존폐 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1930∼1932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에 이봉창, 이봉길 의거로 절강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에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1935∼1939이 되었으며, 이때 양우조, 엄항섭, 이시영, 조성환, 차리석, 송병조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 됨으로써 김구 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 기강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 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성환 선생 (1875.7.9∼1948.10.7)
1906년 안창호, 이갑, 이동녕, 김구,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노백린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일단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간도, 노령 등지를 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2년 그는 만주를 시찰하러 온 일본 총리대신 계태랑桂太郞의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거제도에 1년간 유배되었다가 재차 상해로 건너갔다. 1916년 9월 그는 신규식, 민충식, 박은식 등과 체화동락회棣華同樂會 조직하여 교민의 단결 및 재외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에 종사하였으며,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열을 올렸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을 발표하여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공표하였는데, 그는 39명의 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그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유동열 등과 무력투쟁을 계획하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하게 되자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김동삼, 조영진, 조소앙 등 30여 명과 함께 1919년 3월 하순 노령에서 상해로 와서 임정에 참여하였다.
동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서 개최된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노령을 대표하는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겸하여 군무차장에 임명되었다. 4월 23일에는 차장제를 위원제로 바꿈에 따라 군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날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그는 박은식, 현상건, 신채호 등과 함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만주로 나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 직에 참여하여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그는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등 독립군의 무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동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에 대승한 북로군정서 및 대한독립군, 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10개 독립운동단체들이 1920년 말 밀산密山에 모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서 일을 총재로 추대하게 되자, 그는 홍범도, 김좌진 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노령으로 들어갔다.
노령 이만에서 이청천, 최진동, 오하묵, 안무,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그는 고려의용대를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백계白系 러시아군 토벌작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당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당하는 커다란 손실을 입고, 그는 북경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위원으로 중국정부와의 외교 교섭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을 계속하다가 북만의 동지들을 돕기 위하여 다시 만주로 복귀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영안현에서 김혁, 김좌진, 나중소 등과 신민부新民府를 새로 조직하고 외교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당시 신민부의 군세는 보안대, 별동대를 합하여 530여 명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군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년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이범윤과 같이 고문에 추대되어 교육 훈련을 지도하였다.
1925년 10월 임시정부가 좀 더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탁, 김동삼, 오동진, 이유필, 김좌진 등과 함께 그를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만주에 머물러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취임하지 않았으며, 1926년 2월 18일 국무원에서 전원 해직되었다.
1926년 그는 북경으로 가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촉성보≫促成報를 발행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과 단합을 호소하였다. 이를 위해서 만주와 상해에 조두진, 장건상 등을 파견하여 선전에 주력하였으며, 1927년 11월 14일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어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그는 북경대표로 참석하여 이후 한국독립당 발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2월 24일 제2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윤기섭, 조소앙, 조완구 등과 경기도 의원에 다시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국무위원에 선임된 이후 광복 때까지 군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 계속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9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황학수, 이준식, 왕중량 등과 화북華北지구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40년 5월에는 중경에서 3당(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통합운동을 벌여 민족진영의 정당을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설하고 그 중앙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운영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여 임정 요인들과 같이 환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유도회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서거하여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1904년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성)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소위 사내 총독寺內總督 암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 3월 20일 석방되었다.
1919년 3․독 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동년 8월 ≪독립신문≫ 기자로서 조동호 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뒤 1921년 6월경 김승학 이 동사 사장이 되어 신문발행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편집국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교포들에게 독립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의장에 이동녕이 피선되고 그는 부의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며 김붕준, 김홍서 함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의정활동에 참여하는 등 1933년 12월까지 의정원 의원으로 재직하였다.
1922년에는 안창호 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뜻을 같이 하였으며,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간의 이견 조정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조직하고 안창호, 손정도, 주요한, 이규서 등과 함께 그 중심인사로 활동하였는데, 1931년 3월까지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하여 민족계몽운동을 펴는 등 노력하다가 이사직을 물러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 28일 개최된 의정원 회의에서 그는 김구, 이동녕, 조성환, 신익희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1930년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기관지 ≪한보≫韓報․, ≪한성≫韓聲을 발행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정신 선양을 위하여 활동하였는데, 1943년 5월 8일 중경(重慶)에서 개최된 제3기 전당대회에서는 그가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35년 임시정부가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분당 싸움이 거듭되고 국무위원들도 사퇴를 하였으나 그는 송병조 와 함께 임시정부를 지키며 정부의 재건에 부심하여 광동廣東에 있는 김붕준, 양명진과 연락을 취하고, 항주에 있는 이시영․, 조완구 등의 협력을 부탁하여 그 승낙을 받고, 다시 가흥)에 있는 이동녕에게 협의를 거듭하는 등,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키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35년 11월 13일 위기를 극복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여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주석에는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재무장, 송병조, 군무장 조성환,, 법무장 이시영, 그리고 그는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또한 신당 운동에 참가했던 한국독립당이 민족혁명당의 창립과 함께 해체되어 임시정부의 여당이 없어졌으므로 새로운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11월에 창립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조국광복에 헌신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임시정부의 환국준비에 분주하던 중 동년 9월 9일 이국 땅 중경에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효창원에 안장되어계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김구 선생님과 중요선생님들이 있어서
조선-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잇고 그리고 대한민국 광복을 가져올수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알아보는것도 좋을것 같아 여러분들에게 임시정부의 역사와 그때 구성된 광복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특히나 왜~! 광복군에 대한 서글픈 우리의 현실을 알수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표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상해시대 ( 1919 ~ 32 ) : 7번 청사이동..
내정·교통·군사·외교·교육·문화·재정·사법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광복 정책 전개하며 뿌리내림.
비밀조직 결성 (국내외동포관할위한 연락기관인 교통국과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 상설기구 설립)
독립신문 간행 ( 독립정신각성과 운동방향제시) 학교 설립 ( 의무교육, 중국대학진학시킴 )
임시정부승인받기위해 외국들과 국교맺음. (파리위원부 설치 - 한국독립결의안 통과 성공)
무장독립운동 ( 신흥사관학교 정신 계승한 육군무관학교설치 - 일본군과 대결 )
한인애국단( 윤봉길, 이봉창) 과 의열단 ( 나석주, 김상옥 )
타국이었기에 사법업무는 제약 ( 보통, 고등법원, 중앙심판처 설립, 실천 )
수립당시 대통령중심제가 내각제로 바뀜. ( 1925년부터 )
김구선생님의 주도하에 이봉창 일왕 폭살이 미수 --> 윤봉길의거 <== 극악해진 탄압피해 상해를 떠남.
* 이동시대 ( 1932 ~ 40 ) : 10여곳 전전하며 남서쪽으로 이동.
윤봉길의거로 인해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중국뿐만이 아닌 대외적으로 환기되어
중국의 국민정부 장제스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실질적인 도움받게 됨.
의정원 비상회의를 개최하여 무정부 상태의 임시정부 기구를 재정비·강화했고,
애국단 중심으로 한국 국민당 조직한 시기..
요인들은 하루에 1끼를 연명할 정도로 지쳐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내린 일이 없으며 좌우익 진영의 통일에 대한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 > 현재 우린 너무 편안한 거 아닌가요 ? ^^*
광복진영의 3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으로 창당
* 충칭시대 ( 1940 ~ 45 ) : 4번 청사 이동.
숙원사업이던 광복군 창설 내외에 선포
<== 일본군이 주둔하는 지역이라면 어디든지 파견 연합군과 함께 대일 항전 수행.
보다 확대, 강화된 임시의정원 활동으로 5차 개헌실시,
<== 강력한 주석 체제로 변경되면서 실질적인 근대적 민주 방식의 지도체제 이뤄짐.
좌, 우익 연합 내각 구성.
1941년 주미 외교 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 외교 정책 수행 <== 우리 나라 대표 구실.
1942년 임시정부 승인 요구 .. 1944년 임시정부 승인 통고 받음.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 창설과 활동
임시정부는 중경에 도착하기 1년쯤 전인 1939년 11월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군대조직에 대한 양해와 재정 지원 약속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중경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정신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 맥락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한 광복군을 자력으로 창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군이 넘어야 할 난관은 험했다. 그것은 ‘9개 준승(準繩)’으로 대변되는 중국군사위원회의 간섭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이 사슬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고, 1945년 초에 들어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광복군의 편제는 초기와 후기로 나뉜다. 초기 편제는 중경에 위치한 총사령부 외에 서안의 1지대(군사특파단)와 5지대(한국청년전지공작대), 수원성 포두(包頭)의 2지대, 안휘성 부양(阜陽)의 3지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42년 7월 민족혁명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제가 확대 개편되었다. 즉 후기 편제는 조선의용대를 1지대로, 기존의 1·2·5지대를 합쳐 2지대로 각각 편성하였고, 1945년 초에 안휘성 부양에 있던 기존 3지대 겸 징모 6분처를 승격시켜 3지대로 삼았다. 이 외에도 광복군에는 중국의 3전구와 9전구에서 활약하던 3전구공작대와 9전구공작대가 있었으며,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이 집단거주하던 중경 교외의 토교(土橋)에 임시 편성부대인 토교대라는 것도 있었다.
광복군의 활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와 적 후방의 한인 청년을 포섭하는 초모공작,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적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란활동 등이었다. 서안에서는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을, 안휘성 임천에서는 한국광복훈련반(한광반)을 각각 설치하고, 모집된 청년들을 군사 초급간부로 양성하였다.
또한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연합국과 공동작전을 펼치는 등 노력하였다. 인도·버마전선에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벌였다. 그리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진입을 위한 초급장교를 육성하였다. 전략정보국은 한반도에 대한 공작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 청년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키고자 계획하였다(Eagle Project). 그래서 2지대 1기생이 5월부터 전략정보국의 교육을 받고 8월 4일에 수료한 뒤, 8월 7일에 국내진입이라는 공동작전이 김구와 중국전구 전략정보국 사령관 도노반(Donovan) 장군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렇지만 출발 직전에 일본의 항복소식이 전해져 광복군은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였고, 3지대에서 실시되던 교육도 중단되고 말았다.
영 국과 미국은 모두 광복군과의 공동작전을 펼치면서 임시정부와 관련을 맺었다. 비록 임시정부를 그들이 공식 승인하지 않았지만 광복군에 대한 역량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특히 미국 전략정보국이 광복군 일부를 한반도 진입작전의 핵심이 되도록 훈련시킨 이유는 바로 그들이 광복군의 역량을 높게 평가한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뒤 국내에 대한 방송공작을 실시하였다. 중경의 방송국을 이용하여 광복군이 직접 국내 동포들에게 보내는 방송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의 추이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알리고 국내 동포들의 투쟁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일제 말기 국내 투쟁의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국내에 대한 방송공작은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해서도 시행되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이었다. 이 위원부는 임시정부가 2차 세계대전을 광복달성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파악하고 미국과의 외교를 전개하고자 미국에 설치하였던 조직이었다.
헐리는 광복군 청사, 묻혀져 가는 광복군 정신
대한민국 군인의 정신이 담긴 광복군청사가 무너지고 있읍니다.
이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는 무얼하는가?
그러면서 일반군인에게 군인정신을 강조하는가?
광복군 기념촬영
광복군 사열식
광복군의 훈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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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충칭에 있는 광복군 사령부 청사.
우리 국군 정통성, 광복군·독립군에 있어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효시다.
우리 국군의 정통성과 정체성은 '민족자주독립'을 위해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했던 광복군·독립군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국군장병들은 이토록 자랑스러운 광복군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을 이어가야 한다.
이렇게 위대한 민족자주독립 정신을 자손만대에 길이길이 전하리라는 신념이 넘쳐나야 한다.
민족적 자부심과 민족애의 한마음으로 민과 군이 일치하고 상관과 부하가 일체되어
진정으로 보람과 활력이 넘치는 군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군은 이와는 정반대 길을 걸어왔다.
결과 대부분 장병들의 마음 속에 자신이 군인이 되었음에 대한 자부심이 희박하다.
장기복무 간부들도 마찬가지다.
국군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않고 이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방의 의무를 소홀히 한 분들이 국가 최고 요직에 버젓이들 앉는 뻔뻔함을 보이고 있으니
누가 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군의 정체성과 정통성은 장병들에 대한 정신교육과 이에 관련된 행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특히 국군의 날을 어떤 의미를 가진 날로 정하느냐는 정체성 결정에서 중요 기준이다.
10월 1일은 한국전쟁 당시 3사단이 최초로 38선 돌파한 날
"우리 국군의 날은 9월 17일로 해야 합니다."
-평화재항군인회-대표 표명렬장군의 글중에서
광복군 창설을 국군의 날로 잡는 게 마땅하지 않나요?
▲ 충청시 재개발 계획에 의해 사령부 청사 일대에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현재 일부 철거작업 중이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은 한국전쟁 중 미군의 인천상륙을 기화로 북진을 개시,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며 친일파 관료 일색 국무회의에서 일사천리 결정해버린 것이다.
이날은 한미상호 방위조약이 체결된 날이기도 하다.
친일 인사들과 숭미 사대주의자들은 "안성맞춤의 참 좋은 날을 택했다"며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는가?
이 는 동족상잔의 부끄러운 한국전쟁에 국군의 정체성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여 항일독립전쟁의 의의를 희석시키려 한 기만적 결정인 것이다. 자신들 과오를 덮기 위해 광복군의 빛나는 항일독립전쟁사를 지워버리려는 음모가 깔려 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떼를 지어 성조기 휘날리며 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목소리를 높이던 그 분들이 중심이 되어
"미군이 아니었다면 국군이고 뭐고 존재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국군 속에 '민족자주독립정신'이 싹트지 못하게 하려는 숭미 사대주의적 흉계가 숨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먼 훗날 마치 한국전쟁이 국군탄생의 원년인 것처럼 속이려는 수작일 수 있다.
그간 우리 시민사회는 이렇게 잘못 결정된 국군의 날 변경을 끈질기게 주장해왔지만 국방당국은 지금까지 마이동풍이었다.
이는 바로 우리 군대가 친일무리들이 파놓은 민족정기 말살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과 정체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임시정부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제적인 공인을 받음으로서 보다 효과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정식군대의 존재가 필수 요건이었다.
이에 '연해주 만주 등 각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 세력을
총괄하는 대표성을 가진 본부 구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40년 9월 17일 드디어 중국 충칭에서 '대한광복군'을 창립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 된 공화제 정부 군대가 탄생한 쾌사였다.
그날 창립기념식이 성대히 거행되었고 이 광경은 사진에 담겨져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한국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현재의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 군대였던 광복군 창설 기념일인 9월 17로 바꾸고
충칭에 있는 광복군 사령부의 옛 건물철거를 중단토록 하여 장차 국군 정신교육의 메카로 활용함으로서
실종된 민족혼을 되찾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국군의 자부심을 회복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27651&CMPT_CD=P0001
-- p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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