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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0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토빗 12,1.5-15.20
복 음 :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장관을 임명하지만 국회는 장관들의 능력과 자질을 검증하는 제도가 청문회입니다.
여당은 장관들의 능력과 정책을 검증하려하고, 야당은 장관들의 도덕성을 검증하려고 합니다.
능력과 정책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도덕성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검증의 기준은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탈루, 병역비리, 부동산투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능력과 자질을 갖춘 장관 후보자들이 도덕성이라는 기준을 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한 야당 의원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성직자를 뽑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에는 어느 정도 도덕성에 흠결이 있어도 업무 수행 능력이 있고 정책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청문회를 통해서 대통령의 임명에 협조를 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새로운 정부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인재를 찾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교구 성소후원회에서 봉사하는 지구장님들이 있습니다.
월례미사, 지구 성소후원회 모임, 서품식, 피정, 연수, 본당 성소후원회 방문,
성소주일을 준비하는데 지구장님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지구장으로 봉사를 하신 분들은 연륜이 있고, 일을 잘 아시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됩니다.
수녀님은 지구장님들의 임기를 이야기 하였고, 임기가 지나신 분들은 새로운 지구장을 추천해 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새로이 지구장이 되셨고 전임 지구장님들에게는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일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 질 것입니다.
물이 흘러야 바다로 가듯이, 지구장님들도 임기가 지나면 새로운 지구장을 선출하는 것이
교구 성소후원회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지구장님들에게는 감사를 드리고,
새로이 봉사를 해 주실 지구장님들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능력과 도덕성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사제 양성에 대한 관심과 열정만 있으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직자를 뽑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려는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사제성소가 줄어들어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젊은이들을 선발해야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을 선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직업으로 선택하려는 젊은이들을 선발해서는 안 됩니다.”
성직자는 신앙 안에서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되고 비록 부자라 하더라도
불선(不善)을 쌓은 집안에는 언젠가는 재앙이 닥쳐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현재 미국 사람들이 쓰는 언어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영어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여차했으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뻔했다고 합니다.
그 언어는 바로 히브리어였습니다.
미국 건국 선조들은 성경을 중시하고 당시의 영국에서 사용하던 영어를 혐오했습니다.
그래서 신대륙으로 향하던 메이플라호 선상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투표했습니다.
그 결과 딱 1표 차로, 히브리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딱 한 사람이 영어가 아닌 히브리어를 선택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은 대단합니다.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그 한 사람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 하나의 힘을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능력과 힘이 없기 때문에,
돈이 없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들어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쌍둥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왜 다르게 만드셨을까요?
누구는 중요하고 누구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모두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하신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내 자신의 중요함을 깨달으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사실 능력의 많고 적음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을 더 사랑하실까요?
아니면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을 더욱 더 인정하실까요?
세상의 기준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들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헌금했지요.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작은 동전이라고 할 수 있는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가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다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이 여인의 봉헌하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너무나 적은 헌금이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큰 것을 봉헌한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소유한 재물의 양은 하늘 나라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한 준비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진정 소유한 것이 하나도 없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지닐 수 있습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혹 이렇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돈 모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믿음의 삶이요,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삶임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그러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주군이신 그분,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인가 봅니다.
곧 순수한 마음의 지향에 달렸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마음의 지향’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 마음을 얻는 길일 것입니다.
이는 요한 까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모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기적의 연속을 사는 하루살이들
전삼용 요셉 신부
몇 년 전 방송된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서는 오늘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일명 ‘화성인’ 하루살이녀를 소개했었습니다.
27세의 헤어디자이너인 그녀의 연봉은 1억 정도지만
월세에 살면서 한 달 소비가 1000만원에 달해 통장엔 잔고가 ‘제로’인 여성입니다.
그녀에겐 ‘내일’은 없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에 자신이 번 돈을 쓰지 못하고 죽으면
너무 안타까울 것 같아서 벌면 바로 써버린다는 것입니다.
화성인 하루살이녀 이미영씨는
“현재를 최대한 즐기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라고 말하며,
그 날 방송에도 친구와 한 끼 먹는데 98만 원이 찍힌 영수증을 들고 나왔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미래도 생각 않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칠지라도,
미래만 생각해서 한 번도 제대로 즐기며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수도 있습니다.
낭비하며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하루살이 인생관은 매우 복음정신과 일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부유하면서도 그 일부분만을 봉헌하는 이들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고,
가난한 과부는 당장 오늘 살아야 할 것까지 모두 봉헌하였으니 내일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루살이 인생들은, 만약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의 섭리를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또 훨씬 강렬하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오늘 자신의 모든 재산을 봉헌한 과부는 그 다음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 엘리야를 맞아들였던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하느님 보호의 손길을 매일매일 느껴가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걱정하여 이미 돈을 잔뜩 모아놓은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어떻게 언제나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로드아일랜드의 릴리안 J. 데올리베이라는 끊임없이 가난했기에 끊임없이 기적을 체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가정용 난방 기름에 얽힌 두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돈이 다 떨어져, 가정용 난방 기름이 다 떨어져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저녁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기름이 떨어져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신부님이 껄껄껄 웃으셔서 조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후에 어떤 신자가 나에게 와서는 기름 100갤런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기름은 당신 거요.”
또 한 번은 남편은 술 때문에 직장을 잃었고,
자신은 심장수술로 역시 직장까지 잃고 돈도 다 떨어져서 전기와 기름이 동시에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주님께서 저희를 돌보겠다고 하셨으니, 돌보아 주세요!”라고
주님께 소리치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8시 30분 경, 예전의 직장 상사에게 전화가 왔는데
초과 이익 분배금을 받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1월까지 근무했기에 받을 자격이 있었고
그 금액은 1,777.68달러로 전기료와 기름 값을 낼 수 있었고
약간의 식료품도 살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몇 달 동안은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한 기쁨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기적의 연속, 101가지 기도의 힘 이야기 중에서]
아마도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이런 기적의 연속을 즐기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부모님보다 더 크신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루살이가 되십시오.
매일 매일이 기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랩톤 두닢도
내것이 아닌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임을 알기에
주님께 바치는 것에서
모든 길은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과부의 가난한 역사가
주님을 통해
다시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것을 맡길 때
구원자이신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참된 믿음이란
물질에 눈이 먼 우리들이
주님의 가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너무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제대로 보는 것에서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대로 볼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봉헌을 통한 일치는
우리자신을
일상 안에서 제대로
아는 것에서 사작 합니다.
알기에 절망치 않고
끝까지 희망할 수 있습니다.
랩톤 두 닢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합시다.
우리자신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과부의 봉헌에서
참된 믿음이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기도임을 배우게 됩니다.
믿음이란 마지막까지
믿고 또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봉헌
그것은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참된 발걸음입니다.
가장 좋은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