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원(語源) 수필(4)
‘가게’ 기둥에 입춘(立春)
조 세 용 (건국대 명예교수/문학박사)
정확한 간행 연대와 편자를 알 수 없는 조선조 때 한문 속담집인 『동언해(東言解)』에 ‘가게 기둥에 입춘(假家柱立春)’이라는 속담이 수록되어 있다.
이 속담의 뜻은 입춘 날 집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내용의 글귀를 붓으로 써 붙이는 것은 고대광실(高臺廣室)의 큰 집에나 어울리는 것이요, 가게처럼 허름한 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제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위나 상황, 또는 분수에 넘치는 어줍지 않은 행위나 상황’을 풍유하여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사실 우리들 인생 세간(人生世間)에는 이처럼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고 속을 메스껍게 하는 비정상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학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또는 인품으로 보나,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아니 앉아서는 안 될 자가 얼굴에 철가면을 뒤집어쓰고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자의 행위나 상황이 바로 그것이요, 한 홉밖에 안 되는 지식이나 글재주를 말[斗]로 과시하려는 사이비 학자나 문필가의 행위나 상황이 바로 그것이요, 없었던 사실을 마치 있었던 사실로 억지로 꾸며서 명함에다 엉터리 경력을 빼곡이 써 넣고 자기 확대증 환자처럼 헤집고 나대는 행위나 상황이 그것이요, 남의 논문이나 싯구를 표절(剽竊)하고도 마치 자기의 독창적인 이론이나 작품인 것처럼 사기 행각을 하는 자의 행위나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가게’라는 낱말은 우리나라에서 조자(造字)한 한자어 ‘가가(假家)’에서 변형(變形, modification)된 귀화어(歸化語)이다.
이 ‘가가(假家)’가 언제부터 ‘임시로 지은 가건물(假建物)’의 뜻에서 ‘길가나 장터 같은 데서 물건을 파는 노점(露店)’의 뜻과 ‘일정한 붙박이 건물에서 물건을 파는 전방(廛房), 전한(廛閈), 점방(店房), 상점(商店)’의 뜻으로 의미가 변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낱말은 조선 중종(中宗) 12년(1517)에 출간된 한자음 운서(韻書)인 『사성통해(四聲通解)』, 하, 59에 ‘가개亦曰平房(가개는 또한 평방이라 이른다)’라고 출현하는데 이 ‘가개’는 ‘가가(假家)’에서 변형된 것이고 오늘날의 ‘가게’의 전차형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가개’는 이때를 전후해서 종로 네거리에 설치되었던 상설 시장의 상점인 시전(市廛)보다는 작고 육주비전(六注比廛)에서 파는 물건을 집에서 파는 재가(在家)보다는 규모가 조금 큰 ‘방(房)’의 뜻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쓰인 것 같다.
‘가개’에서 또다시 모음이화(異化) 과정을 거쳐 오늘날 ‘가게’로 변형된 ‘이 낱말은 다시 ‘구멍[穴]’과 합성어가 되어 한때 ‘구멍처럼 작고 우중충한 소규모의 상점’이라는 뜻의 ‘구멍가게’라고 불리면서 서민층의 사랑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 할인 매점에 밀려나 단독 주택가에서나 그나마 겨우 가뭄에 콩나듯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파트촌에서는 단독 주택가에 있는 ‘구멍가게’보다는 그 규모가 조금 큰 ‘슈퍼마켓’이니, ‘마트’니, ‘편의점’이니 하는 외래어와 신조어가 탄생되어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는 터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만물은 유동(流動)한다.’라고 갈파한 것처럼 물질 문명의 발달은 오늘날 우리의 생활 패턴을 바꾸고, 동시에 그 주변의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변화시켰다. 아직도 나는 ‘슈퍼마켓’이니, ‘마트’니, ‘편의점’이니 하는 낱말보다는 ‘구멍가게’라는 낱말을 더 사랑한다. 왜냐 하면, ‘구멍가게’라는 낱말 속에는 서민 계층의 사람들의 애환(哀歡)이 녹아 있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이 낱말의 통시태(通時態)를 다시 정리하여 밝히면, ‘가가(假家)>가개>가게’가 된다.
첫댓글 2017년 6월 30일 메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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