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현재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틀을 강요합니다.
타인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려면, 돌아오는 것은 격려보단 핀잔과 걱정, 외면이지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틀에 들어가 살기 마련인데,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자유롭게 절에 다니게 되셨는데... 할머니의 불교신행은 기복이 아니셨습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과거 대부분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신행은 가족의 대표로, 가족 구성원의 염원을 대신 빌어주는 형태였지요. 할머니는 뭘 빌러 절에 가시지 않았고, 말 그대로 무주상보시를 하셨어요.
허나, 당신의 자식들은 한심해 했어요. 도대체 빌 것도 없으면서 뭣 하러 절에 가냐는 거지요.
쓴소리가 점점 커지자, 시골 전답의 일부분을 본인이 관리하시겠다 하며, 직접 농사를 지어 그 쌀로 보시를 하시게 됩니다. 농경철이면 시골에 내려가 혼자 하시기엔 좀 규모가 크니까, 품도 사고... 진두지휘하셨던 거지요. 가을이면 수확한 쌀을 다 서울로 옮겨다 놓고, 다음해 농사 시작 전까지 그 쌀로 신행활동을 하셨어요. 오갈 데 없는 전쟁미망인들을 거두어 동기간처럼 서울로 시골로 함께 살면서 일도 분담하고 그러셨답니다.
모두 어렵던 50~60년대, 바라는 바 없이 묵묵히 쌀을 이고 지고, 시내 절들을 순례하셨고, 사정이 딱한 스님들을 도우셨다고 합니다.
제 어머니를 포함해 밑의 세 남매는 아직 학업 중이였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일체 비용은 장자 상속한 큰외삼촌의 몫이라 선을 확실하게 그으시고, 할머니가 일하고 관리해 수확한 일체의 소출은 오로지 말없는 단월노릇에만 쓰셨어요. 대개의 어머니들이 무엇보다 자식이 우선인데, 할머니는 승가의 도우미로 사셨습니다.
할머니의 이러한 삶은, 슬하의 자식들 모두에게 불만이었지만, 어머니를 포함한 아래 세 남매는 불만을 넘어 억울하셨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돈이 부모님 돈이잖아요.
큰형에게, 큰오빠에게 학비며, 용돈을 받아 대학 공부까지 했으니 왜 치사한 적이 없었겠어요.
할머니가 방관만 하지 말고 ‘할아버지 재산으로 동생들 돌보는 거니까 유세하지 말아라.’ 하고 적극 개입이라도 해 주셨으면... 아님 할머니가 수입(?)의 일부라도 내주셨으면... 좀더 편했을 텐데 하는 마음들이였습니다.
어머니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것만 하시고, 자신의 삶을 사시는 할머니가 야속하셨다고 합니다.
열혈엄마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자식들을 위주로 생각하는 보통 엄마였으면 했답니다.
어머니보다 두 살 위인 외삼촌이 대학생이던 시절엔 날씨가 추워지면,
외갓집 사랑채에 배고프고 몸을 녹이고픈 고학생들 친구들이 모여들었답니다.
할머니는 항상 아무 말씀 없이, 늘 그 수가 얼마가 되었든 따뜻한 밥을 지어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채 근처도 안 갔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자리에서든 이야기 끝에 아무개 여동생이라 하면, 외삼촌의 동창들이 그 시절 정말 고마웠노라는 인사를 수없이 들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책을 자유로이 읽고 싶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갈 수 없는 길이지만 공부하는 것을 부러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결혼 전에 남동생들 어깨너머로 언문도 깨쳤고, 천자문도 쓸 줄은 몰라도 다 암송하셨다고 해요.
워낙 부지런한 분이셔서 늘 일을 하셨지만, 몸살이 나 자리보전하시거나 산후조리 하시거나 할 때는 외고 계신 천자문을 작은 소리로 읎조리시거나, 언문 이야기책을 읽으셨답니다.
어머니가 공부하다가 옆에 앉아 바느질 하시던 할머니의 솜씨에 탄복해 “엄마는 바느질을 어쩜 그리 잘 하우.” 하면,
좀처럼 어떤 말에도 대꾸 없으신 분임에도 유독 “너는 글 잘 읽잖니~” 하면서 늘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딸이 부러움을 숨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할머니 세대에는 안주인의 주된 소임이 음식수발과 옷수발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그런 영양학적 상식을 얻으신 건지, 꼭 다양한 잡곡을 섞어 밥을 짓도록 했고,
활동량이 현저하게 적은 동절기에는 기름진 음식과 반찬가지수를 제한했다고 합니다.
고량진미만을 드실 수도 있었음에도 지금의 5대 영양소가 조화된 다양한 식단을 선호하셨다고 합니다. 뭐라 뭐라해도 음식수발에 잔손이 많이 갔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일평생 신식복장은 마다하고 한복에 두루마기를 갖춰 입으셨습니다.
걸치시는 그 모든 옷들을 할머니가 다 지으셨어요. 바느질도 잘하셨지만, 할머니는 옷수발로 할아버지에게 은근한 애정을 표현하신 듯합니다.
일찌감치 재봉틀을 사용하셔서 수고를 더시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복엔 손바느질 아니면 안 되는 부분이 많잖아요. 요즘처럼 드라이크리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한복이라는 옷은 세탁할 때, 솔기를 죄다 뜯어 해체한 후 빨고 다려 다시 복원해야 하는 시스템이기에, 세탁+제작이 바로 옷수발입니다.
게다가 바늘 가는 곳에 따라다니는 실처럼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음식수발을 드셨기에, 정월 보름 지나고 농경준비 직전까지 그 시기에 할아버지가 입으실 1년치 옷을 다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좀 한가한 무렵인데도 평상시처럼 3시간 남짓 주무시면서 손수 다 마련하셨답니다. 할아버지 옷은, 세탁 도움을 받을지라도 바느질만큼은 침모에게 맡기지 않고 할머니가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트콤(?) 같은 일은 다음입니다. 제가 어머니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하시던 대로 정월 보름이 지나면 할아버지 옷을 다 세탁+제작하셨다는 겁니다.
“엄마, 입는 이도 없는데, 옷을 만들어요오오?”
“그래. 생전과 똑같이 1년치를 다 만드셨다. 물론 두루마기도.”
뭔가 괴이해서,
“아니, 입지도 않았는데, 더럽지도 않은데요? 왜에에에?”
어머니는 씨익~ 웃으면서
“아무개 부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셨나 봐. 남편이 이 세상에 없다고 누구의 부인이 아닌 게 아니잖니.”
“그래도 멀쩡한 옷을 매해 뜯어 다시 만드는 것은 비효율의 극치잖아요.”
“아니야. 나중엔 우리들이 입었어.”
“우리? 외삼촌들이?”
“시작은 나부터야. 하하하. 한옥이 춥잖니. 내가 시험공부 하느라 이불을 싸매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 옷들이 생각나잖아. 처음엔 명주솜을 얇게 넣고 만든 명주저고리 바지를 갖다가 입었지. 왜 한복은 좀 커도 입고 작아도 입는 옷이잖니. 실내복으로 가볍고 따뜻해 최고더라. 어디 조이지 않으니 편하고. 계절별로 파자마 삼아 이것저것 꺼내 입기 시작했어. 내가 집에서 즐겨 입는 걸 보더니 외삼촌들도 꺼내 입더라.”
“할머니 반응은?”
“뭐 생전 말씀하시는 분이니? 당신 하시는 일에 이해를 구하는 분이 아니잖니. 그 양반은 평생 하던 옷수발을 지속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누가 입는가가 중요한 건 아니셨지.”
할아버지가 6척의 거구이신데 비해, 어머니나 외삼촌은 아담한 사이즈였기에 큰 바지 저고리를 걷고 접어 입는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웃기잖아요. 남자 노인 옷을 세 남매가 입고 있었다는데 실소가 나오더라구요.
“좀 작게 만들어 주시지 않고....”
“사이즈는 항상 할아버지 사이즈로 만드셨어. 입는 건 니들 마음이지만, 제작은 내 마음대로 이셨던 거지. 우리들은 외출복이야 현대식 옷을 사 입으니까, 한복이 필요치 않았지. 요즘으로 치면 가운이나 수면바지 같은 용도로 할아버지 옷을 꺼내 입었던 거야. 세 남매가 입었다지만, 뭐 일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대충 그런 용도로 입었으니 심하게 더러워지지도 낡거나 헤지지도 않았어. 내가 시집 올 때까지 그러구 살았다아아. 하하. 누가 입든 안입든 할머니가 몸져 누우시기 전까지 옷수발은 계속 하셨지.”
할머니가 보통의 어머니였다면 자식들 사이즈에 맞게 혹은 용도에 맞게 만들어 주셨겠지요.
할아버지 사후에도 할머니의 일상은 자신이 세운 원칙하에 월별 계획대로 분주하게 사셨습니다.
정월이 지나면 돌아가신 분의 옷수발을 필두로, 보시할 쌀을 직접 농사 지으셔야 했고, 가을이 되면 종교활동에 전념하셨지요.
옷수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 솔직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대체 코드를 맞출 수 없더군요.
바느질로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없긴 했지만 왜 그렇게 비효율적인 일을 하셨는지.
그러자 제 어머니는
“왜 그러셨는지 여쭤본 적도 대답을 들은 적도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엄마 봐라. 니 아버지 옷장의 양복을 그대로 지니고 있잖니. 왜 그러셨는지 그 속내가 짐작만 간다...”
첫댓글 외할머님이 훌륭한 대보살님이셨네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집안에서는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자식들이 나이가 들고, 세월이 뭔지 알고서 달라지셨지요.
물론 지금도 살짝 원망이 남아계신 어른도 계십니다.
어머니랑 형제분들이 큰 외삼촌한테 학비를 얻어타게 한 것은, 어머니랑은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문"에 보면, 아버지가 학비를 삼촌에게 맡겨두어서 그 학비를 얻어러 다니는 고로쿠와 그의 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