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산문>, 2024년 겨울호
【신작 시】
장승재 시인
맹문재
1
나는 서류마다 호적 나이를
본 나이로 적었다
누군가 나의 나이를 물었을 때도
호적 나이로 대답했다
피곤처럼 내키지 않았지만
본 나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필요를 평면처럼 느끼지 못했다
호적 나이를 본 나이로 부르면서 나는
자유인이 되었다
2
철 만드는 공장에 다닐 때
나를 지치게 하는 일은 대청소였다
환경검열 날짜가 하달되면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야드를 톱밥에 물을 묻혀
기적처럼 쓸었다
기름 묻은 설비들과 쇳가루 쌓인 작업실을
거울처럼 닦았다
밤낮이 없었고
여름 겨울이 없었다
십 분도 안 되는 사장의 시찰을 두려워한 공장의 관리자들은
연신 점검을 나와
나에게 명령했다
나는 허리를 더 굽혀 빗자루를 들었고
걸레질을 했다
작업복을 빨아 다려 입었고
안전 규칙을 외웠고
안전모 쓴 스무 살의 얼굴을 정돈했다
환경검열이 끝나고
할당된 작업량이 미달되면 나는
반성문을 쓰고
잔업을 자원했다 나는
사장에 맞설 용기가 없었다
나는 자유인이 되고자
환경검열 대청소를 정당화했다
3
호적 나이를 호적 나이로 부르지 못하는 나는
작업장의 안전사고를 두려워하고
야간작업에 코피를 쏟으면서
내 이름이 살 수 있는 집터를 찾았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으려고
노조에 가입했다
나를 아끼는 선배가 불러 탈퇴를 권유했다
말을 듣지 않자
선배는 나의 꽃 같은 뺨을 갈겼다
4
나는 얼얼한 얼굴로 「호적 나이」를 썼다
격려해주는 시인이 있었다
우연 같은 「목도장」에도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호적 나이를 호적 나이로 부르려고 한 소란을
용기라고
시인은 목도장을 찍어주었다
【대표 시】
장시
1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출입문 앞에 사마귀 한 마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놀랐지만
출근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쳐갔다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사마귀가
출구를 찾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되돌아가 우산을 펼쳐 넣었다
출구를 나오지 못한 참사가 얼마나 많은가
2
우산살의 틈새로 기어 나온 사마귀는
우산대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앉았다
나는 사마귀가 날아갈까
조심조심 걷고
조심조심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사마귀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반려견처럼
나의 발걸음에 박자를 맞춰 걸어갔다
3
우산을 펼칠 수 없었기에 사마귀는
지하철역 출구에서부터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신호대기를 지키고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와 풀들이 풍성한 공원에 도착했는데
풀잎에 놓인 사마귀는 힘이 빠졌는지
낯선 세상이어서 당황했는지
나와 헤어지기가 섭섭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사마귀에게 마음 상태를 물어보고
작별 인사도 나누고 싶었지만
우산도 쓰지 못한 채 뒤돌아서 뛰었다
4
사마귀가 어쩌다가 지하에 들어갔을까
열차에 부딪히거나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은 것이
기적이지 않은가
발에 흙이 묻을까 봐 나를 업고 다닌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인연은 장시
장시로도 쓸 수 없는 장시
【산문】
나의 시에 목도장을 찍어준 시인
맹문재
10월 18일 금요일 오전 4 : 25
고 장승재님께서 10월 18일 선종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황망한 마음에 일일이 연락드리지 못함을 널리 혜량해주시길 바랍니다.
* 빈소 : 포항 국화원 장례식장 VIP 3호
*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희망대로 644 / 포항시 남구 대잠동 124-3(대잠동)
* 발인 : 2024년 10월 20일 08 : 00
오전 11 : 43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한번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저 죄송합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10월 22일 화요일 오전 7 : 51
저희 아버지 가시는 길에 글과 마음으로 위로해주시고 찾아주신 분들께 한 분 한 분 찾아가 인사드리지 못함에 용서를 청하면서 아버지께서 남기신 글로 대신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만남으로 돌아가는 길
장승재
나에게 오늘 죽음이 온다면
기쁘게 맞이하리라
살아야겠다 발버둥 치는
그들과는 다르게 웃으며
정말 웃으며 맞이하리라
죽음은 돌아가는 것
돌아가는 그곳이
어딘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어머니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돌아간 그곳
아마
우리 모두가 그 옛날 함께 살았던
지극히 좋은 곳이 아닐까
그러기에
다들 돌아간다고 하지
돌아가는 것은 기쁘다
죽음이라는 것
모두들 끝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이곳으로 오게 된
태초의 그곳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미
돌아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이곳에 살게 한 뒤
불러주시는
그분을 만나는 일이다
오후 12 : 49
선생님의 명복을 거듭 빕니다.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선생님께서 큰 힘을 주셨습니다. 혹 서울에 거주하는 자녀분이 있으면 선생님의 작품 등이 궁금하니 한번 뵙고 싶네요.
10월 23일 수요일 오후 2 : 03
아버지 병상에 계실 때 만든 추모 인스타입니다. 큰 누님이 서울에 있으니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10월 24일 목요일 오전 10 : 43
저는 인스타를 하지 않는데 가입했네요. 선생님의 사진을 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오후 2 : 05
감사합니다. 누님이 관리하고 있고, 연락을 드릴 것입니다. 아버지 오래 기억해주십시오.
맹문재 약력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사북 골목에서』 있음.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고산문학상, 김만중문학상, 효봉윤기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