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River’가 흐르는, 텅 빈 새벽 거리. 노란 택시 한대가 보석상 티파니 앞에 섰다. 진주목걸이에 검정 지방시 드레스, 팔꿈치까지 덮는 검정 장갑을 끼고서 할리가 택시에서 내렸다. 선글라스를 코 끝에 걸친 채 진열장을 들여다 보는 할리. 종이봉지에서 빵을 꺼내 우물우물 씹으며 커피를 홀짝이고. 그러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프닝은 제목 그대로였다. “노을빛처럼 침울한 날, 블루스처럼 비가 줄줄 오는 날엔 비참해지고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럴 때마다 티파니에 가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그 고요함과 고고함. 나쁜 일은 없을 것 같아진다.” 할리에게 티파니의 진열장은 무의미한 일상적 관계들을 떠나 꿈으로 도피하는 창구였다.
맨해튼섬을 남북으로 지르는 5번가(Fifth Avenue)는 호사로운 쇼핑가의 대명사다. 미드타운 북단 5번가와 바로 옆 매디슨가엔 세계 일류 브랜드 직영점들이 밀집해있다. 그중에서도 5번가와 57번가 동남쪽 코너에 있는 티파니는 쇼핑 명소를 넘어 세계적 관광지다.
1층에 들어섰다. 높다란 천장, 푹신한 카펫, 너른 공간에 백화점 처럼 정방형 진열대 수십개를 펼쳐 놓았다. 진열대마다 나이 지긋한 정장차림 직원들이 선 채로 손님을 기다린다. 눈요기만 하는 관광객이 많지만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는 게 티파니답다.
티파니에 함께 들른 할리와 폴은 10달러짜리 선물이 있느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늙은 종업원은 “순은제 전화 다이얼 핀이 세금 포함해 6달러 75센트”라고 침착하게 응대했다. 과자상자에 들었던 장난감 반지에 글귀를 새겨달라는 당돌한 요청에도 흔쾌히 응했다.
실재하는 특정 업소를 ‘티파니에서 아침을’ 만큼 미화해 묘사한 영화도 다시 없을 것이다. 기품과 친절을 겸비한 티파니는 ‘귀여운 여인’의 천박한 로데오 드라이브와 격이 달랐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티파니가 세계적 명소로 각광받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문을 닫은 일요일에도 티파니 앞은 기념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들이 사진에 담아 가는 티파니는 할리의 것처럼 허상일 뿐인데도.
티파니가 꿈이라면 할리의 아파트는 현실이었다. 티파니에서 동북쪽 ‘어퍼 이스트’ 복판. 렉싱턴가와 3번가 사이, 71가에 그 3층짜리 아파트도 그대로 남아있다. 계단으로 올라서는 빅토리아풍 현관에 고풍스런 현관 장식이 여전하다.
할리는 이사온 지 1년 넘도록 가구 하나 들이지 않았다. 소음이 싫어 전화기를 옷가방에 넣어두고, 안대까지 한 채 늦잠을 잤다. 고양이 이름도 짓지 않았다. “티파니 같은 느낌의 아파트를 구하면 가구도 사고 고양이 이름도 붙여주겠다.” 그녀는 센트럴 파크 서쪽 ‘어퍼 웨스트’에 있는 고층 아파트의 펜트하우스를 꿈꿨고, ‘어퍼 이스트’는 그 중간역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곳도 못지 않은 고급 주택가다. 침실 한개짜리 아파트 월세가 3000달러.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동네다. 할리 집에서 난장판 파티가 벌어졌을 때 윗층 일본인이 경찰을 부른 게 당연했겠다.
파티 신을 찍으면서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엑스트라 대신 직업 배우들을 동원해 흥겨운 음악을 틀고 샴페인까지 돌려 즉흥 연기를 유도했다. ‘파티 애니멀’들이 좁은 아파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할리가 장죽처럼 생긴 파이프로 할머니 모자에 불을 내자, 폴이 아이스 버본을 부어 끄는 대목은 이 영화의 경쾌한 풍자적 정조를 대표하는 명장면이다.
할리는 ‘마이 페어 레이디’ 일라이자나 ‘귀여운 여인’ 비비언의 중간형 쯤이었다. 배가 고파 텍사스 농장에서 타조 알을 훔치던 14살 소녀가 할리우드 에이전트에게 액센트를 교정받고 불어를 배우고 스크린 테스트를 받는 건 일라이자 같다. “신사라면 숙녀가 레스토랑에서 화장실 갈 때마다 50달러를 준다”며 인간관계에서 돈을 앞세운 건 비비언을 닮았다.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어 택시를 부르고, 라디오처럼 늘 조잘대고, “손이 녹슬지 않게 가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던 할리. 애써 아닌 척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련하고 외로운 영혼. 그녀는 5번가의 화려한 진열장들처럼 ‘진짜 같은 가짜’였다.
(맨해튼(뉴욕)=조선일보 오태진기자 ) 티파니는 1837년 브로드웨이에 개업해 다섯차례 북상하는 이사를 거쳐 1940년 5번가 727번지에 자리 잡았다. 성채 같은 7층 대리석 건물, 아르 데코풍 출입문, 극적으로 작아 마치 금고처럼 보이는 5개 진열장. 바로 옆 68층 트럼프 타워의 그늘도 시대를 초월하는 티파니의 세련미까지 가리지는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