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 문제, 이제 각 교단차원에서 신학적 판단을 해야 한다
“신적 일체에 합일한다”는 신비한 종교적 언어에 속지 말아야
얼마 전 2010년 5월 10일자 ○○가족 소식지를 받았다. 그 소식지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는 김○○ 목사의 설교를 전하는 일을 한다. 소식지에 실린 김○○ 목사의 주일 설교의 제목은 “하나님의 임재연습”(신 6:4-5)이었다.
설교의 요지는, 수십 년간 신앙행활을 해 온 성도들이 은혜 받고 감사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기쁨이 넘친 경험들이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계속적인 연습과 실천이 없기 때문이고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경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거룩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의 임해하심을 향해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의 요리사 로렌스 형제가 남긴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그 형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방법 다섯 항목을 그 예로 들었다. 소식지에 실린 설교 요약문에는 관상기도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설교에 소개된 로렌스의 글은 가톨릭에서 행하는 관상기도의 방법론이다.
김○○ 목사의 설교의 결론은 로렌스 형제가 주장하는 바대로 관상기도의 연습을 통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4-5의 명령대로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그 방법으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기도자의 방법에 따라 임재하시는 분이신가? 아니다. 기도의 방법에 대한 환상을 지워야 한다. 그 방법이 그렇게 중요한 방법이라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지 않으셨을 리가 없다. 주님께서도, 그리고 사도들도 가르치지 않는 기도 방법을 이교에서 가져와 성경말씀의 왜곡된 해석의 틀을 가지고 교묘히 혼합시켜 가르치는 관상기도를 분별없이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국 기독교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에게서 이런 유의 설교를 듣게 되어 무척 실망스러웠다.
아주 단순히 생각해 보자. 로렌스 형제가 주장하는 대로 관상기도라는 하나님 임재연습을 통해 그가 정말로 하나님과 합일하는 기쁨에 이르렀다면 진리의 성령이 그와 함께 한 것일진대,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진리의 성령께서, 가톨릭이 주장하는바 마리아가 하늘의 황후라는 교리는 잘못이며, 마리아는 결코 죄가 없는 자가 아니며, 우리의 중보자도 아니며,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깨닫게 해 주셔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왜 그 형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평생 관상기도하며 가톨릭에 몸을 담고 살았을까? 그렇다면 그가 임재를 체험했다는 그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어떤 부자 신앙인이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관상기도와 거룩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묵상한다고 하나님과의 합일 체험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옆에 가난한 형제는 울고 있는데 내 곳간에 곡식과 재물을 잔뜩 쌓아두고서 촛불을 켜고 청명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마음을 비우고 짧은 기도를 반복하는 기도 연습을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재하실까? 만일 임재 하셨다고 주장한다면 그에게 임재한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진실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관상기도를 했다고 그 배부른 부자 교인이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교인일까? 관상기도로 종교적 배부름을 충만히 느낀 그는 언제나 배부른 부자 교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계시된 말씀으로 주님을 만난 거듭난 부자 교인이라면 관상기도를 하지 않아도 삭개오처럼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천국을 누릴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관상기도를 유행시키는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토마스 머튼이나 리처드 포스터, 로렌스, 헨리 나우웬 등이 주장하는 관상기도에 관한 모든 글들을 잃어본 분별력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들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종교심 가득한 미사여구 속에 드러나는 종교다원주의로의 위험성과 그들의 관상기도의 뿌리가 이교도의 명상에 있음을 충분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유용한 책인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간)를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에 대해 통찰력과 분별력을 얻음과 동시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별과 같은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들여 온 무분별한 영성운동 중 하나인 관상기도 운동이 배교로 가는 길 중의 하나임을 간파할 수 있다.
따라서 본보는 임헌원 목사가 2010년 4월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용천노회 봄 정기노회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해 줄 것”을 헌의한 내용이 관상기도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지면을 할애하여 싣고자 한다.
용천노회는 봄 정기 노회에서 임헌원 목사의 헌의에 대하여 정치적 이유로 일부 반대 목소리도 있었으나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가을 정기총회에 상정키로 했다. 다음은 용천노회에 임 목사가 헌의 올린 내용이다. -크리스천인사이드 편집부-
1. 제목 : “관상기도 관련 영성행위 사용문제 신학적 판단 헌의”
2. 헌의 내용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이교도의 관상적 영성 행위가 기독교 안에 살며시 들어온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관상기도는 성경말씀을 치우고 촛불을 켜고 종을 치며 하나님의 임재지기들의 행사가 진행 되고, 자기최면술과 집단 최면술을 실행한 후, 불교 선승들과 힌두교 명상가들처럼 자세를 취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훼손하는 혼합주의 이며, 성경의 기독론, 신론, 계시론, 속죄론 등에 심각하게 충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뉴에이지와 인본주의, 신비주의입니다. 나아가서 에큐메니즘과 종교다원주의로 유도하는 통로가 되므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단신학의 명쾌한 판단이 요구되어 헌의를 올리는 것입니다.
3. 취지(구체적 사유 등 세부 내역)
1) 헌의 이유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교도의 영성 관상기도(영성기도, 묵상기도,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으로 포장 변형된 용어)가 등장하여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 기독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습니다.
일부 여러 교단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기독교전통의 강가에서 건져 올린 보석이면서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 총회에서는 이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판단하여 주시고 개혁주의 장로교회 정체성에 배치되거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세부 내역
(1) 관상은 이교도의 기도방식으로 기독교형의 탈을 쓴 비성경적 방법
인도의 만트라(주문)식 명상과 일본 불교 선승들의 명상과 단 월드의 단학 선, 통일교, 로마 카톨릭 등이 시도하는 이교도들의 명상 행태를 도입 성경구절의 일부를 대입하여 외마디 소리(예, ‘주여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등)로 반복 중언부언(빈말, 가증한 것, 신명기와 왕상 18장과 마6:5-15 에서 예수님이 금하신 기도)하는 기도로 기독교형의 탈을 쓴 비성경적 방법입니다.
로마 카톨릭과 최근 통일교 문선명의 후계자 문현진(8째 아들)도 관상기도 예배를 하고 있는 실정으로 기독교의 관상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미국에서 배우기를 비슷한 곳에서 배워 왔기 때문으로 추정이 됩니다.
성경에도 없는 관상기도를 로마 카톨릭과 통일교, 단월드 등에서 수행하고, 일부 기독교 목사들이 동일하게 버젓이 또는 은밀히 감추며 관상기도를 하는 데도 기독교계가 잠잠히 구경만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그것이 궁금하다며 의식이 있는 총신, 합신 고신의 신학 교수들과 목사들은 외치고 있습니다.
(2)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이며 자아 최면 행각입니다.
자기 마음과의 대화인 개인최면과 집단최면을 시행합니다.
자아의식을 향한 자아 최면은 소위 도인들(힌두교, 불교, 가톨릭, 통일교 등)이 실행하는 인본주의적 행태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반복 중언부언(약 20분 정도)하던 성경 구절도 중단 시킨 후 마음속을 비움, 버림의 상태에서 이교도식의 무념무상에 사로 잡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곧 직통계시를 사모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임의로 정한 시간 내에 이성적 사고, 감정, 느낌 등을 백지처럼 하얗게 비우고 버린 마음속에서 스스로 생각이 난 것이나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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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결론
결국 관상가들은 관상기도를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라고 둘러대면서 언어적 유희(wordplay, 말장난)를 늘어놓고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계를 미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대한 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을 비롯한 한국의 기독교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왜 위험한 일이고 한국 기독교 교회를 해치는 지름길인지 확연히 드러난 이상, 관상기도에 대하여 사용금지 및 비상경계령을 발효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고 사료되어 헌의 안을 올립니다.
제26호 2010 년 6월14일 월요일
크리스쳔인사이드
첫댓글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겠다는 마귀적인 발상가운데 하나죠.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이 만들고 개발한 종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방법들을 추종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그 노력은 허황된 환상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들통나고 머리가 깨져서 박살이 났지요.
기독교는 하나님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지식들을 박살내고 박멸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가 타종교와 야합하고 혼합하여 이런 류의 마귀적 발상들을 검증없이 수용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내가 육신안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들의 꿈들거림이 내 안에 역사해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종교의 시작이며,
내 안에 곧 내 육신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첩경입니다.
비움 나를 비우는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비움은 정말 조심해야 하고 무섭기도 한일입니다. 내가 비워질때 그 속에 뭐가 들어가냐 누가 영향력을 행사하냐에 따라 사탄에게 대문의 빗장을 열어놔줄수 있는 기회를 주는 꼴이 되기 십상입니다. 대부분의 이단사이비 창시자들이 그 비움의 순간에 사탄이 들어와서 너가 메시야다 너가 구원자다. 내가 너를 보내서 내일을 시키기로 했다라고 유혹하면 그말이 진짜 하나님의 소리라고 착각해서 자기가 메시야 인것처럼 믿게 되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비워짐속에는 단 하나만이 채워져야 합니다.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오직 성경말씀만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 속에 어떤 이상한 속삭임이 있다면 99% 거짓영의 유혹이라고 보면 됩니다. 비워짐속에는 예수님만이 하나님만이 성경말씀만이 채워져야 합니다. 다른것은 모두 거짓이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걸 명심하지 않으면 정말 영혼을 팔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비워놓고 그 속에 진리를 채우지 않고 비움을 위한 비움을 한다면 그건 참된 비움이 아니라 마귀에게 내 영혼을 네 맘대로 잡아먹고 요리하라고 내 맡기는 굉장히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괴상한 기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