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4일 주님의 변모 축일 (연중 18주일) 설교
회복으로의 변화
루가 9:28-36. 2베드 1:16-19
주님께서 변화하신 축일에 우리도 ‘변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변화는 그분의 공생애와 그 정점인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준 표징입니다.
앞으로 닥칠 수많은 고통과 조롱, 채찍질, 상처 등을 앞에 두시고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비록 지금의 현실은 두려움과 고통, 불안의 시간일지 모르나 결국 그분은 거룩한 모습으로 영원히 계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빛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변화’는 곧 ‘본래 모습으로 회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일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체험하는 변화의 상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이미 변화를 체험하였습니다. 이전 삶의 양태와 자세를 모두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고백하고 다짐하며 세례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체험하셨던 그 세례입니다. 그 변화는 처음부터 선한 존재로 태어난 우리가 다시금 그 심성을 되찾도록 일깨워 주는 회복으로의 변화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이미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변화를 체험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래 모습으로 늘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단하고 여유 없는 일상 중에도 자신이 처음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늘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말씀과 찬양 그리고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세례를 경험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상과 프로그램 안에서 늘 새로운 세례를 경험합니다. 세례를 통해 사랑하는 아들임을 드러내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본래의 선한 본성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두 번째 ‘변화’는 이 또한 주님께서 만드시고 경험하신 ‘성찬례’입니다. 감사성찬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룩한 변화’입니다. 거룩하게 변한 주님의 몸과 피로 인해, 우리는 안으로부터 거룩함과 고백으로 변화하는 이 놀라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성찬례 한 구절 한 구절에 담긴 의미를 진심으로 되새기며 따라가다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성찬례는 변화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교회를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40년대는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때였습니다. 미국 남부 지역은 더했지요. 식수대도 따로 사용해야 하던 시기였습니다. 흑인 연인이 성공회 교회에 갔습니다. 놀랍게도 교회 안에는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이었답니다. 그들이 영성체를 위해 줄을 섰을 때 고뇌와 불안함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성체 때 사제는 정성스럽게 그들에게 영성체를 베풀었고(성작에 담긴 보혈을 마신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어떤 차별도 느끼지 못하고 환대를 받습니다. 성찬례 후 그들은 그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답니다. 그 연인이 바로 현재 미국성공회 수좌 주교인 마이클 커리(Michael Curry) 대주교의 부모님이었습니다. 커리 대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찬례는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 강력한 분열마저도 극복하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성찬례는 우리의 완고함과 교만함마저 벗어버리게 하는 거룩한 변화의 표시입니다.
본래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다시금 돌아가게 하는 회복의 힘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감격한 베드로가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간청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내려가십니다. 눈에 보이는 찬란함은 결국 허상이라는 사실을 직접 보여 주십니다.
변화의 세 번째 키워드는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산 위가 아닙니다.
온갖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 사는 지금 여기,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산 아래여야 합니다.
안락하고 만족한 생활과 축복만을 원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힘겨운 세상의 현실로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오늘 말씀 뒤에는 산에서 내려와 보니 어린아이가 악령이 들려 경련을 일으키는데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룩한 변화를 체험했어도 결국 우리가 살 세상은 산 아래 그야말로 악다구니 같은 삶의 현장입니다. 현실 가운데 서 있는 교회가 본래의 모습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셨다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오심, 곧 회복인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잠에서 깨어나 이 광경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은 이 장면을 생생히 보았기에 2 독서에서처럼 담대히 증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보다’의 헬라어 원형은 호라오(ὁράω)라는 단어입니다. 단지 눈앞에 있는 장면을 본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깊이 깨달아 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바라봄’ 즉 놀라운 체험입니다. 전심으로 보았기에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가운데 때론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고 있다면 제자들처럼 결국 거룩한 변화를 보고 체험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았음에도 얼마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고 전합니다. 그 놀라운 충격적인 변화의 사건을 떠벌리고 다녀봐야 귓등으로 알아들었을 거라 직감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너무도 귀한 체험이어서 여전히 그들 안의 신비로 남겨 두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변화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기에는 연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결국 어떻게 변화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개문류하(開門流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고 아래로 흐르라는 것인데요.
바로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례를 통해 변화를 체험한 우리들이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비록 쉽지 않은 삶과 일상이지만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우리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와도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의 변화가 사실은 본래 그분의 모습과 본질로 회복된 것임을 깊이 깨달아 알았기에, 우리도 그리고 우리 교회공동체도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