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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성립
백포(白圃) 서일(徐一)이 대종교(大倧敎) 교도들을 거느리고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이끌어 나갈 청년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활동에 힘쓰고 있을 무렵, 국내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어 국내외 정세가 반전되자 정의의 깃발을 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자는 명분으로 동만(東滿) 왕청현(汪淸縣)에서 정의단(正義團)이 결성되었다.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 사상으로 정신 무장을 갖춘 단원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만주 지역 동포들의 호응으로 정의단의 세력이 확대되어 만주 각지에 5개 분단과 70여 개소의 지단이 설치되었다. 또 일민보(一民報)와 한국보(韓國報)를 통해 무력(武力)을 통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강조하였다. 단세(團勢)가 날로 증강되자 1919년 7월에는 군정회(軍政會)를 조직하고 인재 모집과 군사훈련에 주력하였으며, 10월에는 군정부를 확대하여 무장 단체의 조직을 튼튼히 하였다. 마침내 8월에는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을 영입하고 노령 방면에서 무기를 대량 구입하여 장정들의 실전 훈련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군정부(軍政府) 본영이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 설치되고 서일(徐一), 현천묵(玄天默), 김좌진(金佐鎭), 계화(桂和), 이장녕(李章寧), 이범석(李範奭), 조성환(曹成煥) 등의 중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지시에 따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되었는데 북로군정서 창설 당시의 부서를 보면 아래와 같다.
註;『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제2편
만주(滿州)의 운동 중 동만(東滿)의 운동 제1장 4절 북로군정서' 애국동지위원회 엮음.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大將) 이범석(李範奭)
경리 계화(桂和)
군기 감독 양현(梁玄)
이 때에는 병력이 군사 5백여명, 장총 5백정, 권총 40정, 기관총 3문이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과 경리 계화는 계속 병력 증강에 힘써, 1920년 봄에도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지에서 약 3백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또 이성규(李成奎)를 국내로 보내어, 대한제국 시대의 육군 장교로 유지 유능한 인물 김규식(金奎植), 홍충희(洪忠喜), 김찬수(金燦洙) 및 박형식(朴亨植) 등을 동반하여 오고, 무송현(撫松縣)에서 전 정위(正尉) 김혁(金赫) 및 유우석(柳佑錫) 등도 와서 함께 군무(軍務)에 종사하게 되니 북로군정서의 군세(軍勢)는 흥성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총재 서일은 경리 계화와 함께 직접 나자구(羅子溝)를 경유, 노령으로 가서 체류하면서 백방으로 주선하여 많은 무기를 구입하고 9월에는 전 모연대장(募捐隊長) 최완(崔浣)이 인솔하는 무기운반대와 함께 무기를 운반하여 왕청현의 본영으로 돌아오니, 북로군정서의 군세(軍勢)는 강화, 발전하게 되어 군사 1600여명, 군총 1300여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의 무력(武力)을 갖추게 되었다.
註; 일제(日帝) 비밀문서
『1920년도 고경(高警) 제9336호·9630호 및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일지(司令部日誌)』
[원본에는 '사령부일지(司令部日誌)'로 되었는데, 여기서는 편의상 '북로군정서 사령부일지(北路軍政署司令部日誌)'로 표기한다.]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는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립하고 이장녕(李章寧), 이범석(李範奭), 김규식(金奎植) 등을 교관으로 삼아 사관생도들을 모집, 단기 교육을 실시하였다. 뒤이어 보병 제1대대가 새로 새로 편성되었는데 대대장은 김사직(金思稷)이요, 중대장을 김규식(金奎植), 홍충희(洪忠熹), 김찬수, 오상세(吳祥世)였으며, 소대장 12명은 이교성(李敎性), 허활(許活)과 사관연성소 졸업생 10명으로 하였으며, 다른 직위에 보임된 80여 명 외의 졸업생 2백명으로는 따로이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였는데, 대장에 나중소(羅仲昭), 부관에 최준형(崔峻衡), 중대장에 이범석(李範奭), 소대장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이탁(李鐸), 남익(南益) 등이었다.
註;『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일지(司令部日誌)』1920년 7월 26일·9월 9일·12일조와 상해(上海) 일본 영사관(日本領事館) 경찰부(警察府) 엮음『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司令部)의 이러한 성장, 발전은 북로군정서의 총재 백포(白圃) 서일(徐一), 사령관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등 간부진의 조국 광복의 일념에 불타는 각고 노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또한 민족의 쾌거인 청산리대결전(淸山里大決戰)의 승리를 앞둔 병력의 신장은 그대로 장병들의 사기가 되고 전투력이 되었던 것이다.
2.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주변 정세
만주 방면에서 항일(抗日) 독립군(獨立軍)의 세력이 증강되고 그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일본 측의 경계심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3.1 시위 독립운동 이후 경술병합(庚戌倂合)이 '조선인들의 의사에 따른 병합'이라고 떠들어대던 것이 터무니없는 허위 선전이었던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자 당황하던 일제(日帝) 침략세력은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수행하려는 독립군 여러 부대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서·북간도 지역에서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상승되고, 무력(武力)으로 일제(日帝)의 국경수비대 초소와 경찰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자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였다. 현지 중국 관헌 측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러시아 방면을 통하여 무력(武力)을 증강하고 있는 북간도 방면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 무장 단체의 눈부신 발전은 일제(日帝) 침략세력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이었다. 1920년 5월 경부터 만주 방면에서 독립운동 군사단체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 일제 침략세력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장 적지(赤池)를 봉천성(奉天省), 길림성(吉林省) 지방으로 파견하여 현지에서 일본 영사관 영사 및 길림·봉천성 독군(督軍)의 고문으로 가 있는 재등(齋藤)·정야(町野) 등 관계 수뇌자들과 협의하게 하고,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에게 봉천·길림 각지에서 그들이 말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항일 독립군에 대한 합동 수사를 요구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리하여 봉천성 내에서는 일본인 경찰 간부를 수사 반장으로 하는 중·일 합동 수사반을 편성, 서간도 일대에 대한 검거 행위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간도 방면에 있어서는 길림성장 서정림(徐鼎林)으로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 또 간도 방면에서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지방에서는 큰 소요가 없는 것 같고, 특히 여기에 대한 취체는 이미 규정을 만들어 도윤(道尹) 이하의 관원들로 실시하게 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게 되니 이것은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등 현지 당무자들이 중국 당국자들과 사전 연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재만(在滿) 간부진 및 조선총독부,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 관계자들은 5월 말~6월 초, 봉천과 서울에서 다시 구수회의(鳩首會議)를 갖고 일본군 제19사단 안천(安川) 대대가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에 패배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가 있은지 10일만인 7월 16일에는 일본의 소위 조선군 참모장 대야(大野)·관동군 참모장 대리 귀지(貴志) 등 일련의 군·경·영사관 간부진이 제3차 봉천회담을 갖고 다시 강안(江岸) 일대 접경 지방에서는 중·일 합동 수사를 수시 실시할 것과 필요한 시기에는 일정한 기간에 중국 군대와 협동하는 이름으로 일본 군대로 소탕할 것을 승락할 것, 2개 조항을 제시하니 이것은 곧 일본군의 간도출병 인정을 의미하는 내용인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 측의 이러한 교섭이 중국 측에 그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친 교섭이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 일본 측은 이 제3차 봉천회담과 함께 이미 주도한 ‘간도 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 계획’이라는 것을 작성하여 간도 지방에 병력을 투입할 것을 내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註; 김정주(金正柱) 엮음 『조선통치사 자료』제2권 간도출병사 상 제1장 2절·3절 및 동 간도출병사 하, 부록1 ‘간도 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 계획’ 참조.
한편 북로군정서에서는 무력의 확충과 함께 외교 관계를 통하여 대내·대외적으로 융화 단합을 기하였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각 기관의 혼연 일치한 활동으로 전력의 증강을 기하였는데, 그 중에도 종교 기타 관계로 종래 다소의 알력이 있어 오던 국민회와의 융화를 위하여는 현지에서의 화합을 기도하던 나머지 대표를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어 그 동안의 경위를 보고하고, 무종교인이며 북로군정서와 국민회에 모두 관계 없고 공정 원만한 사람을 파견하여 조정(調整) 화합하게 해 주기를 신청하여 임시정부로부터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이 특파원으로 와서 양측을 원만히 타협하게 하였다.
註;『독립신문』1920년 4월 22일자 및 『북로군정서 사령부일지』1920년 7월분 참조. 또 서간도 방면에서 군사 활동을 하고 있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도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도모하여 격의 없는 교섭으로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는데, 그 중 1920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대표 김좌진(金佐鎭)과 서로군정서 대표 성준용(成駿用)과의 사이에 아래와 같은 조건을 성문화하기도 하였다.
체약문(締約文)
一. 길림·봉천 양성(兩省)에 있는 군정서는 원래 동일 취지의 군사 기관이므로, 양방 대표자의 합의 결과, 업무 진행상 협동 일치하기 위하여 하기의 조약을 체결함.
一. 양 기관은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하며, 만일 비분적 사망(非分的奢望)이나 부도적 야심으로 정부에 반항하는 자 있을 때에는 이를 협력 성토하여 정의에 귀일(歸一)시킬 사.
一. 양 기관의 성신 친목은 물론이요, 군사상 일체의 중요 안건은 상호 협모(協謀)하여 추호라도 저촉 또는 규위(睽違)의 탄(歎)이 없게 할 사.
一. 양 기관의 사관연성·무기 구입에 대하여, 혹 미비의 일은 상호 부조해서 광복 대업의 만전을 완성할 사.
一. 양 기관은 등적(登籍)한 군인이 사사로이 배귀(背歸)하는 자에 대하여, 서로 조회 반환함은 물론이요, 이미 연합한 제3기관이 비밀히 자기에게 사부(私附)시키려 할 때는 서로 증치( 治)하여 후폐(後弊)를 두절할 사.
一. 본 조약은 양 대표 날인 일부터 실효가 있음.
따라서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 두 독립운동 군사단체는 한층 더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취하게 되었으며 이 해 7월, 일제의 소위 강안 지대 수사에 의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오랜 근거지인 유하현(柳河縣)을 떠나 안도현(安圖縣)으로 들어갔을 때에 서로군정서 사령관은 북로군정서 사령관에게 친서를 보내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요망하였으며, 뒤이어 서로군정서의 참모장 김동삼(金東三)은 북로군정서 본서와 사령부에 1주일간이나 체류하면서 선후 대책을 의논하였으며,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李相龍)과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은 인편을 통하여 연락, 대일 합동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註;『북로군정서 사령부일지』8월 25일·31일조 및 이상룡(李相龍) 저술 『석주유고(石洲遣稿)』권 중 ‘답 서백포서(答徐白圃書) 여(與) 서백포서’ 참조 뿐만 아니라 북로군정서는 홍범도(洪範圖)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독립군, 최진동(崔振東)이 총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 와도 항상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서로 호응하였다. 따라서 대한독립군이 봉오동승첩(鳳梧洞勝捷)을 거두고 이동할 때에는 그 일동 일정이 북로군정서 사령부에 연락되였으며 도독부의 장병은 수시로 북로군정서 및 서로군정서 사령부를 견학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평소의 친밀한 협조는 훗날 청산리대결전(淸山里大決戰)에서 3군 협동의 긴밀한 작전을 벌이게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註;『북로군정서 사령부일지』7월분 참조.한편 일본군의 극성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중국의 현지 당국은, 그러한 입장을 설명하며 자주 북로군정서의 양해를 구하여 왔다. 7월 1일에도 왕청현의 신임 제4구 경찰분소장 왕덕린(王德隣)이 북로군정서의 총재·부총재·사령관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군의 장엄한 형세를 찬양하면서 일본 측의 압력 때문에 자국 관헌으로서는 색책(塞責)하기가 어려우니 속히 무장을 해제하든가, 다른 곳으로 군영을 옮기든가 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그들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갑자기 이동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딱한 형편이었다. 여기에 서로 이해가 가니 중국 측에서는 일본 측 요구에 버틸 대로 버티고 북로군정서에서는 중국 측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해 가며 시일을 끌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일본 측은 이미 출병 계획까지 짜놓고 계속 압력을 가하니, 일제(日帝) 침략자의 강대한 무력(武力)을 당해낼 자신이 없는 중국의 동삼성(東三省) 당국자로서는, 한국 독립군 측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본의 아닌 압력을 가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9월부터는 결국 무력에 의하여 우리 독립군을 강제 해산할 태세를 취하였다. 9월 6일에 군영장(軍營長) 맹부덕(孟富德)이 2백여 명의 중국 육군을 거느리고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의 북로군정서 사령부 군영으로 와서 사명(事命)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적의(敵意)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독립군 군영에서도 비상 경계를 하고 동정을 정찰하였지만 결국 서로 이해할만한 입장이기 때문에 사령관·참모장·참모부장 등 군(軍) 수뇌부는 중국군 장병을 나가 맞이하여, 술과 고기로 대접하고 하룻밤을 지내며 서로 사정을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북로군정서는 형편이 되는대로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하고 중국 측에서는 아군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이리하여, 이튿날 중국군은 원만한 교섭을 이루고 돌아갔으며, 그 동안 무기 구입 차 노령 방면에 나가 있던 총재 서일(徐一)·재무부장 계화(桂和)는 조성환(曹成煥)을 동반하여 본영으로 돌아오고 기계국장 양현(梁玄) 및 무기운반대 제1중대장 이교성(李敎性)·제2중대장 이인백(李麟伯)·제3중대장 최완(崔浣) 등이 모두 무기를 운반, 총재 일행의 뒤를 따라 귀영(歸營)하니 오랫동안 현안으로 되어 있던 무기 증강의 일도 완수를 보게 되었다. 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 침입의 정보를 들은 홍범도(洪範圖)·안무(安武) 등 국민회 계열 독립군 부대로부터 함께 장백산(長白山)으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일대 결전을 하자는 서신을 받게 되니, 여기서 북로군정서에서는 이동 준비를 서둘러 하루를 건너 9일에는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필업식)을 거행하고, 12일에는 보병 1개 대대 및 교성대(敎成隊)를 편성한 다음, 20일에 이범석(李範奭)을 단장으로 하는 여행단(旅行團)을 조직, 민족의 영지(靈地) 백두산을 향하여 대부대 이동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註;『북로군정서 사령부일지』7월 1일, 9월 6·7·9·12일조 및 박은식(朴殷植) 저술『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하편 제29장 ‘아의군 4권 4첩의 기공(寄功)’, 이범석(李範奭)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청산리 전역(戰役),『신동아(新東亞)』58호 『동아일보』1920년 9월 16일조 참조.
3.일본군의 간도(間島) 침입
한국 독립군의 무력(武力)과 군세(軍勢)가 날로 증강되고 발전되어 가자, 현지의 일본 영사관 경찰 병력과 소수 병력의 도강(渡江) 작전으로 반일 무장 단체를 토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저들의 소위 제3차 봉천회담이 있은 1920년 7월 중에 이미 소위 ’간도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 계획‘을 작성하고 나남(羅南)에 있는 제19사단 병력은 물론, 러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까지 초모정자(草帽頂子)·토문자(土門子)·삼차구(三岔口)·나자구(羅子溝) 지방으로 돌려 만주방면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 외교상의 문제점도 있는 만큼, 그 정당성을 억지 주장이라도 할 수 있을만한 기회와 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따라서 일제(日帝) 침략세력은 서간도 방면에서의 소위 중국·일본 군경 합동 수사를 진행하여 한국 교민 거주지에서 행패와 만행을 저지르며 북간도 방면에서도 중국 측의 호응을 계속 요구하고 절충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중국 관헌의 태도는 저들의 보는 바에 의하면 중국 측은 여전히 ‘일본 측의 교섭이 엄중하므로 마지 못해 해산을 명하는 것이라’고 하며 애원하듯 한국 독립군에 교섭해서 그 근거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킨 다음, 군대로 토벌한다고 하면서 그 곳으로 가서 형식적으로 저들이 남겨 두고 간 병영(兵營)을 파괴하여 표면을 호도(糊塗)하는 데에 그치니,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취체(取逮)를 그들에게 일임할 수 없는 것은 명확한 일이므로, 군대에 의한 초토(剿討)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註; 김정주 엮음『조선통치사 자료』제2권 간도출병사 상 제1장 출병 전의 정황 제3절·4절 참조.
여기서 저들이 생각해 낸 것이 만주 지방의 명물 마적단(馬賊團)을 이용하는 간교한 계획이었다. 즉 금품을 탐내는 마적단을 매수 이용하여 한국 독립군의 세력을 제거하고, 출병 구실 조작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1920년 6월에 마적 장강호(長江好) 일당이 무송현(撫松縣)에 있는 흥업단원(興業團員) 전성규(全星奎) 등 4인을 길림성 몽강현(濛江縣)으로 유인, 포박하여 3개월간이나 악형 고문하고, 무리하게 수만원의 금전을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한족회원(韓族會員) 3명과 함께 임강현(臨江縣)에서 총살, 유기한 것도 그러한 사실의 일례였던 것이다. 일본측에 이용되는 마적단들 중에서도 장강호 일파는 가장 많이 한국 독립군 및 간도 지방 거류 동포들에게 피해를 준 일당이었다. 일본 측이 소위 출병의 구실로 삼았던 혼춘 사건(琿春事件)이라는 것도 실은 이러한 마적단과 일본 측이 공동 조작한 계획적인 소행이었다는 것이 당시의 세평이었다. 즉 혼춘현성(琿春縣城)은 두 차례에 걸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았다. 제1차 공격은 1920년 9월 12일이었는데 이날은 3백여명의 마적단이 새벽녘에 동문으로 쳐들어와서 총기(銃器)를 난사하며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많은 물화를 마차에 싣고 달아났는데, 특히 한국 동포의 사상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한국 동포가 30여 명이나 살상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는 이 사건을 한국인 무장 단체(과격파)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포되었던 사실이다. 註; 김정주 엮음『조선통치사 자료』2권 동상 제6절 ‘2회에 걸친 마적의 혼춘 습격’조 및『동아일보』1920년 9월 15일·17일조 참조.
그 후에도 마적단의 재습설(再襲說)이 떠돌아 한국 동포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성 밖으로 피난하던 중 10월 2일 새벽에는 다시 4백여 명의 마적떼가 야포(夜砲)로 공격을 가하며 쳐들어 오니 당황한 중국군은 일본 측에 구원을 청하였으며, 일본 측에서는 영사관 경찰대 등 약 5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군과 함께 방어전(防禦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일 양군이 양쪽으로 나누어 성문을 방어하던 중, 일본군이 방어를 담당하였던 성문이 손쉽게 열리며 마적떼는 물밀듯 들어가 성내를 약 4시간 노략질하게 되었는데, 이 통에 중국 군인 60명과 한국 민간인 7명이 살해되었으며 일본 영사관도 피습, 일본인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런데 이 제2차 혼춘 피습은 당시 북경 통신의 보도 등을 통하여 ‘일본 측이 시킨 마적떼의 소행인데, 이와 동시에 다른 마적떼가 함께 침입하여 일본인까지 살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본 측의 주장은 이와 반대로 전번 침입 때와 유사하게 한국인 무장병력 1백명과 소수의 러시아인, 중국 관병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여 사실을 독립군 토벌에 결부시키려고 조작 선전하였다. 그리고 혼춘을 습격한 마적단이 일본 측과 관계가 있든 독립군과 관계가 있든 그 사실을 밝히기 전에 ‘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라는 구실로, 미리부터 예정하였던 소위 간도출병 계획을 곧 실현에 옮겼다.
註; 박은식(朴殷値) 저술『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하권 제28장 및 애국동지원호회 엮음『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제2편 만주의 운동 중 혼춘사건조 및 김정주 엮음『조선통치사 자료』2권 동 상조 참조.
이런 사태를 예측하고 있던 일본 측 조선 주둔군 사령부의 사령관 대정(大庭)과 참모장 평송(平松)은 이미 국경지인 나남(羅南)·회령(會寧) 등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터이라 10월 2일 그날로 대정(大庭)은 경원(慶源)에 있는 수비대와 헌병대 장병을 혼춘으로 파견하고 온성(穩城)에 주재하고 있던 안부(安部) 대대의 병력을 훈융(訓戎)에서 대기하게 하고 이튿날 3일에는 안부 대대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사수 1개 소대가 대대장 안부(安部) 소좌의 인솔로 혼춘에 들어가고, 조선군 참모장 평송이 혼춘으로 가서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4일에는 회령에서 보병 2개 중대, 공병 1개 중대와 보병 제76연대의 보병 1개 대대·기병·포병 각 1개 중대가 회령을 통과, 혼춘으로 가게 되며 5일·6일에는 보병 4개 중대가 다시 용정(龍井) 지방으로 급행하는 등 제19사단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많은 병력이 북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 방면으로 들이닥쳤다. 여기서 다시 시베리아 방면 출동 중의 병력과 요동 방면에 출동 중이던 소위 관동군(關東軍)의 병력까지 가담하여 만주를 동·서·남 3방면으로 포위 점령하는 태세를 취하니 만주 일대는 일제(日帝) 침략세력의 군대에 의하여 완전 유린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註; 김정주 엮음『조선통치사 자료』2권 간도출병사 상 1장 7절 ‘혼춘 및 간도에 긴급 출병’ 참조.
그렇다면 이들 일본군의 만주 침입 목적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10월 11일 소위 한국군 사령관이 이들 일본군 파견 부대의 주력인 제19사단 사단장에게 내린 아래와 같은 작전명령 제3호 훈령의 내용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① 군(軍)은 혼춘 및 간도 지방에 있는 제국신민(帝國臣民)을 보호하고 아울러 그 지방에서의 불령선인(不逞鮮人) 및 거기에 가담한 마적 기타 세력을 초토(剿討)하려 한다.
② 포조(浦潮) 파견군은 당 군의 행동에 책응하기 위하여 보병 2·3중대의 1부대를 해림(海林)에서 합막당(蛤蟆塘) 부근에, 보병 약 1대대·기병 악 1연대·저격포(狙擊砲) 산포(山砲) 각 2문·공병 1소대로 된 1부대를 삼차구(三岔口)에서 수분대전(綏芬大甸) 부근에, 또 보병 약 1대대, 기병·포병 약간으로 된 1부대를 토문자(土門子)부근에 진출시키며, 또 동지(東支) 철도 동선(東線) 및 남부 오소리(烏蘇里) 지방의 수비를 엄하게 함과 함께, 삼차구 방면의 부대와 연락하여 기의(機宜)의 처치 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
③ 제14사단의 보병 제28여단은 본월 하순 보세트(voset)에 상륙 후, 본인의 지휘하에서 혼춘·간도 지방에서의 불령선인에 대한 시위 목적으로 혼춘·양수천자(凉水泉子)·국자가(局子街) 부근을 경유, 회령(會寧)을 향하여 행동한다.
④ 귀관은 그 예하 보병 약 6대대를 기간으로 하는 연합부대로 대개 초토 계획에 준하여 혼춘·왕청(汪淸)·연길(延吉)·화룡(和龍) 제현에 걸쳐 적을 수색 초토한다. 적의 안도(安圖)·돈화(敦化) 지방 도찬(逃竄)을 고려하여, 그 기도를 좌절하기에 노력한다. 또 본 초토의 여세가 도문강(圖們江)과 압록강 상류 지방 및 수비관구 내에 파급하는 일이 있을 것을 고려, 필요한 처치를 한다. 산포 및 비행기를 증가한다.
⑤ 귀관은 행동 개시 기일을 예보한다. 단, 준비 완료에 앞서, 정황에 의하여 토벌을 요할 때에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실행 한다. 註; 김정주 엮음『전개서(戰開書)』제2장 제3절 ‘작전명령의 수령과 군 명령의 하달’.이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의 표면의 목적은 제1항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적에 의하여 습격당한 혼춘 및 간도 지방에 있는 일본 관민의 보호와 함께, 그 지방의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한국 독립군과 거기에 가담하는 마적 등의 토벌·소멸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적에 의하여 혼춘현성(琿春縣城)이 습격당하였으며, 그 마적은 일본 측의 조종에 의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세평이었던 데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불령선인 및 거기에 가담하는 마적 기타 세력을 초토하려 한다.’고 하여 마적이 아닌 한국 독립군의 제거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더구나 일본군의 사주를 받아 독립군을 공격, 방해하던 것이 당시의 마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에 가담하는 마적을 초토(剿討)한다고 늘어 놓은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객설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혼춘 사건을 구실로 대거 만주 지역으로 침입한 일본군의 주목적은 그들이 이미 전부터 계획하여 오던 만주 지방의 한국 독립군, 그 중에도 북간도 지방에서 날로 증대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및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1920년 6월 大韓獨立軍, 軍務都督府, 大韓國民會, 大韓新民團 등 4개 무장 단체가 통합 편성되어 鳳梧洞戰鬪에서 전과를 올린 抗日聯合軍)를 위시한 독립운동 군사단체 세력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간도 침입 일본군 주력부대인 19사단의 임무가 앞에서 지목한 바와 같이, ‘혼춘·왕청·연길·화룡 제현에 걸쳐 적을 수색 초토한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은 이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일이었다. 또 일본군의 행동 개시와 때를 같이하여 중·일 간에 재체결된 소위 ‘일·중 협동 토벌에 관한 협정 사항’중에서 제2항으로 혼춘·연길·왕청·화룡 4현 및 동지(東支) 철도 이남 20리 이외의 동녕현(東寧縣) 지구에서의 독립군 및 마적 토벌은 일본 군대가 맡기로 하였던 것도 마찬가지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로 이 방면의 전투 임무를 담당하였던 일본의 제19사단 소속 부대의 편제 관계를 보면 아래와 같았다.
육군 소장(少將) 기림직명(磯林直明) 지대(支隊) 병력
보병 제38여단 사령부, 보병 제75연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 기병 제27연대 제3중대, 야포병 제25연대 제2대대, 공병 제19대대 제2중대, 헌병 약간
육군 보병대좌(步兵大佐) 목촌익삼(木村益三) 지대 병력
보병 제76연대, 기병 제27연대 제2중대의 1소대, 산포병(山砲兵)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의 1개 소대, 헌병 약간
육군 소장 동정언(東正彦) 지대 병력
보병 제37여단 사령부, 보병 제73연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헌병 약간
사단 직할 부대 병력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주 제3중대, 비행기반, 무선 전신반, 구(鳩) 통신반
註; 김정주 엮음『조선통치사 자료』제2권 제2장 제5절 ‘제19사단의 초토(剿討) 행동’.
4.독립군의 전투 태세
북간도의 여러 독립운동 군사단체는 아군 병력의 10배나 넘는 일제(日帝)의 대군이 가장 예리한 근대식 무기에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압박 작전을 펼치자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일찍이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제정 러시아와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철쇄로부터 해방되어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원조 아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트리아에 참전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으로 조직된 2개 군단은 동유럽 전선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서부에 이르러 연합군과 손을 잡고 싸워서 개선 귀국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러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였다.서쪽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난날 그들 자신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철쇄 밑에 피지배 약소 민족으로 구박을 받은 노예 생활을 회상하여 한국 반일항쟁(反日抗爭) 진영에 동정심을 보여 주었다. 마침내 그들은 무기고에 저장하였던 총기(銃器)와 실탄(實彈) 일부를 싼 값으로 독립군에게 팔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당할만한 양이 부족하여서 일변 백군(白軍) 러시아인에게서 무기를 입수하는 길을 취하게 되었다. 당시 무기운반에 직접 참가하여 생생한 체험을 했던 이우석(李雨錫)은 1920년 6월 어느날 북로군정서 수뇌부로부터 러시아로 가서 무기를 운반해 오라는 사명을 받고 무장한 경비대에 편입되었는데, 지방에서 선발해 온 2백여명은 도수(徒手)로 가는 터이라 이들의 자체 보호를 위하여 30여 명의 무장 경비대가 수행하는 것인데, 험한 산길을 통하여 하루 길을 가서 혼춘 지방 민가에서 하룻 밤을 지새고 그 다음날 국경을 넘어 30여 리 쯤 가서 30여 호의 동포 부락에 다다르니 아군 무기운반대 일행을 집집에 나누어 배치케 하고 통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70리 되는 해안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내해인데 뱃편으로 운반해 오는 무기를 넘겨받아 가지고 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2~3일 내로 무기가 입수될 예정이었는데 뜻밖에 지장이 생긴 것은 제정 러시아가 망하고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정부가 탄생되어 구제도가 개혁되는 과정에서 자연히 화폐개혁(貨幣改革)이 실시되매, 구 지폐를 마련하였던 한국 독립군 측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 대금을 마련해서 공행(空行)이 되지 않도록 한다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그런데, 주민들은 식량이 다 떨어진 초여름이라 무기운반대 일행 2백여명에 제공할 양식은 커녕 기아(飢餓)의 사선에서 허덕이는 형편이었다. 일본군의 병참이 불과 30리 거리에 있고 후방은 마적단의 소굴로 불과 20리 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산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무기운반대 일행은 한달여 간이나 갖은 고초를 겪다가 백군 계열 러시아인에게서 무기를 구입하도록 교섭이 이루어졌다. 무명(無名)의 사(事)를 일으켜 대군을 시베리아에 상륙시킨 일제(日帝)는 백군 계열 러시아인을 원조하여 혁명군에 대항하게 하였으나 백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결국 부패할대로 부패해져서 일본군에 원조를 받고 많은 무기를 팔아먹고 있었다. 한국 독립군은 이것을 입수하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무기를 샀다는 통지를 받은 이우석(李雨錫)을 선두로 한 무기운반대는 야음을 이용해서 중간에 있는 일본군 병참소를 피하기 위해 산길로 행군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내해면에서 무기를 받아 가지고 돌아올 때에 밤에만 행진하고 낮에는 산중에서 은신하였다가 다시 밤이 되면 행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2백여 명의 일행이 총기(銃器)를 메고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국경을 넘어 혼춘 땅에 도착하여 운반대가 겨우 긴장을 풀 정도로 고난의 역정이었다. 이들 무기운반대가 무사히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 본영에 귀환하게 되니,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게서 구입한 무기와 러시아 백군(白軍)에게서 입수한 무기를 통해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 생도들은 무장을 강화하게 되었고, 항일투쟁(抗日鬪爭)에 대한 의지는 하늘을 찌를듯 치솟게 되었다.일본군이 1920년 10월 2일의 혼춘 사건(琿春事件)을 구실로 간도 방면에 대거 침입, 독립운동 군사단체 진영에 대한 선제공격을 단행하자 그 동안 3.1 시위 독립운동을 계기로 이역 만리에서 항일전(抗日戰)을 준비하면서 무력적(武力的) 기반을 조성해 오던 독립군 입장에서는 큰 위기가 닥 쳐 오게 되었다. 사실 일본 측이 훈춘 사건을 빙자해 간도 방면 독립군에 대한 초토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에 한국 독립군 진영에서는 미리 대책을 강구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서간도 방면의 독립군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7월 중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안도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으로 본거지를 옮겼으며,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승전(勝戰)하였던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國民會) 및 신민단(新民團), 의군부(義軍府) 등의 독립군과 힘을 합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결성하고 백두산을 향하여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무렵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가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대감자(大坎子)를 거쳐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로 향한 것은 9월 하순경의 일인데, 이 동안에 혼춘 사건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전격적인 간도 침입이 있었다. 일은 크게 터진 것이었다.이런 상황에서 1800여명의 인원과 180여대의 수송차량으로 야음과 산길을 이용하여 완만한 이동행진을 하던 북로군정서는 4백여리를 강행군하여 10월 16일에 화룡현 삼도구로 들어갔으며, 이때 이미 출동하여 행동을 개시하는 일본군의 동태를 주시하던 대한독립군, 도독부, 국민회 등의 다른 독립군 부대도 뒤를 따라 도착하게 되니, 여기서 청산리대결전(淸山里大決戰)을 앞두고 각 독립군 지휘관들 간에 합동 작전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註; 박은식(朴殷値) 저술『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하편 제29장 및 이범석 저술『우둥불』제2장 ‘청산리의 혈전’ 2, 12항 참조.
이 회의에서 한국 독립군 수뇌부는 청산리 일대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면서 연합군을 3개 연대로 편성, 적군의 추격을 물리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 제1연대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며 6개 중대 병력으로 완루구(完褸溝) 중앙 산록에 매복하였으며, 제2연대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인솔하에 2개 대대 병력으로 이도구(二道溝) 좌편 고지에 매복하였고, 제3연대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이 6개 중대 병력을 통솔하여 동(同) 우편 고지에 배치되었다. 註; 1921년 1월 15일자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총재 서일(徐一)의 임시정부 대본영 보고서.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위치한 청산리(靑山里) 일대는 한국인 교민들이 많이 살던 용정촌(龍井村)에서 서쪽으로 1백여 리 떨어진 곳인데 주위가 모두 첩첩 청산이므로 처음 들어간 한국인들에 의하여 청산리(靑山里)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한다. 부근의 큰 마을로는, 약 2백호의 큰 중국인 마을 충신장(忠信場)이 있으며, 충신장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대랍자(大磖子)로 부르는 마을이 있고 대랍자에서 다시 서쪽으로 15리쯤 들어가면 이름만 들어도 산간 지대를 연상케 하는 백운평(白雲坪)이 있는데, 대랍자와 백운평 두 마을이 있는 부근 일대를 청산리로 통칭하는 것이다. 이 대랍자와 백운평 마을에는 모두 경술병합(庚戌竝合) 후 살 곳을 찾아 들어간 한인(韓人) 동포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충신장에서 백운평에 이르는 장장 60리의 심수(深遂)한 계곡은, 먼저 차지하여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가장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그리고 백운평에서 다시 서쪽으로 들어가면 안도현(安圖縣) 경내에 이르게 되고 곧 백두산 영봉을 마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니, 강대한 적군을 맞아 어려운 싸움을 치뤄야 하는 한국 독립군에게는 천부(天賦)의 요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註; 홍상표(洪相杓) 저술『간도 독립운동 소사』10, ‘일본군의 간도 토벌 출동’ 참조.
5.백운평교전(白雲坪交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를 위시한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의 이동상황은 간도 일대에 침입한 일본군에게도 즉각 알려졌으며, 이 동안 10월 13일에는 일본군 보병 제73연대의 일부 병력이 북로군정서 행렬의 뒤를 따라 삼도구 부근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독립군 측의 합동 작전회의가 있기 전인 10월 18일에는 북로군정서가 청산리 동구를 향하여 행진하는 중에 광야 반대편에서 적군의 대열이 충신장(忠信場)으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었으며 송림평(松林坪)에 들어가서는 보병·기병·포병·공병 등 합동병력 약 1개 여단의 병력이 충신장에 주둔하고 아군의 정황을 조사하고 있으며 그 전초부대는 충신장에서 7리 거리인 맹가장(孟哥莊) 부근에 포진 경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니 양군의 전기(戰機)는 이미 무르익은 것이었다.
註; 김정주(金正往) 엮은『조선통치사 자료』제2권 간도출병사 상 1장 7절 ‘혼춘 및 간도 지방 긴급 출병’ 조 및 이범석(李範奭) 저술『우등불』제2장 ‘청산리의 혈전’ 2·3항 참조.
따라서 10월 19일, 합동 군사회의가 있은 다음 북로군정서는 1만 이상으로 추산되는 우세한 적군 병력을 맞아 싸우는 데에는 송림평의 넓은 평지보다도 심산유곡(幽谷) 중으로의 유도 공격이 유리하다는 견지에서 그날 밤 행군하여 이튿날 아침 백운평(白雲坪)에 이르렀다. 이 때 아군 후위(後衛)부에는 벌써 기다렸다는 듯이 적군 기마대의 정찰병이 나타나고,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나갔던 척후대의 보고에 의하면 이도구의 적군 부대가 봉미구(鳳尾溝)를 우회하고 있으며, 무산(茂山)에서 강을 건넌 한 부대도 개가장(蓋家莊)을 향하여 전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군이 삼도구 일대를 삼면으로 포위 공격할 계획을 진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독립군 병사들은 다시 산곡 중 양쪽에 절벽이 깎아지르고 중앙에는 공지가 있는 곳으로 로 들어가서 공지를 내려다 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임전 태세를 정비하였다. 비교적 훈련이 적은 보병의 일부와 비전투원으로 제1지대를 편성하여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지휘로 후방에 있게 하고,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기간으로 하고 박격포·기관총수를 포함한 정병 부대는 제2지대를 편성,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의 지휘로 제1선을 맡게 하였다. 우측 산허리의 1개 중대는 이민화(李敏華), 좌측은 한건원(韓建源), 정면에는 김훈(金勳)이 우중대를, 이교성(李敎成)이 좌중대를 지휘하며, 이범석은 중앙을 맡아 포진하고 밤을 새웠다.
음력으로 9월 9일인 10월 20일, 북만(北滿)의 밤 공기는 살을 에이는 듯 차가왔다. 병사들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굶주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수의 적과 대전한다는 분노와 용기로 추위도 굶주림도 잊고 장병이 모두 긴장하여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드디어 밝아 10월 21일 아침 8시 경, 적 일본군의 선봉부대는 독립군이 행진하여 온 그 길을 따라 독립군이 유진, 대기하고 있는 지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천(安川)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선봉부대는 무모하게도 양쪽 절벽 안 공지로 진입하였고, 수림 속에 은신,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 6백여명은 일제히 각종 개인화기(個人火器)를 발사하여 기습공격을 시작하였다. 근거리까지 들어왔던 적군은 갑작스러운 독립군의 총격에 이미 대열이 흐트러지고 아군이 잠복한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제대로 응전(應戰)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리하여 교전 30분만에 적군 선봉부대 2백여명은 완전히 섬멸되고 말았다.
註;간도(間島) 일본 영사관 경찰부(警察府) 엮음『조선연감(朝鮮年鑑)』1920년 10월 20일자 참조.
한 시간 후에 선발대가 무너졌다는 급보를 접한 동지대(東支隊)의 주력부대가 모두 백운평으로 몰려들었다. 적군은 적은 밀집 횡대(密集橫隊)로 제대(梯隊) 돌격태세를 취하며 기관총 등 각종 개인화기(個人火器)를 난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조준은 정확하지 못했고, 위장 엄페물을 이용하는 독립군의 사격은 백발백중(百發百中)이니 무모한 작전이 허다한 생명만을 희생할 뿐이었다. 사상자가 늘어나자 적군은 일시 퇴각했다가 다시 대열을 정돈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 공격해왔다. 전세를 살피고 작전을 지휘하던 총사령관 김좌진은 봉미구(鳳尾溝) 방면으로 돌아오는 적군이 약 1시간 후면 도착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전군에 즉각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또 제2지대는 원 진지에서 교전을 계속하고 제1지대의 퇴각을 엄호한 후에 철수하도록 했다. 이것은 일본군이 병력의 수효면에서 여전히 독립군보다 우세하므로 일본군의 포위 태세가 독립군의 퇴로(退路)를 차단하기 전에 먼저 이동하자는 생각이었다.
註; 이범석(李範奭) 저술『우등불』동상 5항 ‘백운평 전투’ 참조.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제1지대가 제2지대의 엄호를 받으며 먼저 철수하고, 제2지대도 한건원(韓建源) 중대의 엄호를 받으며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철수하였다. 얼마 후 한건원 중대도 교묘하게 적의 시야를 벗어나 철수하여 예정지인 갑산촌으로 가서 모였다. 제2지대가 백운평에서 1백 60리나 되는 연길현(延吉縣 ) 이도구(二道溝) 갑산촌에 도착한 것은 총사령관 명령보다 30분 늦은 이튿날 새벽 2시 반 경이였다.그런데 독립군을 전면에서 추격하던 일본군과 후면에서 협공하여 들어가던 일본군이 독립군의 철수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자군(自軍)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군끼리 벌어진 자상잔멸전(自相殘滅戰)에서 무려 6백여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니 이야말로 적악(積惡)에서 이루어진 자취지화(自取之禍)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백운평교전(白雲坪交戰)에서 일본군은 1천여명 이상이 전사했으나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20명, 부상자 13명에 불과하였다.
註; 박은식(朴殷植) 저술『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하편 제29장·이범석 저술『우등불』동상조 및『독립신문』1921년 3월 1일자 참조.
6.천수평교전(泉水坪交戰)과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
백운평교전(白雲坪交戰)에서 적군의 공격을 물리친 독립군이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하여 거주 교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쉬는 동안,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는 부락민들로부터 적정(敵情)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어제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갑산촌을 지나 30리 떨어져 있는 천수평(泉水坪)에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부근 다른 곳에도 머물고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을 위시하여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첫번째 교전의 승리와 철수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적군의 기마부대를 선제 공격하기로 하였다. 22일 새벽 4시경에 제2지대를 선두로 한 북로군정서 장병들은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1시간 후에 천수평에 도착하였다. 중대장 도전(島田)을 비롯한 일본군 기병중대가 토성 안에 말을 매고 인가에 들어가 잠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독립군은 김훈(金勳) 중대가 동쪽의 만록구(萬鹿溝)고지를 점령하여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민화(李敏華) 중대가 남쪽 고지에 매복하면서 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이 한건원(韓建源), 이교성(李敎成) 중대를 지휘하여 천수평 정면을 공격하기로 하였다.독립군이 말을 매어 둔 곳에 집중사격을 가하자, 새벽 산 마을의 정적을 깨치는 난데없는 총성(銃聲)에 놀란 일본군은 잠을 깨어 뛰쳐 나와 허둥지둥 말을 찾고 응전(應戰)하려 했지만 군마(軍馬)가 독립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달아나니,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 사격으로 일본군 기마병 120여명은 모두 총상(銃傷)을 입어 전사하고 말았다. 북로군정서의 중대장 김훈(金勳)이 사살된 적군 기병중대장 도전(島田)의 시신(屍身)을 수색하여 찾아낸 정보문서를 통해 적군의 사령부가 천수평에서 25리 거리의 어랑촌(漁郎村)에 있음을 알게 된 독립군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최인걸(崔麟杰)이 지휘하는 기관총부대 및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졸업생으로 구성된 2개 중대 병력으로 나가 어랑촌의 서남단 고지를 점령하고 적군과의 전면전(全面戰)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註; 이범석 저술『우둥불』제2장 7항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김훈(金勳) ‘북로 아군 실전기’ 2 (『독립신문』1921년 3월 12일자) 참조.
당시 어랑촌에는 보병 2개 대대·기병 1개 중대·포병 1개 중대 등의 적군 정예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천수평(泉水坪)에서 기병중대가 전멸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진에서도 역시 고지점령을 꾀하였기 때문에 독립군이 천수평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벌써 어랑촌 방면에서 포성(砲聲)이 들려왔다. 그러나 아침 9시경에 이미 8백여 개의 고지 남록(南麓)을 점령한 독립군이 기관총(機關銃)과 박격포(迫擊砲)를 발사하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일본군은 처음부터 고전(苦戰)하기 시작하였다. 산허리로 기어오르던 적군은 독립군의 기관총 사격 앞에서 쓰러지고 굴러 떨어졌다.그런데 일본군은 많은 병력 수를 믿고 여러 곳으로 아군 진지를 향해 공격해 왔는데, 혹은 천수평 서북방의 고지를 따라 아군의 우측을 위협하려 하고, 혹은 어랑촌 후방 산상으로 올라가서 아군을 견제하려 하면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적군의 정면공격과 우회공격을 동시에 맞게 된 독립군은 병력의 열세를 절감하면서 작전상 작전상 노두구(老頭溝) 방면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김훈(金勳)과 한건원(韓建源)이 지휘하는 2개 중대를 후위(後衛)에 배치시켜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하면서 작전상 후퇴를 개시하였다. 중대장 김훈(金勳) 이하 장병들의 생사를 초월한 전투는 실로 용감무쌍하였다. 기관총 중대를 이끌던 최인걸(崔麟杰)은 사수가 전사하자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묶어놓고 처절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기도 하였다. 산 모퉁이를 사수하던 1개 소대 40명이 전원 전사하는 일도 생겼다. 이러는 동안 아침 9시부터 시작된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는 날이 어두워져서 끝이 났는데, 일본군 측은 연대장 가납(加納) 이하 장병 1천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독립군 측도 1백여명이 전사하고 90여명이 부상당하는 타격을 받았으니 6일간 벌어졌던 청산리대결전(淸山里大決戰)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격전이라 할 수 있었다.
註; 이범석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청산리전역’ 및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청(警務靑) 비밀문서 40호 ‘군대 출동 후 간도 불령선인(不逞鮮人) 단체 상황’(국회도서관 소장 마이크로 필림) 중 제1 군사행동의 개요 참조.
한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천수평교전(泉水坪交戰) 및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를 치르며 용전분투(勇戰奮鬪)하고 있을 무렵, 이보다 앞서 합동 작전 부서를 정하고 완루구(完樓溝) 방면에 배치되었던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 제1연대장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및 제3연대장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都督府) 부대도 북로군정서에 호응하여 완루구, 봉밀구(鳳蜜溝) 등지에서 밀려드는 적군과 혼전(混戰)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독립군은 의군부(義軍府)의 일부 병력과 합세하여 적군을 삼림 깊숙이 유인, 매복했던 기관총중대로 습격, 섬멸하는 작전으로 전과를 올렸다.
註; 일제(日帝) 비밀문서 1920년 11월 25일자 고경(高警) 제37231호 중 간도특파원 안정근(安定根) 보고서 및 조선총독부 경무청 40호 비밀문서 중 제2 각 불령(不逞)단체의 정세 (2) ‘홍범도 부대의 행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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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0월 22일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가 있던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 동북 산중에서 독립군 소부대와 일본군 목촌지대(木村支隊) 일부 병력 사이에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고 이보다 앞선 19일에는 봉밀구(蜂蜜溝) 서남쪽 산곡 중에서 약 40명의 독립군과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일부 병력 간의 충돌이 있기도 하였다. 또 10월 24일과 25일에는 독립군 부대가 적군의 천보산(天寶山) 부근 수비대를 공격하여 동지대(東支隊)의 1개 보병중대가 국자가(局子街)에서 급파되기도 하였다.
註; 조선총독부 경무청 40호 비밀문서 중 제1 ‘군사행동의 개요’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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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0월 22일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에서 적군의 대규모 돌격을 저지시킨 북로군정서는 그날밤 만록구(萬鹿溝)로 나와 삼림 중에서 노영하고 이튿날 아침 북쪽으로 행군하였는데, 도중 곳곳에서 적군과의 부분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즉 23일 하오에는 일부 병력이 맹개골 삼림 중을 통과하는 중, 적군 기병 30명을 산곡 중에서 발견하고 일제 사격하여 적군을 궤산(潰散)시켰으며, 다시 20리를 가서 만기구(萬麒溝)에서는 적군 보병 50명의 한 중대를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여 그 중 30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다시 쉬구(溝)로 향하는 도중, 삼림 중에서 6문의 대포를 가진 포병부대와 보병 1백여 명의 적군이 독립군 앞을 향하고 올라오는 것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포병부대를 섬멸하니 보병부대는 흩어져 퇴각하였으며 또 부근 삼림 중으로 올라오던 1개 소대의 적군 기병과도 충돌이 있었다.북로군정서를 위시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우세한 적군을 맞이하여 싸우는 중에는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곤란이 막심하였다. 산중에 교통은 불편하고 거주민은 많지 않으며 더구나 전투가 밤낮으로 계속되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었다. 그 중에도 북로군정서는 3일간 계속 되는 격전에 기한과 피로가 격심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있으면 칼로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혹은 솔잎을 따 먹어 허기를 줄이며, 심지어는 배낭 속에 든 황초를 나누어 먹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 당시 장병들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註; 김훈 ‘북로 아군 실전기’ (2) 참조.
따라서 북로군정서가 3일간의 격전을 치르고 날 무렵에는 북로군정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독립군 부대들도 모두 우선 우세한 적군의 모위망을 피해 가며 시기를 보아 재거(再擧)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계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력부대는 적의 예봉(銳鋒)을 피하여 산림 중으로 행군, 10월 26, 7일 경에 안도현(安圖縣) 경계 황구령촌(黃口岺村)으로 나왔으며, 이를 전후하여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및 지청천(池靑天)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부대도 황구령촌으로 나왔다.
註; 조선총독부 경무청 비밀문서 중 40호 제2 ‘불령선인단체의 정세’ 참조. 그리고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가 여기저기서 소규모 전투를 벌이면서 적군의 발악적인 공세를 피하여 점차 이동, 통합을 꾀하게 되었다.
출처: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자료집 제7장
신흥 무관학교 최후의 1인 - 추산 권기일 (權奇鎰 1886~1920 본명 혁린) 34세 사망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끝까지 신흥무관학교를 사수한 최후의 1인 권기일>
홀로 옥수수밭에 포위되어 일본군의 총검에 20차례나 난자 당해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안동 권씨....추산의 가문은 두 차례나 일본과 싸움을 벌인 역사가 있는 집안이다. 추산의 15대조로 이조판서,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권전은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해전 때마다 선봉장으로 나가 싸우다 이순신에 앞서 순국한 인물이다... |
1911년 새해가 시작되자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전국에서 만주로 건너가기 위한 도만 행렬이 이어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을 필두로 김동삼,김대락 등도 가산을 정리하고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만 25세인 추산 권기일도 젊은 나이에 주저 없이 이 도만 행렬에 동참했다.
소달구지에 살림살이를 싣고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선 추산은 할아버지의 초가를 찾아
큰절을 하고 울면서 기필코 나라를 되찾겠노라 하고 길을 나섰지만 다시 돌아오겠다는 기약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키운 집안의 주손인 손자를 이국만리 땅으로 보내야 했던 조부 권헌봉은 추산이 떠난 후 식음을
전폐하다 3년을 못 채우고 1914년 몇몇 떠나지 않은 노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기전 추산은 토지 일부를 노비,소작농들에게 나눠 준 다음 40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3천석의 막대한 재산 처분이 쉽지 않아 동분서주 하던중 일제의 감시를 피해 호적도 정리하고 이사 간다고 소문도 낸 추산은 이듬해 망명길에 아내와 두 살배기 딸,어머니, 동생 권혁룡과 권혁기, 그리고 제수씨 둘 등과 함께 소달구지를 이끌고 추풍령을 거쳐 얼음 덮힌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추산은 갖고 온 재산으로 신흥 무관학교를 재정비, 확장하고 일제를 피해 만주로 넘어오는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우며 허허벌판 서간도에서 가족과 함께 직접 괭이와 호미를 들고 농사일에 매달렸다.
당시 나이 25세인 추산은 서간도에서 경리와 재무를 담당하며 부민단의 재정담당과 정치외교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석주 이상룡의 지도 아래 만주 독립운동 인사들과 교류하며 한족회 결성에도 참여하면서 구국의 일념을 불태웠다.
또 추산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예비부대 성격의 백서농장을 지원해 독립군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3.1운동이 터지자 서로군정서에 참가해 각 독립운동 단체를 연결하며 외무 업무를 맡아 활동을 계속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을 때까지 모두 7천여 명의 독립군,즉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양성했다.
일본군을 격멸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 상당수가 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추산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1920년 4개월에 걸친 간도 대학살을 온몸으로 막으며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 밀정색출,군자금을 획득하러 다녔다.
하지만 그해 8/15 홀로 남아 마지막까지 신흥무관학교를 사수하던중 무관학교 북서쪽 산을 넘어 온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끝까지 항전했으나 인근 옥수수밭에서 포위되어 일제의 총검 아래 전신을 수십번 난자당하면서 참혹하게 생을 마쳤다.
추산은 숨을 거둘 때까지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신흥무관학교를 8년간 지켰던 그의 나이는 34살이었다.
p.s 추산 권기일의 묘지는 아직도 흔적이 요원하여 찾지를 못하고 있다.
백포 서일 (서기학) 1881 ~ 1921 함경북도 경원 출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청산리대첩의 배후지도자.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1921년 8/28 독립군들을 잃고 41세에 자결) 】
백포 서일은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후 교육구국에 힘쓰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 잔류 병력을 규합, 중광단을 조직하고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민족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간도에도 명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8년 여준·유동열·김동삼·김좌진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하고 이듬해 정의단을 조직하였다.
같은해 8월 현천묵·김좌진·계화 등과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로 만들고,한 민족에게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며 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
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는등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각지에 야간강습소,소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에 대승하고 병력을 북만주 밀산현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의 국민회군,최진동의 도독부군 및 의군부,광복단 등 독립군단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하지만 1921년 일본의 독립군 토벌 작전을 피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들어간 대한독립군단은 흑하사변으로 대다수의 독립군들을 잃게 되었다.그 후 다시 러시아 적군의 후원을 받은 도둑떼들 수백명이 야간에 기습해 살인·약탈을 자행하고 남은 독립군 마저 희생당하게 되자 서일총재는 밀산에서 41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백포 서일의 아들인 서윤제도 독립운동가이다.
흑하사변(자유시사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에서 일제와 러시아간의 밀약으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을 벌인 사건 1920년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독립군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상황이 위태롭자 서일,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이청천의 대한독립단,홍범도의 대한독립군...들은 헤이룽장성 밀산에 집결하여 독립군을 통합,병력 3500 명의 대한독립군단으로 재조직하였다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은 50 만명의 교포와 러시아 적군의 원조로 무기를 보충,때로는 적군의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후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적군이 대한독립군단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들을 공격하였다. 이 흑하사변으로 독립군 960명 전사.1800명이 실종 또는 포로로 잡혔고 8/26 소만 국경지대 밀산,마적에 의해 재기를 도모하던 잔존 독립군들도 사실상 궤멸하고 말았다 ※ 자유시로 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서도 군권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도 있었다. [출처] 독립운동가 7 -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 추산 권기일/ 백포 서일 총재|작성자 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