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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을 더듬더듬... 그리고 오랫만에 찾아온 시간덕분에 다시 올립니다.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를 해야지!
예술과 비엔나
여행 기간은 12월 20일-1월 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와 연말 연시를 유럽에서 보내게 되는 거였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라니! 그 가운데서도 어디에서서 크리스마스를 보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비엔나로 결정했다. 그래서 23일 저녁-25일까지 비엔나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강의 일정은 이랬다. 24일에는 벨베데레 궁전에 가서 쉴레와 클림트의 그림 감상. 25일에는 쇤부른 궁전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가기로 했다. 중간중간 크리스마스 마켓도 가고 성당도 가는 것으로!
처음 시작은 괜찮았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에서 조식을 배불리 먹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엔나 거리로 나왔다. 15분쯤 걸으니 벨베데레 궁전에 도착했다. 빈의 유력자 가문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곳, 위쪽 궁전을 상궁, 아래쪽을 하궁이라고 하고 두 궁전 사이에 프랑스풍의 멋진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네모진 높은 나무의 미로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별로 볼거리는 없었다.
벨베데레 궁전은 클림트 컬렉션으로 유명한 곳이다. 클림트의 '키스'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벽에 아주 붙박이로 박아놨다고 한다. 쉴레의 작품은 레오폴드 미술관이라고 하는 다른 미술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기간에는 하궁에서 무슨 특별전 같은걸 하고 있어서 한 곳에서 두사람의 그림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우선 쉴레부터 시작했다.
“당신이 그림을 사는게 아니다. 당신은 돈을 주고 나는 그림을 주고. 서로 교환하는거다.”
쉴레 특별전에는 쉴레가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어떤 생각으로 그렸는지, 그의 모델이었던 사람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있었다. 그가 썼던 기록들을 읽으면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의 그림은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런 그림을 보고 가슴뛰는 나를 보는 것이 좋았다. 이런 자극은 실로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에서의 부딪힘이 가져다주는 에너지에서 벗어나 틀 안에 있는 작품을 오랫동안 서서 바라보고, 수십년에서 몇백년사이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예술작품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아 사람이란 이런 부분도 갖고있는 존재구나. 그동안 나는 너무 한쪽 부분만 열어놓고 한쪽 부분은 닫아놓은 채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쉴레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와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찾아봤는데, 사생활은 한마디로 엄청 나쁜 남자다. 오랜 연인이자 자신의 모델이었던 연인이 있었지만 정작 결혼은 신분이나 여러가지가 자신에게 좀 더 맞는 여성과 했다. 그러면서 오랜 연인과 헤어지는 아픔을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어마어마하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서도 쉴레는 두 사람 모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뭔가 애를 쓰기도 하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버려진 여인은 쉴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간호사로 자원했다가 죽었다(고 읽었는데 이부분은 확실치 않음). 또 모델을 구하기 위해 가출을 빈민가 소녀들을 꼬셔서 집으로 데려갔다가 몇 달동안 감옥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돌아와서 읽으면 읽을 수록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늘어나는 인물이었는데, 그럼 그의 그림앞에서 꿀렁거렸던 나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거지?
벨베데레의 상궁에는 벨베데레를 유명하게 만들어주는 주인공 ‘클림트’가 있다. 쉴레를 보고났더니 벌써 음악회 예약한 시간이 다가와서 클림트는 아껴두기로 하고 돌아 나왔다.
예술의 도시 비엔나에서 미술 감상을 했으니 음악을 들어야지. 사실 순서는 음악이 먼저였다. 뮌헨에서 비엔나로 출발하기 전에 음악 공연을 열심히 검색해서 갈 수 있는 곳들을 알아보았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공연은 대부분 일정이 없었고, 크리스마스 아침 빈 소년 합창단 공연이 있었지만 매진이었다. 결국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관광객을 상대로 연중무휴로 하는 쇤부룬 궁전의 음악회였다. 별로 탐탁치는 않았지만 비엔나에서 음악을 듣지 않고 지나칠 순 없지 않는가.
음악회를 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바로 격식에 맞는 옷차림. 떠나기전 허리가 아파왔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들고다니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서 옷은 정말 최소한으로만 넣었다. 바지 한 개로 여행 내내 다녔고, 윗옷은 두벌을 번갈아 입었다. 관광객이 다 그렇지, 지금 입은대로 갈래요라고 했다가 그래도 나보다 좀 더 유럽에 살아본 오바니와 지은이가 유럽은 그런 곳이 아니라며 옷을 구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본의아니게 유럽에서 옷 쇼핑에 나서게 되었다. 주머니사정을 생각해서 구제옷 가게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다가 겨우 원피스 하나를 20유로 정도 주고 샀다. 그런데 이런! 신발도 운동화 하나밖에 없네.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고 갈 수는 없으니 신발도 사야하잖아.
신발을 사러 지은이가 추천하는 또 다른 구제 옷 가게에 가게 되었다. 가게 이름은 ‘킬로 앤 픽KILO & PICK“. 색깔별로 엄청 많은 옷이 진열되어 있었고, 옷마다 다른 색의 택이 달려있었다. 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이 재미있었는데, 택마다 그램당 가격이 적혀있었고, 고른 옷을 저울로 재서 그 택에 해당하는 가격을 곱하면 그 옷의 가격이 나온다. 그러니까 무거운 옷일수록 비싸고, 택의 레벨이 높을수록 비싸진다. 예쁜 옷이 많았지만 나의 목적은 신발. 한국에 돌아와서도 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고르다보니 또 선택에 제약이 있었다. 그렇게 엄청 고민고민하면서 고른 신발이 하나 있었는데, 약간 문제가 있었다. 발등 부분이 망사라는 것. 그래도 지금은 12월 24일인데... 어쩌겠는가. 멋내려다 얼어죽는다고 우리할머니는 늘 말씀하셨지. 하루 발 시린 것쯤은 참아보자 하고 그 신발을 집어들었다. 그것도 20유로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옷을 차려입고 쇤부룬 궁전의 음악회에 갔다. 그곳은 몇백년전 모차르트가 비엔나의 궁정에서 일했을 때 실제로 연주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프로그램은 비엔나를 대표하는 작곡가 모차르트와 왈츠의 왕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우스의 음악으로 짜여져 있었다. 두사람의 유명한 레파토리를 짤막짤막하게 소개하는데 기악곡과 중간중간 성악곡, 춤곡에 맞춰 성악가와 무용수도 나왔다. 노래는 듣기 좋고 편한 노래들로 짜여져있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아참 클래식은 원래 이나라 사람들의 음악이었지! 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성악곡을 들을 때 느껴지는 뭔가 과장되거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없이 부르는 이도 듣는이도 자연스러운 그런 흐름이 있었다.
음악회를 들으러 온 사람들의 차림새는 가지각색이었다. 이전의 나처럼 100프로 관광객 차림으로 온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왔다. 엄청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면모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제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음악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힘들게 산 옷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음악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서 멋내느라 추웠던 옷을 갈아잆고 다시 나왔다. 오늘은 12월 24일 계획대로라면 멋진 크리스마스 이브가 펼쳐질 예정이었지만 많은 가게들의 문은 닫혀있었거나 닫고 있었다. 오늘 문을 연건 성당밖에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제일 유명한 슈테판 대성당으로 갔다. 성탄 미사는 12시에 시작하는데, 아직 시간이 3-4시간정도 남아있었고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은 상태라 그 시간까지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 우리는 다시 숙소에 갔다가 나오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곳곳에 주변 성당에서 하는 성탄 전야미사 안내문들이 붙어있었다(비엔나에는 크고 작은 성당들이 무지 많았다). 그 안내문에서 잘 이해가 안되는 것은 미사의 시간, 장소와 미사곡 제목이 함께 공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어떤 형식으로 펼쳐질지 잘 상상이 안되어서 그 시간에 연주회가 있다는 건가, 아무튼 직접 가봐야 어떤 모양인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슈테판 대성당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길가다가 벽보에 붙은 예수회 성당의 미사 안내문에 끌리게 되었다. 이 성당의 미사곡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였다. 사실 많은 성당에 이 미사곡이 써있긴 했다. 예수회 학교를 나온 개인적인 나의 선호와 슈테판 성당은 왠지 관광객으로 꽉 차있을 것 같은 예감, 그리고 예수회 성당이 우리 숙소에서 더 가깝다는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회 성당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오바니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여기가 더 나을 것 같다고, 나의 감을 한번 믿어달라고 약간 우겼다.
열한시 반쯤 숙소에서 다시 나왔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상태였고, 그것도 그냥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거의 네다섯시간을 서있다가 음악회를 감상하고 관광지를 몇번 왕복하는 강행군을 소화하고 난 저녁이라 잠시 가지말까 하는 유혹도 있었지만, 관광객의 불굴의 의지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숙소를 빠져나왔다. 열두시가 다되어 숙소밖을 나가며 우리는 호텔 프론트 아저씨에게 약간 쑥스러운 인사를 던졌고 아저씨는 빙긋 웃었다. 성당을 성당은 골목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유럽 성당들이 신자가 없어서 거의 비어간다는데 이곳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던 찰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어들어가는 성당을 발견했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니 자리가 하나도 없게 사람들이 꽉차있었다. 아 죽었구나, 피곤해 죽겠는데 한시간 넘게 서있어야 되겠네 라고 절망하는 찰나. 맨 앞자리 뭔가 예약석으로 남겨져 있던 자리에 오기로 했던 사람이 안온 모양인지, 성당의 터주대감처럼 보이는 할머니들이 우리보고 거기 앉아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덕분에 맨 앞자리에서 미사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득템했다!
미사가 시작되고 길에서 봤던 안내문이 무슨 의미인지 드디어 이해가 갔다. 미사 시작 전에 합창단원들이 제대 앞으로 먼저 등장했고 합창단보다 늦게 입장한 신부님은 성당의 왼쪽편에(사실은 약간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렇게 미사의 중심이 합창과 솔로로 된 노래들로 채워졌다. 합창단원의 차림새도 인상적이었는데 아까 음악회에서 차려입었던 사람들이랑은 다르게 그냥 입던 코트나 잠바를 입고 서있었다. 우리나라 성당에서 보던 성가대 단원복같은 것을 맞춰입지 않았는데 그래서 별 기대 없이 시작한 미사는 처음 입당 노래를 듣는 순간 싹 없어졌다. 사실 나에게는 아까 돈 주고 본 음악회보다 성당에서 들은 미사곡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합창단원들 중에는 동양인들도 꽤 있었는데 생김으로 보아 대부분 한국인 유학생일 것으로 추정되었다(그중 한분은 솔로곡을 부르기도 했다). 하여튼 모차르트의 미사곡 덕분에 기대치 못했던 황홀한 미사 시간을 보냈다. 미사가 끝나고 나중에 합창단에 대한 안내문을 볼 수 있었는데 비엔나에서 활동하는 고음악 합창단이었고(이름은 까먹음) 앞으로 몇 달치의 스케쥴이 나와있었는데 여기 살면 이런데 다 가볼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게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성당을 나섰다. 오래된 신자들인지 끝나고 인사를 하고, 자동차를 타거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우리도 조용한 비엔나의 거리를 걸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비엔나의 불꺼진 크리스마스는 끝이 났다.
12월 25일. 역시 비엔나의 많은 곳들은 문이 닫혀있었다. 그래도 미술관이 그나마 문을 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어제 아껴두었던 클림트를 보러갔다. 클림트를 보러 오는 사람의 숫자는 어제 쉴레와는 사실 비교도 안되게 많았다. 그러고보니 비엔나는 음악과 클림트로 먹고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크림트의 <키스>는 다른 곳으로 절대 이동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벽에 고정해서 박아놨다고 한다. 클림트를 좋아하는 오바니는 엄청 흥분했다. 클림트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그림은 실물로 봐야한다는 말이 있다. 실물의 그림은 그 크기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책으로나 엽서 같은 것으로 봤을때랑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나온 말인데, 실물의 <키스>는 정말 반짝반짝하고 너무 아름다웠지만 그 주위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오래도록 빠져있기는 좀 힘들었다.
클림트가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 전에 그린 그림들도 있었다. 우선 그는 아름다운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다. 사진처럼 세밀하고도 정교한 그림들. 그러고보니 클림트의 스타일의 황금 가운데있는 주인공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예뻤지. 그렇게 잘 그리는 능력 위에 거기에 금박의 스타일을 더해 오늘의 클림트가 있게 된거라고 책에서 읽었다. 역시 기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벨베데레 궁전을 나와 벨베데레 앞에 펼쳐진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점심을 사먹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글뤼바인과 감자튀김으로 때우는 점심. 사실은 미술관에서 계속 서있었던 관계로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비가 와서 어디 앉을 데가 없었다. 어디 앉아서 밥을 먹고 싶었지만, 배도 너무 고파서 그냥 여기서 먹기로 했다. 배가 부르고 따뜻한 글뤼바인으로 몸이 좀 따뜻해지니 조금 힘을 내고 다시 걷는다.
그렇게 비엔나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는 끝! 이제 이탈리아로 간다~
첫댓글 클림트, 정말 좋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