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위공 밀례
영평현령을 지내고 좌승지로 추증된 23세 익위공 권경 할아버지의 묘소를 청계산 금토동 능안에서 음성 능산리로 밀례를 한다고 하여 참관하기로 하였다.
2008년 2월 27일, 금토동으로 8시까지는 와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오극이형제와 오주 형제가 도착하고 파묘작업은 시작하였다.
음성에서 올라온 노인회장은 새벽 6시 반에 올라와서 전화를 하고 작업을 빨리해야 한다고 독촉을 한 모양이다.
밀레를 하게 된 동기는 용인에서 금토동을 거쳐 서울로 오는 고속도로가 신설되어 도로에 인접되어있는 묘소를 이장하라는 공고가 있어 부득이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2천년에 할아버지산소 밑에 있는 숙부인 할머니 산소를 할아버지와 합장하였는데 또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9시가 되니 파묘를 하여 숙부인 시신은 수습을 하여 영구차에 싣고 나서 할아버지 관을 꺼내는데 보통일이 아니다.
관위에 석회를 두자정도 씌웠는데 강회라 굴삭기가 뿌레카로 두들겨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강회가 돌덩이같이 굳어져 있어 뿌레카로 모서리부터 뚫고 부수기를 계속하는데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뿌레카가 작업을 하는데 관 뚜껑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고 산 위라 바람은 불고 날씨가 쌀쌀하여 밀례 참관하는 사람들이 추워서 쩔쩔맨다.
두시간만에 간신히 관 뚜껑위에 있는 석회는 걷어냈는데 관을 꺼내자면 관 옆의 또 회공구리를 걷어내야 한다.
오시에 음성에서 하관식을 한다는데 참 난감하다. 이렇게 관을 꺼내는데 시간이 걸릴 줄은 예측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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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레카로 관을 덮은 회 공구리를 뜯어내는 작업
우선 관위의 홍대를 뜯었다. 홍대를 널빤지로 차곡차곡 놓았는데 널빤지 간에 삼각 쐐기로 연결을 하여 홍대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게 만들어 요즈음에는 볼 수 없는 홍대다. 굴삭기로 홍대를 뜯어내니 홍대의 두께가 한 7~8 Cm 정도 된다.
이렇게 두꺼운 널빤지로 홍대를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
홍대를 뜯고 나니 바로 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 관으로 홍대 같은 두께의 널빤지로 관이 또 하나있어 이중관을 썼다. 포크레인으로 옆의 강회를 뜯어내고 이중관의 걷관을 부수며 한쪽으로 속관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거의 굴삭기 혼자하고 나머지 인부들은 구경만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포크레인의 쁘레카로 석회를 부수기 시작한지 두시간반 만에 속관을 밖으로 완전히 들어내는 작업이 끝났다.
관을 밖으로 끌어 내놓고 보니 관에 옻칠을 한 것이 벗겨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있다. 관은 모서리를 각을 지게 하지 않고 유선형으로 처리 하였다. 탈관을 하여 시신만 다른 관으로 모시려고 예비관을 준비해 왔는데 관이 원형그대로 있으니 구태여 새로운 관으로 옮기지 않고 원형관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였다.
준비한 예비관은 원형관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을미년인 1655년대의 관이 350년이 지나도록 원형 그대로 있다는 것은 관의 제작이나 석회와 옻칠의 우수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보통 관을 썼으면 다 삭아서 흔적도 없고 뼛조각도 찾기 어려워 흙만 갖고 가기도 하는데 원형대로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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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칠을한 관의 외부에 이중관이 보이고 회공구리가 있다.
준비해온 예비관보다 원형관은 크기의 규모가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다. 관이 너머커서 영구차에 실을 수가 없어서 트럭에 실고가기로 하였다.
굴삭기의 브레카로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곡괭이로는 하루 종일 작업을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현군 묘를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석회를 깨지 못하고 실패한 원인을 이해할만하다. 병인양요와 남현군 묘 도굴사건에 천주교 신자가 개입하였다고 하여 대원군의 천주교박대가 심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인이 살해당하는 빌미가 된 도굴사건이다.
금토동 능안에서 원형 관을 트럭에다 실고 음성 능산리로 출발을 하니 12시가 다 되어간다. 음성에서는 오시인 11시에서 1시 사이에 하관을 한다고 친척이 다 모여 있을 텐데 청계산 금토동에서 음성 능산리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도저히 하관시간을 댈 수 없는 촉박한 시간이다.
사전에 밀례를 어떤 이유로 음성으로 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왔는데 이해 못할 점이 있다.
밀례를 잡숫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정익공 공조판서의 묘가 바로 옆에 있는데 아버지인 이 정익공 묘소 밑에 터를 잡고 밀례를 하면 일도 편하고 부자가 같이 있어 세향도 한번에 지낼 수 있어 참으로 좋은 일을 구태여 음성까지 가서 이장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제부터 세향을 지내려면 금토동에서 지내고 음성으로 내려가 능산리에서 지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또 비석이나 상석 촟대석등 석물은 모두 버리고 간단다. 비석이나 상석에 쓰여 있는 글이 음성묘의 좌향에 맞지 않아 다시 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석물을 가지고 가서 새로 조성한 음성 묘에 그대로 세우고 옆에다가, 금토동에서 언제 이장을 하고 금토동의 좌향과 밀례를 하는 음성 능산리의 좌향을 표시한 표석을 세우면 될 일을 효율 없이 일을 한다.
그러면 일도 편하고 비석이나 상석을 만드는 불편함도 해결되고 경비도 적게들 것을 좌향 표시하는 글자하나 때문에 옥개석까지 있는 비석을 버리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 같다.
더구나 금토동 비석은 오석몸체에 화강암 옥개석인데 새로 만든 비석은 몸체나 옥개석이 모두 화강암이다.
우리가 버릴 때 버리더라도 비석과 촛대석 둘 향대석만이라도 가지고 가라고 트럭 기사에게 지시를 하였다.
이장 비용도 보조받은 9백8십여 만원 외에 추가로 더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밀례를 하면서 내가 궁금한 것은 우리 부모님은 탈관을 하여 청계산 하오고개에 모셨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친척이 모두 우리조상은 모두 탈관을 하여 모시기로 하여 지금도 모두 탈관을 하여 산소에 모시는데 몇 대조부터 탈관을 하게 되었는지 무슨 이유에서 탈관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2대인 경 할아버지가 이렇게 중후한 나무 관을 썼으니 이 이후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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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례를 한 익위공 묘소
우리는 승용차로 음성 능산리에 도착하니 아직 영구차가 도착하지 않아 족친의 집에서 점심을 하게 되었다.
동리에는 다 노인들만 있고 반찬은 직접농사를 지은 것이라 맛이 담백하다. 식사를 하고 곧바로 이장하는 산소로 갔는데 벌써 하관을 하여 식사 때문에 하관식을 참석 못했다.
하관을 하고 봉묘를 하는데 굴삭기가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
봉분에 둘레석을 어떻게 쌓았나 궁금했는데 현장을 보니 간단하다.
맨 처음 기초석을 둥글게 원형으로 쌓고 석주를 중간 중간 세운 후에 석주와 석주 간에 12지석을 끼운다. 지석위에 마무리석을 올려놓고는 그 안에 흙을 메워 봉분을 하니 순식간에 봉분이 된다.
기초석을 쌓기 전에 묘 중앙에 한자정도 파고 유물을 넣었다.
유물은 금토동에서 파묘를 할 때 나온 것으로 조그만 옛날 잔으로 사기로 되었는데 종지같이 생긴 소형이다. 이 종지를 뒤집어서 묻었다.
두개의 석관을 준비했다가 석관 하나는 반납하고 할아버지 관은 금토동에서 가지고온 원형관을 그대로 모시고 숙부인 관은 석관을 사용하였다.
할아버지 새로 잡은 터에서 편안히 쉬십시요.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글을 읽어보니 우리 선조님들의 지혜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감히 그당시 어찌 이렇게 영구히 보존될 방법을 알았을가? 선조님들의 명특함이 현제 과학으로도 입증이 되는 과학적 두뇌를 유지 한 사례임을 확인 시켜 주었습니다.
큰 행사를 치르 셨습니다. 할아버님 고히 편히 쉬시고 우리 후손들의 삶을 굽어 살펴 주십시요....
이글을 안동권씨 무사 메-뉴란에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