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2004년도) 우리 시조의 동도설과 함께 임씨의 원류를 밝혀 사실화하고, 이를 근거로 최근 작성되고 있는 우리 각 임씨의 족보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도 근거자료로 활용된 자료 중 평택시에서 수원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실시한 농성유적조사 결과인 『농성유적조사보고서(1998)』가 있는데, 『충절공임팔급동상봉안지(2004)』에서도 이 보고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평택시에서 거의 동일한 목적으로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작성된 『평택 농성 지표 및 발굴조사 보고서(2003)』가있다.
위 두 보고서는 같은 평택시에서 (거의)동일한 목적으로 조사를 의뢰하였으면서도 보고서의 결론 은 유사하면서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시조의 동도설에 대해서 고찰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고서의 내용에 대하여 요약해보고자 한다. 편의상 『농성유적조사보고서(1998)』는 ①, 『평택 농성 지표 및 발굴조사 보고서(2003)』는 ②로 표시하고자 한다.
①은 2004. 9. 7 수원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하여 모현선(수원대학교 박물관 조교)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으며, ②는 평택시청 문화공보과 전선식님께 부탁하여 2004. 9. 3 우편으로 받은바 있다.
1. 보고서 내용 및 결론 요약
①과 ②의 보고서는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21-2번지 등에 위치한 농성(경기도지정기념물 제74호)에 대한 유적조사 보고서로, ①은 평택시에서 유적을 정화하여 지역사회의 산 역사교육장으로 만들고 시민들의 체력단련과 휴식공간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수원대학교 박물관에 유적조사를 의뢰하여 1997. 12. 9 ~ 1998. 2. 16까지 현장을 답사하고 유물을 수집하는 등 현장탐색을 위주로 하는 조사와 문헌을 수집하여 작성된 보고서이며
②는 평택시에서 농성 외곽에 대한 공원화 계획을 추진하면서 농성의 축조시기와 성격을 규명하고자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2002. 12. 15 ~ 2003. 1. 4까지 현장을 답사하고 실시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결과보고서이다.
②는 ①보다 5년 정도 후인 2003년도에 작성되었으나 우리 임씨의 시조 동도와 원류를 최종 정리 편찬한 『충절공임팔급공동상봉안지(2004)』에는 참고자료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농성의 축성 시기와 용도에 대하여 ①과 ②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농성의 축성 시기와 용도에 대해서 ①은 삼국시대 후기나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반대로 조선시대 후기로 볼 수도 있으나 정확한 축성연대를 말하기 어려우며, 이에 대한 說로서 삼국시대 축조설, 고려시대 축성설, 조선시대 축성설과 최근 평택임씨 시조인 임팔급이 농성을 축조하여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까지 축성 시기를 밝힐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현재로서는 없으므로 9세기 전후에 중국에서 임팔급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곳 농성 또는 그 주변으로 망명하여 정작의 근거지를 정하였다는 문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고 팽성임씨의 문헌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성씨와 관련된 지역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특정 유적의 역사적 가치나 의의를 제고시킨다는 차원에서 농성의 역사를 우리나라에 귀화한 팽성임씨의 발원과 연계시켜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②는 그동안 여러 기관에서 대략적인 지표조사를 통해서 농성의 규모와 측성기기를 논한 적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ꡓ고 하면서(①의 내용도 포함 한 것으로 여겨짐) 축성시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노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하면서 조사를 사였으며, 농성의 축조시기를 추정했던 다양한 견해들을 정리하여 삼국시대 축성설, 통일신라시대 축성설, 고려시대 축성설, 조선시대 축성설로 나누었다.
그런데 (다른 기관이)농성에서 채집된 토기편이 김해식토기편이었다는 견해를 들어 삼국시대 축성설을 주장한 것에 대해 당시에 채집되었다는 김해식 토기가 과연 어떤 것인지 알 수없으며,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등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편으로 볼 수 있는 토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모두 고려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었을 뿐이며, 만일 김해식 토기편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성곽의 축성조시기와 관련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했다.
통일신라시대 축성설은 임씨 족보에 기록된 임팔급의 망명사실을 근거로 주장되고 있는 것 같고, 이 설은 현재 농성의 안내판에도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이에 대해서는 학문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성곽의 축조는 아무리 소규모의 성곽이라 하더라도 국사의 정치․군사적 목적과 관련되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일개의 문중이 성곽을 축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통일신라시대로 볼 수 있는 유물이 없으며 모두 고려시대의 토기임을 들어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축성설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가지 견해로 나누며, 임진왜란시 적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견해와 왜구가 축조하였다는 견해에 대하여 조선시대 축성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고려시대 축성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고려시대 전기냐 후기냐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전기에 축성되었을 가망성에 무게를 두며 고려 전기에 아산만 일대의 해안방어와 관련하여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 ①의 보고서중 결론부분 요약
①의 보고서는 우리 임씨의 시조 동도와 시조의 원류를 밝히는 비중이 크게 반영된 근거자료이므로 이 자료를 별도로 요약 하여보았다.
1) 조사내용
농성의 축조연대와 축조방법 그리고 농성의 역사적 의의를 밝혀보려고 정밀하고도 심도 있는 지표조사와 문헌자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수반되었다. 조사 전 지역에서 자기편과 토기편 다수를 수거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유물들이 집중 분포되어 있거나 규모가 큰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상생활 가운데 파손된 것들이 거름이나 퇴비 등에 섞여 농경지 주변에 버려진 생활쓰레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건축에 필수적인 주춧돌이라든지 기와무지와 건물지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지표조사 결과 채집된 유물들은 시대적으로 볼 때 다양한 편이다. 다양한 편으로 삼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토기편이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의 옹기편, 백자편 그리고 최근의 사기편들까지 있어 각 시대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농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 후기나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반대로 조선시대 후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축성연대를 말하기는 어렵다.
농성의 축조시기와 용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첫째, 삼국시대 축조설이다. 삼국시대에 도적이 심하여 양곡을 보관하기위해 쌓았다는 설과 신선(神仙) 도승(道僧)이 거지(居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ꡒ삼국이 서로 전쟁을 할 때 서로가 치고받고 하는 까닭에 농민들이 가을 추수 때가 되면 곡식을 그(농성) 가운데 쌓아두었다ꡓ하여 도적이 아니라 각종 수탈로부터 양곡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ꡒ신령스럽다는 중 도선이 지맥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이 성을 쌓았다ꡓ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백락부곡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설도 있으며, 백락부곡민 집단거주지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도 있다.
둘째, 고려시대 축성설이다.
농성이 토성(土城)인 점을 주목하여, 조선시대의 성(城)은 대체로 석성(石城)이고, 읍성을 제외하고는 산을 의지한 천연요새지(天然要塞地)에 축성하는 경우가 많아 조선시대 축조 가능성은 희박한 반면, 고려시대 성은 대체로 토성이고 규모도 작다. 더욱이 농성은 인접해 있는 고려시대 토성인 처인성과 축성방법 및 입지 조건이 유사하다. 고려 후기에 잦은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여 전국에 많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평택의 농성도 이 같은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편 이 일대에 포구가 발달되어 있어 고려시대 중요한 교통로인 점을 주목하여, 농성이 고려시대에는 창고성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셋째, 조선시대 축성설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성의 축조와 임진왜란을 연결시키는 것은 같으나, 그 축조 주체를 전혀 다르게 제기하는 설도 있다.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지역 주민의 말을 인용하여, 임진왜란 때 왜구가 이 당에서 농업을 경영하며 土城을 設築하였으며, 農城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최근 평택임씨 종친회에서 새로운 설을 제기하고 있다.
즉, 당 말기 한림학사였던 임팔급이 간신의 참소를 당하여 동료학사 7인과 함께 신라 말기인 800년에서 83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이곳 彭城으로 망명하였으며, 이곳에 자리 잡은 임팔급이 농성을 축조하여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 조정에도 등용되었으며, 신라 변방을 침공한 賊兵을 토벌하는 등 공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彭城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임팔급과 관련해서 해석하고 있다.
2) 조사단 견해
위에서와 같이 현지에서 채집된 유물들을 분석해보고 관련 문헌에 대한 조사내용을 종합해볼 대 현재로서는 농성의 축조연대를 정확하게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현실이고, 문헌자료를 통하여 고찰해 본 농성의 연혁도 현재로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입장이다.
한편, 팽성임씨 문중에서는 그들의 시조인 임팔급 公이 唐末의 혼란시기에 전란을 피하여 통일신라에 망명하여 이곳을 정착의 근거지로 하였다는 문중의 문헌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근거의 예로는 팽성임씨 족보에 나와 있는 그들의 선조들이 고려시대 이 지역에서 크게 번성 하였고 그들의 묘소가 팽성 인근의 2-3km 지역 안에 다수 위치해 있다는 주장인바 그에 대하여도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현재 농성의 정확한 연혁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는 처지이므로 농성이나 팽성지역과 관련된 자료들을 최대한 검토해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닐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가령 팽성 주변지역에 팽성임씨의 선조들, 즉 고려왕조건국 원년 6월에 登載된 29명의 명단 중 林曦 외 4명이 고려사에 기록된 것들은 임씨들이 이 지방 호족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다수의 묘소가 위치해 있으며, 사적이 뚜렷한 인물들이 이곳 팽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임씨문중의 문헌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사결과로 볼 때 현재로서는 농성의 축조연대 및 농성의 축성방법 등 농성과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농성의 축성연대를 통일신라시대의 후기까지 소급하여 볼 수 있고, 지금까지 수집된 문헌자료에 대한 검토결과 9세기 전후에 중국에서 임팔급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곳 농성 또는 그 주변으로 망명하여 정작의 근거지를 정하였다는 문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농성은 조선시대 팽성현의 객사나 동헌 등의 건물들이 있었던 지점과는 불과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팽성임씨의 문헌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성씨와 관련된 지역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특정 유적의 역사적 가치나 의의를 제고시킨다는 차원에서 농성의 역사를 우리나라에 귀화한 팽성임씨의 발원과 연계시켜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사료된다.
(※ 고려사에 나타난 임씨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설명을 하고자 함 )
3. 두 기관 보고서에 대한 고찰
①에서 농성의 축조시기와 용도를 우리의 시조인 휘 팔급공과 관련지은 것에 대해서 우리 임씨의 입장에서 보면 만족할 수 있고, 그간의 미해결 문제인 동도설의 사실화와 임씨의 원류를 밝히고, 더욱이 우리 시조의 상계 선대를 중국 殷나라 주왕 시대(BC1154 ~ BC1111, 지금부터 약 3,161년 전)까지 연결시키는데 도움을 준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의 문중에서 이어져 오던 說을 사실화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①의 보고서를 좀더 분석해보면 같은 보고서의 내용 중에서도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는 내용을 요약하지는 않았지만 보고서의 내용 중에 현재의 平澤을 彭城이라고 불리던 시기에 대해서 임진왜란 직후부터 공식 지명인 평택과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고, 우리 시조의 동도시기를 9세기로 보고 있으며, 고려왕조건국 원년 6월에 登載된 29명의 명단 중 林曦 외 4명이 고려사에 기록된 사례를 들어 농성의 역사를 우리나라에 귀화한 팽성임씨의 발원과 연계시켜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즉, 팔급공이 9세기 初(800~830)에 팽성(지금의 평택)에 동도하여 농성을 축조하고 생활근거지로 삼았다 면서도, (10세기 初, 918)고려사에 등장한 임씨들이 이 지방 호족임이었다고 하였으며, 彭城이란 지명이 (16세기 末, 1592 ~1598)임진왜란 직후에 사용된 것으로 본 것은 시대적으로 서로 연계가 되지 않으므로 오류가 아닌가 한다.
4. 조사 및 보고서 작성 관련자
수원대학교 박물관과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대한 우열을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보고서 내용에 대한 의문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두 기관의 조사 및 보고서 작성에 관련된 자들의 명단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