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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은 내 마음의 근본생명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입니다”
* 2001년 2월7일 성륜사 동안거 해제 날 사부대중을 위하여 청화 큰스님께서 간절히 염불법문을 하신 내용입니다. 원음으로 듣고자하시면 다운 받으시여서 CD로 구워서 들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청화큰스님 음성법문 바로가기 http://www.mujuseonwon.com/
오늘 만나 뵙는 우리 불자님들은 저에게는 그지없이 반가운 고향사람들이십니다.
길가다가 잠시 옷깃만 스쳐가도 삼생 인연이라고 했는데 하물며 이와 같이 같은 자리에서 부처님 법을 설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로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무수한 생을 되풀이 하면서 만나고 또 만난 그러한 소중한 인연들이십니다. 지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만나기도 하고 오늘도 처음 뵙는 분도 계십니다만 한결같이 똑같은 그리운 고향사람들이십니다. 그러나 세월이 또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그렇게 지나다 보면 다시 또 무상한 현실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헤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 또는 영생의 고향을 찾는 이른바 불성佛性 존재입니다. 본래 우리 성품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성까지 본래 성품과 하나가 되기까지는 영원한 나그네 길을 걸어가면서 고생고생 윤회하고 다시 태어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지금 가까운 시일로 해서는 1년도 채 안 지났지마는 그 많은 세월을 인생고해에서 헤치고 나온 그런 아득한 그런 것을 저는 심각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는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공덕과 본래 죽음이 없는 생명을 갖추고 있는데도 우리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도 우리가 현실 이 사바세계의 그런 무상한 모든 그러한 제한된 것을 다 초월해서 정말로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자리를 재차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어려운 말씀도 있고 또는 방편 쉬운 말씀도 있고 합니다만 모두가 다 고향자리를 영생불멸한 남도 죽음도 없는 영생의 고향자리를 우리한테 보여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우리의 보통 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명의 근본도리를 알지 못하면 영원한 고향자리는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우리 생명의 근본 도리인 것인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이나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나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으나 그냥 말로만 그치는 그런 것은 우리의 근본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인식하는 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우리 인간존재의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상相밖에는 인정을 못합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다 산이다 뭐다 하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상 밖에는 우리 중생은 인식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으로 해서는 우리의 본래 생명의 자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한 말로 말씀을 드리면 모든 상을 거두어서 상을 여의고서 상을 초월한 영원의 자리로 돌아가는 즉 다시 말하면 본체로 돌아가는 그런 말씀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그러나 일반 분들은 극락세계 하면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인생고해니까 우리를 위안시키기 위해서 안락스러운 극락세계를 말씀했다.’ 이렇게만 쉽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 고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설이다.’ 이렇게 말씀한 분도 있습니다. 또는 근래 우리 불자님들까지도 극락세계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생소하고 그 자리를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인가. 극락세계를 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몇 만생을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꼭 도달해야 될 우리의 근원적인 영생의 고향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바꿔 말하면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비단 우리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락세계라 하는 영원의 세계를 가기 위해서 걸음걸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세계에 꼭 가야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존재란 것이 본래가 극락세계에 가게 되어있단 말입니다. 본래 성품이 아까 말씀드린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우리 마음이 이루어지고 우주의 일체만유가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부처의 성품인 그 생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과 합치가 되는 불성과 오로지 하나가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우리 마음이 갖추고 있는 참 나 참 자기가 방금 말씀드린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인데 불성과 하나가 돼 버려야 그래야 비로소 참다운 안심입명이라 참다운 편안함 그런 느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극락세계에 도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단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서도 또는 우리 스님 네 가운데서도 극락세계는 우리 인간을 달래기 위한 방편법문方便法門이지 어디에 극락세계가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분명히 명명백백히 존재하는 실상實相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가상假相의 세계인 것이고 사실은 극락세계가 참다운 실상 세계입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0리의 반이 5리 아니겠습니까. 무중霧中은 ‘안개 무霧’자, ‘가운데 중中’자, 안개가 조금만 끼어도 그럴 것인데 5리나 10리나 안개가 끼어놓으면 앞도 안 보이고 뒤도 안 보이고 답답하겠지요. 우리 범부 생활은 그와 똑 같습니다. 자기 과거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죽어서는 어디로 갈 것인지도 우리 범부는 모릅니다. 사실은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자가 돼야 비로소 뒤에도 보고 앞에도 보고 훤히 내다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견성오도見性悟道라, 자기 본래의 성품을 봐야 비로소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견성오도는 공부하는 스님네나 갈 것이지 일반 우리 불자들이야 어떻게 말씀만 따라 가다 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견성오도를 할 것인가,’ 그렇게 또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일하게 쉽게 생각을 말으셔야 합니다.
견성오도를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인간이나 또는 천상天上을 뱅뱅 돈단 말입니다. 과거의 위대한 철인들 가운데서 윤회설, 우리가 지은바 업보業報에 따라서 사람으로 또는 축생으로 또는 지옥으로 뱅뱅도는 윤회설을 말씀한 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참다운 도인들은 말씀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과거나 현재를 뻔히 내다보는 분들은 분명히 보이는 것이니까 윤회설을 긍정하고 역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비록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을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으로 해서 보면 더러는 귀신도 되고 축생도 되고 또는 지옥도 갔단 말입니다. 우리 본래 성품은 다 부처이건만, 불성佛性이건만 우리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무지에 가리어서 함부로 말도 하고 함부로 행동도 하고 생각도 무지로은 생각으로 그쳐버리면 결국 개가 됐다 소가 됐다 좀 잘 살아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런단 말입니다. 인과란 것은 조금도 이것은 흠절이 없습니다. 꼭 그대로 받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금생今生에 나와서 인생 참 험악한 사회에서 그때그때 고생도 많이 하고 있지만 이런 것이 모두 다 어느 누구의 허물도 아닌 것이고 우리 스스로 지어서 그대로 받습니다. 우리 몸뚱이라든가 우리 음성 같은 이런 것도 과거세에 어떻게 살았던가 자기 업業의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또 내생도 마찬가지로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우리가 나쁜 생각 한 생각하면, 불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념 오백세一念五百世라, 한 생각을 하면 한 생각의 그 기운이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남 미워하면 미워한 그 마음이 한 생 두 생 보태져서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다 말입니다. 남을 지나치게 너무나 좋아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행무량겁諸行無量劫이라 우리가 두고두고 저 놈 미운 놈이다 미운 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운 놈이다 그 마음이 우리 생리에도 반영이 옵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니겠습니까마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록 우리가 금생에 만나서 정말로 참 반가운 고향사람들이지마는 또 우리는 조금만 더 있으면 또 반드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숙명적인 무상의 물결위에 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고향이라 하는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 인생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어차피 죽어 갈 것이고 죽은 뒤에 오는 것이 천상도 없고 극락도 없고 그대로 자연적으로 뱅뱅도는 윤회만 있다고 생각할 때에 개나 소나 돼지나 사람이나 천상이나 그런 정도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살 가치가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영원불멸의 극락세계가 분명히 실존적으로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이고 극락세계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영원의 고향이고 참다운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신묘부사의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목적을 제시해 놓고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무시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를 가기위한 여러 가지 법문이 이른바 팔만사천법문이란 말입니다. 참선 하는 것이나 주문을 외이는 것이나 염불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가기 위한 그런 법문입니다. 극락세계는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열려야 갑니다. 우리 마음이 깨달은 단계, 어렵지마는 견성오도 하는 단계가 돼야 극락세계에 비로소 우리가 도달한단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견성오도가 견성이란 것은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 불성을 공부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것인데 그것이 또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오도라 깨달을 오悟자 길 도道자 오도도 쉽지가 않은 것이고 말입니다. 견성하면 오도가 되고 오도가 되면 견성이 되고 그러겠지요.
인도의 성웅간디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말을 굉장히 의미 깊게 생각합니다. 간디가 한 말이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을 싫어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닮지 않기 때문에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그런 것이 예수를 닮으면 마땅히 그리스도 예수를 좋아하니까 다 좋아해야 되겠지만 예수는 훌륭한 분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닮지 않는단 말입니다. 욕심은 욕심대로 부리고 진심瞋心은 진심대로 부린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간디가 우리 불교인들 보면 그와 비슷한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불교를 좋아하지만 불교인은 안 좋아한다.”라고 왜 그렇는가 불교인들이 부처님을 닮지 않았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닮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견성오도를 해야 되니까 말입니다. 쉽진 않겠지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견성오도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마는 어느 누구나가 꼭 해야 됩니다. 견성오도를 하지 않고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불안을 다 불식하고서 정말로 행복스러운 마음의 평화 또는 마음의 여러 가지 혼란스런 것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오랜 나그네 길인데 과거 전생에도 무수 생을 우리가 되풀이 하면서 지내오고 또 미래에도 우리가 무수 생을 그때그때 낳고 죽고 해서 지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나그네길인데 어떻든 간에 영원히 의지가 되고 안락스러운 극락세계에 가지 못하면 또 역시 윤회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윤회가 싫지만 그것도 무서운 하나의 진리입니다. 자기가 닦은 대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우리 행동 하나, 생각 하나, 우리 말 하나가 우리 의식에 남아 있다가 그것이 업보가 돼서 우리 생을 결정합니다. 우리 눈 하나 우리 코하나 모두가 과거 어떻게 살았던가! 그런데에 따라서 우리가 업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같으신 분은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백겁百劫이라 하는 무량세월 동안 자기 몸뚱이를 범한테 바치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 법을 듣기 위해서 몇 번이나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그렇게 무수한 난행고행을 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만덕존상萬德尊像 삼십이상三十二相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라, 그런 존귀한 상이 됐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기분 사나울 때 찌푸려 보시고 찌푸릴 때에 거울 한 번 보십시오. 금쪽 같이 아까운 자기 몸뚱이지만 찌푸릴 때 자기 얼굴이 얼마나 추악한가 말입니다. 망망한 우리 사바세계 스승이 없다고 한다면 참 적막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석가모니 같은 위대한 스승, 예수 같은 스승, 또는 공자 같은 스승, 우리 한국만 두고 본다 해도 원효대사, 의상대사, 고려의 대각국사, 보조국사, 이조 때도 서산대사 그런 훌륭한 스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스승들이 그냥 그대로 쉽게 견성오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무수 생 동안에 닦고 금생에 사람 몸 받아서도 부처님께서 오히려 6년 고행을 하셨단 말입니다. 우리 일반중생이야 그냥 거저 견성오도라 하는 우리 인생의 참 면목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인간이 그렁저렁 살아도 되지 않는가 이래서 우리가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한다고 생각할 때는 나중에 아무 때 가도 갈 길입니다. 내생에 가도 가야할 길이고 또 그 다음 생에도 가야할 것인 것이고 금생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무리한데 어떻게 그런 견성오도를 하는 성자들만 갈 수 있는 그런 길을 갈 것인가 이렇게 아득한 마음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부처가 되는 길이 제일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부처한테 가는 길만이 우리 마음의 불안을 씻어 버릴 수 있고 동시에 부처한테 가는 길만이 사람 사람끼리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 진리가 둘이 아닌지라 부처가 되는 길만이, 각 종교하고도 참다운 화해가 되는 것이고 또는 자기 자녀간들한테 돈을 많이 벌고 또 높은 지위에 올라서야 그야말로 인류학교도 보내고 외국유학도 보내고 할 것이 아닌가, 그보다도 우리가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에 대한 모범만 보여준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한테 별 다른 효성은 못했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위해서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을 역설하고 권고했다면 그 효성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을 지도했으니까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던 간에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모든 해결이 그 가운데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제일 쉽단 말입니다. 마음 편하고 몸 편하고 남을 미워할 때는 우선은 자기 마음도 안 편하고 자기 몸도 안 편합니다. 그러나 다 풀어버리면 미운 사람은 어떻게 다 풀어버릴 것인가 좋은 사람은 분명히 좋은데 어떻게 좋은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고서 그대로 평탄하게 지낼 것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 공부를 해야 됩니다.
부처님 공부를 하는데 가장 방해가 무엇인가 하면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妄’자, ‘나 아我’자 참다운 자기를 모르고서 자기를 망령되게 잘못 안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는 대체로 무엇인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 같은 것들이 인연 따라서 결합된 것이 우리 몸뚱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은 우리가 또 감수하고 상상하고 의욕하고 또 분별 시비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됐단 말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마음이나 몸뚱이나 하나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님 성품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이 현상적으로 나타나 있는 내 존재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석적으로 보면 산소나 수소나 탄소 같은 각 원소가 인연 따라 합해진 것이 내 몸뚱이고 내 마음은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느끼고 상상하고 또 의욕하고 분별한 것이 자기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가 마음과 몸뚱이 허망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망령될 망妄’자, ‘나 아我’자 망아妄我란 말입니다. 그 망령된 나에 얽혀있는 한에는 도저히 풀려나올 수 없습니다. 내 몸뚱이와 마음이 무상한 마음이 결합돼 있는 인간 존재의 한계 내에서는 우리는 참다운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몸뚱이와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의욕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렇게 돼 있는 우리 마음과 몸뚱이 이것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좀 어렵습니다만,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몸뚱이라든가 우리 마음 같은 것은 우리가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지 정말로 과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고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없단 말입니다. 왜 없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저는 될수록 부처님 말씀을 쉽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애를 쓰나 제 인간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고 하나, 또 한편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말씀드려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분명히 ‘나’라는 실제는 존재한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의 ‘나’라는 것은 존재한다. 우리 인간의 안목에서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겠지요.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서 과학적으로 분석해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것이 결국은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바람기운, 불기운, 또는 물 기운, 흙 기운 각 원소 기운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합해진 것이 이 몸인 것이고 우리 마음도 역시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서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남 미워하고 좋아하고 모두 다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은 우리 중생들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무아의 도리라 내가 없다는 도리 아닙니까? 무아無我를 모르면 불교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내내야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복이나 빌고 그런 정도 밖에는 다르게 더 못 나아간다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러한 가르침에 그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행복 근원적인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분명히 봐야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영원적인 길로 바로 못 가는 것은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바로 못갑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봐져야 이른바 제법공이라 여러분 반야심경 아까도 다 같이 외우셨지요. 반야심경 도리가 뭣인고 하면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잘못 보니까 이른바 뒤바뀌어서 거꾸로 본다 말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전도몽상 하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길로 못갑니다. 전도몽상 그것을 바로 봐버려야 바른길로 간다 말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몸뚱이나 우리 허튼 생각들이 다 무상하고 허망한 거라 말입니다. 사실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 눈으로 봐서는 명명백백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또 명명백백히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이라, 제법공 도리 여러분들『반야심경』에서 수 천 번 많이 하셨지요. 제법공이란 말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相은 모두가 비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제법공을 모르고 불교를 알 수 없습니다. 불교가 심오한 가르침인 것이고 방대한 가르침이지만 사실『반야심경』한 편만 바로 알면 다 알아버립니다. 상에 걸려서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상에 걸려서 우리가 바른 길로 못 나가는데 그런 ‘모든 상이 본래로 허망하다.’ 이런 것만 알아 버리면 불교를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우리 마음이 본래로 하나라는 본래고 비었다는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뭉쳐야 한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하이나 화두공안을 의심하거나 그런 공부가 다 좋은 공분데 그런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생각 생각에 연결돼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힘이 생긴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백일 동안 기도를 모시지 않습니까. 문둥병 환자도 기도 모시면 낫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문둥병의 병균도 역시 우리가 부처님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佛性으로 됐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제한된 눈이나 현대 현미경 가지고 보니까 문둥병의 세균이 따로 있는 것이지 깨달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문둥병의 균이나 폐 균이나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됐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외우는 것도 그냥 입으로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성 자리 우주의 근본 순수한 에너지인 불성자리를 인격적으로 표현할 때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 도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불법佛法을 생각할 때에 인격적으로 생각해야지 인격을 배제해 버리면 우리한테 큰 도움이 못됩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인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제한된 생명이 아니라 우주에 가득찬 생명입니다. 어떠한 공간 속에도 불성은 다 들어있습니다. 현대에 기를 말하는데 저도 병석에 누워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와서 기를 넣어준다 그럽니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기를 넣고 있으니까 안 넣어줘도 된다고 사양했습니다마는 우주에는 그런 에너지 기가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가장 순수한 상태가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입니다. 따라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떠한 병균도 불성이 다 근거가 된다 말입니다. 불성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그것 따라서 암 균이고 무슨 균이고 다 된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교를 믿을 때도 암 균이나 폐 균이나 그런 균들도 모두가 다 한결같이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졌다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가 근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상相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자리에서 근본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불성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서 공부하기 위해서 화두공안이 있고 또는 염불이 있고 합니다. 제가 너무나 말씀을 많이 드리면 저도 좀 피로하고 여러분들도 기억하기가 곤란스러우니까 제 말씀을 줄여서 얘기 드리겠습니다마는 그 불성자리 진여불성자리 여러분 우리 불자님들께서 꼭 중요한 술어만은 외우셔야 됩니다. 또는 자성이라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견성오도라는 것은 자성을 통해야 된다 말입니다. 자성이란 말은 불성이란 말하고 똑 같습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나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 자성을 깨달으면 이른바 견성이지요. 견성하면 그 자리가 그때는 오도라 도를 깨닫는단 말입니다. 우리의 영생불멸한 고향자리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원히 행복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바세계 고생바다에 있다하더라도 그 자리를 항시 그리워하고 동경해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고향을 잃어버리고서 방황하는 그런 길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있어야 고향에 빨리 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극락세계가 우리 마음의 고향이고 영생불멸하는 고향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흠모심과 그리움이 없으면 빨리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그 마음이 우리 종교심의 굉장히 소중한 힘이 됩니다. 『법화경』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심회연모갈앙어불心懷戀慕渴仰於佛’이라, 마음으로 극락세계를 연모하고 갈앙이라, 목마를 때 우리가 물을 찾듯이 어린애들이 젖을 먹고 싶어서 보채듯이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즉종선근卽種善根이라, 우리 선근善根이 더 깊어진 동시에 빨리 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 너무 많으니까 자칫하면 불교가 다신교多神敎가 아닌가 말입니다. 거기에만 그쳐버리면 다신교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 하나의 자리를 놓쳐버리면 불교는 참 기여하는 바와 같이 다신교로 타락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 많은 부처님의 명호名號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이름보고는 명호라고 합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란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다시 바꿔 말하면 법신불法身佛이라 하는 하나의 자리입니다. 하나의 자리에 왜 그와 같이 많은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이것도 또 의심을 품을 수 있겠지요.
그것은 하나의 자리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다던가 그러면 모르겠지마는 자비도 있고 지혜도 있고 별스런 공덕이 다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을 다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문수보살’, 이와 같이 이름이 붙는 것이지 사람 김가 박가 모양으로 뿔뿔이 있지 않단 말입니다. 만약 뿔뿔이 있으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교는 다신교가 되겠지요. 미신 같은 종교가 되지요. 그래서 우리 불교인들이 아주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부처님 사상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법신法身이나 법성法性이나 진여眞如나 실상實相이나 실제實際나 중도中道나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근기가 다른 만 중생을 제도하고자 해서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신묘한 순수에너지 순수생명으로 해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닷물에 비유하면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바다는 불성에 해당하고 바람 따라서 일어난 파도는 만 중생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파도가 친다 하더라도 물의 성품은 조금도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주에는 진여불성의 바다라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인데 진여불성 위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작은 파도 또는 큰 거품, 작은 거품 같은 것이 제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똑같은 다 물입니다. 물 성품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되나 개가 되나 또는 지옥중생이 되나 다 모두가 불성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람은 제법 똑똑하니까 불성이 되고 지옥이나 축생 존재 같은 것은 불성으로 안 됐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적인 인식 범위에서 말하는 것이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옥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에서 영원히 못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들어가서 금생에 또는 다생에 지은 업장만 녹으면 푹 이렇게 쑥 올라온다 말입니다. 불교는 어느 누구나가 다 구제합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구제를 받습니다. 영원한 나락이나 영원한 지옥 가운데서 헤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부처님을 찾을 적에 이것 부르고 저것 부르고 관세음보살 여태까지 몇 십 년을 했어도 나무아미타불 좋아하는 분들은 그만두고 나무아미타불 부르라고 하고 또 지장보살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은 소용없고 지장보살만 부르면 도움이 되겠다하고 이래버리면 그때는 참 곤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아른바 ‘제경소찬 타재미타’라고 했듯이 무슨 뜻인고 하면 모든 경전, 모든 극락세계라든가 영혼의 세계에 대한 그런 법문 가운데서 ‘나무아미타불’에 관한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이른바 본사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제 아무리 부처님 이름이 많이 나열돼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근본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무’란 귀의한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바쳐서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이란 것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다 겸해 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법신과 말입니다. 또는 근본에서 이루어진 현상계 모두와 그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과 그 모두를 다 포함한 포괄적인 이름이 이른바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집안에서도 죽으면 부모님은 불교를 믿고 아들이나 딸은 기독교나 가톨릭을 믿는 집안 이 많을 것인데 그것도 신안의 자유인지라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기왕에 옳은 일이라면 가족적으로 똑같이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갈등도 적고 같이 기도 모시기도 좋고 그런다 말입니다. 또 같은 불교 내에서도 아들은 미륵존여래를 부르고 어버이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러면 피차 달리 부르게 되겠지요. 그런데 200부 이상 되는 불경 가운데 ‘나무아미타불’ 법문을 제일 많이 했어요. 법신, 보신, 화신을 포괄한 눈에 보이는 세계나 안 보이는 세계나 모든 존재의 모든 것을 다 포괄한 통합적인 명호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해왔는데 꼭 지장보살을 해야 한다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 지금 금강경 독송회에서는 또 미륵존여래를 부르라 그런다 그래요, 미륵존여래를 불러도 좋지요 좋으나 아까 말마따나 그 의미 자체가 개념 자체가 일체존재를 다 포괄한 일체 불호 부처님 명호를 다 포괄한 그런 이름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소리 내서 크게 할 때는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를 보태야 여섯 자가 돼서 음률이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고 참선을 주로 해서 묵묵히 참구 할 때는 ‘나무’를 빼버리고서 간단하게 ‘아미타불’만 화두 삼아서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되었던 간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200부 경론 가운데서 ‘나무아미타불’을 찬탄했단 말입니다. 찬탄하고 또 가장 많이 외우고......
신라 때 원효스님은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스님이 아닙니까마는 그 양반도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각 마을을 다니면서 목탁 대신에 두레박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창도하신 분 아닙니까. 의상대사도 마찬가지고 그 뒤에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옹스님이나 보조스님도 염불하셨고 서산대사는『선가귀감』에서 ‘심즉염불경계心則念佛境界’라, 마음은 부처님 경계에다 두고서 ‘억지불망億持不忘’이라, 간절히 생각하고 그런 우리 마음을 부처님 경계에다 두는 것을 잊지 말고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우리 입으로는 부처님 이름, ‘나무아미타불’을 분명히 불러서 조금도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부처님 경계에다 둔 그 마음과 또는 우리가 소리를 내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 그 이름과 이것이 합치가 딱 돼서 상응이 되어가지고서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팔십억겁八十億劫 생사대겁生死大劫이라,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팔십억이나 되니 얼마나 많은 무량세월입니까. 팔십 억겁 동안에 우리가 지은 죄를 다 녹이고서 그와 동시에 팔십억겁의 무량공덕을 성취한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다르게 부르신 분들은 억지로 제가 그만 두시라고 말씀은 않습니다. 내내야 그 자리가 그 자리니까 상관없으나 그래도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역설하셨고 한국 도인들도 그대로 해서 우리에게 역설을 했고 말입니다. 부르기도 좋고 또는 개념상 의미도 큰 ‘아미타불’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문수보살’이 다 그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혹시 누구라도 빠졌으면 모르거나와 그렇게 불러도 된다 말입니다. 그 옹색하게 미륵존여래라 뭐라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만 보면은 꼭 자기 식대로 할라 그래요 자기 식대로, 부처님 식대로 하고 정통 있는 도인들 식대로 하면 훨썩 쉬울 것인데 화두공안도 그래요 대혜종고스님이 나올 때까지는 대혜종고스님은 북송 때 분인데 나올 때까지는 화두공안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 양반이 재주가 좀 있어놓으니까 자기 식으로 참선은 꼭 화두공안을 들어야 된다. 이렇게 해서 화두공안의 체계를 세워 놓으니까 그 파가 중국에서 상당히 세력을 떨치니 꼭 그 파에서 하는 화두공안을 들어야만 이 참선이 된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 외에 임제나 벽제나 그런 스님들께서 하신 말씀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똑똑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보통 꼭 자기 식을 만들라고 해요. 그런데 그런 버릇이 지금도 있다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씀에 현혹 될 필요가 없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부처님께서 말씀을 많이 하고 또 도인들이 가장 우리한테 권고를 많이 하고 또는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거기에 포괄되어있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아까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극락세계, 극락세계의 교주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우주의 교주, 또한 동시에 우리 마음의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주인공과 극락세계의 교주와 전 우주의 주인공 자리는 똑 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자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습니다.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모양이 있어야 크다 작다 그러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생명자체 우리마음이 분명 있지만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법신 자리도 모양이 없지마는 우주의 본바탕으로 해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외우시기 바랍니다. 소리 내서 할 때는 ‘나무’를 보태서 ‘나무아미타불’ 하시면 하기가 쉽고 또 소리 없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시해서 말입니다. 참선 하는 하나의 공안으로 생각할 때는 ‘아미타불’만 하시면 되십니다. ‘아미타불’은 내 마음의 근본생명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이고 우리가 종당에 돌아갈 고향인 극락세계의 교주란 말입니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우리가 죽을 때에 설사 업장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10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란 것이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정말로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명호를 외우면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이 됩니다. 초월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이 아니면 모르거니와 우리 불자님들께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가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우리마음과 부처와는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분명히 살아있으니까 생명이 있는 것인데 이 마음도 역시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단 말입니다. 분명히 있지마는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또 부처님도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양을 나투신 부처님이신 것이지 참다운 부처님은 법신불 이른바 불성인데 그 부처님도 역시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나’다 ‘너’다 내가 김 아무개다 박 아무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비록 김 아무개한테 있는 마음이나 또는 박 아무개한테 있는 그 마음이나 원래 똑같이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은 법신 부처님, 불성과 똑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모양이 있고 물질이 돼야 한계가 있고 크다 작다 구분해 말할 수 있는 것인데 모양이 없는 것은 구분해 말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의 마음이든 간에 우주에 충만해있고 동시에 그것이 불성이기 때문에 만 공덕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능력도 자비도 지혜도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폐 균을 일으킬 수 있는 힘도 또는 나병의 균을 일으킬 수 있는 힘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돈 좀 버는 것이라든가 감투를 쓰는 것이라든가 그런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지요. 그러나 그런데다가 우리 마음을 잘못 써버리면 정말로 가야 될 고향 길을 더디게 가게 되는 것이고 또는 눈에 보이는 재물이라든가 명예라든가 그런 것에 우리 마음이 집착이 되어버리면 정작 해야 될 일을 못할 것이고 우리 업만 짓는 그런 것에다가 우리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고 또는 명예롭게 살고 재물도 있어야하고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도 소중하나 설사 명예를 구하고 돈을 구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마음자세는 항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성자의 가르침대로 다 따라 간다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러서는 몽땅 다 부처님 가르침만 따르는 쪽으로 우리 생명의 길을 그쪽으로 돌려야합니다. 그쪽으로 회향해야 한단 말입니다. 성불로 회향하고 정말로 참 극락세계로 회향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는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연해서 말씀드릴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으나 우리가 부처님 명호를 외인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소리 내서 하기에 거북할 때는 소리 안내고라도 생각생각에 염불을 하려고 않더라도 저절로 나오는 정도로 한문투로 하면 불념이념이라 생각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생각이 나온다 말입니다. 오랫동안 한 사람들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화두공안을 들어도 오랫동안 들다보면 결국은 불거이거라 화두를 안 들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진다 말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익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익어져야 그래야 액운을 이긴단 말입니다. 병고도 이기고 그때는 액운을 이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은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만능의 자리입니다. 만능의 자리이기 때문에 재수나 운수는 별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로 다 귀의해서 말입니다. 그 쪽으로 하시면 집안 식구도 다 그런 쪽으로 온 가족이 합심해서 하나의 그런 부처님 명호로, 기독교 믿는 집안은 하느님 부르고 다른 이름 부르고 그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지금 20억 수가 있는 것은 그 신앙이 단순소박하단 말입니다. 불교는 너무 다양해서 복잡하니까 이럴까 저럴까 다 헤맨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했고 극락세계의 교주고 또 내 마음의 내 본 주인공 자리의 이름이고 말입니다. 전체 우주이름인 것이고 그러한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로 해서 통일을 해 나가십시다. 그것이 굉장히 우리한테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까 여러분이 입정하실 적에 보리방편문, 보리방편문도 그런 도리여요.
우주의 순수 생명자리인 법신불法身佛, 또는 법신불에 들어있는 만 공덕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만 공덕 자리가 보신報身인 것이고 그 자리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 천체만물이 화신化身인 것이고 말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을 합한 것이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금생에 얼마나 바쁘고 할 일도 많습니까.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네 도인들이라던가 불경에 가장 말씀을 많이 했고 부르기도 좋고 최상의 이름입니다. 최상의 개념입니다. 차를 운전할 때라든가 어느 때나 중단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돼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염불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고 또는 순간찰나에 교통사고를 당할 것인데 항시 염불하고 있으면 신장들이 자기한테서 못 떠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몽수경도 읽고 그러시지요.『몽수경夢授經』에 천라신天羅神 지라신地羅神이라, 우리가 염불하면 공간에 있는 신이나 또는 땅에 있는 신들이 우리를 못 떠난단 말입니다. 염불 소리를 듣고서 우리를 지킨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정말로 신비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하기에 메여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생활이란 것은 아들한테나 딸한테나 어버이한테나 또는 자기 친척한테나 친구한테나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아미타불’이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인공인 동시에 너의 주인공도 되는 것이고 또는 바로 우주의 주인공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염불 많이 하고 극락세계에 갈 때는 성중내영聖衆來迎이라, ‘아미타불’과 보살들이 우리를 마중 나온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신비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안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부정을 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다 도인들이나 부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이니까 말입니다. 생각 생각에 염불을 많이 하셔서 금생에도 행복하시고 또는 금생인연이 다하면 그냥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살아 놓으면 지옥이나 아귀나 뚝 떨어지는 것인데 죽음은 기약이 없습니다. 내일 갈지 모레 갈지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나이 많다고 해서 꼭 빨리 가고 나이 젊다고 해서 늦게 가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허망한 몸뚱이 무상한 몸뚱이는 가고 마는 것인데 간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 훤히 우리 갈 길을 알아야 됩니다. 제 아무리 안개가 오리가 아니라 몇 백리가 끼었다 하더라도 우리 갈 길은 극락세계라 말입니다. 훤한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바로 광명세계입니다. 빛으로 빛나는 세계란 말입니다. 현대물리학도 미세한 단계에서는 모두가 광명이란 말입니다. 전자나 양자나 모두가 하나의 방사광명입니다. 우주란 것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 있어요. 우리 인간이 망령된 ‘나’라 하는 것에 얽매여 있어서 안 보일뿐입니다. 명명백백히 존재하는 우주는 참 광명의 세계인데 우리 인간 중생들이 자기라 하는 잘못 본 망령된 망아妄我 때문에 자기 몸뚱이에 집착하고 자기 관념에 집착하고 그런 망령된 생각 때문에 본래 갖추고 있는 극락세계를 광명세계를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정말로 빠짐없이, 또는 끊임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것은 간단한 가운데 지속을 시키는 끈기로 해서 마음이 하나로 딱 통일이 되고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니까 우리의 본래 주인공을 체험을 못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일념이 돼서 정말로 통일이 되면 그때는 삼매三昧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삼매란 말도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란 것은 산란스런 마음을 잡아서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머무는 것이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체험합니다. 삼매에 못 들어가면 말로는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체험을 못한단 말입니다. 체험하기 위해서는 꼭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는 공부,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주문이면 주문을 오로지 일념으로 외운다 말입니다. 그래야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어야 우리의 본래 불성자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로 원래 갖추고 있는 행복을 스스로 만 유감이 없이 빠짐없이 스스로 수용을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2001년 2월7일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 아미타불
스님의 말씀 고이 아로새겨갑니다.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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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청화대선사님의 주옥같은 말씀 가슴으로 새김니다.
뜻깊은 말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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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인연공덕이 불민하여 이생에서 큰스님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큰 스님은 극락왕생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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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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