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를 안동, 묵호, 서울 등 모두 세 군데에서 다녔다. 처음 입학한 곳은 경북 안동 시내에 있는 옥동국민학교(현 서부초등학교)였는데, 1952년 4월초에 입학하여 한 달도 채 다니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 두었다. 자그마한 학교 건물은 초가로 지붕을 이었고, 아직 6․25전쟁 중인지라 인민군 탱크가 부서져 녹슨 채로 운동장에 가로 놓여 있어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곤 하였다. 집 옆으로 개울이 있고, 개울을 건너면 바로 학교여서 한 번도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철조망 사이로 등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4월말 철도국 사무관이셨던 아버지께서 안동철도국으로부터 삼척운수국으로 전근 발령을 받아 묵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트럭 뒤에 가득 이삿짐을 싣고, 짐 위에 앉아 곳곳에 피어 있는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도계를 거쳐 묵호로 갔다. 진달래는 전장에서 흘린 피만큼이나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때 처음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보았고, 우리 산천이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산은 헐벗었고, 트럭 위로 불어대던 바람이 아직 차가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묵호로 이사한 후 바로 전학수속을 밟지 않은 채 1년을 집에서 놀았다. 아직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 한데다가 겨우 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동부전선이 멀지 않은 탓으로 밤이 되면 쿵쿵거리는 대포소리가 온 도시를 낮게 울리곤 하였다. 그해 7월의 휴전을 앞두고서는 대포소리가 더욱 잦아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대포소리는 늘상 어린 가슴에 쿵쿵 소리를 내고 지나갔고, 불안감으로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1년 후 여덟 살이 되어서 다시 묵호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무명으로 된 검정 교복에 머리는 빡빡 깎은 모습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비하면 덩치가 제법 컸다. 그래서인지 공부도 남에게 전혀 뒤지지 않아, 이 무렵 시험 성적이 평균 100점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학교 건물은 군에 징발되어 제59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들은 묵호역 앞 광장에 천막을 치고, 맨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엎드려 수업을 받았다.
우리 학급의 급장은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였는데, 옷은 언제나 신사복에다가 빨간 넥타이를 단정하게 맸으며, 머리 모양도 우리와는 다른 하이칼라 스타일이었다. 공부는 잘 하지 못했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었다.
우리들은 그 아이가 어떻게 급장이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를 비롯한 말썽꾸러기들은 공부 못하는 급장, 몸집이 작은 급장을 자주 괴롭혔다. 그래서 담임선생으로부터 미움을 많이 샀다. 담임선생은 나를 특히 미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급장의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 왔다. 급장의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와는 차림새가 달랐다. 화려한 꽃무늬의 투피스에 화장을 짙게 했고, 퍼머 머리에 핸드백을 팔에 걸었으며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여자를 바로 선녀라고 하는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고, 지금껏 미인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그런 급장의 어머니 앞에서 얼굴이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담임선생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왜 그 아이가 급장이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후 급장의 어머니가 삼척 비행장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 말썽꾸러기들은 급장이 나타나기만 하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런 노래를 부르며 그를 놀려댔다.
양, 양, 양갈보를 바라볼 때에
호박 같은 낯짝에다 분을 바르고
오-케이 쌩-큐 유 남버 원
하루에 돈 십만 원 문제없어요.
당시 널리 알려진 군가를 개사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면 급장은 우리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이처럼 담임선생의 미움을 산 나는 여름방학 때 60명 중 49등이라는 참담한 통신부를 받아들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런 나의 통신부와 100점짜리밖에 없는 시험지 묶음을 들고 학교를 찾아가 교장 선생님께 항의를 하셨고, 그 날 저녁 교장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께 사과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일로 담임선생은 옥계 분교로 좌천이 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 악동이었던 내 행동이 빚어냈던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휴전조인이 성립되어 2학기부터 우리는 본래의 학교 건물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화장실을 갈 수가 없었다. 화장실 변기 아래에는 수술을 하여 잘려진 팔 다리가 그대로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학생들은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오줌을 누거나 가까운 집에 달려가서 오줌을 누고는 다시 학교에 오기도 하였다. 그 후 2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얼마 전 가을에 혼자 동해안을 여행하다가 묵호의 옛집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일본식 건물의 철도관사는 헐리고 그 자리에 2층의 붉은 벽돌집이 서 있었고, 마당 한 곁에 있던 놀랍고도 큰 벚나무도 베어지고 없었다. 대문 근처를 어정거리던 나는 주인으로부터 냉수 한 사발과 연시 두 개를 대접받았고, 대문 앞에서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두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같은 반 동창이었음을 확인하고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눈 다음, 귀경하기 위해 서둘러 다음 여정을 잡았다.
50여 년 전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괜히 악동 노릇을 하던 그 시절 내 모습을 묵호 앞 바다의 허허로운 바람결에 모두 날려 보내고 싶다. 겨울이면 푸지도록 내려 쌓여 봄이 되어야 겨우 녹기 시작하는 묵호의 눈처럼 그 시절의 기억은 더디 녹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림을 제법 잘 그려 화가를 지망했다. 그러다가 서울로 이사하여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가난하고 외로운 시골 출신 학생은 책을 가까이하고, 작가의 꿈을 꾸었다. 이제 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문단의 말석에 겨우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좋은 소설 몇 편을 남기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고교와 대학시절 습작한 소설 10여 편으로 스스로를 달래기엔 아쉬움이 너무 크다. 한국전쟁 시절, 묵호에서 보낸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토대로 멋진 소설 작품을 한 편 남기고 싶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첫댓글 글을 좋아 하시니.... 글재주가 있다는 것이지요 ㅎㅎ
-겨울이면 푸지도록 내려 쌓여 봄이 되어야 겨우 녹기 시작하는 묵호의 눈처럼 그 시절의 기억은 더디 녹는 모양이다.-선생님의 기억속에 시리도록 쌓이는 하얀 눈은 오래도록 녹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생채기를 내듯 가슴에 켜켜이 쌓이던 회한 같은 것 이겠지요. 아마 제가 태어날 무렵 쯤 초등학생이셨을 선생님의 시대적 아픔은 동참하지 못합니다만 충분히 글을 쓰실 수 있는 서러움과 그리움들이 육화되어 멋진 작품으로 탄생되시길 염원해봅니다.
문단 말석에 끼어계시니 훌륭한 작품이 나올듯합니다.좋은글 쓰셔서 글재주 없이 읽기만을 고집하는 저희들에게 즐거움을 주실줄 믿겠습니다.위의글도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즐겁게 읽었습니다.건강하시고 건필하소서~~~
라디오 프로였는데, 어나운서가 "다시 태어나면 무슨 일 하고 싶습니까?" 하고 물으니 80세가 넘은 노교수가 이렇게 대답하는 걸 들었습니다. "소설을 쓸 것입니다." 천형이라고 하나요? 결국 소설도 쓰셔야 할 것입니다. 물론 평론가로 활동하시지만, 그래도 소설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관까지 가져가는 천형을 조금이라도 치유하시려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괜한 소리 드려봤습니다.
정말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저편을 담담하게 엮으신 실력은 훌륭한 소설가가 되시고도 남겠습니다. 우천님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다양한 소통으로 이루어질 소설적 구성 조건이 충만해 보입니다. 꿈을 반드시 이루세요. 삼년 전 묵호항에서 출발하는 페리 편으로 울릉도를 가려고 묵호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도계역의 이상한 (?) 철로 진행방향을 보고, 신기하게 느겼어요.창 밖으로 보이는 태백산 줄기의 뛰어난 경치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느낌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득한 그 시절의 이야기 참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