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참 자상한 분이셨다.
지금도 때때로 아버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
그럴 때면 눈앞에 떠오르는 아버지는 항상 방 한 구석에서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일본어로 된 책인데
칼라로 큰 배추며 각종 채소가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아마도 고등소채에 관한 책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에 밀양농잠학교를 졸업하시고 잠시 공무원을 하시다
고등소채 농사를 지어오신 터라 항상 연구를 하며 책을 가까이 하시던 모습이다.
그런 모습이 자식교육이 되어
나는 아직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도록 책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별로 없다.
여름철이 지나고
김장 채소 종자를 뿌릴 무렵이면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형아,」
「예?」
「올해는 내가 1관 나가는 배추를 꼭 생산하고 말끼데이..」
「예..」
그러던 어느 해에
과연 우리 배추밭에는 어린 나의 아름으로는 안지도 못할 큰 배추를 볼 수 있었다.
지금 밀양 들판을 뽀얗게 뒤덮고 있는 비닐 온실이
당시에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우리 집에는 지금의 비닐로 만든 온실 대신에
창호지에 들기름을 먹여 만든 온상이며 온실이 있어서 겨울에도 고등소채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아침에 온상을 덮은 가마니를 벗기고 저녁이면 다시 덮는 일이 일과였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한마디로 진취적이고 유능한 농사꾼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마는 자식사랑도 남다르셨다.
고추농사를 지어
부산 청과시장에 내다 팔고 오실 때에는 항상 연필이며 공책을 사다 주셨다.
나는 그런 선물보다는
아버지가 사다주시는 큰 눈깔사탕이 더 좋았다.
한 입에 넣으면
한나절은 녹여 먹을 수 있는 큰 사탕이었다.
가게가 없던 우리 동네에 살면서
그런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아이는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부산 청과시장에 가셨다 돌아오실 즈음 나는 마중을 나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눈깔사탕 때문이다.
나는 멀리 천일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가고 있었다.
당시 나의 걸음으로는 상당히 멀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정류장이 거의 눈앞에 보일 때쯤 저만치 골목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고 계셨다.
얼마나 반가웠든지...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마중을 나오는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형아.」
「예?」
「니는 나중에 커서 육군사관학교 가거래이.」
「예? 와예?」
「사관학교는 몸도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은 사람들이 가는 학교니까 그렇지.」
「예.」
나는 깡충깡충 뛰면서
큰 눈깔사탕을 한 입에 문 채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섯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하나는 사관학교에 갔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혹 한 번씩 어머니와 함께
우리 형제들 몰래 밤 외출을 하셨다.
외출이라 해봐야 당시로서는
읍내에 있는 한양극장 구경이 고작이었다.
당시 극장에서는 본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대한뉴스인가 리버티뉴스인가를 상영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뉴스에 나오는 졸업식 하는 사관생도들의 늠름한 모습을 아버지는 부러워하셨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항상 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장래의 꿈이 되어버렸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무렵 어느 날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몇 달 전부터 무슨 중병을 앓고 계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고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만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체능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멀리뛰기, 공 던지기, 턱걸이, 달리기 중에서 턱걸이가 제일 자신이 있었다.
지도 선생님의 지시를 받으며
턱걸이를 하는 철봉대 앞으로 갔다.
밀양중학교 철봉대는
학교 담 너머로 다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나는 만점인 아홉 번을 하고도 몇 번이나 더 해서
감독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할 때서야 비로소 철봉을 놓고 내려왔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가 방에 누워 계시다 나를 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형아. 오늘 시험 잘 쳤나?」
「예.」
아버지는 또 빙그레 웃으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나를 데리고 강둑으로 나가셨다.
「형아.」
「예?」
「음....」
아버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습이셨다.
한참을 머뭇거리시다 다시 말을 이으셨다.
「형아. 이제 아버지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우짜마 좋겠노…….」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니가 턱걸이를 잘하는 거 보는 순간이었단다.
다른 아이들은 두 개도 못해서 낑낑대던데…….」
아버지는 병든 몸을 이끌고
입학시험을 치르는 자식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오셨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몰래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줄곧 방에 누워만 계셨다.
한 번씩 읍내 제중병원 원장 선생님이 왕진을 왔다 가시면
어머니는 그분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셨고 그 때마다 표정이 침울해지시거나
눈물이 글썽거리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쯤 나는 비로소 암이라는 병을 알게 되었고
우리 아버지가 그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음력 오월 단오절 무렵이었던가 싶다.
밀양공설운동장에서는 소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도소 김해소 밀양소 그리고 멀리 진주소까지
몽땅 밀양공설운동장으로 다 몰고 온 느낌이었다.
한창 소싸움을 구경하고 있는데
동네형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찾으러 다녔다.
「형아!」
관중들 속에서 나를 발견한 그 형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소리쳤다.
「형아, 빨리 집에 가자!」
「형, 와 그라노?」
「좌우지간 빨리 집에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 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형, 무슨 일이고?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나?」
「그냥 집에 가보마 안다.」
마을입구에 도착하니
멀리 보이는 우리 집 지붕 위에 흰옷이 던져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부근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사람의 죽음에 관하여 생각을 해 보거나
목도한 적도 없었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눈을 뜨신 채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계셨다.
그리고 옆에서 엄마며 누나들이 목놓아 울고 있었고
멋모르는 젖먹이 동생들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인간의 죽음을 만났던 것이다.
나는 저절로 울음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그렇게 눈도 감지 못하고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리 형제들 곁을 떠나셨다.
어린 여덟 남매를 두고
머나먼 길을 홀로 떠나야만 하는 한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린 여덟 남매를 아내에게 맡기고
외로이 떠나야만 하는 한 남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린 자식들이 감당해야할
고난의 세월만 남긴 채 떠나야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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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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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02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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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한 잔 했습니다. 문득 아버지 생각에 적어 본 글인데.... 이런 글 올려도 되는가 모르겠네요..허허허..
내 나이 다섯 살 때 4남매를 두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현성님! 우리가 그 나이가 되고 그 나이를 훌쩍 넘고 보니 후회와 아쉬움만 남았습니다. 허허허...
현성선생! 우린 그나이 넘었으니 우리 잘해봅시다. 그때를 생각하면서....글 잘 올렸습니다.
고난의 세월을 극복하시고 이제는 휼륭한 아버지로 계시는 당신께 심심한 격려의 박수 보냅니다...
팔순을 사시다 가셔도 막내라는 이유로 그립기만 한데 현성님 마음 간절하시겠지요 여덟남매를 위해 사신 어머니의 지극정성으로 오늘이 있음에 심심한 격려를 보냅니다...
현성님네 집안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나이기에 이 글을 읽는 감회 또한 남다르다. 그,의 집이있던 "진장"과 내가살던 "상청동네"는 지호지간의 거리.... 이 글을보니 나 역시 아버지 생각이.... 우리가 벌써 이만큼왔소이다, 그려.......
제 코끝이 찡합니다. 하지만 현성님은 부자십니다. 아마 현성님도 선대인의 교육으로 훌륭한 아버지 임에 틀림없다 여겨집니다. 선친 생각을 할 수있는 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기억은 언제나 채우지지 못한 빈가슴처럼 아려오기만 합니다. 많은 생각과 나의 부모역활을 생각합니다. 좋은글 감사. 행복한 시간 되시길...
현성님의 자상한 성품이 선친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성님의 글로 해서 편찮으신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좋은저녁 되세요.
글을 읽다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많이 힘든 어린시절을 보내신 님, 많은자녀, 부인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야하는 그 암담한 마음에 눈이 감길리 없으셨겠지요이렇게 훌륭히키워주신 장하신 어머님을 떠올려봅니다 수많은 외로움과 힘드셨던 많은날들...아름다운 심성으로키워주신 어머니께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제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저는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꼭 껴안았습니다. 이번에도 한국에 가면 아버님을 꼭 껴안아 보겠습니다....감사합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잘해야 하는데 왜이런지...깊이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