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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原子爆彈, atomic bomb, Atombombe]
핵병기의 일종으로,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 등의 핵분열성 성질을 이용,
핵분열의 연쇄 반응(핵연쇄 반응)을 순간적으로 실시하여 그때에 방출되는
팽대한 에너지를 이용하는 폭탄. 줄여서 원폭이라고도 한다. 1kg의 우라늄
235가 전부 핵분열하면 TNT 화약 2만톤의 폭발에 상당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핵분열 연쇄 반응은 아주 짧은 시간(약 10-7초 이내)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부인 우라늄 235가 핵분열을 하지 않는 동안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연쇄 반응이 정지한다. 이렇게 해서 정말 소폭발에 머무르며 폭발해서 손실한
것을 피즐(英 fizzle)이라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쇄 반응은
고속 중성자만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중성자의 감속에는 10-3초
정도의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자 폭탄의 경우는 원자로와 달리
감속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 폭탄의 재료는 아주 순수한 핵분열성 물질
(예를 들면 100% 농축한 우라늄 235)이 필요하다.
원자 폭탄의 경우에도 원자로와 마찬가지로 임계 질량이 있어서, 핵분열성 물질량
이 이것 이하이면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원자 폭탄의 구조는 2개의 임계
에 가까운 핵분열성 물질의 덩어리를 처음에는 떼어두고, 폭발시킬 때에는 화약
등의 힘으로 순간적으로 1개의 덩어리를 다른 쪽으로 내던져서 임계 질량 이상
으로 하여 폭발시키려는 구조가 생각되고 있다. 원자 폭탄은 미국, 영국, 캐나다
3국의 협력에 의해 5년의 세월을 들여서 1945년 6월에 미국 Los Alamos 원폭
연구소에서 완성하여, 같은해 7월 16일 New Mexico에서 실험했다. 같은해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일거에 양 도시를 파괴했다.
히로시마에는 우라늄 235,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 239를 이용했다. 원자 폭탄의
효과는 충격파에 의한 파괴, 열복사에 의한 연소 및 화상, γ선 및 중성자에 의한
방사선 장해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은 지상 수백 m인 곳에서
폭발했지만 폭심 바로 밑에서는 폭풍의 강도는 초속 수백m, 열복사선에 쪼인
표면 온도는 한순간 3000℃에 달하며, 또 방사선의 강도는 약 105뢴트겐에
달했다. 원자 폭탄은 대포의 포팅으로서 쏠 수 있는 소형의 것도 만들어지고
있다. 또 원자 폭탄의 폭발시의 고온을 이용해서 수소 등의 열핵반응을 일어
나게 하는 수소 폭탄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원자 폭탄의 수백배의
폭발력을 갖고 있다.
출처:(화학대사전, 2001. 5. 20., 세화)
인류 최초로 일본에 원자폭탄투하[原子爆彈投下]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廣島)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일. 원자 폭탄은 우라늄·플루토늄
등의 핵분열에 의해 얻어지는 거대한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으로서
, 45년 7월 16일, 미국이 뉴멕시코에서 세계 최초로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전후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다.
피폭 직후의 조사에 따르면, 히로시마에서는 인구 33만 명 중
7만 8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 3만 7천 명, 행방불명 1만 4천 명, 기타
피해자 17만 7천 명, 건물 7만 호가 반 이상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나가사키에서는 인구 27만 명 중 사망 2만 4천 명, 부상 4만 1천 명,
행방불명 2천 명, 기타 피해자 17만 7천 명, 도시 전체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중에는 한국인 수만 명을 비롯하여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존자의 정신적·육체적·사회적 고통은 매우 심각하여 현재
까지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 피폭자와 그 2세·3세들은
일본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로 아무런 국가적 보상이나 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2차 세계대전중 미국의 극비 사항이었던 위장되어져 있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보잉 B-29 폭격기 생산 공장 - 1945년
미국 B-29 폭격기 생산 공장
B-29 폭격기에 적재시킬 폭탄을 검사하는 미해병 대원들 - 1944년 사이판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공군 B-29 폭격기의 폭탄 적재
미 공군 468 폭격 연대 소속 B-29 폭격기의 버마 랑군 일본군 기지 폭격 - 1944년 11월 3일
본토 폭격의 임무를 띄고 처음으로 일본으로 출격하는 B-29 폭격기 편대 - 1944년 9월
일본 본토 폭격후 기지로 귀환하는 B-29 폭격기 - 1944년 12월 사이판
필리핀 마리애나 제도에서 이륙하여 일본 본토 폭격에
나서는 미 공군 B-29 폭격기 편대 - 1945년 초기
일본 도쿄를 폭격하는 B-29 폭격기 편대
B-29 의 소이탄 폭격에 화염에 휩싸인 도쿄 - 1945년 3월 9일
B-29 폭격기의 폭격 이후 도쿄 - 1945년 3월 10일
1945년 3월 9일 야간 폭격에는 300대의 B-29 폭격기가
출격하여 소이탄 1700톤을 도쿄에 쏟아 부었다.
이 폭격으로 일본인 10만명이 소이탄에 의해 불타 죽었다.
B-29 폭격기의 소이탄 폭격후의 일본 도쿄 - 1945년
B-29 폭격기의 요코하마 폭격 - 1945년 5월 29일
B-29 폭격기의 오사카 폭격 - 1945년 6월 1일
B-29 폭격기의 일본 고베 항구 폭격 - 1945년 6월 4일
일본 고베 상공의 B-29 - 1945년 7월 17일
일본 도쿄로 폭격을 나서는 미 공군 제 73 폭격 대대의 B-29 폭격기 - 1945년 7월 3일
일본 주요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든 지옥의 괴조 B-29 폭격기의 융단 폭격
B-29 폭격기의 야간 소이탄 폭격에 불바다가 된 일본 도야마 - 1945년 8월 1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시킬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적재시키는 B-29 폭격기 에노라 게이(Enora Gay) - 1945년 8월 6일
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미국령으로 지대가 평탄한 티니안 섬은
일본 남쪽 2,500km 지점에 위치하여 이 섬 면적의 절반 이상이 항공기지로 사용되었다.
1944년 일본군은 본토의 형무소에서 강제로 동원한 1,000명과 도민및
어린이들까지도 동원해서 섬 북부, 중부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바다의 생명선으로
절대 방위권으로 설정되어 육군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기지는 결국 미국으로 넘어가고 일본 본토 공습의 발판이 되었다.
핵폭탄 Mark 1형은 일명 리틀 보이(Little Boy)였다.
이 원자폭탄은 약 50kg의 우라늄235로 TNT 폭탄 15,000톤(15 kiloton)에 해당하며,
피폭 핵심지의 순간 온도는 3,000-4,000도의 고온에 달했다.
당시의 히로시마의 인구는 약 35만 명으로
이중 사망자는 약 13만 명이였다.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
길이 3m, 지름 0.73m, 무게 4톤(TNT 15,000톤에
해당)으로 외형이 가늘고 긴 모양으로 인해
리틀 보이(Little Boy)란 애칭으로 불린 원폭이었다.
B-29의 통상 TNT 폭탄 적재량은 5톤으로 B-29 폭격기의
3,000기분의 통상폭탄이 한 번에 투하된 것에 상당하는 셈이다.
비교한다면 도쿄 대공습 때인 1945년3월10일의 공습한 B-29 폭격기는 344기였다.
이때 투하된 폭탄(소이탄)은 총 1,720톤이었다.
따라서 히로시마 원폭(TNT 15,000톤)은 도쿄 대공습의 약 9배 상당 규모의 에너지를
도쿄의 10분의 1 정도의 도시에 일시에 투하하여 방출한 결과였다.
이때 경시청의 사망자 통계에 의하면 8만 3,793명이었다.
이때의 사망자 중 히로시마 시내에는 미군 포로 1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나
전원이 원폭으로 인해 피폭사했다.
이 포로들은 7월28일 히로시마(廣島)와 야마쿠치(山口)에서 추락한
미군폭격기 B-24(타로아호, 론삼레이디호 등)의 승무원으로,
헌병 사령부가 있는 히로시마(廣島) 시내에 이송된 직후의 피폭이었다.
유일하게 론삼레이디 호의 기장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동경으로 재이송되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일본 프로야구 선수였던 하리모토(張本 勳, 한국명
장훈(張勳)의 누님은 이때의 피폭이 원인으로 사망했으며,
당시 장훈의 부친은 기차 화통속에서 작업을 하다가 원폭이
폭발하여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장훈 자신도 원자폭탄의 피폭을 당해
일본 프로야구 선수로서는 유일한 원폭의 피해자 수첩을 소지한 사람이었다.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
투하 작전에 출격 했던 B-29 폭격기 에노라 게이(Enora Gay)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 투하후 마리아나 제도의
미국령 티니안섬으로 귀환 하는 B-29 폭격기 에노라 게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에 참가한 것은 6기의 B-29 폭격기였다.
8월6일 0시37분 먼저 기상관측기 3기의 B-29가 이륙했다.
B-29 Straight Flush호는 히로시마(廣島)에,
B-29 Full House호는 나가사키(長崎)에,
B-29 Jabit 3세호는 코쿠라(小倉)에,
그리고 0시51분에는 Top Secret호는 이오우지마(硫黃島)로 향했으며.
다음에는 1시45분 핵폭탄 「Mark 1」을 탑재한 Enola Gay호가 이륙했다.
1시47분에는 원폭의 위력을 위한 과학관측기 B-29 The Great Artiste호가,
2분 후에는 사진촬영기 Necessary Evil호가 이륙했다.
티니안(Tinian)도에서 목표 히로시마(廣島)까지 약
7시간의 비행으로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였다.
폭격후, 14시58분 에노라 게이호와 13명의 승무원은 티니안(Tinian)에 무사히 귀환했다.
전략 공군사령관인 칼 스파츠 소장(Carl "Tooey" Spaatz, 공군대장으로 전역)으로부터
티베트 대령은 영예 십자장이 다른 12명은 은성장의 훈장이 각각 수여됐다.
에노라 게이 B-29 폭격기 대원들
1945년 8월 6일 국령 태평양의 괌(Guam)의 미 제20항공 군사령부에서,
티니안(Tinian)의 제509 혼성부대에 극비 야전명령의 전달과 함께 작전은 시작됐다.
현재 미국 자치령이며 사이판에서 8km의 거리에 있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 중에 하나인 티니안(Tinian)에서 폴 티베트 대령이
조종하는 원폭 투하작전용으로 개조된 총 14기 중의 하나인
에노라 게이(Enola Gay, 기체번호 44-86292)라고
명명한 B-29 장거리 통상 폭격기를 포함한 총 6기가 참가했다.
오전8시15분17초, 이중 3기가 히로시마(廣島) 상공에 진입하여
에노라 게이(Enola Gay)는 고도 9,632m에서 핵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자동투하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시킬때 촬영기는 컬러 필름으로 촬영을 했으나
티니안에 귀환 후 현상에 실패하여 중요한 이 기록들은 전부 소실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폭발 약 3분간 후에 다른 비행기의 과학 조사팀의 리더
하롤드 아그뇨에 의한 8mm 카메라로 찍은
버섯구름의 영상이 세계 처음으로 원폭이 투하된 장면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 되었다.
B-29 폭격기의 애칭인 에노라 게이(Enola Gay)란 이름은
모친 (에노라 게이 티베트)의 이름이 유래이다
B-29 에노라 게이에서 투하되어 폭발한 원자폭탄 -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폭발한 다음날 초토화된 히로시마 시의 모습 - 1945년 8월 7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 패트 맨(Fat Man)
Mark 3 형의 이 핵폭탄은, 길이 3.5m, 지름 1.5m, 무게 4.5톤으로
외형은 히로시마의 것과 비교하여 통통한 비만형으로 인해
[Fat Man]이란 애칭으로 불린 원폭이었다.
플루토늄 239로 TNT 폭약 22,000톤(22 kiloton)으로
히로시마(廣島) 원폭의 1.5배에 해당한다.
당시의 추정인구 24만 명중 사망자 약 7만 4천명과 건물은 약 36%가 전소 혹은 파괴되었다
B-29 폭격기의 조종사 챨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소령은,
히로시마(廣島) 원폭의 실행자이며 같은 비행대의 사령관인
폴 티베트(Paul Warfield Tibbets Jr.) 대령으로부터 원폭 투하작전의 실행명령을 하달받았다.
티니안(Tinian)에서 출격한 미군 제509 혼성부대 소속의
원폭 투하작전용으로 개조된 14기 중의 총 6기의 폭격기가 출동했다.
B-29 장거리 통상폭격기 벅스카(Bockscar, 기체번호 44-27297)의
조종사 챨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소령에 의해
오전 11시2분, 나가사키(長崎)의 상공 고도 9,000m 상공에서
핵폭탄 「Mark 3」 일명 「Fat Man」 을 수동 투하했다.
이것은 실전에 사용된 2번째의 핵폭탄이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제2의 원자폭탄 패트맨(Fat Man)를
투하시키기 위하여 나사사키로 향하는 B-29 폭격기 벅스카(Bockscar)
벅스카(Bockscar)는 "Bocks Car " 혹은 "Bock's Car
"로도 불리며, 실제 기체에는 "Bockscar"로 되어 있다.
원래 이 비행기의 조종사 Frederick C. Bock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조종사 챨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소령은 관측기 B-29(The Great Artiste 호,
기체번호 44-27353)의 조종사 였으나
기상관측 장비와 원폭 장비의 교체 적재 등으로 시간이 소요되므로
동료인 Frederick C. Bock의 비행기로 출격했다.
원폭 투하후 폭격 지점을 벗어나면서 B-29 폭격대원이 촬영한 나사가키 원폭의 버섯구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버섯 구름
나가시키에 대한 원자폭탄의 폭격실행은 실수로 고도 12,000m까지 상승하여
폭격항로 이탈등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오전9시44분 제1원폭 투하 목표지점인 코쿠라(小倉, 現 北九州市小倉北) 육군 병기공장의 상공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폭격수 카밋트 비한 (Kermit K. Beahan)의 투하 목표지점 확인이 실패했다.
또다시 투하 목표지점 확인을 위해 비행 했으나 또 실패 했다.
이때 소요된 시간은 대충 45분으로 폭격 타이밍의 실패로 연료의 여유가 없었다.
벅스카(Bockscar)의 연료 계통에 이상이 발생하여 예비 연료로 전환했다.
이 동안 기후가 악화, 일본군 고사포의 대공 공격이 심해졌다.
또, 육군 아시야 기지(芦屋基地)에서 비행 제59전대의 5식전투기, 해군 쯔이키 기지 (築城基地)에서는
제203항공대의 영식 함상전투기(零戰) 10기가 긴급 발진해 온 것을 확인한다.
B-29 폭격 비행대는 오전 10시30분경 원폭투하 제1목표 도시를 포기하고 현 상공을 이탈했다.
약 20분 후 원폭투하 제2목표인 나가사키(長崎) 상공에 진입하여 공업지대를 임시목표로 핵폭탄은 투하되었다.
원자폭탄이 폭발한 다음날의 초토화된 나가시키 시의 모습-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3일후에 기념 촬영한 B-29
폭격기 벅스카(Bockscar)의 대원들 - 1945년 8월 11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사 져격으로 다리를
잃은 시게마루 마모쓰가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종전후의 일본 도쿄 시가지 - 1945년 9월 10일
역마차(SP판)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가는 서울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삼각산 돌아보니 별들이떳네
♥
자유의 종이울어 8.15.는 왔건만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우느냐
멈처라 역마차야 보신각이 여기다
포장을 들고보니 종은 잠자네
♥
연보라 코스모스 앙가슴에 안고서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색시냐
달려라 푸른말아 덕수궁이 여기다
채찍을 휘두르니 하늘이도네
2017-08-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