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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대의 문화유적답사기
봄빛 완연한 안동
봄 빛이 완연한 봄 날씨 속에 안동지역을 찾아 나섰다. 안동지역은 몇 번 답사를 한 지역이라도 이번에 가는 답사코스로는 처음 인 듯 하다.
가장 먼저 임하면 일대에 탑들을 보기 위하여 임하리로 간다. 임하면에 들어서 폐교된 초등학교를 지나니 바로 탑이 보인다. 안동 임하동 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05호)이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기단부는 크게 파손되어 전체가 동쪽으로 13∼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던 것을, 1979년에 해체ㆍ보수하였다. 특이 한 것은 위층 기단 윗면은 연꽃무늬를 돌아가며 새기고, 가운데에 윗돌을 괴기 위한 높직한 괴임을 두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에는 문짝모양(문비)을 새겼다. 문비 안에는 자물쇠 문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층급 받침이 4단이며, 몸돌에 비해 처마가 좁고 줄어드는 비율도 적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바로 주위에 또 다른 탑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숨은 그림 찾기나 하듯 탑들이 하나둘씩 숨어 있다. 안동 임하동 중앙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66호)은 임하리에 남아있는 석탑들 중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원래 3층이었으나 탑신의 2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던 것을 2001년에 지방예산을 투입하여 2001년 12월 24일부터 2002년 6월 10일까지 보수공사를 실시한 탑으로 현재의 모습처럼 복원되어 있다.
맨 윗돌은 윗면에 3단의 괴임을 두고, 밑면에도 2단의 받침을 새겨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는 밭갈이가 한참인지라 주변에서 당초문이 화려한 막새를 1점 수습하였다.
바로 옆에 보이는 안동 임하동 십이지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06호)은 기단 아랫밑에 마멸이 심한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상층기단 면석에 팔부중과 보살상으로 추정되는 상이 새겨져 있다. 안동지역에서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탑이 드문예로 주목되는 탑으로 기단 갑석은 조금 떨어진 논 두렁에 예전 돌이 방치되어 있다. 현재는 일부 신 부재를 사용하여 보수하였다.
안동 임하동 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80호)은 이제 외따로 홀로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논밭에 있다. 앞에 조각 수법이 아주 우수했던 석불좌상 1구가 목이 없어진 채 방치되어 있고 앞에는 대좌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는데 연꽃잎 조각 표현 등 아주 우수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었다.
2중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기단부가 완전히 땅 속에 파묻힌 채, 탑 전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위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1층 몸돌에는 문비를 새겨두었고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이 단조롭고 불안정하게 줄어들었으며,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임하리에는 주변에 고택들이 많았는데 그 중 이우당 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49호)이 눈낄을 끌어 찾아가 보았다. 안동 권씨 부정공파 이우당 권환의 종택으로 조선 인조 18년(1640)에 지었다고 한다.
정면 5칸ㆍ측면 5칸의 안채는 목조기와집으로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마을의 모든 건물은 북향인데 이 집만 북동향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다음으로 안동 임하면 신덕리에 있는 경상북도민속자료 50호 의성김씨운암종택을 찾았다. 도로변 표지판은 잘 설치되어 있었으나 조금 더 밑에 표지판이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길을 잘못들어 청송군까지 갔다가 다시 찾은 곳이다. 청계 김진 선생의 셋째 아들 운암 김명일(1534∼1570)의 종가집으로 건물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조선 영조 30년(1754)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 사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붙어 있는 형식이다. 큰 개들이 짓고 난리가 나서 집 내부 구조는 자세히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용담사 무량전은 정면 3칸ㆍ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주변에는 요사채와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이 남아있으나 조용하고 아늑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경치와 주변이 풍광을 이룬 길안면 대사리에 천지갑산에 있다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70호 대사동 모전석탑을 찾아 나섰다. 안내 표지판 하나없어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과수원 옆으로 난 길을따라 올라가면 탑이 있다고 한다. 탑을 찾아 주변 산 및 여러군데를 찾아 헤메었으나 탑은 보이지 않는다. 또 다시 마을 사람에게 물어 길을 나섰으나 역시 헤메이기만 할 뿐 탑은 찾지 못하였다. 여기서 약 1시간 30분 가량 탑을 찾아 다녔다. 탑을 찾다가 지쳐 포기하고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잉어찜을 늦은 오후 2시에 먹었다.
이제 안동시내로 진입한다. 철길 옆에 큰 키로 맞는 국보 16호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사실 이 곳은 신세동이 아닌 법흥동이 소재지이나 문화재 지정 당시인 일제시대에는 신세동이어서 명칭이 이렇게 붙어진 것이다. 이런 예는 전국 문화재에 무수히 많다. 즉 후대에 행정 지명이나 구역이 바뀌어도 한번 지정된 문화재명은 수정되기가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 부분의 전탑은 안동지역과 인근 지역에 밀집되어 집중되고 있다. 전탑이 안동에 집중된 이유에 대한 先學학자들의 생각은 조금씩 다르다.
고유섭은 안동군(시)에 전탑이 그와 같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좀 불가사의한 현상으로서 그 같은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하였고, 김원룡은 신라기의 전탑이 안동부근에 모여있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안동부근에서의 조탑 재료 입수문제와 관련시켜 고찰하여 볼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김현준은 안동지역의 지질에 의해 분석해 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학자들의 의견은 많으나 아직 전탑의 안동 집중설은 수수께기로 남아 풀어 나아가야 할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있다. 전탑을 대표하는 이 신세동 전탑은 국보 제16호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의 몸돌을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또한 어디서 옮겨 온 것이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보살상으로 추정되는 상들도 간혹 보인다.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을 향하게 하였다. 특이한 것은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는 달리, 기와를 얹었던 흔적이 보인다. 7층의 거대한 탑으로 목탑을 어느정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매우 중요하나 철길 옆에 있어 보호 조치가 아쉽기만 하다.
바로 옆에 건물이 중요민속자료 185호인 법흥동 고성 이씨탑동파종택은 정원에 작은 연못도 구성되어 있고 조선 중기 양반집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주택이었다. 담장너머로 볼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긴 건물이 있다. 보물 182호인 안동 임청각 정침 및 군자정이다. 현재 사람은 살고 있지 않는 듯 하며, 관리 상태는 양호했다. 대문채에 들어서면 양지바른 곳에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 따뜻하기 그지 없다. 길게 지어진 건물은 약 50칸이 넘는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건물 양식과 건축 구조를 알 수 있는 주택으로 가 볼만하다.
안동 시내로 접어들어 평화동에 위치한 보물 114호 안동 옥동 삼층석탑을 찾아 나섰다. 예전에 다녀간 기억이 있는데 다시금 찾아가려니 길이 헷갈린다. 안동 영명학교 입구 주변을 여긴가 하다가 돌다가 옛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니 맞다. 역시나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전혀 없다. 길목 길가에 근래에 지어진 절 옆에 잔티밭이 조성되어 있고 이 곳에 숨어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지붕돌은 처마밑이 직선이며,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남아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로 보이며 주변에는 근래에 조성된 석불좌상과 예전 앞에 놓여진 목 없는 석불좌상이 근세불 옆에 방치되어 있는데 조각 기법이 아주 우수하다. 현재는 이 곳이 평화동이나 문화재 지정당시인 1963년에는 옥동지역이었으므로 옥동이라고 지칭된 것이다.
이천동 석불상을 보기 위해 갔다. 가는 길가에 석수암이란 절이 있다. 이 곳에는 통일신라시대 의상(義湘)대사가 석수암을 창건하면서 심었다고 전하나는 안동 석수암 향나무(경상북도기념물 106호)가 있다. 일부 책에는 또한 도선(道詵)국사가 이 석수암 창건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의 석수암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을 후에 중수한 것이다. 새로 지은 대웅전과 바로 옆 무량수전이 남아 있는데 무량수전은 그나마 오래 되었고, 그 옆에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석불좌상 1구가 있어 노천에 모셔져 있어 눈에 뛴다. 이 불상은 1983년 관음전을 지을 당시 출토된 것이라 전하며 옷주름 처리가 그 나마 섬세하게 남아있다. 약수인 석수로 유명한 이 절에 있는 향나무는 나무 높이 12m, 지름 1m의 노거수로 수령은 약 400여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가 바로 서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퍼지면서 자라고 있으며 특이하게 산의 경사면에 심어져 있다.
도산서원, 하회탈과 함께 안동의 상징 마크로 유명한 이천동 석불상(보물 115호) 우리에게는 제비원 미륵불로 더 익숙한 이 불상은 현재 연미사라는 절에 있다. 자연석에 머리 높이 2.43m의 석불을 조각하였으며 소발(素髮)에 육계가 있고 이마에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다. 머리는 거의 파손되어 있으나 얼굴은 완전한 형태이다. 왼손은 가슴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 구품인 중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어 아미타여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경기도 파주 용미리 석불(보물 제93호)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옆에 삼층석탑이 있는데 철조망으로 쳐져 있어 가지 못한다. 연미사 스님에게 사정하여 탑만 잠시 보고 오겠다고 하고 뒷쪽으로 난 등산길로 접어들어 탑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예전에는 바로 가로지르는 길로 가서 보곤 하였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99호인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은 뒷편에 흩어 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으로, 예전에는 이 곳이 연미사의 자리였다고 하나 알 수 없다. 탑은 단층기단으로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과 탑의 몸돌은 아무런 꾸밈이 없는 단조로운 모습이며, 지붕돌은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솟아올라 가벼운 느낌이다.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이제 안기동 일대의 탑과 불상을 찾아 안동 시내를 다닌다. 정말이지 찾기가 만만치 않다. 안내판이나 이정표는 전혀 없고 안기동 일대에 가서 지나 가시는 할아버님게 여쭈어 보니 할아버지는 "그기 몰제"라는 말만 하셨다. 어찌 하여 안기동 일대를 둘러보다 전각 같은 건물이 있기에 어 저기다. 라는 느낌으로 찾았다. 현재 안기동 안기 목욕탕을 지나 골목길의 맨 끝 집에 석불사라는 절의 명칭으로 된 가정집 같은 곳에 약사전이라하여 작은 단칸짜리 건물에 모셔져 있었다. 보물 58호인 안동안기동석불좌상이다. 현재 불상의 머리는 후대에 새롭게 붙여 놓은 것으로 발견 당시에는 몸통과 대좌만 있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역시 원래 불상과 같이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책에는 불상의 몸만 따로 발견되었다 하니 아마도 대좌는 제짝이 아닌 듯도 하다. 암튼 현재 호분이 칠해져 있어 원형마저 잃어버린 불상은 밑에 대좌는 유리로 보호하고 있다. 대좌에는 화려한 조각 수법의 장식들이 나타나 있다. 불상은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옷 소매 하나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기 목욕탕 바로 옆 골목안에 문화재자료 18호인 안동안기동 삼층석탑이 또 있다. 예전에는 민가 안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동시에서 민가를 매입 한 듯 민가 안은 아닌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은 없어져 시멘트로 만들어 놓았고, 1층 몸돌에는 네모난 감실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직사각형의 화창인 듯 하다. 두툼한 지붕돌은 낙수면이 짧아 경사가 급하고 네 귀퉁이가 치켜올라갔다. 지붕돌 밑면에 새긴 받침수가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꼭대기에 상륜부는 1972년 새로이 만들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의 양식과 밑면의 받침 수가 줄어들어 일정하지 않은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이 있는 이 곳을 임피사라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안동역 옆 관용 건물이 있는 곳에 보물 56호인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이 있다. 예전에는 안내판이 없었으나 이제는 문화재를 알리는 표지판이 크게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이곳을 모르는 이들은 많다. 이탑은 무늬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다. 몸돌에는 층마다 감실(龕室)을 설치했고 특히 2층 남쪽면에는 2구의 인왕상(仁王像)을 새겨두었다. 밑면의 받침수는 1층부터 차례로 10단ㆍ8단ㆍ6단ㆍ4단ㆍ3단으로 줄어들었고 처마끝에는 기와골을 받기 위해 총총한 나무를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혀 놓았다. 『동국여지승람』이나『영가지(永嘉誌)』에는 법림사(法林寺)의 전탑으로 기록이 보여 법림사 전탑으로 추정된다. 6. 25 때 일부 파괴되어 196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운흥동 당간지주
바로 옆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00호인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가 있다. 동부동 오층전탑과 이 당간지주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 내외이다. 한 곳은 동부동, 한 곳은 운흥동 왜일까? 허나 둘 다 소재지는 운흥동이다. 이 역시 지정 당시의 문화재 지명이 아닌가 한다. 높이 260미터의 이 당간지주는 6.25 때 윗 부분 일부가 파손되었다. 양 기둥에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아 간결하며,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는 둥근 받침돌이 놓여 있다. 기둥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영가지에는 법림사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법림사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음으로 시간이 이제 저녁 시간 때를 향한다. 대구로 가는 길에 도로에 굴을 뚫어 놓은 곳인데 기억이 잘 안난다. 집에 와서 지도를 찾아보니 신기굴인 듯 하다. 이 굴을 지나면 천연기념물 252호인 구리 측백나무 자생지와 조금 떨어진 것에 고산서원이란 표지판 있고 주변에는 무릉 유원지인 듯 하다. 암튼 그 곳을 통과하여 일직면에 있는 조탑동 오층전탑을 찾아 나섰다. 가는 길가에 효자비 같은 건물이 있어 보니 송리리에 있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67호인 손홍량 유허비였다. 뜻밖에 문화재를 하나 더 덤으로 본 기분이다.
이 비는 고려 시대 일직 손씨(一直孫氏)의 시조인 손홍량(孫洪亮, 1287∼1379)선생의 유허비로 조선 순조 4년(1804)에 세웠다.
비문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이 짓고 비석의 제목 글씨는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명균(徐命均)이 썼으며 비문 글씨는 생원 권서가 썼다.
참고로 손홍량 선생은 고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정왕 1년(1349)에 추성보절좌리공신이 되었고 판삼사사에 올랐으며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난의 평정에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궤장(机杖)과 초상화를 하사 받았다.
이제 안동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전탑 보물 57호인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을 찾았다. 다녀온지가 불과 2달 정도 채 안되어 다시 찾은 이 곳은 예전에는 도로변에서 보고 가야만 했다. 개인 사유지인 과수원 내에 있어 가까이 가 볼 수가 없는 실정이었고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아도 탑 앞까지만 가 보고 오는 안타까운 장소였다. 다행히 2000년도부터 안동시와 정부가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사유지를 매입하여 안동대학교 박물관으로부터 시굴조사를 하여 지금처럼 진입로를 개설하는 등 주변 정비를 하여 이제는 마음껏 찾아가는 장소가 되었다. 도로변에 표지판도 잘 되어 있고 남 안동 나들목에서도 가까워 주변 보물 475호 소호헌과 답사 코스를 짜기에도 충분하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기단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다소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5∼6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쪽면에는 감실(龕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인왕상의 표현은 걸짝이다. 마치 권투 장갑을 낀 것 같은 주먹 표현과 앙증맞은 발가락 표현은 잊을 수 없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 돌에 새겨진 화려한 당초문과 인왕상은 이 탑의 조각 솜씨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한다. 하루 동안 20군데를 답사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정구역별로 나누어 답사를 다니기 정말이지 쉽게 우리의 문화재를 접할 수 있었다. 전탑의 고장이며, 충효 양반 마을의 고장인 안동, 안동댐과 임하댐 그리고 수 많은 사연을 간직한 천년 고찰들이 있는 그 곳으로 나는 이미 가고 있었다. 길 떠나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그 곳에 가고 싶다. 라고 답해 주련다.
<붓가뉴스> 김환대 2003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여여님^^
안동 친구에게 보여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