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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7 -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 나폴레웅 군대를 추격해 섬멸하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국 및 속국들에 지시를 내려 모은 군대는 61만명으로
이 중에 42만명이 1812년 6월 24일 네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는데
나폴레옹의 목표는 속전속결로 러시아군 주력을 일시에 섬멸시키고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는 러시아의 제1 서부군 1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사령관인 바클라이
드 톨리는 나폴레옹의 병력이 엄청난 군세임을 알고는 신속히 퇴각해
나폴레옹이 의도한 결전을 피했으며....... 이후 계속 후퇴하니 나폴레옹의 계획이 틀어집니다.
드 톨리가 신속히 퇴각함으로써 나폴레옹 군대는 강행군으로 비전투 손실이 극심해졌으니, 며칠만에 폭우가 내려
길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불어난 강물에 폴란드 기병대 상당수가 익사했고 군마의 먹이 건초와 귀리가
부족한지라...... 농가의 초가 지붕을 벗겨서 말에게 먹이니 군마 20,000마리가 병들거나 굶어죽거나 탈진합니다.
병사들은 물이 없어 수인성 질병 발진티푸스 에 걸려 첫 2주만에 병력 135,000명을 잃었는데, 폴란드에
미리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쌓아두었으나 이걸 러시아로 제대로 운반하는게
불가능했으며 구급 약품 수송 마차는 전투부대 뒤로 쳐져서 현장에는 닿지 않아 치료가 불가능 햇습니다.
이런 탓에 42만명 중에서 핵심인 나폴레옹의 본대 주력군 232,000 명은 스몰렌스크 전투 직전 175,000명으로
감소했는데.... 러시아군 드 톨리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청야전술을
시행한 것 처럼 되었으니 러시아는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반면에 프랑스는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8월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러시아군의 서유럽 보급기지였고 군수물자가 풍부했기에 일시에 장악
하려 했지만, 프랑스군 선발대가 공성용 대포를 못 챙겨와 시간을 놓치자 드 톨리가 스몰렌스크 기지창의
파괴를 명령했고 스몰렌스크는 불바다가 되었는데 교전이 있긴 했지만 사상자 수는 20,000명 이하 였습니다.
그후 프랑스군은 진격을 계속해 보로디노에서 러시아군을 따라 잡았으니, 새벽에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전투
가 시작되니..... 외젠 드 보아르네가 러시아 우익에 유도 공격을 하는척 하면서 러시아군의 좌익
바그라티온을 프랑스군 우익 포니아토프스키가 기병으로 우회하고 중군의 다부가 바그라티온을 협공합니다.
보르디노 전투는 혼전으로 육박전이 되어갔으니, 양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채 소강상태에서 결국 더 피해가
큰 러시아군이 후퇴함으로써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보로디노 전투의 피해는 러시아군 사상자
60,000명, 프랑스군 50,000명으로 추산되며 작센 기병여단 전멸을 포함해 35,000필 이상 군마를 잃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로디노 전투로 부터 7일 후인 9월 15일 유유히 모스크바에 입성했는데
전투 5일 후에야 후퇴 명령을 내린 탓에 모스크바 시에는 러시아군
부상자 10,000 여명이 치료를 받다가 도망도 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포로로 잡힙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이집트 원정 때 처럼 마음껏 정복자 행세를 했으니 이집트에서 나환자
병원에 찾아간 것 처럼 모스크바에서도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해서 기부했고
정교회 사제들에겐 평소처럼 교회를 열어 예배를 볼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포고문으로 약탈을 금지합니다.
모스크바에서 달아난 상인과 수공인들에게 공정한 통상과 안전을 보장하며 평소처럼 경제활동에 종사할
것을 주문했으니.... 나폴레옹과 참모들의 계산으론 모스크바엔 대군을 먹여살릴 반년치 식량이
확보되어 있었고 이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월동을 하며 항복 사절을 기다려도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9월 14일~18일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원인으로 프랑스 측에선 러시아인들의 야만적
애국심 때문이라고 주장하니,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드르 1세에
보낸 편지에서 비난하길 방화는 당시 알렉산드르 1세로 부터 직접 임명된 전시 모스크바 총독
로소톱친 백작의 소행이며 프랑스가 방화범 400명을 체포하여 모두에게서(?) 자백을 받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화범을 몽땅 처형하고 나서도 방화범이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화재 진압을 제대로
못했는지 다음날 또 큰 화재가 발생해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태우고 한때 나폴레옹이
머문 크렘린 근방까지 번져 잠시 성밖으로 몸을 피해야 할 정도였다는데, 러시아 측에서는
프랑스군 약탈 때문에 벌어진 화재였다고 주장하는데 현재는 의도적 방화설이 신빙성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관대한 정복자 코스프레도 통하지 않았으니 모스크바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고 도시 안의
병력들은 위대한 군대에서 폭도로 변해가고 있었는데,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출신들은 너나할것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본전이나 뽑자는 생각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고관대작들의 집을 서로 차지하려고 했으며 술을 퍼마시고 멱살을 잡으며 싸웠으니 주민
들도 학대했는데 총질은 기본이었고 유서 깊은 교회들도 약탈당했기 때문에 점령군은
사제들에게 사탄 취급을 받았으며 나폴레옹이 크렘린(왕궁) 경호에 방해가 된다며
성 바실리 성당을 두고 "저 모스크를 때려 부숴라." 라고 명령한 일이 소문으로 퍼졌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극장에서 연극과 오페라를 상영할 것을 지시했지만 병사들이 여배우는 물론이고 반반한 여자들을
몽땅 약탈했기 때문에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고, 약탈 금지령도 아무도 지키지 않았으니 장교들은
물론 헌병대까지 약탈병들에게 공공연히 살해당했고 이런 풍조는 근위대에까지 번져 병사들이 근무를
거부하고 약탈대열에 합류하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크렘린에 나폴레옹 침실 앞 복도까지 약탈당했을 정도입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맺을 것이라고 판단해 3번
항복을 권했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으니, 군부와 황태제 콘스탄틴 대공, 황태후 마리야 페도로브나
까지 강화를 권유했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전투 지휘에선 엑스맨이었으나 정치면에선
굳건했으니 쿠투조프 진영에 나폴레옹의 사절이 간 것을 알고는 쿠투조프에게 직접 신하를 보내 질책까지 합니다.
약탈은 끝을 보이지 않았고 식량이 모자라자 모스크바 밖까지 병력이 흩어지면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생활은 종지부를 맞이하게 되는데,..... 사실
나폴레옹이고 장수들이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순찰 중에 어느 병사와의 대화에서 "지금이라도 신속히 후퇴해야 합니다. 황제 폐하."
라고 말해 이를 듣고는 이틀 후에 전군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는데, 더 이상
머무를수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크렘린 궁전이라도 파괴한후 퇴각하려고 왕궁 밑에
폭약을 설치했지만.... 후퇴 당일 비가 내려 탑 3개와 성벽 일부분만 무너지는 정도로 큰 피해를 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후퇴하기로 한 날에 또 한번 놀라는데 군대의 어마어마한 짐 때문이었으니
모스크바의 모든 짐마차를 동원해 일개 졸병까지 금붙이, 사치품,
예술품들을 산더미 처럼 들고 왔으니..... 행군 대열이 아니라 이삿짐 대열이었습니다.
군기가 이토록 개판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마차가 많으니 부상병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라며 애써 부정했는데, 4주 간의 모스크바 생활 동안 병력은 저희끼리
죽이고 이탈하며 약탈하러 나가느라 175,000 명에서 다시 90,000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10월 24일 마로야로슬라베트에서 일어난 러시아군과 전투에서는 나폴레옹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
었는데, 쿠투조프는 공격에 매우 소극적이었으니 주전파와 젊은 장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격한 것으로 의도치는 않았지만 나폴레옹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도록 유도
하는데 성공했으니 스몰렌스크는 양군의 격전으로 초토화된 후라 현지 보급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남쪽의 칼루가와 툴라 방향으로 퇴각하지 않은게 나폴레옹의 실책이라는 의견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갈리니, 칼루가와 툴라 방향은 빌나-스몰렌스크-모스크바 라인처럼 초토화를 당하지 않아 식량이
있는데다가 툴라에는 대포 공장을 비롯 러시아군의 기지창이 있었는데, 병력이 더 소모되기 전에 일전을
벌였어야 된다는 의견과 군기와 전투력이 소모된데다가 러시아군이 허수아비도 아니니 무리라는 의견이 갈립니다.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로 우회한 이유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10월 25일에 카자크 연대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척탄병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던 것을 이유로
꼽을 수 있으며 나폴레옹이 자살용 독약을 가지고 다녔던 건 25일의 카자크 연대의 공격 이후였다고 합니다.
한편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추격에 있어 두가지를 강조했는데 첫째는 나폴레옹 군대 10명을 잡고자
러시아군 한 명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 둘째는 나폴레옹을 러시아 국경에서 몰아내는 것
이었으니.... 이에 공명심에 부풀었던 젊은 장교들은 쿠투조프를 겁 많은 노인이라고 욕하며 불만을 가집니다.
신중한 정도가 지나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을 전멸시킬 기회를 여러번 놓쳤다는 비판도 있으나....
나폴레옹을 뒤쫓는 러시아군도 고생하며 손실이 심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나폴레옹군도 신속하게 후퇴했어야 하는데.... 약탈한 짐들이 너무 많아 퇴각 속도가 느려져
러시아군에게 따라 잡히니 견제해야 할 프랑스군 기병대는 극심하게
소모된데다가 지독한 식량난으로 말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말이 없는 탓에 다량의 대포와 수송차들이 버려졌으니 나폴레옹의 주 전력이라 할수 있는
포병대의 붕괴로 이어져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으로 작용하는데,
네 장군의 3군단 기병 병력은 사실상 전멸했고 뮈라의 병력도 수천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탈주병들이 급증했지만 탈주병들은 잡혀서 포로가 돼도 사는 걸 장담하기 어려웠으니
잔뜩 뿔이 나 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 걸려 죽거나, 운 좋게 포로로 잡히더라도 러시아군은 포로들을 먹여살릴 의도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어 11월 8일 간신히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생존자는 60,000명까지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력은 40,000명에 불과했으니 쿠투조프의 판단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나폴레옹군은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짝 뒤쫓기만 해도 말고기에 화약을 뿌려먹다가 알아서 병들거나,
굶어 죽든가, 농가를 약탈하며 흩어지든가, 카자크에게 목과 약탈품을 바치든가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를 묘사한 참전 생존자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다섯명의 프랑스 병사가 꽁꽁 언 말 다리 하나를 두고
개처럼 싸운다. 말 담요, 여자 치마, 반쯤 마른 짐승가죽, 넝마를 몸에 걸치고 신발 대신
양가죽, 천조각을 발에 감았다. 때와 연기에 시커멓게 절어 얼음 위를 행군하다 누가 지쳐
쓰러지면 그 사람이 죽기도 전에 다른 병사들에게 몸에 걸친 것들이 모두 벗겨지고 눈밭에 내버려졌다.
황제 근위병이 아직 죽지 않아 저항하는 자기 동료의 입은 것을 강제로 빼앗아 입는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교회에서 이미 들어가 쉬던 다른 병사들을
총검으로 내쫓아 길가에서 얼어 죽게 만들었다. 동료의 사체를 깔고 앉아 무심하게 불을 쬐었다.
수백명의 프랑스 병사가 빼곡히 들어찬 헛간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자 병사들이 불타는 헛간에 모여
들어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아우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녹인다. 식인을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게 보고되었다.... 와 같은 전우애는커녕 인간성마저 다 내다버린 듯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상당수의 병사들, 특히 네나 다부 같은 명장들이 지휘하는 군단은 어느 정도 군율을 유지하고
군대 답게 행군을 했는데, 특히 각자 살아남으려는 병사들은 얼마 못가 죽었지만
작은 빵조각이라도 나눠먹는 전우애를 가진 병사들은 꽁꽁 뭉쳐서 생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닉다.
11월 6일, 나폴레옹은 본토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사실상 죽었음"
이란 명분으로 10월 23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받았으며 11월 28일,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베레지나강을 건너기 위해 나폴레옹군이 배다리를 놓자 쿠투조프는 이때가 결정타를
먹일 때라 판단하고 미리 도하시킨 별동대와 협공하여 나폴레옹군을 급습하니 베레지나강 전투 입니다.
이 전투에서 후위를 맡은 클로드 빅토르는 가능한 많은 병력을 도하시키려고 동분서주하며 사력을 다했으나
모든 병력을 구할 수는 없었으니 먼저 도하한 장군들과 병사들은, 강 건너편에 남겨진 전우들이
구원을 애걸하다가 끝내 도륙당하는 처참한 광경과 끔찍한 비명을 모두 생생하게 보고 들어야만 했습니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조아킴 뮈라에게 뒷일을 맡기고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갔지만 뮈라는 자신의 영지인
나폴리 왕국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잔존 부대를 떠넘기고 탈주해 버렸으며
12월 7일부터 9일까지는 영하 39도 강추위가 찾아왔고 들판에서 노숙하던 병력들은 상당수 얼어죽었습니다.
12월 7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 도착한 대육군 병력은 어느정도 몸을 추스릴수 있었지만 카자크 척후병
들이 나타나자 이틀 뒤인 12월 9일, 다시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으니 빌뉴스 정도의 도시
였다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지만 지휘관이 사라진 대육군은 사실상 통제되지 않는 오합지졸일 뿐이었습니다.
살아남은 병력들은 리투아니아와 프로이센의 국경인 네만 강 (Neman River) 에 도달했으며 대육군의
최후미를 맡았던게 미셸 네 원수였으니,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내뺀 뮈라와 달리 네는 책임감
있게 후위대 역할을 수행하며 한명의 아군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코브노에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칩니다.
기병대는 진즉에 전멸했으므로 미셸 네 원수 조차 머스킷을 들고 방진에 섞여 사격을 해야 하는 상황
이었는데 12월 14일, 마침내 모든 병사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확신하자 네 원수는
머스킷을 마지막으로 한 발 사격한뒤 강에 집어 던지고 유유히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넜으니 이 일화로 네 원수는 '러시아를 떠난 마지막 프랑스인'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전장터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진격할 대가 아니라 퇴각할 때 인데, 이때 추격하는 적군으로부터 본대의 후퇴
를 엄호하기 위한 부대가 남겨지니 일본에서는 이를 “신가리” 라고 하니, 오다 노부나가는 에치젠
(후쿠이) 의 아사쿠사씨를 치기 위해 쓰루가에 갔다가 후방에서 매제인 아사이씨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쓰루가는 병목처럼 좁은 지역이라 앞뒤로 포위되면 전멸할 우려가 있으니 포위망이 왕성되기 전에 노부나가는
극소수 기병으로 샛길로 교토로 달아났으며 그 뒤에 본대가 따르고 가장 후미에는 신가리 지원자인
하시바 히데요시군이 남고 히데요시를 엄호하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케치 미쓰히데군이 중간에 배치됩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기만술과 적전 기습등 전술로 영웅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으며 병력을 좀 잃기는
했지만 무사히 퇴각하니 노부나가는 그에게 아사이씨의 영지인 오미 일부를 주고 성주로
임명했고 비와호수 북부에 나가하마성을 쌓으니 이제 히데요시에게 출세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신가리는 얼핏 떠오르지는 않는데 6.25 때 평안도에서 터키군이 미군 2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군우리에
진을 쳤다가 400명이 전사하는등 큰 피해를 봤지만 임무는 완수했는데, 한국군은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5사단과 7사단이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뚫리니.... 미군 2사단이 사력을 당해 방어하는 사이 7사단은
도주하면서 한국군 3군단의 3사단과 9사단에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 중대 병력에 점령당했다는 통지도 안합니다.
5사단과 7사단이 무느졌다는 소식에 현리로 후퇴한 3사단과 9사단은 적군의 공격을 받기 전이라 멀쩡했으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나서도 통신에 혼선이 일면서 우물쭈물하며 우왕좌왕하다가 공격부대가 오미재에
이르지도 못했고, 임진왜란때 임진강 전투 처럼 군단장 유재흥이 도망쳤다는 뜬 소문에 너나할거 없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바람에 4개 사단이 와해되었으니.... 저런 중요한 임무를 맡길수는 없었는가 봅니다?
나폴레옹이 "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날씨의 희생양이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11월 3일 쯤 첫 눈이 내리며 기온이 떨어지긴 했지만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는데..... 여름옷을 입고 행군하며 노숙을 하는 병사들에게는 눈이 몸에 내리면
신발과 옷이 그대로 얼고 녹고 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폐렴등으로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의 참패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니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는데 모스크바 원정 병력은 본대 병력은 거의 전멸했고 말 200,000
마리와 대포 1,000여문을 잃었으며 소중한 기병대와 포병대는 괴멸했는데.....
나폴레옹은 이후 신기에 가까운 행정 능력과 카리스마로 빠른 시간 내에 40만명 병력을 복구합니다.
어떻게든 머릿수를 채울 수 있었던 보병 및 포병과 달리 잘 훈련된 말과 숙련된 기수가 핵심인 기병
전력은 나폴레옹 전쟁 끝까지 예전의 전력으로 돌아올 수 없었는데.... 이 손실은 꼼꼼하고
빠른 정찰과 재빠른 예비대 투입을 장기로 삼았던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마이너스가
되어 이후의 모든 전역, 특히 마지막의 워털루 전투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즉, 나폴레옹이 1808~15년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 전쟁에서 250,000명을 잃긴
했지만 진짜 전력을 통째로, 제대로 날려먹은 건 러시아 원정이었던
것이며..... 이는 나폴레옹에게 당한 동맹국에게는 둘도 없는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만 60만 대군 중에서 국경을 건넌건 420,000명이고 본대와 모스크바로 향한 병력은 350,000명 정도이며
러시아 국경을 넘어 도망친 병력은 9~ 120,000명 정도로 추산한느데, 여기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병력 4~ 50,000여 명이 포함되고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살아난
병력을 감안하면 몽땅 러시아에서 죽은건 아니지만 본대 중에서는 80% 이상이 집에 못 돌아간 것은 맞습니다.
겨울철이 겹치고 기후가 혹독했기 때문에 비전투 손실이 양군 모두 컸는데 러시아군도 주력인 1전선군이
120,000명에서 30,000명 또는 50,000명까지 감소했고 결국 1, 2전선군을 합치게 되며
벨로루시에 머물면서 산책만 하다가 돌아간 오스트리아군 마저 33,000명 중
20,000명만 본국으로 돌아갈수 있었을 지경이었으며 러시아군 총 손실은 230,0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힐때 러시아 정규군에게 잡혔다면 천운 그 자체였으며 대열에서 낙오했다가 시골에서 분노한
현지 농부에게 잡혀 끌려가면 말 그대로 척추가 으스러질 때까지 인간 도르래가 되어 버리거나, 산 채로 불태워
지거나, 사지가 찢겨진다던가 뜨겁게 끓는 물 냄비 안에 강제로 얼굴을 처박게 하는 일이 매우 잦았으니....
프랑스 병사들은 포로로 잡히느니 자살하려고 했고 나폴레옹도 만약을 대비해 자살용 독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만, 러시아 제국 정부는 최대한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으려고 애썼으니 알렉산드르 1세의 조카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던 시점까지 문해율이 6% 도 안 되던 러시아에서 글을 읽고 쓸줄 알고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가졌으며 신체 조건까지 훌륭한 프랑스 군인들은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보물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포로들을 사로잡아 후방으로 이송해 정착시킬 계획을 수립했으며 실제로도 러시아 정규군은 많은
수의 포로들을 잡아들였지만 패주하는 프랑스 군인들이 서쪽으로 무질서하게 도주하면서 각지의 농민
민병대들에게 사로잡혀 조각나 버리거나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등 사태가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프랑스군에게 완전히 적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상당수의 낙오병들이 러시아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현지에 정착해 살아갔으니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 5인조인 세자르 큐이의 아버지 앙투안 큐 입니다.
프랑스 군인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 가문에 있던 많은 프랑스인 가정교사들도 제노포비아 때문에 같이 후퇴
하다가 많이 죽었으며,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독일인과 영국인들도 의사나 엔지니어로 러시아에 많이
와 있었는데 1812년 6월부터 외국인을 상대로 한 폭행과 약탈이 급증해 순수 러시아인에
귀족이어도 외국어를 쓰면 거리에서 린치를 당하고 외국인들은 첩자 취급했기 때문에 같이 퇴각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외국어와 외국 문화 애호 경향이 살아나 19세기 내내 대다수의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할줄 알아도 러시아어는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는데 5~ 6개 국어를 할줄 아는 러시아 외교관이 모국어
를 해보라고 하면 겨우 몇 문장만 구사할수 있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으니, 전후 세대인 푸시킨과 조국전쟁을
다룬 소설 “전쟁과 평화” 를 쓴 톨스토이조차 부모의 교육 방침에 따라 어릴 적부터 프랑스어를 가까이 했습니다.
조국전쟁의 영향을 받아 표트르 대제 이래 러시아 문화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서유럽주의를 비판
하고 러시아의 전통 문화를 회생시키려는 슬라브주의가 생명을 얻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로 가서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이 데카브리스트가 되어 조국 러시아의 개혁을 꿈꾸었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사실적이고 냉철하게 쓰였
졌으며, 톨스토이는 보로디노 전투 현장을 여러차례 직접 방문하고 전투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러시아 원정기간 러시아군 지휘관의 전투 보고서와 내부 문서들을 문서고에서 발견하여 냉정하게 분석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톨스토이는 나폴레옹빠들이 부르짖는 '이랬으면 나폴레옹이 이겼다' 는 If 가상들을
분쇄하며 "나폴레옹은 전술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고, 매 상황 최선을 다했다.
러시아 원정은 애초에 무리였으며 나폴레옹은 질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를 원작으로 1956년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전쟁과 평화> 는 당시로서는 대작이고 소련
에서 조차 환영받으며 흥행했지만 스토리가 약한게 흠이었는데, 분량상 7년에 걸친 수천
페이지의 소설을 3시간 정도에 담으려니 내용 연결이 안되고.....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았으며 50세 헨리 폰다가 소설상 20대 극초반의 주인공역에 캐스팅된 것이 큰 흠이었습니다.
본 고장 러시아(소련) 에서는 우리나라 작품을 저렇게 망쳐놓았다고 불만도 있어서 제대로 만든다며 마음
을 먹고 나중에 <워털루> 를 감독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가 감독을 맡아서 1966년부터 4부작
으로 나눠 제대로 만들었으니 상영시간은 431분에 달하며...... 영화상 최다 동원 엑스트라로
《기네스북》에 오른 750,000명이라는 가공할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우라돌격을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830만 루블이라는 가공할 제작비로 만들었는데 소련 내 흥행만으로 5,800만 루블을 벌어들였고 해외로 많이 수출되어
원작을 가장 잘 그렸다는 호평을 받았는데 저 가공할 병력이 모두 실제 사람이며, 스텝들을 활용한 서구-소련 합작
영화가 일종의 후속작 격인 <워털루> 이지만 7시간으 로 너무 긴지라 개봉은 고사하고 TV 미니시리즈로 봐야 합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작품 <1812년 서곡> 은 바로 이 대전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인데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가 각각 포함되어 있으며, 2012년에 러시아에서 조국전쟁 200주년
기념으로 보로디노 전투를 재현하는 대규모 리인액트먼트 행사를 치렀고 박물관도 세웠습니다.
러시아의 혹한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군대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고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가 초토화 전술을 이용하여 프랑스 군이 약탈할 식량과 마초들을 모두 태워버린 상태였습니다.
겨울이 닥치자 프랑스 군인들은 죽어나갔고, 러시아는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프랑스 군대를 차츰차츰 약화시켜
나갔으며 나폴레옹이 후퇴하자, 러시아군은 추격해 중앙 유럽까지 들어갔고, 동맹국과 함께 나폴레옹을 패망
시키는데 성공했으니,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구원자 ' 라고 불렸고 빈 회의에서 폴란드를 전리품으로 얻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초중반 나폴레옹을 무찌르는등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기는 했으나, 경제는 생산성이
지극히 낮은 농노제에 묶여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서유럽 국가들은 산업혁명이 일어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와중에 러시아는 갈수록 경제가 퇴보하니 "조선이 노비제도" 를 폐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약해지기 시작하는 원인이 되는데, '강대국' 이라는 허울은 정부의 무능, 고립된 백성들,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을 가렸으며 상처는 갈수록 깊어져만 갔으니 나폴레옹을 이긴후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지배 구조를 바꿀 용의와 힘이 있었으나 시도에만 그치고 개혁 정책들은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 사후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즉위했는데 직후 부터 반란에 시달렸으니, 반란은 대부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다녀오면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자유주의에 매혹된 군인
장교들이었으니...... 그들은 봉건적인 러시아 제국에 자유주의의 바람을 불어넣고 싶어했던 것 입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빠르게 진압당했으며 큰 충격을 받은 니콜라이 1세는 표트르 대제 때부터 실시한 개혁
정책들을 폐기하고 국가주의, 정교회, 독재등 옛 시스템으로 회귀했으며, 이후 엄격한 검열을 통하여
국민들을 통제했으며 비밀경찰 제도를 실시해 반대하는 급진주의자나 혁명가는 시베리아 유형소로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