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2. 이십삼번째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
신앙고백
찬송 29 성도여 다 함께
기도 조용림 권사,이원준 장로,염성섭 장로,유춘자 권사,
성경말씀 호세아12:3~6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이노베이션innovation!
찬송 276 하나님의 진리 등대
광고 새가족-송봉주(78), 민춘식 선생님(61), 김강원 선생님
예배후 직원총회(3층 회의실), 매주 월요일(목사 휴무)
이순희 집사 장남 결혼(7/8, 전주 12시)
찬송 503 고요한 바다로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장마가 시작 되었습니다.
물이 부족해서 농부들이 농사를 포기 했었는데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십니다.
제가 롤 모델Role model로 삼고 있는
우리 이원준 장로님 부부께서 땡볕에서
우리 주차장 앞에 있는
앞집 화단을 매고 계시는 것입니다.
3층 큰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밤을 세우며 어르신들을 돌보시고
저러다 끙끙 앓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이원준 장로님이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정신없이 지낼 정도로 바빴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희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저녁만 되면 보따리 싸들고 나가시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품이 워낙 불같아서 목사인 저 역시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님을 붙들어 주저앉게 하옵소서.
그리고 사고가 난 것입니다.
코뼈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골절 되고,
눈이 새파랗게 부어오르고,
90이 되어가는 노인양반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니,
다른 분도 아니고
목사인 제 아버님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딴 길로만 가려다가
이런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아버님 일로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우리 아버님께는 제가 목사가 아니라
아들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성도님들이 다 순종하시는데도
장로님이신 우리 아버님만
순종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예수님께서도
형제들에게조차 버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3절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절,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우리 형제들과 함께 가정 예배드릴 때가
가장 은혜롭지 못합니다.
참 아이러니irony입니다.
호세아 12장 3절입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힘을 겨루되
4절,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절, 저는 만군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칭호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도 실수와 허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마음에
사라가 자기 아내인 것을 속이고,
누이 동생이라고 소개하는 잔꾀를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6장 7절입니다.
그 곳 사람이 이삭의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그래서
이삭역시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래서 부전자전父傳子傳인가 봅니다.
그래서 저도 걱정이 많습니다.
아버님을 닮아기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허물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발꿈치를 잡았다.”
발꿈치를 잡았다는 말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
그의 등 뒤에
몰래 숨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름처럼 살았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으로 가로챘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교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조상들조차 이렇듯 허물이 많았었는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남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얻어야 되겠습니까?
저 역시도 이 말씀에 가슴이 철렁거립니다.
목사인 저도
야곱처럼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속이는 자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삶도
야곱의 삶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은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동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고단한 것입니다.
호세아 12장 3절입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힘을 겨루되
4절,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이렇듯
이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속이는 자로 태어나서
수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장년이 되어서도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청년의 힘으로 맞장을 뜹니다.
가소롭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처럼 내 힘만으로
세상의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짓과 속임수, 잔꾀, 잔머리를 부리는 것조차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형 에서와 만남을 앞두고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밤이 새도록 힘겨루기를 합니다.
천사가 끝까지 자신의 교만, 고집을 꺾지 않고
버티기만을 하던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트리고 나서야
야곱은 자신의 의지와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이기는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교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사랑의 묘약이라고 합니다.
인애하신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4절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절, 저는 만군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칭호니라.
아름다운 복음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칠 때에도,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에도 벧엘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창세기 35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절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너희 중에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단을 쌓으려 하노라.
아름답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속이는 자로 살았던 야곱이
그래서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야곱이
그래서 평생 쫓기며 살았던 야곱이
그래서 평생 불편하게 살았던 야곱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겠습니까?
2절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너희 중에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노베이션 innovation!
혁신!
바로 내가 변한 것입니다.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새것으로 갈아입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남을 속이며
내 유익만을 위하여 살지는 않았습니까?
지금까지도
나만의 유익이라면
물, 불가리지 않고
형제의 축복권까지 가로채지는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나약하기만 하고,
불쌍한 우리 어르신들이 보호 받아야만 하는 권리를
무시하고,
내가 좀 더 편하고자
우리의 책임을 소홀이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랬다면
지금 회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다면
지금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었던 것처럼
오늘,
지금,
당장,
내 자신을 혁신해야만 합니다.
이노베이션innovation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6절입니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나의 모든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