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자) (청화백자) (진사백자)
백자 [白瓷]란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를 말한다. 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졌으며, 그 수법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순백자(純白瓷) : 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여 바탕흙과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원(元)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릇 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유약은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순백자는 다른 빛깔로 장식하지 않으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며 부분적으로 장식물을 첨가하거나 혹은 투각(透刻)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수가 있으며, 표현한 종류에 따라 ① 소문백자(素文白瓷, 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② 양각백자(陽刻白瓷, 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 ③ 음각백자(陰刻白瓷, 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 ④ 투각백자(透刻白瓷,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 ⑤ 상형백자(象形白瓷,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2) 청화백자: 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뒤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소상팔경(蕭湘八景)·
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접시·사발·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주전자·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연적·필세(筆洗)·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동물·산수(山水)·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하였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 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해내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안료(酸化鐵顔料)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에 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를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관요(廣州官窯)와 지방민요(地方民窯)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관요의 것은 잘 수비(水飛)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白瓷釉)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대나무·운룡(雲龍)·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죽(竹)·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철화(鐵畵)·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石間褓)라고 하였다. 가마터[窯址]로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천안·괴산·철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 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진사)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여진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요(分院里窯)와 함경남도의 영흥(永興) 일대가 알려져 있다.
백자의 대표작들
국보 제309호 : 백자대호(白磁大壺) , 리움미술관
백자대호는 보통 높이가 40cm 이상 되는 대형으로, 둥글고 유백색(乳白色)의 형태가 둥근 달을 연상하게 되어 일명 ‘달항아리’라고도 불린다. 조선 17세기 후기~18세기 전기의 약 1세기 동안(특히 18세기 전기 50년간) 조선왕조 유일의 관요(官窯)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백자제작소(경기도 광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광주지역에 산포해 있던 340여 개소의 가마 가운데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기가 대형인 탓에 한번에 물레로 올리지 못하고 상하 부분을 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접합하여 완성한 것으로 성형(成型)과 번조(燔造)가 매우 어렵다. 순백의 미와 균형감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백자의 독특하고 대표적인 형식이다.
국보 제309호 백자대호는 높이 44cm, 몸통지름 42cm 크기에 구연부가 짧고 45°정도 경사진 것으로 몸통의 곡선이 둥글며 매우 풍만한 형태를 하고 있다. 몸통의 중심부 이어붙인 부분에 일그러짐이 거의 없어서 측면 곡선은 거의 완전한 원을 그리고 있다. 구연부의 외반 정도와 수직 굽이 조화되어 풍만하면서 안정적이며 전반적으로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전형적인 조선중기의 특징을 보인다. 몸통 전면에 성형 흔적 없이 표면이 일정하게 정리되어 있어 최고수준의 환경에서 제작되었음을 보여주며, 굽은 수직에 가깝고 깎음새도 매우 단정하다.
국보 제294호 :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전성우
조선시대 백자들은 대개 단순한 형태와 문양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다채로운 색채의 사용을 절제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높이 42.3㎝, 아가리 지름 4.1㎝, 밑 지름 13.3㎝인 이 병처럼 하나의 작품에 붉은색 안료인 진사, 검은색 안료인 철사, 푸른색 안료인 청화를 함께 곁들여 장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형태는 가늘고 긴 목에 풍만한 몸통과 약간 낮은 굽을 하고 있다. 굽은 선을 그은 듯이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아가리는 그대로 끊어내어 날카로운 맛이 있다. 18세기 전반경의 백자 병은 아가리 끝이 밖으로 살짝 벌어지거나 말린 것이 많은 것에 비해 드물게 보이는 모양이다.
병의 앞뒤 면에는 국화와 난초를 그렸으며,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무늬는 돋을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채색하였다.
이 병은 같은 종류의 조선 백자 중 큰 편에 속하며 유약의 질, 형태의 적절한 비례감, 세련된 문양표현으로 보아 18세기 전반경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219호 :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리움미술관
조선 전기에 제작된 높이 41㎝, 아가리 지름 15.7㎝, 밑 지름 18.2㎝인 청화백자 항아리이다.
아가리는 안으로 약간 오므라들었으며, 몸통 윗부분이 불룩하고 아랫부분이 잘록하게 좁아졌다가 살짝 벌어진 형태이다. 아가리 맨 윗쪽에 두 줄의 가로선이 있고, 그 아래에 꽃무늬와 이중의 원무늬를 번갈아 그렸고 아랫쪽으로 다시 한 줄의 가로선을 둘렀다.
어깨 부위에는 장식적이면서 화려한 연꽃무늬가 있고, 굽 바로 위쪽에도 같은 문양을 배치하였다. 중심 문양으로는 매화와 대나무가 몸통 전체에 그려졌는데, 가지가 교차하는 매화와 그 사이사이의 대나무 표현이 세밀하며 뛰어나다. 특히 윤곽선을 먼저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칠하는 구륵진채법이 돋보인다.
이 백자는 문양의 표현 기법과 색, 형태 면에서 아름다운 항아리이며, 구도와 소재면에서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중엽 초기 청화백자 항아리로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107호 :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이화여자대학교
조선시대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포도무늬를 그린 백자항아리로, 높이 53.3㎝, 아가리지름 19.4cm, 밑지름 18.6cm이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서의 화가인 화원들에게 도자기를 굽는 곳에 가서 도자기들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이러한 그림 중에는 청색 안료인 청화(靑華)로 된 것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검은색 안료인 철사나 붉은색 안료인 진사(辰砂)로 된 것은 비교적 수가 적었다.
항아리 중에서 포도무늬의 그림은 또 다른 격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항아리의 크기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조선 중기 항아리의 전형으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항아리의 아가리는 알맞게 올라왔으며, 아가리에서 어깨까지 둥글게 팽창되는 모습이 당당함과 대담함을 느끼게 한다. 몸체에는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포도 덩굴무늬를 그려넣었는데, 그 사실성 및 농담과 강약의 적절한 구사에서 18세기 백자의 높은 회화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국보 제168호 : 백자진사매국문병(白磁辰砂梅菊文甁)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백자병으로 높이 21.4㎝, 입지름 4.9㎝, 밑지름 7.2㎝이다.
아가리 가장자리가 밖으로 말렸고 목이 길다. 목과 어깨 그리고 몸체에 각각 2줄의 선을 두르고 목과 어깨 사이에는 파초잎을 그렸으며, 어깨와 몸통 앞뒤로는 매화와 국화무늬를 옆으로 길게 그렸다. 파초무늬는 형식적이나 매화와 국화무늬는 사실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2세기 후반에 진사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조선시대 전기에는 도자기에 붉은색을 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며 후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작품은 15세기경에 진사로 그린 병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