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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서울 독림문역(지하철 3호선) 5번출구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 다녀왔다.
수 많은 독립투사들이 옥사하고 또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슬픔에 찬 절규와 비명이 느껴지는 듯했다.
모든 동선이 1번부터 15번까지 숫자로 표기되어 있어 관람하기에 편했다.
관람 순서 1번 본관에서 비껴본 옥사다. 본관지하실에는 취조실이 있었는데 여기 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 감정이입이 되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해방후에도 형무소로 사용되었다.
13번째 관람 순서인 여자 감방에 먼저 갔다. 약 10개정도의 작은 감방이였는데 여기에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었다고 한다.
빈 공터에 옥사가 더 있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을 이렇게 폭력이나 고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문화나 의식이 더 높은 민족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였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미류나무가 통곡의 미류나무라고 한다.
미류나무 뒷쪽 건물이 사형을 집행하는 시설이다. 이 미류나무를 지나는 독립투사들이 이 미류나무를 어루만지며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한 심정을 통곡으로 달래던 나무라고 한다. 이 건물안에도 작은 미류나무가 있었는데 동시에 심어졌지만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하였다고 한다. 궁금해서 살펴보니 여러 가지들이 말라죽어가고 있고 링거병 두세개가 매달려 모진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여자 감방에 수감되었던 열사들의 사진과 설명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앳되보였다.
스위치를 누르면 임신한 후배를 다독이는 선배가 같은 독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재연해놓았다.
유관순 열사가 갖혔던 독방인 것 같다. 유관순의 모습은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달려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모진 고문으로 두 눈은 출혈이 있었고 얼굴은 온통 부어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일본남겼다고 한다. 실제의 모습을 추정한 얼굴을 역사학자가 설명하는 동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체험학습온 학생들에게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죄수들이 쓰고 다니던 용수라는 모자다. 독립지사의 모습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기 꺼려했고 혐오감을 주기위한 목적도 있다고 했다.
70년대 대구삼촌(명희 아버지)네에 아버지와 기차타고 방문했을 때도 보았다. 그때도 이 용수와 하얀 무명한복을 입을 죄수를 간수 두명이 호송하는 것을 보았다. 어린 마음에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 각인되어 있다.
'요'라고 한다. 수형자들이 일을 할때 도망을 못가게 메달아 놓는다고 한다. 무게가 5kg이라는데 이런 것을 질질 끌고 일했다고 한다.
본관(1번건물) 지하시에 있는 고문실이다. 두손을 고정된 수갑에 고정시켜놓고 손톱밑으로 쇠바늘을 끝까지 찔러넣어 고문했다고 한다. 쇠바늘이나 대바늘이 20cm정도로 보인다.
고문후에 손가락이 꺽어지고 눈이 파열된 사진이다.
저 상자에 사람을 가두고 발로차고 크게 흔들었다고 한다. 좌우와 위에 10cm가량의 쇠바늘이 촘촘히 달려 있다.
틀림없이 얼굴을 보호하려고 수인은 머리를 감싸안았을 것이고 온몸에는 바늘 구멍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낭자했을 것이다.
저 태극기가 걸려 있는 붉은 벽돌에 총구멍 흔적이 있었다. 6.25.때 북한군과 총격전 흔적이라고 한다.
폭증하는 죄수를 수용할 수 없자 계속 대규모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13제곱미터 즉 4평도 안되는 곳에 50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김구선생님의 50명 수감내용에 대한 옥중일기를 읽어 봤다.
10명이 자기도 비좁은 곳에 어떻게 50명이 잠을 잤을까?
방법은 이렇다. 한사람이 바로 누우면 다른 사람은 반대편으로 눕는다. 즉 옆사람의 발쪽에 얼굴오게 하여 눕인다. 이렇게 오이나 가지를 박스에 최대한 많이 담기 위하여 지그재그로 포장하듯이 누웠다. 이렇게 하여도 눕지도 못하고 서서 있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 사람들의 역할은 사람을 짐짝처럼 최대한 한쪽으로 밀친다. 그러면 계속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 서 있는 사람을 눕힌다. 계속 이렇게 반복하다보면 옥사가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고 표현되어 있다. 왜냐면 여기저기서 뚝딱~ 벽에 금이 가는지 사람 갈비뼈나 관절이 부러지는지 모를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그 소리가 그렇게 무섭게 들렸다고 한다. 겨울이면 몰라도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는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중 한 곳은 한명이 겨우 들어갈 좁은 방이 있었다고 한다. 문을 닫으면 빛 한줄기 없어 '먹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 한달이상 감금되고 나오면 이상한 환각증세에 시달린디고 한다.
이런 길다란 통로가 있는 감방이 2층으로 되어 있고 3개의 옥사가 부채꼴 모양으로 한 곳에서 모두 관찰 및 관리 될 수 있도록 붙어 있었다.
무거워진 마음으로 옥사를 나와보니 연못에 핀 수련꽃. 이 꽃을 보아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저기 부채꼴 모양의 격벽은 무엇하는 곳일까?
하루에 딱 30분만 주어지는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곳에는 침묵이 첫번째 지켜야 할 규칙이다. 운동중에도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도록 격벽을 두어 통제하였다.
거대한 태극기가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넋을 위로하는 것 같다.
이 나무가 통곡의 미류나무다. 신작로에서 대사초등학교로들어오는 개울가 우측에도 이런 미류나무가 5~6그루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베어 없어졌지만 그때의 기억에 반갑게 다가갔다. 그렇지만 이 나무의 유래를 알고 놀라 한발 물러 섰다.
아래는 어느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
<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블로그 내용 >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갖은 옥고를 치르고 목숨까지 빼았겨야 했던 서대문형무소는 우리민족 독립의 현장으로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 볼수 있는 장소로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방문하기에도 좋은 교육의 장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난 날의 형무소를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지 못한 주위 환경이 아쉬운 점이긴 하다만 계속 보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보내줄 필요가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터입니다.
지금은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은 형무소의 벽
입구에서 어른 입장표(1,500원)를 구입 입장을 합니다. 가끔가다보면 TV에서 감옥에서 출소하거나 입소하는 장면에서 철대문이 열려 있고 드나드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형무소 내 왼쪽 풍경
형무소내 오른쪽 풍경
서대문형무소 역사 전시관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이 역사관. 1층에서 2층, 그리고 지하로 이어지는 전시관입니다.
첫번째 전시관을 둘러 보도록 합니다.
형틀의 모습과 태극기 목각판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하여 만든 태극기 목각판이라 합니다.
태형에 사용되는 여러가지 도구들.
태(笞): 일제는 조선태형령을 1912년 3월 18일에 제정공포하여 우리민족에게 태형을 적용하다가 3.1운동을 계기로 1920년에 폐지할때까지 사용하였답니다.
용수
일제강점시기에 애국지사를 호송할때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씌웠던 것이며, 이를 보는 사람에게 공포감과 혐오감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수갑과 족쇄
제소자용 밥그릇
백범일지
백범일지가 처음활자로 간행되었던 1947년도 초판 간행본.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에 대하여 알아보면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민족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다양한 국권수호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봉기하여 일제의 무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였으며, 동시에 계몽운동을 통하여 실력을 쌓아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고 침력기관을 폭파하는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 같은 우리 민족의 국권수호운동에 대해 일제는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는데 민족운동을 펼치던 헤아릴 수 없는 의병과 의사. 열사. 계몽운동가들이 일제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당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애국선열들은 오히려 항일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으며,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운동 역시 더욱 활발히 전개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에 당황한 일제는 우리민족의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온갖 미명아래 애국선열들을 체포감금하였고, 갖은 고문과 악형을 일삼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일제는 우리 애국선열들을 감금시킬만한 충분한 공간을 필요로 하였고, 1907년부터 근대감옥을 지어 1908년 10월 '경성감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것이 후에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루고 산화해간 독립운동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재현한 모형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3.1운동 민족지독자 48인
일제침략에 항거하다 투옥된 의병장들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세운 독립문
독립문은 최초의 서양식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높이 14.28m, 폭 11.48m로 45cm X 30cm 규격의 화강암 1,850여개로 세워졌습니다.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 모양으로 되어있고,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무늬가 방패모양을 한 문양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부의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동층계가 있습니다. 또한 상단에는 독립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에는 獨立門의 한자가 새겨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감옥은 형을 집행하기까지의 미결수를 수용하는 제도이고 인정을 표방하여 감옥은 설치하되 비어있게 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감오긔 규모는 클 필요가 없었답니다. 또한 형벌이 가볍과 불법적인 고문행위를 엄격히 규제하였으며 기꺽해야 태형이 가해지고 이것마저도 엄격히 규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이 같은 전통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일제는 무수한 항일독립운동을 탕압하고자 전국에 수많은 형무소를 만들어놓고 애국지사들을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하였습니다. 특히 애국지사들에 대하여서는 특수번죄자로 분류하여 족거수용한 후 고문과 폭행등 갖은 악형을 일삼았으며 전기도 변기도 없는 감방에 수감했다 합니다.
감옥의 위생 밑 급식상태는 마치 짐승우리 같았고 통밥으로 불리던 가다밥(주먹밥)을 걸핏하면 줄여버리는 바람에 영양실조에 걸리기 일수였다 합니다. 또 일부 수감자는 창고들지에서 노역하다가 쥐가 나오면 잡아 먹기까지 하는 등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일제는 잡범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독립운동가들을 구금한 다음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가했습니다. 토와 입으로 고춧가루 물 붓기, 발가벗기고 거꾸로 메달아 비행기 태우기, 고무호스로 입에 물 넣기, 손톱 발톱 밑에 바늘찌르기, 관속에 넣고 못질하기, 생매장하여 위협주기, 전기고문, 성고문 등 참으로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갖은 악형이 동원되었다 합니다. 특히 이렞가 ㄱ문할때 즐겨 사용한 쇠좆몽둥이(소의 생식기를 뽑아 말린것)는 한대만 맞아도 살이 찢어지고 피와 설이 튀어 올랐는데 이것으로 매질을 하거나 불려서 여성음부에 삽입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합니다.
이러한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탄압은 대개 한국의 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가해진 것들이지만 일제통치 36동안 항일독립운동은 줄기차게 계속되었었습니다.
고문의 참혹상에 관하여 당시 서대문감옥에서 조선인 간수로 근무했던 한 전직교도관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습니다. " 나는 지금도 내가 처음 근무했던 서대문감옥의 고문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아니, 그곳에서 숱하게 매질을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비명소리가 지금도 귀에 잡히는 듯 하다. 당시 서대문감옥 본관에는 취조실이라는 나무팻말이 붙은 고문실이 있었다. 그 크기는 8평 가량인데 출입문과 조그만 창문이 하나 있을 뿐이어서 한낮에도 전등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캄캄하였고 네 벽은 모두 방음화되었으며 바닥은 시멘트였다......" (권영준 "刑政半世紀" 중앙일보. 1971. 9. 20)
독방을 재현한 모습.
벽관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고문하기 위해 사용한 고문기구로, 한 사람이 들어가 서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비좁아 2,3일 동안 갇혀 있으면 전신이 마비되는 이 고문을 직접 체험하도록 재현한 모형입니다.
이제 지하로 내려가면 갖은 고문과 수감실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이 있습니다.
갖은 혹독한 방법으로 고문을 가하는 모습들.
억지 거짓자백을 강요하는 일본 순사
갖은 악랄한 고문에 고생당하는 애국지사들.
숱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애국정신을 다잡는 모습
일제의 침략과 잔혹한 만행에 앞서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애국지사
우리 애국지사가 감방 안에서도 계속 저항을 하자 구타를 하는 일본 간수
역사관을 나와 옥사가 있는 장소로 발길을 옮깁니다.
한 곳을 개방하여 옥사를 경함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감옥의 수용실태
일제는 감옥을 한민족 탄압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했기때문에 감옥의 계속적인 증설에도 불구하고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1908년 전국에 8개소의 감옥을 설치했을때 제대로 감옥시설을 갖춘곳은 경성감옥 뿐이었고 그 외의 감옥은 불완전한 온돌감방이 2~3개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908년 말에 수감인원은 이미 2,000여명을 넘고 있었기 때문에 평당 7,9명이 수용되고 있었으며, 감옥의 위생.급식상태는 마치 짐승우리와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감방은 햇빛과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어둡고 습기가 찼고, 용변시설을 갖추지 않아 방안에서 변통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옥사는 가득찼으나 수감인원이 날로 증가하여 감방은 제대로 앉지도 못할 만큼 비좁았습니다. 재감자가는 누워서 잘 수가 없어 1/2씩 또는 1/3씩 교대로 자게 하였으므로 전염병등 질병이 유행하고 사망자가 속출하였습니다. 특히 일제강점시대에 감옥에서 걲는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는데 급식의 혼합비율은 쌀 10%, 보리(또는 조) 50%, 콩 40%로 정해졌는데, 일제말기에는 전쟁때문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콩 대신 콩깨묵을 지급하였고 그나마 대폭 줄이게 되자 많은 수감자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옥사를 나와 주위를 돌아봅니다.
옥사 뒤쪽으로 가다보면 나병사가 나오는데 이 곳은 1923년에 지은 독립옥사로 투옥자 중 나병환자나 다른 전염병자와 불치 환자들을 격리하여 수용하던 곳이랍니다. 3개의 감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비된 공원의 왼쪽 길에는 순국선열 추념탑이 양팔을 길게 벌리고 서 있습니다.이 곳은 원래 제 1,2,3,4,5,6 옥사가 있었던 자리라 합니다.
공원길을 따라 주욱 따라가다보면 사형장이 나옵니다.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사형이 집행된 곳입니다. 일제의 침략과 만행에 항거하다가 투옥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순국선열들의 넋이 서려있는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사형장의 둘레는 5m 높이의 붉은 벽돌담이 쌓여있고, 간물 면적은 50 제곱m이며, 내부에는 사형을 집행할때 사용한 사형수 의자. 동아줄. 배석자용 의자가 있고 지하엔 처형된 시신을 확인하는 방이 있습니다.
사형장 엎엔 시구문이 있는데,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처형한 후 시신을 형무소 밖 ㄷ공동묘지까지 운반하기 위해 비밀통로로 뚫어 놓은 굴입니다. 일제는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입구를 막았으나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을 조성할때 약 40m 길이로 발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해방된지 40여년이 흘러서야 복원을 하다니 그동안 우리는 어찌 그러한 과거를 잊고 살았던 것인지 그들에게 한 없이 미안하고, 참으로 씁쓸할 마음이 들뿐 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공원은 한가롭고 마냥 아름다워만 보입니다.
더 늦기전에 우리는 일본에게 받아야만 하는 확실한 보상과 과거 사실에 대한 부정보다는 고개숙인 진실한 사과를 받아내야 다시끔 이러한 슬픔이 조금이라도 삭혀지지 않을까요?
독립공원은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조경에 애쓴 흔적이 보이고, 덕분에 도심인들에게 쉼터가 될수있는 공원이 된 뿐더러 우리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역사적 가치가 깃든 곳으로 주말 나들이로 먼곳을 다녀오느라 피곤할 필요도 없고, 돈도 들 필요가 없는 서울에서의 의미있는 하루가 될 기횔 제공해 주는 좋은 답사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상은 모하라였습니다....
첫댓글 아! 너무 치가 떨려 말이 안나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