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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108분 + 보너스 41분 / 미성년자관람불가>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제라르 코르비오
주연 - 보리스 떼랄, 브누아 마지멜, 콜레트 엠마누엘, 세실 브와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14세, 그의 궁정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 희극작가 몰리에르
예술을 축으로, 한 시대를 지배한 세 남자의 이야기
2001년 베를린 영화제 오프닝 초청작
17세기 프랑스, 열네 살의 어린 왕 루이14세는 이태리 출신 음악가 륄리가 만든 무곡에 맞춰 춤을 춘다. 어린 루이 대신에 실질적인 권력을 움켜쥔 사람은 어머니와 재상 마자랭. 루이에게 주어진 건 춤과 음악 뿐이다. 8년 후, 루이는 재상의 죽음을 계기로 직접 통치에 나선다.
루이는 자신을 위해 작곡하고 자신의 춤을 돋보이게 해주는 륄리의 음악에 매료된다. 륄리 또한 혼신을 다해 작곡한 음악과 사랑을 왕에게 바친다. 그들은 마치 춤과 음악에 심취한듯 서로에게 빠져들어간 것이다.
루이는 왕실극단의 연출자 몰리에르와 왕실악단 지휘자 륄리가 만든 음악과 연극을 통해 절대권력인 태양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들의 작품은 바로 왕의 권력과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러한 왕의 은밀한 야심을 대변하던 몰리에르와 륄리는 지나치게 신랄한 풍자극으로 마침내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는데...
=== 참고자료 === <2013년 7월 8일 네이버캐스트 / 진회숙 글>
영화 속 클래식
제라르 코르비유 감독
왕의 춤
태양왕 루이 14세가 군림하던 시절, 프랑스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아버지인 루이 13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대신해 이탈리아 추기경 마자랭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했다. 국사에서 배제된 어린 왕은 할 일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여흥을 즐기는 것. 그는 발레에 몰두했다. 7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고, 15세의 나이에 [밤의 발레]라는 작품에 아폴로 역으로 출연했다. '태양왕'이라는 호칭은 바로 이때 얻은 것이다.
1661년 마자랭이 죽자 22살의 루이 14세는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십수 년 동안, 여흥을 즐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그는 권력을 잡은 후에도 그 호사스러운 취미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권을 쥐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파리 근교 베르사유에 거대한 궁전을 신축하고, 왕립 무용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는 정사를 보는 틈틈이 사냥과 기마, 트럼프와 당구, 연극과 음악, 발레를 즐겼다.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궁정의 이 ‘화려하고 떠들썩한 놀이 문화’는 그 후 전 유럽 왕가의 모델이 되었다.
제라르 코르비유 감독의 [왕의 춤]은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궁정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와 극작가 몰리에르가 손잡고 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미생활에 봉사하고 있었다. 륄리는 본래 이탈리아 출신으로 열두 살 때인 1646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스무 살 때 프랑스 궁정의 바이올린 주자와 무용수로 일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 왕을 위한 작곡가가 되었으며, 1661년에는 프랑스 왕실 악단의 총감독 겸 작곡가의 자리에 올랐다.
륄리는 특별히 발레를 좋아하는 왕을 위해 발레곡을 많이 작곡했다. 루이로 하여금 태양왕이라는 호칭을 갖게 한 [밤의 발레]도 바로 그가 작곡한 것이다. 륄리는 어린 왕에게 아름다운 구두를 선물하고, 구두를 신은 왕은 [밤의 발레 ]를 춘다. 힘찬 음악, 아름다운 의상과 화려한 무대, 절도 있는 안무 등이 어우러진 이 공연에서 루이 14세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태양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에는 [밤의 발레] 외에 [쾌락의 발레], [크세르크세스의 발레], [알시디안느의 발레] 등 륄리가 작곡한 발레곡이 나온다. 루이 14세 시절, 발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프랑스 궁정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장면들이다.
이 무렵 프랑스 궁정에는 또 한 사람의 엔터테이너가 있었다. 바로 극작가 몰리에르였다. 그는 주로 지방무대에서 활동하다가 1658년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한 [사랑에 빠진 의사]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왕실 전속의 프티 부르봉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다가 1665년 왕실 전속극단의 총감독이 되었다.
영화 [왕의 춤]은 각각 왕실 악단 총감독과 왕실 전속 극단 총감독으로 일했던 륄리와 몰리에르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1661년 8월 17일, 몰리에르는 작곡가 륄리와 손잡고 [훼방꾼들]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이제 막 실질적인 권력을 거머쥔 태양왕 루이 14세에게 바쳤다. [훼방꾼들]은 고전 희극과 발레가 결합된 새로운 양식으로, 여기서는 음악과 춤이 대사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새로운 양식을 ‘코미디 발레’ 라고 했다. 프랑스 궁정 사람들은 발레를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궁정에는 발레 공연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무용수가 부족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몰리에르는 연극의 막간에 발레를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렇게 해서 코미디 오페라와 발레를 샌드위치처럼 결합한 코미디 발레라는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몰리에르는 희극의 대가로 꼽힌다. 그의 연극은 그냥 재미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당대의 위선에 대한 풍자도 담고 있었다. [왕의 춤]에는 몰리에르의 희극 [엘리드 공주]의 공연 장면이 나온다. 륄리와 몰리에르가 배우로 출연해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연기하는 것을 보고 왕을 비롯한 관객들은 폭소를 터트린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대비와 성직자들은 심기가 불편하다.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만다. 몰리에르의 [타르튀프]라는 작품이 문제가 된 것이다. [타르튀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을 풍자한 작품이다. 애초에 루이 14세의 후원을 받고 만들어졌지만 성직자와 귀족, 대비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공연이 금지되고, 륄리와 몰리에르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1670년, 루이 14세는 [멋진 애인들]이라는 코미디 발레에 출연한다. 여기서 왕이 맡은 역할은 아폴로. 그는 온몸에 황금 칠을 하고 아폴로로 출연해 태양왕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중간에 몸을 돌리다가 균형을 못 잡고 그만 넘어지고 만다. 발레를 추기에 너무 몸이 늙은 것이다. 왕은 곧바로 무대를 떠나고, 그 후로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춤으로 더 이상 왕을 즐겁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륄리는 절망한다. 바로 그때 몰리에르가 찾아와 새로운 작품으로 왕을 즐겁게 해 주자고 한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코미디 발레 [서민귀족]이다. [서민귀족]은 주르댕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부자들의 위선을 풍자적으로 폭로한 몰리에르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므슈 주르댕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신흥 중산층, 말하자면 ‘벼락부자’이다. 돈은 많지만 평민에 불과한 그는 자신의 재력에 맞는 품위를 갖추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음악, 무용, 검술, 철학 선생 등을 고용해 귀족의 생활을 배운다. 하지만 워낙 무식한 탓에 그 과정에서 온갖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의 딸 루씰은 클레몽트라는 청년과 결혼하려고 하지만 주르댕은 그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클레몽트는 터키 왕자로 분장해 주르댕 앞에 나타난다. 그는 엉터리 터키 말을 하고, 엉터리로 터키식 종교의식을 치르지만 무식한 주르댕은 그것도 모르는 채 자기도 왕족이 되었다고 좋아한다.
[왕의 춤]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 주르댕을 속이며 엉터리로 터키식 종교의식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륄리의 [터키 의식을 위한 행진곡]이 연주된다. 여기서는 대사, 음악, 연기, 연주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특히 악사들의 과장된 몸짓이 인상적이다. 자기들이 희극배우나 된 것처럼 온몸으로 깔깔거리며 연기한다.
연극과 음악, 발레가 결합된 종합예술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서민귀족]은 엄밀한 의미에서 연극이다. 륄리의 음악은 극의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몰리에르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연극과 음악, 무용 세 장르의 예술에 서열을 매기면서 음악과 무용을 ‘연극을 위한 장식품’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서민귀족]에서 음악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말 그대로 막간극의 반주 정도 밖에 안 된다. 륄리는 몰리에르와 함께 하는 코미디 발레에서 자기 음악이 부수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작곡가라면 음악이 주가 되는 작품을 쓰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심사가 뒤틀린 것일까. 륄리는 몰리에르에게 오페라에 발레와 코미디를 집어넣어 자기 예술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서민귀족]이 공연된 이듬해인 1671년, 파리에서는 륄리의 라이벌인 로베르 캉베르의 오페라 [포몬느]가 크게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대사 없이 오로지 노래만 부르는 오페라인데, 공연은 성공했지만 무대의 기계 장치에 너무나 큰 돈을 투자하는 바람에 대본을 쓴 페랭이 빚에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륄리는 궁지에 몰려있는 페랭을 찾아가 오페라 공연의 권한을 쉽게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루이 14세를 찾아가 파리에서 공연되는 모든 오페라 공연에 대한 독점권을 요구한다. 왕으로부터 오페라 독점권을 부여받은 륄리는 한창 리허설 중인 몰리에르를 찾아가 그동안 그와 함께 만든 모든 작품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일로 륄리와 몰리에르의 오랜 동반자 관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륄리와 결별한 몰리에르는 작곡가 샤르팡티에가 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서민귀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상상병 환자]를 무대에 올리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1673년 2월 17일, 주인공으로 출연한 몰리에르는 공연 도중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영화에서는 몰리에르가 [상상병 환자]에 출연해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펼치다가 나중에 해골 가면을 쓴 무희들이 슬로 모션으로 죽음의 춤을 추는 가운데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폐병을 앓고 있었던 몰리에르는 무대에서 쓰러졌으며, 그 후 얼마 안 지나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몰리에르로부터 독립한 륄리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모색한 끝에 1673년, 기존의 프랑스 연극과 발레 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서정비극'이라는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선보인다. 륄리의 서정비극은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별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서정비극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극을 훨씬 중요하게 취급하고, 발레와 합창 역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며, 기악이 단순한 노래 반주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와 본격적인 노래인 아리아가 확연하게 구분되는데, 서정비극에서는 이것이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가 길고 기교적인데 반해, 서정비극의 아리아는 짧고 간단하다. 또한 서정비극에서는 레치타티보가 극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륄리는 프랑스어의 특징을 살린 독특한 레치타티보 즉, 이탈리아 레치타티보보다 훨씬 선율적이고, 프랑스어의 운율이 충분히 살아나는 레치타티보를 썼다.
[왕의 춤]에도 륄리의 서정비극이 나온다. 1686년에 작곡한 마지막 서정비극 [아르미드]를 비롯해 [파에통], [아티스], [이시스], [아마디스] 등이다. 마지막에서는 대표적인 서정비극의 여러 장면들이 연달아 나온다. [이시스]에 나오는 [프랑스의 행복을 위해 신이 선택한 사람]과 [영웅의 위대함과 당당한 위용을], [아르미드] 중 [그 이름의 찬란함이 세상 끝까지 퍼지기를] 그리고 [아마디스] 중 [하늘이 이 땅에 알리는도다]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오페라를 감상하는 왕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그는 매년 한 편 씩 꼬박꼬박 오페라를 써서 무대에 올렸지만 왕의 환심을 사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1687년 1월 8일, 이 날은 륄리가 작곡한 [테 데움]이 연주되는 날이다. 륄리는 왕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왕은 오지 않고 결국 연주가 시작된다. 화가 난 륄리는 격정적으로 지휘를 하다가 그만 지휘봉으로 발등을 찍고 만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기다란 막대 모양의 지휘봉을 바닥에 쿵쿵 내리치며 지휘를 했는데, 그러다가 그만 실수로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다. 상처는 심각했다. 의사들은 발을 잘라야 한다고 했지만 륄리는 끝내 이것을 거부했다. 발을 자르면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며 버텼다. 결국 염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륄리는 화려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리고 외롭게 세상을 떠난다.
륄리가 죽고 난 후, 궁정에서 음악이 사라졌다. 거울의 방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던 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오늘은 왜 음악이 없지?”
그런 후 방을 나가는 왕과 신하들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륄리의 [스페인의 폴리아]가 흐른다.
=== 참고자료 === <2009년 9월 1일자 발행 네이버캐스트 / 서울교육대학교 함규진 교수 글>
[인물 세계사]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Louis ⅩⅣ, 1638. 9. 5 ~ 1715. 9. 1
1715.9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다
베르사유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 거룩히 여겨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땅에서나 바다에서나,
그 어디서나 당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더 이상 맹트농 부인의 시험에 들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재무총감에게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아멘!
18세기가 열린 지 몇 년 되지 않던 당시, 이처럼 주기도문에 빗대어 ‘태양왕’ 루이 14세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파리와 프랑스 곳곳에서 연일 나붙었다. 나중에 볼테르는 이 시대를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드로스가 활약하던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에 뒤지지 않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당시 2천만에 달하던 프랑스의 민중은 지쳐 있었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그에 맞춰 세금의 압박 역시 심해지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기근과 전염병까지 덮쳤다. 1710년 한 해에만 30만 명 이상이 죽어갔다. 베르사유의 임금님은 그들에게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였으나, 삶이 괴롭다 보면 자연히 절대자에게 원망이 돌아가는 법, 당장에라도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불온한 공기에 프랑스는 질식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루이 14세는 고독과 고통 속에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낡은 성처럼 무너져가는 그의 건강을 많은 의사들이 달라붙어 호전시키려 했으나, 거꾸로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침내 1715년 9월 1일, 77번째 생일을 나흘 남겨 두고, 태양왕의 수명이 다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볼테르가 멋대로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짐은 국가다”라는 말이 아니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였다고 한다.
위태롭던 '신의 선물'
루이 14세는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군주의 하나다. ‘절대주의’는 그의 이름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며 화려한 궁정 생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시작은 매우 미약하고, 위태로웠다.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 왕비의 아들로 1638년에 태어났다. 무려 23년이나 후사를 보지 못하다가 얻은 왕자였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의 선물’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1643년, 루이 13세가 세상을 떠나며 겨우 여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이 된다.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을 맡았고, 나랏일을 거의 모르는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 마자랭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런 가운데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관료귀족들이 반정부 성향을 노골화했다. 마자랭이 앞장서서 그들의 특권을 줄이고 왕실의 수입을 늘리려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648년, 마자랭의 칙령들을 고등법원이 거부하고 이에 맞서 그 대표자들을 정부가 체포하자 파리 시민이 봉기에 나섰다. 이후 1653년까지 이어진 ‘프롱드의 난’의 시작이었다.
왕실은 부랴부랴 파리를 탈출하여 생제르맹으로 피신했다. 이 와중에 한때 폭도들에게 왕과 대비가 유린될 뻔했으나, 대비가 천진하게 잠자는 어린 루이 14세의 모습을 보여주며 눈물로 호소한 끝에 간신히 무사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놀랄 만큼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만 왕실에 맞서 왕국의 여기저기서 반역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왕실이 희망을 걸었던 명장 그랑 콩데 공까지도 딴 마음을 품고 반란군에 가담했다. 1651년에는 결국 견디지 못한 마자랭이 외국으로 도망치면서 프롱드의 난은 성공을 거두나 싶었다. 하지만 대귀족, 관료귀족, 지방귀족, 소시민 등 왕국의 온갖 세력이 참여했던 이 반란은 그만큼 참여자들 사이에 이해가 엇갈리기도 했고, 그래서 왕실 측이 잘 막아냈다기보다는 자체의 분열과 다툼 때문에 실패한다. 1652년 9월에 그랑 콩데는 파리를 버리고 달아났고, 그 동안 지방을 전전하던 왕실이 5년 만에 파리에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마자랭도 귀국하고, 지방의 프롱드 잔당들도 진압되어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베르사유에 태양이 뜨다
어린 나이였지만 때로는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며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을 뼈저리게 겪었던 루이 14세는 기필코 왕권을 강화하리라 생각했고, 그가 친애했던 학자 보쉬에도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그런 생각을 뒷받침했다. 때마침 사회 흐름도 왕권의 강화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사실상 귀족들끼리 기득권과 새 특권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인 것과 같았던 프롱드의 난을 치르고 나자 “어떤 보편적 기준을 중심으로 각자의 권리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엘리트 집단 사이에 생겼고, 30년 전쟁에 이은 프롱드의 난으로 넌더리가 난 민중 역시 강력한 정부를 원하게 된 것이다.
이십여 년간 나라를 쥐고 흔든 마자랭이 1661년에 죽음으로써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에 1년 앞서 스페인 왕실의 마리 테레즈와 혼인함으로써 강력한 스페인의 지원도 얻게 된 그는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족과 대귀족의 정치참여를 제한했으며, 지방에 지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시민과 상인계급, 말하자면 부르주아 출신들 중에서 비서관들을 발탁하여 철저히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총신들로 삼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콜베르였다. 리슐리외나 마자랭처럼 카리스마적이지는 않으면서 실무에는 능했던 그는 재무총감, 조영총관 등을 맡으며 루이 14세가 한껏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여러 해 동안 충실히 보좌하게 된다.
루이 14세는 단지 행정개혁으로 권력을 늘린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왕의 옥좌를 만인이 경외하고 찬탄할 그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을 알렉산드로스나 헤라클레스에 비겼으며, 플랑드르 전쟁과 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러한 호언장담을 뒷받침해 보였다. 또한 라신, 코르네유, 몰리에르, 페로, 르브룅 등 작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고전주의 예술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꽃피었다(그들은 왕실 후원금의 대가로 루이 14세를 칭송하는 작품을 양산해냈다). 그는 무용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궁정이나 광장에서 열리는 발레 무대에 직접 출연, 아폴로나 마르스 신으로 분장한 모습으로 수준 높은 춤솜씨를 선보여 수많은 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리고 1662년부터 태양왕으로서의 자신을 빛내 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 베르사유 궁을 짓기 시작했다. 베르사유 궁이 완성되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1682년 이후에는 대중들 앞에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는 일은 사라졌다. 대신 궁정에서는 불과 십여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세밀한 에티켓, ‘세련된 궁정 예법’이 도입되었다. 만찬의 진행 순서, 좌석 배치와 각자 입을 옷, 취할 행동 등이 하나하나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왕의 옷을 입히는 일과 세수를 시키는 일, 코를 풀게 하는 일 등도 다 격식대로 정해졌고, 그 담당자도 제각기 따로 있었다. 모든 게 격식대로였다. 베르사유의 일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과 같았다.
절대왕권을 위하여
과연 루이 14세는 무슨 생각에서 발레에, 베르사유에, 에티켓에 열정을 쏟았을까. 윌리엄 쿠피는 단지 허영심이 많은 독재자의 겉만 번드르르한 악취미였을 뿐이라고 한다. “루이 14세의 삶은 시간과 돈이 남아돌지만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떠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볼 때, 그 배후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강한 집념을 찾아볼 수 있다. 귀족들의 봉건 기득권을 교통정리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귀족을 포함한 모든 국민을 하나의 국가 체제로 통합하고 그 위에 군림한다. 그 통합을 확고히 하고자, “국가적” 수준이 아니고서는 꿈도 못 꿀 이미지를 제공한다. 오늘날에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적 제전이 국민통합에 이용되듯, 루이 14세가 보여준 눈이 번쩍 뜨이는 이미지들은 정치선전의 속셈을 갖고 있었다. 고대 비극을 능가하는 라신과 코르네유의 장엄한 비극을 보며,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국왕에 대한 존경심과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머리가 아플 만큼 복잡한 궁정의 에티켓도 정치적이었다. 에티켓 때문에 궁전에 들어가는 귀족들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계속 긴장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 백작은 알현을 하루 세 번씩 했었는데, 이번 달부터 한 번으로 줄었다” “모 공작부인은 옷 갈아입는 시중만 들었는데, 내일부터는 식사 시중에도 참여한다” 같은 인식은 권력에 대한 긴장감과 경쟁심을 부추긴다. 아무 것도 아닌 예식 절차 때문에 모두가 늘 왕을 우러러보고, 총애를 갈망하게 된다. 기원전 2세기에 숙손통은 군주의 권위를 높이려면 복잡하고 장엄한 예법을 도입하라고 한고조에게 조언했다. 그 수법을 17세기에 루이 14세가 본받은 것이다. 불필요할 만치 자주 치러진 전쟁 역시 국민을 단결시키고 군통수권자로서의 왕의 힘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영광 끝의 상처
그러나 모든 것에는 계산서가 따르기 마련이다. 루이 14세를 태양왕으로 만들기 위한 온갖 사업들은 비용이 크게 들었다. 특히 전쟁 비용은 엄청났다. 루이 14세는 왕실 후원으로 조성한 매뉴팩처 산업에서 그런 비용을 일부 염출하고, 관직을 매매하기도 했지만(당시에는 그것이 비리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은 국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지방귀족과 상인계급이 절대왕정에 협력한 속내가 드러났다. 전보다는 틀이 잡혔지만 아직 국가관료제는 힘이 약했고, 세금 징수는 지방의 귀족과 대상인들에게 위탁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세금의 태반을 자기 몫으로 챙기고, 정부에는 3~40퍼센트만 상납했던 것이다. 전쟁을 비롯한 국가적 사업이 늘수록 이들은 부자가 되어갔고, 그만큼 농민은 피폐해져 갔다. 루이 13세 당시 10만에 못 미쳤던 상비군은 루이 14세 때 60만을 돌파하여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군사력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는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을 촉발시켜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등은 투입한 전력에 비해 신통치 못한 결과만 얻고 끝났다.
날마다 ‘베르사유 라이브쇼’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르는 루이 14세의 건강도 점차 부도 위기에 몰렸다. 그는 만성적인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40대 후반에는 충치가 심해져 이를 모두 뽑아야 했다. 50대부터는 잇몸 염증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악취를 풍겼고, 치질과 함께 통풍이 와서 앉으나 서나 고통스러워했다. 병을 고친답시고 악화시키기만 하는 당시의 의술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이쯤 되면 정신 건강도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초인간적인 지위의 부담을 덜고자 미식과 미녀에 탐닉했다. 특히 왕성한 성생활로 왕비 이외의 여인들에게서 12명의 자녀를 보았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며 심신이 쇠약해지자 미녀보다는 정신적 위안을 주는 여성을 찾게 되고, 이 틈을 노려 막후의 실권자로 부상한 사람이 맹트농 부인이었다.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였던 그녀의 영향도 한몫 하여 루이 14세는 1685년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데, 이로써 국민통합에 금이 갔을 뿐 아니라 대체로 신교도였던 수공업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가뜩이나 힘든 나라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역사의 어릿광대
루이 14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불리는 미술사적인 흔적, 융성했던 고전주의 문학과 초기 자본주의의 실마리.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유산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어찌됐든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는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불과 백 수십 년 전만 해도 왕국 깊숙이 영국의 영토가 있고, 남부에는 독립 공국이 버티고 있으면서 지방마다 제각기 관습과 종교를 가지고 때마다 툭탁거리던 나라. 그 나라가 부르봉 왕조에 이르러 하나의 국가로 정비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그 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왕조의 역량을 자기 대에서 대부분 소모해 버렸다. 따라서 후계자가 될 두 왕은 이미 자체적인 생명을 가진 프랑스 국가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고, 그 허울을 걷어내고 ‘국민의 프랑스’를 만드는 데는 루이 14세가 죽은 뒤 겨우 70년이 필요했다.
한국사의 인물 중에서 루이 14세와 가장 비교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광개토왕? 고려 광종? 연산군? 뜻밖에도 지금까지 나와 있는 학술논문을 기준으로 하면 그처럼 한 시대를 진동시켰던 군주가 아니고, 군주조차도 아니었던 사람, 효명세자(1809~1830)다. 효명세자와 루이 14세를 비교한 논문이 여러 편 나와 있는데, 다만 두 사람을 철저히 비교했다기보다 무용에 미친 두 사람의 영향을 비교한 것들이다. 루이 14세가 발레의 진흥에 앞장서고 직접 발레에 출연까지 했듯, 효명세자도 병자호란 이래 궁중연회에서 사라졌던 정재(呈才) 무용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현존하는 정재 53종 중 30종 이상이 효명세자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용에 열정을 쏟은 동기 또한 두 사람이 엇비슷했다. 루이 14세처럼 효명세자도 세도정권의 압박을 받던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조선을 국왕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나라로 개조하려 했다. 이미지와 예법을 권력 강화에 활용하는 것은 본래 동양의 장기였고 보면, 왕권 강화에 부심했던 두 사람 모두 무용의 효과에 착안했음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래도 결정적 차이를 갖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이상이 알렉산드로스 같은 정복자, 아폴로 같은 초월적인 존재였다면 효명세자의 이상은 요순과 같은, 또는 세종이나 정조와 같은 유교적 성인군주였다. 효명세자는 루이 14세처럼 놀라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보다 유교 경전 공부와 수신에 힘쓰라는 압박을 크게 받았다. 더구나 그에게는 루이 14세처럼 정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배출할 길도 없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수십 년 동안 절대군주로 행세한 끝에 심신이 무너진 반면, 효명세자는 부왕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 지 불과 4년 만에 심신쇠약으로 죽음에 이른다. 군주란, 그리고 최고지도자란 역사에 놀아나는 광대와 같다. 하지만 그 광대짓의 범위와 정도는 역사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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