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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3월 7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일부. 기사 속 사진은 ‘여성 안수 허용’을 촉구하는 이들의 모습. |
함남노회 여전도회를 이끌었던 최영혜는 주장했다. 여성에게도 주(主)의 사명이 있고, 장로교인의 3분의 2가 여성이다. 그러니 이들을 중심으로 한 설교는 여강도사가 담당해야 하며, 여성 신자를 치리할 때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여성 장로가 치리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이다.2 이쯤 되면 최영혜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신학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1933년 제22회 총회는 “가르치며 치리하는 것만은 남자의 특권에 속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가르친 뜻”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비슷한 시기 감리교도 성차별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1930년 남북감리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할 때만 해도 교역자 자격에 남녀 구별을 두지 않았다. 여성 목사의 존재를 법적 차원에서 승인한 셈이다. 그런데 1934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2회 총회에서는 여성 목사가 교회 담임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사실상 여성 목사의 길이 좌절되었다. 이때 감리교는 여집사와 전도부인의 자격을 “가정에 책임이 없는 자”로 한정하였다. 여성에게만 독신의 신분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성차별이었다.
누군가는 반발할지 모르겠다. 21세기의 가치관으로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일을 비판하는 건 결과론적 오류라고. 《한국 기독교 흑역사》를 썼을 때, 제법 많이 들은 지적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때의 비극이 희극으로 무수히 반복되어 왔다는 점이다. 예컨대, 진보적인 신학으로 유명한 기독교장로회(기장)에서도 여성 목사 안수는 16년 만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57년 제42회 총회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여성 목사 안수가 1974년 제59회 총회에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여성 안수를 인정하지 않은 교단들과 비교하면 매우 선구적인 사례이지만,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진) 교단조차 여성 안수 문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성 안수 운동의 역사를 말할 때,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교단을 빼놓을 수 없다. 1959년의 교회 분열로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선 후 통합 교단의 여성들은 1961년부터 1992년까지 32년 동안 22번이나 여성 안수를 요구하였다. 통합 교단의 기관지인 〈한국기독공보〉를 천천히 살펴보면, 거의 매년 총회가 열릴 때마다 여성 안수 문제를 총회에 상정하고 가결시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을 모았던 이들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통합 교단의 여성들은 30여 년 동안 여성 안수를 실현시키기 위해 가부장적 신학에 맞서 싸웠던 셈이다. 결국 1994년 제79회 총회에서 여성 안수가 가결되었고, 1996년부터 여성 목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1961년 제46회 총회부터 1970년 제55회 총회까지만 해도 여성 안수 문제는 총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1960년대에 통합 교단은 여성 안수 문제를 반려함으로써 논의 자체를 구조적으로 배제하였다. 1971년 제56회 총회의 경우 94대 194로 부결되고 말았지만, 여성 안수 문제가 총회의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34년 이후 무려 38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불편한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1972년 제57회 총회 때 경남노회가 “여장로제도 신설을 총회에서 논의와 청원할 수 없도록 하여 달라”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성 안수 문제는 거의 매해 총회에 상정되었지만 부결을 거듭하였다. 심지어 1991년 제76회 총회 때는 여성 안수 문제가 부결된 이후 “향후 3년간은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하여 헌의도 할 수 없도록 하자”는 안건이 즉석에서 통과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다각적인 노력이 결실을 보아 1994년 제79회 총회에서 여성 안수의 길이 비로소 열렸다.
여기서 돌발 퀴즈.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목사는 누구일까. 정답은 1955년 3월 감리교에서 안수를 받은 전밀라 목사(1907-1985)이다. 혹자는 재건 교회의 핵심인물인 최덕지 목사로 알고 있지만, 전밀라 목사보다 2개월 정도 늦게 안수를 받았다. 기독교장로회에서는 1977년에 안수를 받은 양정신 목사가 있다. 그러다 1996년 통합 교단에서 여성 목사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합동 교단은 위기의식을 느꼈나 보다. 아무래도 통합 교단은 교세가 매우 큰 교단 중 하나이니까. 합동 교단은 가부장적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또 다른 희극이 반복되는 순간이다.
합동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해온 〈신학지남〉은 1996년 가을호를 ‘교회와 여성’이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여성 안수는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총신대의 박아론 교수는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여권주의자들이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박 교수는 “여성이 성경과 여권주의를 동시에 섬길 때에 그 마음이 성경에서 떠나 여성의 권리를 찾고 여성의 평등성을 실현하는 일에 쏠리기 때문에 성경을 여성의 자기주장에 유리하도록 이용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주장하였다.3 여성 안수 운동은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한 꼴이라는 비판이다.
결국 합동 교단은 1998년 제83회 총회에서 여성 안수를 “성경을 위배하고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말았다.4 그 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독교는 여성 안수 문제를 우회적으로 보류하거나 부결시키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합동 교단은 ‘여성 안수는 비성경적’이라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선을 확실히 그어버렸다. 1998년 제83회 총회를 통해 가부장적 성경 해석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셈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합동 교단이 여성 안수 불가를 고집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종교재판의 서막이 열리다
이왕 합동 교단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보태보자면, 종교재판의 성격을 띤 결정들이 교단 총회에서 무수히 나왔다. 다른 교단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지만, 합동 교단의 결정들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마 합동 교단이 1969년 제54회 총회에서 ‘개혁주의 연합회’(Reformed Ecumenical Synod, 이하 RES)의 행사를 중지한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RES는 개혁주의 신앙의 전수와 확장에 목적을 둔 국제적인 교회협의체였다. 합동 교단은 1962년 제47회 총회 때 RES에 가입하기로 결의하였고, 1968년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이어 1970년에 서울에서 RES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돌연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그 이유는 RES 행사에 참가하는 세계 각국의 보수교단 대표들이 술과 담배를 한다는 데 있었다. 합동 교단은 이들에게 금주와 금연을 강요할 수 없는 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RES 행사를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5
금주와 금연은 한국 기독교의 고유한 정체성이다. 이 점에 대해 섣불리 비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강요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합동 교단이 RES 행사를 돌연 취소한 사건의 이면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합동교단은 ‘하느님’과 ‘성서’ 호칭의 사용 금지(1977년 제62회 총회), 복음성가 사용 금지(1981년 제66회 총회), 찬송가 261장 금지(1988년 제73회 총회), 개역 성경 외 다른 성경 사용 금지(1991년 제76회 총회) 등을 결의하였다. 이를 통해 합동 교단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철저히 통제하고자 했다. (참고로 찬송가 261장은 진보 신학자로 알려진 김재준 목사와 문익환 목사가 작사로 참여한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이다.)
보수교단의 역사적 뿌리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화된 우상을 강요하는 시대에 신념과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후손이 보수교단이다. 문제는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옥죄던 방식을 그들이 따라 한다는 데 있다. 신학적 견해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사생활을 감시하고, 특정한 신학이 아니면 이단으로 몰아가는 방식 말이다. 작은 차이도 용납 못한 채 ‘진리 수호’라는 명목으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
올해 총회도 종교재판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포용한다는 이유로 임보라 목사와 김근주 목사, 그리고 김대옥 목사가 새로운 이단으로 규정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교단 총회가 종교재판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건 장로교의 1935년 제24회 총회였다. 이때 김춘배 목사가 여성 안수 반대의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을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큰 곤욕을 치렀으며,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김영주 목사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설을 부인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성경의 무오성을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현상이 불거진 셈이다. 한국 기독교의 낙인찍기가 본격화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24회 총회는 1934년 12월에 출간된 《단권 성경주석》도 정죄의 대상으로 삼았다. 《단권 성경주석》은 감리교가 선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해외 신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주석서를 번역한 책이다. 1934년으로부터 50년을 거슬러 올라간 해인 1884년을 선교 원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번역 작업에 51명이 참여했는데, 80%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당시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단권 성경주석》의 원전이 《Abingdon Bible Commentary》(1929)였다는 점이다. 원전은 미국 감리교 출판국이었던 어빙돈 출판사에서 나왔다. 장로교는 감리교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단권 성경주석》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러고는 번역작업에 참여한 장로교 목사들의 공개사과를 요구하였다. 이에 번역자로 참여하였던 채필근 목사와 이대위는 즉시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송창근 목사와 김재준 목사, 그리고 한경직 목사는 사과문을 미루고 미루다가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총회는 《단권 성경주석》의 구독을 금지하였다. 마침내 1935년 제24회 총회는 《단권 성경주석》을 이단서로 규정함으로써 감리교를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단권 성경주석》 사건은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감리교의 유형기 목사가 1936년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할 대표로 선정된 일에 대한 장로교의 반발을 들 수 있다. 이는 유형기 목사가 설립한 신생사(新生社)라는 출판사에서 《단권 성경주석》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장로교는 유형기 목사에게 ‘이단서’를 만든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에 감리교가 반박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두 교단 사이 갈등이 발생하였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단권 성경주석》은 두 가지 수용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즉, 《단권 성경주석》은 원전에 가깝게 번역되기도 했지만, 보수적인 독자에 맞춘 부분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단권 성경주석》은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이 공존하는 텍스트였다. 만약, 제24회 총회를 이끌었던 이들이 《단권 성경주석》을 꼼꼼하게 읽었다면 감리교를 적으로 돌리는 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타자를 차분하게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노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너머를 상상하자
이상 거칠게나마 교단 총회의 역사(라고 쓰고 ‘잔혹사’로 읽자)를 훑어보았다. 과거의 사건 속에 현재 한국교회의 친숙한 모습이 아른거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질문이 가능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거에 겪었던 딜레마를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과거라는 지층을 토대로 현재가 형성되는 법이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파국’의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주기적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한국교회가 교회사적으로 독특한 지점에 있음을 드러낸다. 교회가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는 말들을 쏟아내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파시즘적 정동(情動)을 뿜어내고 있다. 교회 안팎으로 기독교는 ‘혐오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교단 총회의 역사를 ‘여성혐오’와 ‘종교재판’으로 살펴본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교회가 1930년대부터 ‘정체성의 정치’에 몰두한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자기 집단의 정체성에만 집중한 끝에 자기 세계에 갇히고 말았다. 특정 사안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작은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건 자기 집단의 정체성에 몰두한 나머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 결과는, 타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사실은 앞으로도 기약할 수 없는 세월 동안 ‘혐오’와 ‘종교재판’이 한국 기독교를 배회할 거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비극에 맞서 저항하려면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면 새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 다시 보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 주요 결의 및 교회회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출판부, 2007), 32쪽
2 최영혜, "채정민 목사의 '여자에게 언권이 없다'에 대하여(1)", 〈기독신보〉(1934년 9월 5일).
3 박아론, "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신학지남 〉(제248호, 1996), 47쪽
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 주요 결의 및 교회회의》, 99-101쪽.
5 "보수의 긍지에 꺾인 젊은 힘", 〈교회연합신보〉(1969년 10월 5일).
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