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시, 거울의 제국[제4편]
거울은 깨어지며 완성되는 그 무엇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거울의 완성이란 무엇일까. 거울에는 완성이란 게 아예 없다. 거울이 깨지는 것은 불운의 징조다. 징조들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현실을 가로질러 온다. 거울이 깨지고 사태가 어긋난다. 세계는 무수히 많이 일어나는 사태들의 종결이다. 그때 수수께끼가 풀리고 자명함으로 세계가 굳건해진다. 시인은 그 완성이 곧 거울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걸까. 다음으로 거울에는 아무도 빠져 죽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검토해보자. 거울은 심연 없는 표면일 뿐, 어떤 깊이도품지 못한다. 아무도 거울에 빠져 죽을 수 없다. 거울에는 죽음이 나타나지 않는다. 거울은 죽음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 거울 밖의 세계에는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 그곳에는 꽃이 피고 지듯이 태어나고 죽는 삶이 엄연하다. 방금 태어난 거울이 명랑하게 다시 죽는다,라는 또 다른 명제가 있다. 거울에는 죽음이 나타나지 않지만, 거울 자체는 죽는다. 거울은 깨지면서 사라지는데, 우리는 거울을 통해 현존재의 가장 중요한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추체험한다. 홍일표는 ‘거울’이 흐르는 세계 속에서 태어나고 달아나며 사라지는 현존의 이미지들, 즉 새가 되거나 되지 못하는 것들, 거울에서 흘러내리거나 흘러내리지 못하는 나뭇잎들의 움직임들을 잡아낸다. “해와 달이 세 번 거울을 부인하며” 거울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방금 전 태어난 알몸의 거울”이 다시 죽는다. 그 뒤 “거울에서 흘러내린 나뭇잎들”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로 돌아간다. “창세기의 첫 줄이 불타고” 있는 이 사태는 거울의 죽음 뒤에 이루어진다. 이런 시적 진술이 품은 게 하나 있다. 모든 거울에 앞서는 ‘거울’, 즉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은 왜 거울 상에서 사라졌는가? 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거울에 거울을 비춰도 거울이 안 보이듯이 모든 거울에 앞서는 '거울'인 신도 거울에 자기를 비출 수는 없다. 신은 해와 달, 나뭇잎과 물고기로 화(化)되어 나타날 뿐이다. 거울에 신이 비치지 않는 것은 신이 사라진 탓이 아니라 신이 세계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거울이라는 흥미로운 광학적 기기는 그 자체로 시의 아주 중요한 이미지다. 거울은 이미지를 쪼개면서 수많은 표상들을 생산한다. 우리는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기 이미지를 보고, 자기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의 이미지를 본다. “<거울>은 장치이고, 거기에 비친 이미지를 보는 것이 ‘상상적이고 상징적으로 신을 보는 것’이다. 더 말하자면, 신을 보면서 자기 이미지를 보는 책략이 바로 이 <거울>인 것이다.” 거울은 무한 반사하는 것, 이미지의 세계, 표상의 제국이다. 진정한 ‘나’, 타자의 지평 속에서 ‘나’가 누구인가를 바로 보려면 당장 상상의 표면인 거울 앞에 서라! 지금까지 윤동주와 이상을 거쳐 홍일표의 시까지 ‘거울’ 시편들을 읽어보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앞으로 더더 많은 ‘거울’ 시편들이 나올 것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