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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땅
박 완 서
버스가 부릉부릉 가쁜 숨을 몰더니 마침내 그 노구(老軀)를 경련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와 농업협동조합과 지서와 S일보 보급소와 K전자 직매장과 다방과 중국음식점과 예식장과 잡화상이 있는 읍내를 순식간에 벗어나 푸른 들판으로 접어들었다.
“어딜 가나 길 하나는 잘 닦아놨단 말야.”
내 뒤에 앉은 남자가 남방셔츠를 풀어헤쳐가지고 양손으로 펄럭펄럭 부채질 시늉을 하며 혼잣말을 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숫제 사람을 키질하듯이 들까불던 흙먼지가 지독하면서도 돌이 많던 시골길이 매끈히 포장돼 낡은 버스가 제법 미끄러지듯이 구르고 있었다.
저만치 숨이 막히도록 짙푸른 들판 너머 미루나무숲 사이로 내가 떠나온 마을의 주황색 지붕들이 보였다.
농가도 많이 변했다. 초가가 슬레이트나 함석 지붕으로 바뀐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저런 강렬하다 못해 독기마저 서린 주황색으로 지붕을 칠할 줄이야.
미루나무숲 사이로 어른대는 주황색이 아직도 나에겐 지붕 같지 않고 팔월의 지열이 이글이글 열도 높은 불꽃이 되어 지각을 뚫고 분출한 것을 보는 것 같아 지겹다.
창가에 앉은 딸은 눈을 창 밖으로 둔 채 말이 없다. 찬바람에 곧고 긴 머리가 나부끼며 드러난 섬세한 귀와 목고개의 아름다움이 애처롭다.
처녀 나이 스물일곱이면 누가 뭐래도 과년한 편이다. 아직 고운 얼굴이지만 눈가에 잔잔한 애수 때문에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일 때도 있다.
그 애수가 오늘은 한층 짙다. 딸의 상심이 얼마나 깊은가 짐작된다. 그러나 나는 에미로서 도울 방도가 없다.
아무도 ― 나뿐 아니라 이 세상의 아무도 지금의 딸을 도울 수 없다. 이 ‘아무도’ 가 나를 소름 끼치게 하고 절망시킨다.
만일 딸의 지금의 상심을 아물릴 약손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분의 발 아래 몸을 던지고 내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셔가며 그분의 자비를 애걸하리라. 그러나 그런 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몇 년 전 나는 지금의 딸의 상심과 똑같은 아들의 상심도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바라다만 본 적이 있다. 그래도 그때는 내 마음이 지금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아들은 공과대학을 졸업하던 해 국가기관인 모 연구원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모두 다 부러워했다. 최신 최고의 시설과 환경에서 연구에 몰두하면서 충분한 생활보장과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까지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수재들이 운집하여 몇십 대 일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었다. 이런 곳에 외아들이 무난히 합격한 기쁨과 자랑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은 신원조회에 걸려 이차에서 낙방을 하고 말았다. 월북한 삼촌이 있다는 게 문제가 된 모양이다.
나는 아들과 딸한테 6·25 때 공산당한테 무참히 학살당한 아버지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심어주려고 한 나머지 삼촌에 대해선 거의 아무 얘기도 해준 일이 없었다.
월북 당시 삼촌은 미흔이었으므,로 남긴 가족도 없는데다가 나는 삼촌에 대해 아무 얘기도 안 했으므로, 그때까지 아이들에게 삼촌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간에 삼촌을 말살해버렸던 것 이다.
그런 삼촌이 느닷없이 소생해서 아들의 장래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죽은 사람의 망령을 달래는 미신적인 방법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산 사람의 망령을 달래는 법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질 못했다. 삼촌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렇게 아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음으로써 알려지자 여직껏 삼촌의 존재조차 몰랐던 만큼 아이들의 충격도 컸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비록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학살당했다고는 하지만 훌륭한 인품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아이들의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아이들의 흠모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아버지보다 아이들에게 한 번도 존재해본 일이 없는 삼촌이 어째서 그런 엄청난 영향을 아이들에게 끼칠 수가 있나를.
만일 아이들의 운명에 그런 악랄한 간섭을 하고 나선 게 삼촌의 산 망령이 아니라 산 몸뚱이였다면 나는 칼부림도 서슴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나는 삼촌이 진짜 빨갱이는 아니었노라고 웅얼웅얼 아이들에게 먹혀들지도 않을 변명 이나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빠르게 상심을 아물리고 유수한 개인 기업체에 취직하더니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
아들처럼 딸도 빨리 상심을 달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러나 이번 딸의 경우는 사랑의 문제까지 겹쳐 있어 아들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하다.
나는 딸이 그 청년을 얼마나 깊이 얼마나 오래 사랑했는지 알고 있다. 딸이 그만한 인물을 가지고 스물일곱 살씩이나 나이를 먹게 된 것은 오직 그 청년 때문이었다.
대학교 일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동급생으보 대학 사 년 동안을 서로 변함없이 사랑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에미 마음에 연애라면 그저 덮어놓고 싫기만 하던 나도 둘을 같이 만나보니 너무도 천생연분 같아 축복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었다.
딸은 대학 사 년 동안 충실히 그 청년만 사랑했고 군대생활 삼 년 동안을 충실히 기다렸다.
청년은 제대하는 대로 서독으로 유학을 가기로 돼 있고, 그곳에서 학위를 따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릴 걸 예상해서 결혼해서 동반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이쪽에서도 바라는 바였다. 딸은 자그마치 스물일곱이다.
실은 군대생활 삼 년 기다린 것도 내 딸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혼처 나서서 하나 둘 시집가는 동창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흔들렸지만 제 마음인들 어찌 좋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와서 머나먼 이역으로 보내놓고 기약 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딸은 스물일곱이다.
그런데 서독으로 떠날 수속 중 또 그 삼촌의 산 망령이 훼방을 놀고 나선 것이다.
죽은 망령이라면 용한 무당 시켜 지노귀굿이라도 해서 좋은 곳으로 천도라도 할 수 있으련만, 용한 판수를 시켜 경이라도 읽어 다시는 못 헤어날 옥중에 가둘 수라도 있으련만, 북쪽에 살아있는 자의 망령에 대해선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속수무책이었다.
청년은 딸이 못 가게 되면 자기도 서독 유학을 포기하겠다고 한다지만 그 어려운 유학시험에 합격한 청년의 전도를 내 딸이 가로막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면 딸은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십 년 가까이 정성 들인 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딸이 내릴 어떤 결정도 두렵다.
이번 딸의 문제는 아들의 문제와 달라 해결책이 쉬이 나설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딸은 상심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절망하고 있으리라.
어제 느닷없이 딸이 고향에 내려가보자고 했다. 그곳은 아버지가 학살당한 끔찍한 고장이다. 이제 거기 남아 있는 친척도 없다.
“그곳엔 왜?”
“아버지와 삼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엄마가 다 말해줬잖니?”
“엄마 맡씀이 정말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녜요? 제가 이런 벌을 받아야 할 까닭이 없잖아요? 반공투사의 유자녀다운 대우는 못 받을망정요.”
“그럼 넌 엄마 말을 못 믿겠단 말이로구나.”
“엄마 말씀 믿어요. 믿으니까 가봐야겠어요. 엄마 말씀처럼 아버지는 지방에서 덕망 있고 용기 있는 반공지도자였고 그래서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고, 삼촌은 그저 철부지 소년이었고 월북한 것도 무슨 사상이 투철해서라기보다는 주체성 없이 휩쓸리다가 그리 된 거라는 걸 목격하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요.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내가 아버지의 딸임을 확인하고 싶어요. 삼촌의 조카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딸임을 말예요.”
그리고 또 딸은 고향을 내려가는 버스칸에서 나에게 말했었다.
“엄마, 그때 그 일을 기억하는 이가 될 수 있는 대로 많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누구의 딸, 누구의 손자, 누구의 무엇 하는 걸로 혈연의 덕을 입는 것도, 해를 입는 것도 싫어하면서 살아왔어요. 지금이니까 엄마한테 고백하지만 엄마가 아버지께서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나를 말씀하시는 게 저한테 감동을 준 일도 없거니와 자랑스러웠던 일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다만 고인(故人)일 따름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 혈연의 간섭을 받게 된 이상 가까운 혈연의 간섭을 받고 싶어요. 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삼촌의 조카이기 때문에 제가 부닥쳐야 하는 장벽을 저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걸로 타개해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하신 일, 학살당할 때의 상황, 그런 것들을 기억해주는 이가 될 수 있는 대로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어쩌겠다는 거냐?”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어떻게 해보는 도리가 있을 것도 같아요. 그런 분들이 많기만 하다면 전 그런 분들한테 엎드려 빌겠어요. 도와달라고, 저를 위해 증언해달라고ㅡ”
결국 딸의 고향 행은 물에 빠진 자가 검부락지 잡는 식과 비슷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고향도 많이 변해 있었다. 서울행 직행버스가 삼십 분 간격으로 있을 만큼 서울과의 교통이 빈번해진 때문일까, 있는 집 자식들은 대개 서울 학교로 보내다보니 서울서 취직까지 하게 되고, 없는 집 자식들은 서울의 공장이나 상점으로 밥벌이를 내보내다보니 그럭저럭 서울에 눌러앉게 되고, 아직 남아 있는 본토박이는 무자식한 노인 아니면, 자식을 못되게 둔 노인뿐이었다.
고향의 새로운 주민은 서울이 가까운 이점을 이용해 고등채소 재배나, 도시인의 휴양을 위한 유원지식 농원 개발을 목적으로 이주한 상업 농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고 알 만한 얼굴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 난리통에 우리가 당한 일을 자세히 기억해주는 사람은 어쩌면 한 사람도 없었다.
노인네들 중의 한 분은 우리 시아버지의 유별난 주사나 시어머니의 깔끔한 반찬 솜씨까지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때 그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를 않았다.
내가 제일 기대를 걸었던 학종이 엄마까지도 내 딸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에구, 신통해라. 그때 미처 돌도 안 된 갓난쟁이가 그새 이렇게 자랐구먼, 아이구 대견해라. 그 양반 국으로 있었으면 처자식 하고 깨가 쏟아지게 살 양반이 그때 암만 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공연스리 이북으로 넘어가갖고 그 꽃 같던 새댁이 이런 할망구가 될 때까지 생이별을 하고 사니. 그 양반이야 남자니까 제 아무리 무서운 이북땅이라도 새장가 들었겠지만 여잔 무슨 팔잘고…… 하며 혀를 찼다.
“여봐, 학종이 엄마, 지금 누구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누구하고 생이별을 했다는 거야?”
“누군 누구야, 얘 아버지하고 당신 말이지.”
“얘 아버지가 인민재판인가 뭔가 받고 동구 밖 미루나무에 묶여서 총살당한 걸 제일 먼저 울면서 일러준 게 누구였는데 지금 와서 그런 소릴 해.”
“아, 참 내 정신 좀 봐. 난 지금 얘 아버진 이북 가고 얘 삼촌이 그때 그 끔찍한 지경 당한 걸로 헷갈리고 있구만, 원체 지지리도 고생만 하고 살다보니.”
그러면서 뉘 집 자식은 서울 가서 어떻게 자리잡고, 뉘 집 자식은 어떻게 돈을 벌어 부모 모셔다 호강시키는데, 학종이는 어디 가서 소식이 감감하다간 휙 나타나선 땅뙈기나 팔아가지곤 또 휙 달아나버리는 재주밖에 없으니 이년의 팔자를 어찌할 거냐는 푸념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변하지 않은 건 동구밖 미루나무밖에 없었다. 그중 제일 큰 미루나무에 묶여서 남편은 총살당했다. 강렬한 태양으로 미루나무 잎이 거의 은백색으로 보이던 그 지겹던 여름날에.
미루나무는 성장이 빠르다니까 그때 그 미루나무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미루나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미루나무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학종이 엄마가 우리를 하룻밤 자고 가라고 붙들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스름 달밤 혼자 몰래 미루나무숲으로 갔다. 제일 큰 미루나무의 수피를 어루만졌다. 거기 남편이 총살당할 때 입은 총상이 남아 있을 터였다. 아무리 어루만져도 총상을 찾아낼 순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미루나무를, 그 유일한 목격자를, 남편이 피 흘릴 때 같이 피 흘린 몸뚱이를 껴안았다.
그러지 않고는 너무 허전해서 딸한테 면목 없음을 감당할 기력이 없었다.
정직하고 유일한 목격자 미루나무는 내 절박한 포옹에도 도무지 무감각했다.
이런 미루나무를 껴안고 있으니까 소년과부로 아이들을 기죽이지 않고 기르기 위해 또는 세상 형편에 눈치봐가며 아부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왜곡하고 과장하고 은폐했던 진상에 대해 오랜만에 생각을 가다듬어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실은 남편은 신념 있는 민주주의의 투사도 덕망 높은 농촌지도자도 아니었다.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집 맏아들이었고, 동네에서 제일 공부를 많이 한 젊은이였는데도 그 당시 직장을 안 가지고 놀고 있었다. 창백하고 귀족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오고, 남편은 어디로 숨을까 말까 일단 관망하고 있는 시기에 붙들려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더위에 약간 머리가 돈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를 치면서 우리 동네에서 제일가는 반동으로 남편을 지적하자, 제일가는 반동은 사상이 투철치 못한 동무들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사형에 처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동네 사람 아닌 낯선 사람이 한마디 하자 옳소 옳소, 짝짝짝 만장일지로 박수를 치고 나서 미루나무에 매달고 쏴 죽인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차마 아버지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란 세상 형편에 따라서 같은 사람을 복날의 개보다도 쉽게 죽일 수도 있어진다는 것을 이해시키기가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하는 애들의 정신적 지주로 강력한 아버지의 유지 유덕, 그런 걸 필요로 했고 그러다보니 어느 틈에 그런 아버지상을 날조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위해 실제의 아버지하고는 많이 틀린 새로운 아버지를 날조한 것까지는 그렇게 변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삼촌을 말살하려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삼촌은 비록 월북했다고는 하나 악질적인 공산당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때 철없는 소년이었다.
시아버지가 동네 과부를 건드려 낳아 들여온 남편의 이복동생인 삼촌은 어려서부터 우락부락한 용모에 반항적인 몸짓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것은 서자로서의 열등감의 몸짓이었을 뿐 사상 따위하곤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런 몸짓을 남들이 막연히 온건한 형과의 불화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실제론 그렇지도 않았는데.
그런 중에 사변이 나고 형이 충살당하자 보기보다 겁이 많은 소년인 그는 남들이 짐작하는 불화의 관계를 적대의 관계로까지 인식시켜가며 저쪽에 아첨을 하다가 결국 넘어가게 된 것이다.
형은 공산당에게 학살당하고 아우는 공산당을 따라 월북했다면 한국적인 상황 아래선 오히려 통속적이지만, 아무튼 극적으로 상반된 운명을 산 형제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그들의 이념이나 인간성이 서로 뚜렷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학종이 엄마까지 오늘날, 두 사람의 경우를 혼동해서 기억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오랜 세월 쉬쉬 굳이 삼촌을 말살하고자 했을까. 내가 그렇게 철저하게 삼촌을 말살하지만 않았던들 아들과 딸이 오늘날 받는 충격이 다소 덜할 수도 있었을 것을.
미루나무도 나에게 그 회답을 주지는 않았다. 미루나무는 다만 인간이 하는 그 미친 짓을 목격했을 뿐이지 이해하지는 못했으리라.
어젯밤 딸이 학종이네서 한잠도 못 잤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딸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창밖을 노려보고 있다. 휙휙 스쳐가는 풍경을 보는 무심한 눈이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걸 어떡하든 이해해보려는 비상한 노력을 집중한 눈이다.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그런 단정한 모습이 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힌다.
휴일이 아닌 평일의 시외버스는 자리가 서너 자리는 비어 있을 만큼 한산했다. 그래 그런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도 내려달라면 내려주고 태워달라면 태워주는 것 같았다.
급정거를 하더니 술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남자가 올라탔다. 그는 너무 거침없이 거친 숨을 확확 내뿜어서 혼자서 서너 사람의 취한이 풍길 수 있는 술냄새를 풍겨댔다.
뒷자리가 모조리 비어 있으니 거기 길게 누워서 한잠 잤으면 좋으련만 아가씨가 혼자 앉은 옆자리에 털썩 큰 엉덩이를 들이대더니 돼지 멱 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올라요, 성도 모올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안겨, 푸른 등불 아래 붉은 등불 아래 춤추는 땐서의 순정, ……거기까지는 또 좋았는데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여봐, 남의 노래를 들었으면 화답을 해야 할 거 아냐, 화답을. 그렇게 시침 딱 떼고 있지 말고 어서 한 곡조 뽑으라구 어서. 아무리 순진한 척 해도 노래깨나 해본 솜씬 걸 내 다 안다구ㅡ”
아가씨가 울상을 하고 버스 속을 휘둘러보았다. 아가씬 승객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모두 웅성웅성할 뿐 아무도 나서진 않았다. 그만큼 취한에겐 만만치 않은 데가 있었다.
딸은 버스 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여전히 창 밖으로 향한 시선이 미동도 안 했다.
“어서 한 곡조 뽑으라니까, 아무리 얌전 빼고 있어도 누가 모를 줄 알구. 다 안다구 다 알아. 공순이 노릇도 좀 했겠구 주전자 운전사 노릇도 꽤 했겠는데 뭘 그렇게 도도하게 굴고 있어. 자아 한 곡조 뽑아. 어서!”
드디어 아가씨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더니 차장보고 차를 세우고 내려달라고 했다.
내 뒤에서 꾸벅꾸벅 졸던 남자가 분연히 주먹을 휘두르며 일어섰다.
“야, 차장. 빨리 차 세우고 저 새낄 끌어내리지 못헷!”
“뭐 저 새끼? 야, 이 새끼야. 내가 누군 줄 알구 너 까부니. 날 끌어내리라구? 어디 겁 없는 놈 있으면 날 끌어내려봐. 어서!”
취한의 힘깨나 쓰게 생긴 몸집이 딱 버티고 섰다. 이 소동에도 아랑곳없이 딸은 외눈 하나 까딱 안 하고 창 밖만 노려봤다.
마침 검문소였다. 헌병이 경례를 하며 올라왔다. 차장이 헌병 귀에다 대고 뭐라고 수군댔다. 아마 취한을 끌어내려달라는 것 같았다. 내 뒤의 남자도 이때를 놓칠세라 한마디 했다.
“헌병 어른, 헌병 어른 소관은 아닌 줄 알지만 지 주정뱅이가 어디서 올라타가지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니 여기서 내려놓고 가게 해주시구려. 제발 부탁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취한이 그 동안 주정을 딱 그치고 아주 점잖게 앉았는 거였다. 그러고 앉았으니까 버스 속 승객 중 제일 의젓해 보였다. 여북해야 헌병이 누가 주정뱅이냐고 물어봐야 할 지경이었다. 그 지독한 술냄새조차 안으로 홀딱 들여마신 것처럼 가셔 있었다.
차장과 내 뒤의 남자가 동시에 저 사람이 주정뱅이라고 취한을 손가락질하다 말고 되레 기가 죽어서 말끝을 흐리고 손끝이 불확실 해졌다.
그래도 헌병은 취한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취한은 점잖게 약간 권태롭게 느릿느릿 신분증을 제시했다. 헌병은 신분증을 점검하고 나서 취한에게 공손히 되돌려주고는 승객 모두에게 말했다.
“여러분, 복중의 버스 여행이니만치 다소 짜증스러운 일이 있으시더라도 참으시고 즐거운 여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경례를 올려붙이고 헌병은 내려갔다. 버스가 움직였다.
별안간 취한이 숨을 크게 내뿜자 고약한 술 냄새가 다시 진동을 했다. 취한이 벌떡 일어났다.
“야, 이 빨갱이놈의 새끼야.”
너무 당돌한, 너무 뜻밖의 호칭에 승객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를 끌어내라고 한 놈은 빨갱이 아니면 공산당일 거야. 틀림없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 ×˙당 × ×군 위원장에다 지금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 ×의 직속부하다. 이런 나를 감히 끌어내리라고 한 놈이 빨갱이밖에 더 있냐 말야. 이 악질 빨갱이들아.”
주정치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주정이었다. 취한은 자기를 끌어내리란 발언을 제일 먼저 한 내 뒤의 남자뿐 아니라 버스 속의 승객 모두를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내 뒤의 남자도 어수룩하고 착하디착한 시골 농부였지만 딴 승객들도 초라한 부녀자 아니면, 죄지은 것 없이 주눅만 잔뜩 들어 뵈는 겁쟁이 남자들뿐이었다.
취한의 충격적인 발언에 분노에 앞서 겁부터 나는지 숨을 죽이고 딴전만 보고들 있었다.
취한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서 손가락으로 아무 가슴이나 지적하며 신문조로 악을 썼다.
“너도 빨갱이지? 응 너도 빨갱이야. 너도 날 내쫓자고 했지?”
이상한 일이었다. 승객은 한결같이 취한의 좀 전의 횡포는 접어둔 채 취한의 너도 빨갱이지? 하는 지적이 자기 가슴에 떨어질까봐 그것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승객이 죄인이 되고 취한은 죄인을 응징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취한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며 미워하는 빨갱이라는, 악 중에도 최악을 내세워, 자기가 지지른 악을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마침내 무화(無化)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악이란 악은 빨갱이라는 강렬한 최악만 만나면―그게 설사 허상이더라도―맥을 못 추고 위축되는 이 땅 특이한 풍토를 이 취한은 취중에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버스에서 일어난 일에 여직껏 그렇게 무관심 했던 딸이 취한의 빨갱이 소동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발끈 솟으면서 작은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꼬챙이 같은 시선으로 취한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꼭 무슨 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딸에게 작은 소리로 애걸했다.
“얘야, 참아라, 참아. 그저 참는 게 수니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나는 그 소리를 주문처럼 자꾸자꾸 되뇌었다.
승객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것을 확인한 취한은 다시 종전의 주정으로 되돌아갔다.
“한 곡조 뽑으라니까. 왕년의 솜씨 다 알고 있다구. 누가 모를 줄 알구 그렇게 얌전을 빼고 있어. 어서 한 곡조 뽑으라니까.”
이를 어쩌나, 아가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정말 한 곡조 뽑기 시작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서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사이사이 흐느끼면서 모기 소리처럼 가늘게 노래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승객 아무도 아가씨를 돕지 못했다. 승객의 이런 비열한 심금을 아가씨의 가냘픈 노랫소리가 아프게 울려줬다. 뭔가 견딜 수없는 기분이었다.
별안간 운전사의 운전 솜씨가 거칠어졌다. 분명히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데도 포장하기 전 잡석만 깔아놓은 위를 달리는 것 같은 진동이 오장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운전사를 탓하거나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승객은 모두 이심전심으로 운전사가 그런 방법으 로나마 취한에게 저항하고 있다고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직접 저항은 못 하나마 운전사의 그런 저항이나마 말없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주책없이 차멀미를 시작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심한 멀미가 왔다.
나는 딸에게 매달려 헛구역질을 하고 손발을 비틀고 갖은 엄살과 갖은 추태를 다 부려 딸을 쩔쩔매게 했다. 딸이 나 외에 버스칸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신경을 못 쓰게 내 멀미는 심했다. 실로 지옥의 고통같이 고약한 멀미였다.
그런 중에도 나는 내 멀미로 딸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는 데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쯤 왔는지 딸이 내리자고 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내다보니 서울인 것 같았다. 혼자 내릴 기운도 없었다. 기진맥진한 나를 딸은 업어 내리다시피 했다.
이상하게도 내려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평평하고 굳은 땅을 디뎠는데도 멀미는 가라앉지를 않았다.
서울 거리가 커다란 버스가 되어 내 발밑에서 출렁이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 발을 가늘 수 없어 다시 딸에게 매달렸다.
딸은 제 몸에 실린 내 체중을 잘 감당하며 확실하고도 늠름한 걸음걸이로 그 출렁 이는 땅을 잘도 걸었다.
딸이 그럴수록 내 평지 멀미는 심해졌다. 어쩌면 나는 딸의 늠름함에 의지하고 응석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딸의 그런 늠름함을 통해 딸이 상심을 능히 아물릴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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