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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과거청산 문제: 대중의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임 호 준
1. 스페인 과거청산 문제의 쟁점
우리에게 스페인은 다소 먼 나라로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와 매우 유사한 현대사의 경험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가 내전, 개발독재, 민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도 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간동안 내전을 경험함으로써 유사한 과거의 상처를 공유하게 되었다. 또한 군사독재 기간동안 많은 억압과 폭력이 자행됨으로써 훗날 이에 대한 청산의 문제를 안게 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스페인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보자면 3년간 지속된 내전에서 전장에서만 30만 명이 사망했고 테러와 보복으로 10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63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됨으로써 총 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파는 집권하자마자 즉시 공화파 숙청에 착수함으로써 외국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국내에 남겨진 적어도 5만 명의 공화파 인사들이 처형당했다.1) 또한 프랑코파는 36년의 독재기간 동안 정권유지를 위해 납치, 고문, 감금 등 많은 불법 행위들을 저질렀다.
이러한 과거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사망 후 스페인은 과거의 문제를 들춰내지 않고 넘어감으로써 별다른 혼란 없이 짧은 기간동안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성취한 바 있다. 당시의 국민들 역시도 대부분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 것에 동의했으며 현재의 국민들 역시도 이러한 민주화 과정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과거청산의 문제와 관련하여 스페인의 과거처리 방식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이다. 즉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이 전체주의 정권에서 민주화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구원(舊怨)으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었음에 비해 스페인은 과거를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혼란을 피해간 것이다. 내전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흔히 보게 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구성이나 진상규명을 위한 보고서 한 장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넘어간 것은 세계 현대사에서 드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첫 번째 드는 의문은 이러한 방식의 과거처리에 대해 어떻게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집권 세력의 정치적 판단과 의지에 따라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는 많았지만 스페인의 경우처럼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과거의 문제가 유예된 경우는 드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사회의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내전의 패배자 측에서 이러한 합의에 동의하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의문은 설사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과거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고 해도 영원히 과거를 정리하지 않은 채 넘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민주화가 상당히 공고해졌고 또한 사회당이 집권한 80년대 중반 이후에도 과거청산에 관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인 국민들은 어떻게 과거문제에 대해 이토록 철저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인가?
세 번째의 의문은, 앞의 의문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거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 결여된 채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민주적 절차라는 게임의 룰을 짓밟고 쿠데타로 집권한 행위에 대해 후대에 이르러서도 아무런 청산절차가 없다는 것은 분명 발전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정리되지 못한 과거의 원한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며 국민적 화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데 그런데도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건강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현실적 어려움에 불구하고 과거는 명명백백하게 정리되어야 한다는 청산론자의 주장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 길이라는 도덕적 차원의 판단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는 현실적 차원의 판단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국가들은 현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과거청산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청산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페인의 경우는 불만스럽고 또 한편으로 곤혹스러운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청산과정이 없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갖다가 ‘스페인 민주주의의 질이 낮다’는 결론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경우를 청산론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그 사회 내부의 독특한 구조와 메커니즘을 단순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스페인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될 것인데 스페인의 경우를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구체적인 청산의 절차가 없었다는 것을 문제 삼는 대신 청산과정이 생략될 수 있었던 스페인 내부의 고유한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한다면 위 의문들의 대부분은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방식의 과거청산이 스페인에서 가능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과거문제에 얽힌 스페인 국민들의 의식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살펴볼 것이고 과거청산의 결정적인 국면들에서 스페인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할 것이다.
2. 스페인 내전의 기본적인 성격
스페인 내전에 대해 국외자들은 민주주의 공화파 정부를 당시 유럽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파시즘이 국제적으로 연합하여 쓰러뜨린 전쟁으로 연상하기 쉽지만 19세기 중엽이래로 형성된 ‘두 개의 스페인’ 사이의 고질적인 갈등이 곪아터져 일어난 사건이었다. 물론 우파에는 스페인 파시스트 조직인 팔랑헤(Falange)가 가담하고 있었고 대중들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파시즘에 이끌렸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근대적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오래된 카톨릭의 나라 스페인에서 그 동안 쌓여왔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내전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의미에서 스페인 내전은 카톨릭을 둘러싼 종교전쟁이었다는 점을 우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사회에서 국가의 분신이었던 교회는 20세기에 들어서도 경제적으로 최대지주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은행이나 공업에 투자하여 스페인 자본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2) 이 때문에 교회는 좌파들에게 개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의 권력 약화는 제2공화국 아사냐(Azaña)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들 중의 하나였다. 더 나아가 급진좌파 그룹은 교회를 타도대상으로 삼았는데 그 결과 이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불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 신자가 절대 다수인 스페인 사회에서 대중, 특히 보수적 성향의 대중들의 분노를 유발했고 이것이 결국 내전의 중요한 빌미가 된다. 실제로 내전이 발발하자 급진적인 좌파들은 교회를 불태우는 것은 물론 성직자들에 대한 총살을 감행한다. 프랑코는 내전을 카톨릭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몰고감으로써 우파 대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이몬드 카아는 스페인 내전을 ‘유럽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단언한다.3)
두 번째로 스페인 내전은 바스크, 카탈루냐 분리주의 운동에 맞서 국가단위로서 통합적인 스페인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빚어낸 전쟁이었다. 스페인에서 전통적으로 분리주의 움직임이 강했던 바스크와 카탈루냐 지방은 마드리드 중심의 중앙집권에 반대하며 지속적으로 분리를 주장해 왔는데 제2공화국의 사회주의 정권은 이 지역들에 상당한 자치권을 양도했다. 이것은 우익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자랑스러운 국가통합체인 스페인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 보아도 스페인의 다른 지방들에 비해 발달된 산업을 가진 두 지역이 스페인 영토에서 분리되어 나간다는 것은 우파들에겐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우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이라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휘둘린 전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아 카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분열의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실제로 프랑코를 비롯해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결여하고 있었다. 산 후르호 장군은 왕정을 복고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프랑코 장군은 한때 “공화국 내에 질서를 재확립하는 문제”를 언급하기도 하며 내전에서 승리하더라도 공화국 체제를 유지시킬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4)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프랑코파에 대항하여 싸웠던 영국작가 조지 오웰조차도 “프랑코는 엄격하게 말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비교될 수 없다. 그의 봉기는 귀족과 교회의 지원을 받은 군사적 폭동이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특히 초기에는, 파시즘을 강제하려하기 보다는 봉건제로 복귀하려 하였다” 라고 말했다.5)
한편 좌파들은 우파들에 비해 스페인 내전에서 보다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좌파가 우파에 비해 훨씬 복잡한 이데올로기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화국 정부는 반란의 기본적인 성격을 합법적인 정권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 규정하였으며 반란을 진압하고 공화국을 지켜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 사회당 좌파,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 등 급진적인 좌파는 내전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회로 삼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내전이 한창이던 1936년 9월의 CNT 기관지는 “혁명의 진전을 가로 막을 수 없다...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곧바로 자본주의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6)라고 쓰고 있었다. 조지 오웰도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은 사실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었다”라고 말한다.7) 인민전선 내부의 분열은 1937년 5월에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총격전으로 절정에 달하는데 CNT와 POUM에 소속된 노동자들과 카탈루냐 공화파 사이에서 벌어진 이 시가전으로 말미암아 1천 명이 사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민전선 내부의 분열은 공화파가 내전에서 패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밖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대결로 쟁점이 좁혀져 단순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시 유럽이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대결 구도로 판이 짜여져 있었다는 것이 크다고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랑코 측이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스트 정부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반란군의 파시스트적 색채는 확실해졌던 것이다. 또한 노선 차이로 분란을 겪었던 공화파 역시도 전쟁이 불리해지자 일단 공화국을 사수하는 것으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이로써 내전 후반에 가면서 비로소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판이 짜여진 것이다.
어쨌든 훗날 제기되는 과거청산의 문제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프랑코파는 단순한 파시즘 그 이상이었다는 것, 즉 스페인의 보수적 대중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전통적 가치들과 카톨릭 신앙을 이유로 봉기함으로써 교회, 귀족, 지주 등 상류계급 외에도 보수적 가치를 신봉하는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카톨릭이 파시즘화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종교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카톨릭 신자가 절대 다수인 사회의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좌파는 파시즘에 대항한 선량한 대중들로 보기에는 그 일부가 지나치게 좌경화되어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 내전의 이러한 복잡한 메커니즘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스페인 사람들의 과거처리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3. 프랑코 정권의 실적과 정당화 노력
주지하다시피 프랑코 체재 초기는 숙청과 억압의 시기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숙청이 마무리되자 프랑코 정권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민들을 화합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따라서 종전 직후 스페인 내전을 내전이 아닌 ‘조국의 독립과 신앙을 위협하는 적들’을 물리친 ‘해방전쟁’이자 ‘성전(聖戰)’으로 규정했던 프랑코 정권은 1960년대에 들어서며 내전을 ‘형제들 간의 다툼(una lucha entre hermanos)’이니 ‘집단적 광기(狂氣)’니 하는 논리들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내전은 양쪽 다에게 책임이 있는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이제는 잊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프랑코 정권에 의해 행해진 이러한 노력은 쉽게 말해 내전에 대해 대중의 기억과 인식을 바꿔 놓으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전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프랑코 집권 전반기에는 패배자 측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선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스페인 대중들 사이에서 프랑코이즘이 내재화되기 시작하며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게 된다.
특히 1960년대 이래 이룩한 엄청난 경제성장은 쿠데타로 집권한 프랑코 정권이 정당화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60년대 이래 스페인의 경제 성장은 국제 사회에서 ‘스페인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1973년 석유파동이 있기 전까지 연평균 7%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이 시기 지구상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도 급속도로 향상되었는데 1959년 유럽연합 국가의 평균 개인소득의 58%에 불과하던 스페인의 개인소득은 해마다 증가를 거듭하여 1975년 81%에 이르게 되었다.8) 산업혁명기를 거치지 못한 탓에 경제적으로 유럽 중심 국가에 뒤쳐지며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게 된 스페인인들에게 60년대의 경제적 도약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것은 정치적으로 보자면 프랑코 체제가 범국민적으로 용인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쿠데타와 내전을 통해 집권했지만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룸으로써 프랑코 체제는 대중들 사이에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국민적 관심이 유럽화라는 외부의 목표로 향하게 되자 내부의 결속은 훨씬 쉬워졌다. 프랑코 정권 역시도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유럽화를 간절히 원했다. 유럽과 통합되는 것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임을 확인한 이상 경제 발전을 통해 정권을 합법화하고 업적을 인정받고 싶어 했던 프랑코 정권은 1964년부터 유럽공동시장에 가입하기 위해 유럽국가들과 협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유럽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성인들의 관심 역시도 이동하게 된다. 1940,50년대 스페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엄격한 검열 속에서도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거론했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 소설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는 네오 리얼리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성행한 시대였는데 작가들은 사회의 어두운 곳을 조명하며 전후 스페인 사회에서 빈민층이나 노동자층의 피폐한 삶과 그들이 겪는 착취와 억압을 고발하는 것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 물론 검열이 엄격했기 때문에 작가들은 간접적이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야 했고 이런 점에서 내전의 문제가 비판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검열이 없었다면 당시의 문학 사조 속에서 내전은 당연히 중심적인 주제로 다뤄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자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이를 반영하듯 소설의 경향 역시도 변화하게 된다. 60년대 이후의 소설이 이전의 소설과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사회에서 개인으로 초점이 옮겨간 것이고 실존적 자유라는 덕목이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부상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체된 현실 속에서 개인이 겪는 고뇌, 정체성의 혼란 또는 해소될 수 없는 개인의 주관적인 욕망 등이 주요한 주제가 된다. 표현에 있어서도 50년대의 명확하고 사실적인 서술 대신 난해하고 실험적인 형식이 주로 채택된다.
소설에 있어 이러한 변화는 유럽화를 갈망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는데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스페인의 국지적인 관심사였다면 개인의 실존적 자유는 유럽적인 관심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68혁명은 이웃나라 스페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사건 이후 스페인의 학생들은 잦은 시위를 통해 자유와 인권을 보장할 것과 광범위한 개방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물론 이러한 지성적, 정치적 흐름의 이면에는 경제성장으로 인해 얻어진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려는 현실도피적인 소비문화가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지속적으로 증가한 외국 관광객의 유입과 TV 등 매스 미디어의 보급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따라서 저급한 대중영화, 상투적인 희극 그리고 스포츠가 대중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망자의 계곡’(Valle de los caídos)에 공화파 희생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도 이 시기였는데 프랑코가 아끼던 이 신성한 장소에 공화파가 묻히게 된 것은 그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망자의 계곡’은 1940년 프랑코의 명령에 의해 건설에 착수되어 1959년 4월 1일 승전 20주년 기념일에 완공된 초대형 추모 공간으로서 성당과 납골당으로 이루어진, 내전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내전에서 카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국민파 희생자들을 추모하고자 높이 150미터의 초대형 십자가를 중앙에 세워 놓았다.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 이 공사에서 공화파 포로들이 동원되었고 총 14명이 공사 중 목숨을 잃었다. 물론 공화파 희생자라고 해 봐야 소수가 상징적으로 묻히게 된 것에 불과했지만 그렇더라도 이것은 프랑코 정권이 내전을 새롭게 규정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파시스트의 성지’였던 ‘망자의 계곡’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내전으로 희생된 양측의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화해의 기념물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60년대 이래로 이룩한 경제 성장 그리고 내전을 탈이데올로기화하는 선전의 결과로 프랑코 체제는 과거의 책임에서 점점 멀어져갈 수 있었다. 70년대 말부터 학생 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거세지며 정권에 부담을 주었지만 이 역시도 유럽적인 이슈의 스페인적인 발현이었지 과거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코는 경제성장이라는 중대한 업적을 이룸으로써 당대는 물론 훗날 자신의 범죄를 회피해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민주화 이행기의 혼란과 과거 청산의 유예
1970년대에 들어서며 스페인 사회는 서서히 혼란 속에 빠져든다. 학생들의 시위와 노동운동이 격화되었으며 급진적인 바스크 분리주의자들(ETA)은 테러를 일삼기 시작한다. 1973년 ETA9)에 의한 부통령 카레로 블랑코(Carrero Blanco)의 암살은 프랑코 집권말기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4년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그 동안 호황을 구가하던 경제마저 위축될 상황에 이르게 되자 스페인 국민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프랑코가 죽었을 때 스페인 국민들이 느꼈던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불안감이었다. 물론 오랜 독재가 끝나고 새롭게 도래할 시대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내전의 기억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좌우의 갈등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고 이로인해 평화가 깨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전의 오래된 원한이 프랑코 사후 스페인 사회에 분열을 가져 올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졌다. 1976년의 시점에서 당시 스페인의 대표적 소설가 후안 베넷(Juan Benet)은 ‘두 개의 스페인’ 사이의 갈등은 여전하다며 매우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가장 명백한 것은 지난 40년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헛되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1936년 전쟁을 벌였던 두 편은 여전히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여전히 같은 참호 속에 있으면서 적들 또는 앞에 있는 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타격을 주려하고 있다. 시간이 흘렀지만 어느 쪽도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주변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어야 할 텐데 그것도 못하고 있다. 1936년의 유산은 여전히 원한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오늘 날의 스페인이다.10)
물론 베넷의 시각은 다소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들도 내전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우려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실제로 프랑코의 사망 직후 내전을 패자의 입장에서 조명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영화계를 보자면 내전을 공화파의 입장에서 조명한 영화들이 쏟아지게 되는데 감독들이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마당에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선호한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프랑코 사망 직후 내전을 다큐멘터리로 조명한 작품들은 바실리오 마르틴 파티노(Basilio Martín Patino)의 <전쟁 이후를 위한 노래>(Canciones para después de una guerra, 1976) 와 <두목>(Caudillo, 1976), 디에고 산티얀(Diego Santillán)감독의 <왜 우리는 전쟁에서 패했는가?>(Por qué perdimos la guerra?, 1977), 하이메 카미노(Jaime Camino) 감독의 <오래된 기억>(La vieja memoria, 1977), 곤살로 에랄데(Gonzalo Herralde) 감독의 <민족, 프랑코의 정령>(Raza, el espíritu de Franco, 1977), <희망과 사기 사이에서: 스페인 1931-39>(Entre la esperanza y el fraude: España 1931-39, 1977), <스페인은 알아야 한다>(España debe saber, 1977) 등이다.
다양한 노선의 의견을 청취하는 등 영화는 객관적인 중립성을 내세우는 듯 하지만 그 다지 중립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팔랑헤주의자 다비드 하토(David Jato)가 국민파에 의한 마드리드에의 폭격이 아주 가벼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말하자 그 다음 장면으로 영화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드리드의 건물들을 보여준다. 또한 내전에서의 잔혹행위를 다루는 부분에서 공화파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고발하는 증언자는 1936년 8월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반란군인들에 대한 공개처형을 소개하는 반면 국민파의 폭력을 설명하는 이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증언한다. 즉 아무도 공화파 후방에서 벌어진 폭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증언하지 않는데 이로써 공화파의 폭력은 적어도 재판을 거친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것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16세에 국민파 소위로 자원하여 참전했던 비야롱가(Villalonga)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국민파에 의해 행해진 잔혹행위에 대해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국민파가 바스크를 점령한 이후 바스크 민족주의를 표방한 사제들을 모두 총살할 때 총살대원들에게 꼬냑을 한 사발씩 마시게 한 이야기, 국민파 시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였던 발렌시아의 한 마을 점령했을 때 국민파의 중령이 “두 시간 동안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라고 하며 병사들을 풀어놓은 이야기를 증언한다. 사실 비인도적인 폭력은 후방에서 주로 벌어졌다고 보아야 하는데 전쟁은 해묵은 증오를 갖고 있던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비야롱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바스크 정벌 동안 나는 전선에서 군인들과 의용군들을 보았다. 하지만 팔랑헤 당원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 대신 한 도시를 점령하면 팔랑헤 당원들이 뒤에서 트럭을 타고 피마자 기름을 들고 몰려와서 처음엔 비밀스럽게 고문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도시 내에서 그럴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렇게 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직적으로 행해진 진정한 야만 행위였는데 그들은 냉혈한처럼 보였다.
이러한 비야롱가의 증언이 프랑코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음은 자명하다. 이 영화가 우파 비평가와 언론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우파 언론들은 이 영화가 내전을 주관적인 시각을 통해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극우파 시민들 또한 이 영화에 대해 불쾌해 했는데 마드리드의 우파 극장주들은 상영을 거부하기도 했고 마드리드의 한 극장에는 극우파 그룹이 극장에 난입하여 오물을 투척하고 스크린을 찢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11)
사실 정도만 달랐지 앞에서 열거한, 이 시기의 내전 영화들은 모두 좌파적인 시각에 경도된 것이었다. <왜 우리는 전쟁에서 패했는가?>의 경우는 제목에서 보듯 처음부터 좌파적인 시각을 채택하며 내전의 패인을 무정부주의자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다큐멘터리들은 당시의 대중들에게 내전의 기억을 상기시킴으로써 프랑코 사망 직후 스페인 사회의 혼란에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은 권력의 공백상태를 틈타 완전한 자치를 쟁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수많은 테러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왕을 비롯한 당시의 정치인들은 과거를 거론하지 않는 것만이 제2의 내전을 피하고 스페인 사회를 민주주의로 연착륙시키는 길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 역시도 좌, 우파를 막론하고 정의나 자유 보다 평화와 질서를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73년의 석유파동 이래로 닥쳐온 스페인의 경제 위기 상황도 국민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안정을 희구하게 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대결을 불러오지 않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었고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의’, ‘자유’, ‘민주화’ 보다도 우선은 ‘평화’와 ‘질서’로 여겨졌다.12) 이에 따라 ‘국민적 화해’(reconciliación nacional) 정책이 펼쳐졌는데 이것은 과거의 일을 거론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대다수 스페인 국민들 역시도 이러한 정치적 해결에 동의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정치적인 타협대로 실행되는 데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은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나온 양보와 타협의 산물이었다. 우선 우파의 입장에서 보자면 프랑코 체제의 원칙들과 기득권을 버리고 민주적인 체제로 이행하기로 한 것 자체가 양보였다. 우파의 양보를 얻어내는 데는 국왕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우파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민주주의로의 개혁이 부진하자 프랑코에 의해 지명되었던 수상을 해임하고 당시 무명이었던 아돌포 수아레스(Adolfo Suárez)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수아레스 수상은 군부 등 보수세력의 불만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치개혁법안 국민투표 통과(1976.11), 공산당 합법화(1977.4), 자유 총선거 실시(1977.6), 몽클로아 협약(1977.10), 신헌법 국민투표 통과(1978.12)로 이어지는 민주화 여정을 성공리에 진행시킴으로써 훗날 평화로운 민주화 이행에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게 된다.
한편, 좌파의 입장에서 보자면 즉각적이고 철저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에 동의한 것이 양보의 핵심이었다. 이를테면 공산당 합법화를 얻는 대신 공화제가 아닌 군주제를 허용했고 몽클로아 협약을 통해 노조의 파업중지, 임금 동결 등에 동의해 준 것이다. 하지만 좌파의 입장에서 가장 큰 양보는 과거를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사면법에 동의해 준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1977년 6월, 38년 만의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집권한 민주중도연합(UCD)은 야당인 PSOE의 동의를 얻어 제정한 지 1년 이상된 사면법을 그해 10월에 선포했다.13) 이 법은 그 때까지의 모든 정치적인 범죄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그 골자였는데 이로써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반프랑코 진영의 정치범들이 모두 석방되게 되었다.14) 하지만 동시에 이 법은 프랑코 시대 관리들에 의해 자행된 모든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서 프랑코파들에게는 이전 정권의 정치적 책임에 대해 최종적인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들의 대부분은 ‘화해’를 앞세운 이 법을 환영했지만 실제로 이 법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지 못했다.15) 사회노동당과 야당 성향의 유력지였던 《엘 빠이스》(El País)지 역시 자세한 내용과 의미를 국민들에게 알리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면법에 대해 《엘 빠이스》지는 “민주적 스페인은 내전의 사건들과 책임을 잊고 40년 동안의 독재를 넘겨 버리고 지금부터 앞을 쳐다보아야 한다. […] 역사적 기억이 없을 수도 없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이 기억은 과거를 향한 원한을 북돋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공존의 평화로운 프로젝트에 힘이 되도록 쓰여야 한다”16) 라고 썼다. 야당지가 이 정도였으니 과거의 일이 현재의 평화와 민주화의 여정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좌파와 우파 지도자들에 주도된 사면법을 비롯한 이러한 양보와 협상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국민들의 정서를 반영하듯 내전을 조명하는 문학작품이나 영화들도 1977년 이후로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는 군부와 프랑코파등이 주축이 된 극우파와 그리고 프랑코 시대에 탄압을 받은 극좌파, 그리고 바스크 분리주의자 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는데 이로써 테러는 엄청나게 증가하게 된다. 1981년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당시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군부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아직도 스페인 사회에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정치인들이나 스페인 국민들은 민주적 개혁에 대해서도 이렇게 반대세력이 만만치 않은 마당에 과거의 일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일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5. 사회당의 침묵
82년의 총선에서 좌파인 사회노동당(PSOE)이 승리하여 집권함으로써 적어도 제도적인 의미에서 민주화는 성공적으로 종결되었다. 내전의 패배로 무너진 제2공화정 이후 좌파의 집권은 무려 40여년 만이니 만큼 사회당의 집권은 사회의 전 영역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 올 것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과거의 문제와 관련해서 사회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왜 그랬던 것일까.
우선, 군사 쿠데타를 겪은 지 1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새롭게 정권을 잡게 된 좌파로서는 군대를 비롯한 우파의 불만과 그 결과로 터져 나오게 될 새로운 쿠데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코 사후 시간이 지나며 민주화는 점점 공고해 졌지만 좌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극우파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로써 사회당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스페인이 EC에 가입하게 되는 1986년까지 위험은 상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치적인 면에서 사회당의 입장을 보자면 민주화 이행기에 우파와의 협상을 통해 마련된 평화적인 이행의 룰에 의해 자신들이 집권한 이상 이것을 뒤집고 다시 문제를 거론하기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보자면, 우파는 붕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제1야당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많은 수의 국민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국민들의 대다수 역시도 과거의 문제를 건드림으로써 현재의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기 스페인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적 이슈에서 빠르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그 동안의 경제적 성장으로 얻어진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새롭게 도래한 민주사회의 이완된 분위기를 즐기려 했던 것이다. 검열의 폐지로 인해 저질 예술작품이 난무하고 성인 전용관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민주화 이행기에도 나타났던 현상이지만 완전한 민주주의가 성립됨으로써 더욱 가속화 되었다. 따라서 사회당을 고심하게 만들었던 것은 민주화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수준 높은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회당은 많은 예산을 문화를 진작시키는 데 투입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에 ‘프랑코이즘의 청산’(liquidación del franquismo) 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는데 이것은 프랑코 시대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들을 몰아내자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지성인들은 스페인 사회에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프랑코 시대의 정신적 유산들이 남아있어 새로운 사회로 거듭나는 데 방해가 되고 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사회당이 집권함으로써 집권세력의 인적 청산이 달성된 이상 문화적 청산만 이루어진다면 명실 공히 새로운 스페인이 출범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적어도 스페인에서는 과거청산이라는 것이 과거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피해자 규명, 책임자 처벌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문화적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전과 잔학행위를 둘러싼 규명과 처벌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도 내전을 거론하는 것은 공식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여전히 터부시 되었다. 예를 들어 1996년 내전시의 여성 아나키스트들을 조명한 <자유여성들>을 만든 비센테 아란다 감독은 내전을 다루는 것에 대한 집단적 거부가 이행기의 합의에서 유발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나는 그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있고 그것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 결정은 민주적인 것이었다”17)라고 말한다. 결국 그의 말을 뒤집어 보면 90년대 중반에 이르도록 예술가들은 내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사회의 다수에 의해 합의된 불문율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결국 96년까지 사회당 집권기 동안 내전의 문제와 프랑코의 잔혹행위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당의 이러한 태도는 이행기의 미진한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사회당의 집권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진보적인 좌파 그룹에게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예를 들어 90년대 스페인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무뇨스 몰리나(Muñoz Molina)는 1989년의 시점에서 “현재,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좌파들은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의 계승자들에 의해 조장된 민주주의 게임에 동참된 것에 불과하다. 지금의 좌파는 좌파 전통의 가장 훌륭한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재시대의 도덕적 비열함을 취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사회당 정권을 비난했다.18) 하지만 이렇게 사회당을 원색적으로 비판한 무뇨스 몰리나조차도 자신의 소설에서 내전을 다룸에 있어 동시대 작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우회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역시도 내전에 관해 말하지 않기로 한 사회적 합의를 깨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90년대 중반까지도 내전은 여전히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테마였던 것이다.
6. 최근의 상황: 새로운 국면의 도래인가?
그대로 묻혀 버릴 것 같았던 과거의 문제는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미 내전이 끝난 지 무려 55년 이상이 흐른 시점에서 내전이 서서히 공론의 장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좌파 감독인 켄 로치(Ken Loach)가 1995년에 만든 <토지와 자유>(Land and Freedom)는 국제적으로 크게 알려지면서 이러한 움직임에 도화선이 되었다. 내전 초기에 참전했던 리버풀 출신의 한 좌파 노동자의 경험을 따라가며 내전과 국제 의용군을 조명한 이 작품은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국제 의용군 내부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 노선에 따른 공화파 내부의 분열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명성 때문인지 스페인 내전에서의 좌파와 국제 의용군을 신화화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로써 내전을 정치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는 움직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001년에 출판된 하비에르 세르까스(Javier Cercas)의 실화소설인《살라미나의 병사들》은 7개월 동안 11판이 찍힐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작가의 성실한 역사 추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작품은 내전이 주로 개인적인 드라마에 시대적인 배경으로만 등장하던 이전의 소설들에 비해 개인의 기억을 통해 오히려 내전이라는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19) 이 소설은 2003년 다비드 트루에바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는데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사진을 픽션에 삽입함으로써 잊혀진 기억을 다시 소환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내전을 새롭게 조명하는 움직임 속에서 고발성의 폭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2002년 2월 TV3에서 <프랑코 시대에 실종된 아이들>(Los niños perdidos del Franquismo) 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여 큰 화제를 모았는데 이 작품은 공화파 부모를 가진 아이들이 수용소로 옮겨지는 화물 열차 안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고 강제입양 되어야 했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또한 2003년에는 《프랑코의 구덩이들: 프랑코가 생매장한 공화파들》(Las fosas de Franco: Los republicanos que el dictador dejó en las cunetas)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독재자에 의해 공화파들이 생매장된 스페인 전역의 구덩이들을 폭로하고 있다. 이 외에도 프랑코 시대 감옥에 수용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공화파 포로들의 기억을 다룬 《모든 스페인이 감옥이었다: 프랑코 시대 죄수들의 기억》(Toda España era una cárcel: Memoria de los presos del franquismo)이 2003년 출판되었다. 또한 프랑스 감독 장 프랑소아 잉베르(Jean-Francois Ymbert)는 프랑스에 망명한 공화파 병사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인 <승리하리라>(No pasarán)를 2003년 발표하였다.
사실 이러한 폭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방법으로 제기만 되지 못했을 뿐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져 왔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방영이나 출판 등 보다 공론화된 장을 통해 과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이제 시간이 흘러 과거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제 스페인 사회의 민주화가 성숙되어 과거의 문제로 현재의 평화가 위협받을 단계는 확실히 지났다는 대중적 의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의 주역들이 프랑코 시대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세대로 교체되었다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공론화된 폭로는 스페인 사회에서 저널리즘적 호기심 이상의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 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진 것도 아니었고 또한 사회의 새로운 주역들은 과거의 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생존해있던 고령의 내전 참전자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였는데 특히 프랑코 체제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에 감격해 했다.
민간 부문에서 생겨난 새로운 현상에 이어 정치권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스페인 의회는 2002년 11월 만장일치로 프랑코를 자유를 탄압한 독재자로 규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프랑코에 의해 생매장된 피해자들의 유골을 발굴할 것을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20) 또한 2004년 재집권한 사회당 정권은 프랑코 정권에 의한 희생자 진상 규명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사파테로(Zapatero)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가시적인 조치들을 취해 지난 5월에는 프랑코 재단을 지원해 오던 연간 150,000 유로의 지원금을 폐지했다. 또한 사회당과 좌파 정당들은 지난 11월, 아직까지 남아있는 프랑코와 그의 측근들의 이름을 딴 공원, 건물, 학교, 기관, 광장, 거리들의 이름을 바꿀 것과 전국에 남아있는 프랑코의 동상들을 철거할 것을 행정부에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행정부는 아직 확실한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행정부가 망설이는 이유는 철거에 반대하는 프랑코 추종자들이 아직도 스페인 사회에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21)
이러한 최근의 움직임은 다소 갑작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내전, 학살과 같이 충격적인 사건이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영원히 덮여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이고 또한 억울한 피해자의 명예회복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사회적인 합의가 과거를 들춰내는 것을 터부시하도록 만들었지만 이제 상당한 시간이 흐른 이상 그러한 합의가 마냥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합의를 가져왔고 유지되도록 만들었던 사회적, 정치적 이유도 이제는 효용을 다한 것이 사실이었다. 또한 그 합의의 당사자들로부터 현재의 세대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과거문제가 본격적으로 말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 것은 틀림없다. 심지어 사회 일각에서는 프랑코파에 의해 세워진 ‘망자의 계곡’을 허물거나 오히려 프랑코의 범죄를 증명하는 기념물로 만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스페인 사회가 과거청산의 문제로 시끄럽거나 갈등을 겪고 있지는 않다. ‘망자의 계곡’을 허물자는 등의 주장은 사회일각의 소수의견일 뿐이고 대다수 국민들은, 심지어 좌파 정당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주장이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일단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스페인의 일반 대중들의 관심은 매우 낮은 편이다. 언론에서도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권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이러한 움직임을 아예 모르는 일반 시민들도 허다한 형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스페인에서 과거청산의 문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러한 진상규명의 움직임이나 피해자의 명예회복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스페인 사회에서 여기에 반대할 명분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스페인 의회나 정부에서 결정한 사항들이 모두 피해자 중심의 조치들이라는 것이다. 의회가 결정한 것도 피해자들의 유해발굴과 명예회복이었고 사회당 정부가 구성한 것도 “내전과 프랑코체제의 희생자들을 조사하기 위한 범정부적 위원회”였다. 어디에도 가해자들을 조사하거나 처벌하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언급한, 좌파 정당들이 행정부에 제기한 상징물 철거 요구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여기에서도 좌파 정당들은 “상징물을 철거하자는 것일 뿐, 역사를 재조사하자는 것은 아니다”22)라고 못 박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프랑코파의 특정한 인물이 가해자로서 조사를 받거나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이 벌어질 확률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다만 프랑코에 대해서는 독재자였다고 의회가 규정한 이상 그를 격하(格下)하는 움직임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스페인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내전과 독재는 불행한 과거였고 이 과거에는 모두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프랑코파와 마찬가지로 공화파 역시 성직자들을 집단 학살하는 등 잔혹행위를 자행한 이상 책임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일방적인 피해자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만 프랑코파는 종전 후에도 대량 학살과 고문을 자행한 이상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여기에 대해서는 ‘청산’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세월이 흐른 이상 책임자 조사와 처벌은 의미가 없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스페인에서 ‘과거청산’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측된다.
7. 스페인 과거처리 방식에 대한 평가
백만 명이 희생된 내전과 36년간의 강압적 독재라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과거의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스페인은 중대한 고비마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선택하며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고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해 왔다. 제대로 과거청산을 못했다는 이유로 스페인의 민주화 수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스크, 카탈루냐 지역주의의 위협 속에서도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해 오고 있으며 현재 유럽연합 내에서 정치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페인의 민주화가 상당히 공고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커다란 사회적 갈등 없이 이런 수준의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과거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사회적 합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스페인 국민들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다. 결국 평화적인 민주화와 과거청산을 맞바꾼 셈인데 이렇게 된 데는 스페인 국민들이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비극적인 내전의 기억이 있는 만큼 무엇보다도 평화를 원했고 평화를 원한 이상 두 세력이 여전히 맞서고 있는 현실적 상황이 그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한 최근에 이르러서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골자로 하는 소극적 의미의 과거청산을 큰 사회적 갈등 없이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다. 이렇게 스페인의 과거청산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만큼 그 결과를 판가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현재의 진행 상황으로 볼 때 미래에 소란스러운 국면이 펼쳐지리라고 예상하기는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만일 현재의 예상대로 큰 소란이나 갈등 없이 과거 문제가 봉합이 된다면 스페인의 경우는 과거청산 문제를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풀어낸 특이한 예가 되는 셈이다. 즉 사회의 대립양상이 확실한 위험한 국면에서는 좀 더 시급한 목표를 위해 뒤로 미루다가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된 후에 피해자 명예회복이라는 최소한의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스페인의 과거처리 방식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고려 되어야 한다. 즉 근대 이래로 극명하게 대립해 온 좌파와 우파 간의 오래된 갈등과 반목에는 정치적 노선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까지 결부됨으로써 이성적으로 타협되기 어려운 부분이 남았기 때문에 일방적인 청산의 논리가 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개의 스페인’ 사이의 오래된 갈등이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고 있는 스페인 국민들은 어떻게든 그 갈등이 표면화되어 평화를 해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청산의 목적이 청산 그 자체에 있지 않다면 스페인의 경우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매도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물론 정의의 차원에서 과거의 잘못을 엄정하게 심판하여 희생자들을위로하고 이를 통해 더 큰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우처럼 국민들 대부분이 과거에 대해 양비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과거를 문제삼는 것이 불필요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이에 대해 청산론의 시각에서 비판을 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결국 스페인의 과거처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국민적 합의라고 볼 수 있다. 국민들 대부분은 정치적 입장을 불문하고 민주화 이행기의 선택이 매우 현명했다고 믿고 있다. 또한 그 이후의 과정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이 과거청산을 유예한 정치권의 결정에 동의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격한 대립이 내전이라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확인한 것에서 우러난 일종의 학습효과였던 것이다. 밖에서 스페인을 들여다보는 외국인들에 비해 스페인 사람들은 훨씬 더 ‘두 개의 스페인’ 사이의 갈등과 내전의 비극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이것이 외국인들의 눈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안전과 평화를 최우선시 하는 길을 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스페인과 유사하게 내전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통일 이후를 위해서라도 스페인의 경우를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머지않아 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한국전쟁의 처리문제와 관련하여 스페인이 겪은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 때 스페인 국민들의 선택과 이후에 스페인 사회가 겪은 과정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참조가 될 것이다.
<출처 : 역사와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2) 제등효 편, 《스페인 내전연구》, 39쪽. 3) 레이몬드 카아, 후안 카를로스 푸시, 《스페인 현대사》, 5쪽. 4) 황보영조, <스페인 내전의 전쟁 이념 분석>, 《이베로 아메리카 연구》, 제12집, 130-131쪽. 5)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68쪽. 6) 황보영조, <스페인 내전의 전쟁 이념 분석>, 145쪽 재인용. 7)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71쪽 8) Un siglo de España, Agencia EFE, 2002, p.297. 9) 바스크어 Euskadi ta Askatasuna의 약자로 ‘바스크의 땅과 자유’라는 의미이다. 바스크 민족정당 PNV(Partido Nacional Vasco)의 온건한 대 프랑코 투쟁에 실망한 급진주의자들이 1959년에 창설하였다. 이들의 강령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있는 바스크인들의 거주지역을 통합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국가로 완전하게 독립시키는 것이다. 10) Juan Benet. ¿Qué fue la Guerra Civil? , Barcelona: La Gaya Ciencia, 1976, p.11. 11) Magí Crusells, La Guerra Civil Española: cine y propaganda, Barcelona: Ariel, 2000, p.157. 12) Paloma Aguilar, Memoria y Olvido de la Guerra Civil española, Madrid: Alianza, 1996, pp.349-352. 아길라르에 의하면 1975년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80%가 동의했다고 한다. 13) 오히려 이 사면법에는 당시의 극우파 그룹이 투표하는 것을 거부했다. 극우파 외에 바스크의 급진적 민족주의자 그룹도 이 법을 거부했다. 14) 하지만 곧 ETA가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내 감옥은 다시 채워지게 되고 ETA의 주요 테러목표였던 극우 군부조직의 반격 가능성은 여전히 잠재적 불안요소로 남게 된다. 15) Paloma Augilar, "Justicia, política y memoria: Los legados del franquismo en la transición española". Las políticas hacia el pasado: Juicios depuraciones, perdón y olvido en las nuevas democracias. eds. Barbona de Brito, Alexandra, Paloma Aguilar y Carmen Conzález Enríquez, Madrid: Istmo, 2002, p. 149. 16) El País. 1977.10.15 p.6 17) Magí Crusells, La Guerra Civil española: cine y propaganda, Barcelona: Ariel, 2000, p. 251. 18) Lawrence Rich, The Narrative of Antonio Muñoz Molina, New York: Peter Lang, 1999, p.112. 19) Angel Quintana, "La Guerra civil y el cine académico", La vanguardia. 2004. 12.19. 20) “El Congreso español condena el franquismo", Radio Nederland Wereldomroep. (http://www.rnw.nl/informarn/html/act021121_franquismo.html) 21) 예를 들어 2000년 프랑코 사망 25주기를 맞아 스페인 일간지 <엘 문도 El mundo>지가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당신은 프랑코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주 좋다’ 4.2%, ‘좋다’ 18.3%, ‘보통이다’ 33.1%, ‘나쁘다’ 22.0%, 아주 나쁘다 16.1% 무응답 6.2 %로 응답이 나와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프랑코가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2004년 11월 20일 망자의 계곡에서 있었던 프랑코의 사망 29주기 추모식에는 약 8,000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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